전쟁과역사 줄루전쟁 (11) - 불안한 가운데 시작된 2차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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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72회 작성일 16-02-07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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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을 회피하기 급급한 지휘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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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의 참패로 끝난 이산들와나 전투. 영국 정규군의 의외의 패배로 줄루족에 대한 나탈 주민들의 공포심은 극에 달했다.



로크스 드리프트에서 영국군 소대가 줄루족의 대부대를 대파하기는 하였지만 전황은 여전히 영국에 불리하였다. 이산들와나에서 패한 켈름스포드는 침공군의 전면적인 재정비에 들어갔고 켈름스포드와 진격한 다른 부대들은 고립되었으며 나탈지방은 줄루왕국의 공격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나탈로 진입하지 말라는 국왕 세츠와요의 엄명 때문에 줄루군의 나탈 침공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줄루족에게 패하고 온 패잔병들을 목격한 나탈 주민들 사이에는 공포분위기가 만연하였다. 주민이나 관리들 할 것 없이 모두 줄루군이 쳐들어올지 모른다며 건물을 요새화하고 식량을 저장하는 등 부산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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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3월 15일자 런던·가젯트지의 부록 표지. 이산들와나 전투 청문회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다.



한편 나탈주의 헬프메카르(Helpmekaar)에서는 이산들와나에서의 패배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청문회가 열렸다. 그러나 이는 전투에 참여하였던 장교와 장성들로부터 증언을 듣고 전투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직접적인 증언은 없었고 다만 서술을 토대로 문서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정식 평가도 아니고 보고서를 만들어 더번(Durban) 관리들에게 보내는 절차에 불과하였다. 아울러 이들의 서술은 이산들와나 본진 내에서 일어난 일에 한정이 되어있었고 진지 외부에서 적과 접촉한 사실에 대한 증언은 빠진 반 쪽짜리 서술에 불과하였다. 이 보고서에 들어갈 서술을 한 인사들은 전투에서 패배한 지휘관들이 늘 그리하듯이 책임을 회피하기에 바빴다.

더군다나 이산들와나의 전장에 있었고 패배의 당사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던 하니스 대령(Colonel Harness)이 조사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어 서술의 객관성을 담보하기 조차 어려웠다. 이들의 서술은 더번의 법정에서 검토를 거친 다음 본국의 외무부로 보내졌는데 패배의 책임을 던포드 대령에게 지우고 있었다. 외곽에서 적들과 접촉하여 그들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사실 던포드 부대에게 주어진 명령이 적정(敵情)을 파악하고 그들의 공격을 지연시키라는 것이었고 던포드 부대는 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러나 정작 패장(敗將)들이 주축이 되어 작성한 보고서는 던포드를 적의 진격을 지연시키지 못한 패배의 원흉으로 둔갑시켰다. 이산들와나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죽은 던포드에게 패전의 책임을 지우려는 얄팍한 수작이었고 던포드는 희생양이 되어 억울하게도 이산들와나 패전의 주범으로 몰리게 된다. 모든 사실이 밝혀지는 데는 오랜 시일이 걸렸고 그 때서야 던포드는 패배의 주범이 아닌 용전분투한 충직한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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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Zulu Dawn”에서의 던포드 대령(Burt Lancaster분). 청문회에서 비겁한 일부 지휘관들에게 이산들와나 패배의 원흉으로 몰린다.



영국군은 분명히 줄루왕국을 아프리카의 기타 부족과 다를 바 없다고 업신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줄루왕국은 명확한 체계가 있는 국가였으며 그 국왕은 명령 한 마디로 수만의 잘 훈련된 전사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줄루왕 세츠와요 총동원령을 통하여 수만의 전사들을 모아 영국군 본대를 이산들와나에서 격파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샤카가 이룩한 군사시스템으로 영국군에 대한 승리가 가능하였기는 하지만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총동원령으로 왕군(王軍)을 만들게 되면 싸울 수 있는 정예전사들이 모두 왕도에 집결하여야 하기 때문에 왕국을 이루는 소부족들에 대한 통제가 어려워지고 결국 왕국의 다른 부분에 대한 방비가 허술해질 수밖에 없었다.

비록 켈름스포드의 본대가 이산들와나에서 패하는 바람에 고립되기는 하였지만 영국침공군 지대(支隊)들의 형편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이산들와나 전투 이전, 우드 대령이 진격하고 있던 줄루왕국의 서북부 지역은 세츠와요가 있는 왕도 울룬디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줄루 국왕의 직접적인 통제가 어려운 곳이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이들이 영국군의 작전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있어 켈름스포드는 우드의 부대로 하여금 이 지역을 ‘청소’하게 하였다. 이 지역의 부락들은 대부분 소규모였고 부락마다 전사의 수는 기껏해야 수십 명 정도였다. 이 때문에 이들 소부락들은 영국군 지대의 공격을 감당할 수가 없었고 우드의 진격은 수월한 편이었다. 이산들와나 전투 직전에 벌어진 소추장 시하요(Sihayo)와의 전투가 바로 단적인 예였다. 시하요 부족과의 전투를 비롯하여 이산들와나를 전후하여 벌어진 소규모 전투에서 영국군은 크게 위협받지 않고 그야말로 앞의 모든 부락들을 “쓸어버리며” 전진하고 있었다. 관점에 따라 승승장구라고 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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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된 상황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한 우드 대령(Col. Evelyn Wood). 이후 원수(元帥, Field Marshall)의 지위까지 오른다.



1월 6일에 본대의 좌측으로 진격하고 있던 우드 대령의 부대는 다른 소추장 벰바(Bemba)의 부락에 이르렀는데 벰바는 영국군의 위세에 눌려 스스로 고개를 숙였다. 그도 그럴 것이 벰바의 부족에는 80명밖에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드는 벰바의 부락을 소개(疏開)시키고 벰바의 부락민 80여 명과 1000마리 정도의 소, 양, 염소 등을 나탈주에 있는 유트레흐트로 보냈다. 또한 1월 11일에는 인근 보어인들을 자주 습격하곤 했던 다른 소추장의 부락을 공격하였고 7명의 줄루 전사를 사살하고 500두의 소를 탈취하였다. 바로 후에는 손돌로지라는 줄루왕국의 예하부족을 공격하여 소를 무려 3000마리나 빼앗았다.

이산들와나에서의 승리로 인하여 가려지기는 하였지만 줄루왕국의 군대동원과 전투방식은 시간이 갈수록 그 단점이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벌어진 소위 ‘식민전쟁’의 경우 문명국의 군대가 고전하는 이유는 대개 지형과 풍토에 익숙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원주민들이 가급적이면 ‘결전(Decisive Battle)’을 피하기 때문이다. 병력을 모아 한 두 번의 싸움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문명국 군대를 지속적으로 괴롭혀 물러가게 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 때문에 문명국 군대가 그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싸움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줄루왕국은 불과 1세기전 그 국왕인 샤카가 단행한 군사개혁으로 인하여 병력을 모아 큰 싸움 몇 번으로 승패를 가르는 ‘결전주의’를 택하고 있었다. 이는 원주사회치고 상당히 드문 현상이었으며 이산들와나에서는 승리를 가져다 주었지만 종국에는 줄루왕국이 영국에 패하는 원인이 되었다.

아울러 줄루왕국도 엄연한 위계를 갖춘 ‘국가’였기에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물적 토대가 중요하였는데 영국군의 진격과정에서 이 물적 토대가 급격히 와해되고 있었다. 많은 수의 추장들이 병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영국군과 싸워 전멸당하기보다는 영국군에게 항복하고 그들 부락의 재산을 보전 받는 길을 택하였다. 국왕은 왕도 주변과 그 외 자신의 직속(直屬) 크랄들에서 병력을 모두 끌어 모아 중앙군을 형성하였다. 왕의 직속 크랄에 있는 전사들의 평소 임무에는 다른 크랄들과 그 추장들에 대한 감시가 포함되어 있었다. 줄루국왕 세츠와요가 그의 군대의 힘으로 소부족들을 위협하여 그 예하에 두기는 하였지만 역시 ‘멀리있는 법보다는 가까이 있는 주먹이 가깝다’라는 사실은 줄루전쟁 초기에 줄루왕국에서 여실히 증명되고 있었다. 이 소추장들에게 국왕의 군대는 멀리 있고 영국군은 바로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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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전이 아닌 대형(隊型)과 결전을 중시한 줄루전사들. 줄루왕국의 ‘결전주의’는 이후 줄루가 영국에게 패하는 원인이 된다.



1월 18일에는 우드 대령의 부대를 본 소부락들이 무더기로 항복하였으며 이날 우드대령이 획득한 소만 4천마리에 달하였다. 물론 일부 추장들은 병력이 없는 상태에서도 저항하려 하였다. 이보다 하루 전 1월 17일에 우드의 부대는 일단의 줄루전사들과 싸워 30명의 전사를 쓰러뜨리고 양 100마리를 획득하였으며 하루 후인 1월 19일과 20일에 우드의 부대는 틴타(Tinta)라는 추장의 전사들과 충돌하였는데 12명의 전사를 사살하고 그 크랄을 점령하였다. 틴타의 마을을 점령한 것은 전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틴타의 마을은 줄루왕국으로 진입하는 주요통로인 움폴로지강이 내려다보이는 벼랑 위 평평한 곳에 위치하여 있었고 우드는 이를 점령하자마자 돌로 석축(石築)요새를 짓고 이를 틴타 요새(Fort Tinta)라 명명하였다.

켈름스포드의 본대가 이산들와나에서 줄루전사들에게 몰살당하던 1월 22일에도 우드의 부대는 4천 명 정도의 줄루부대를 만나 50명을 사살하는 등 작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산들와나에서 본대가 참패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우드는 작전을 중지하고 바로 틴타 요새로 후퇴하였다. 영국군의 분진합격(分進合擊) 전략은 이산들와나의 패배로 큰 차질을 받게 되었고 지대들을 지원할 수 없게 된 켈름스포드는 1월 31일에 우드에게 당분간 지원은 없을 것이며 스스로 수비태세를 갖추고 버티라는 전갈을 보낸다. 이후 우드는 수비에 유리한 지형을 찾아 나섰고 캄불라라는 높은 고지대로 병력을 이동시킨다. 캄불라는 줄루왕국과 케이프식민지사이의 요충지로서 이후 줄루전쟁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전투가 벌어진다.

이산들와나에서 본대가 패한 이후에도 줄루군은 우드가 있는 지역으로 병력을 투입하지 않았고 우드 지대의 ‘쉬운 전투’는 계속되었다. 줄루의 중앙군은 소부락들을 감시하기도 하였지만 또한 외부의 침입자들로부터 지켜주는 역할도 하였다. 영국군과 결전을 위하여 왕도에 집결한 시점에서 중앙군은 소부락들을 지켜줄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줄루족의 많은 크랄들이 우드의 영국군에게도 쉽게 함락된 것은 이러한 줄루 중앙군의 ‘결전주의’에서 비롯되었다. 예를 들어 움폴로지강과 페바나강 사이의 아바쿨루지(AbaQulusi) 부락은 높은 벼랑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위치하여 있어 인근에 사는 보어인들에게 난공불락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아울러 줄루국왕 세츠와요에게 진정으로 충성하는 부락이었고 원래는 국왕 직속 크랄에 속한 전사들에 의한 순찰이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나 불러(Redvers Buller) 중령 휘하 민병대 140명이 벼랑을 기어올라 아바쿨루지 크랄을 습격하였을 때 그곳을 지키고 있던 병력은 거의 없었다. 6명의 전사를 사살하자 크랄에 있던 부족민들은 도망가기에 바빴고 영국군의 진격을 방해할 수 있었던 난공불락의 요새는 순식간에 함락되었으며 덤으로 민병대는 270마리의 소까지 빼앗아 돌아왔다. 민병대는 이 크랄을 기지로 삼았고 2월 10일에 불러의 민병대는 400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인근 인들로바네산(Mt. Indhlobane) 방면으로 위력 정찰을 개시하였는데 또 하나의 부락을 점령하고 490마리의 소를 탈취하였다.




불안하게 시작하는 2차 침공



한편 이산들와나에서 대패를 당한 켈름스포드는 기록의 조작으로 패배의 직접적인 책임은 피할 수 있었지만 첫 번째 공격이 실패했다는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켈름스포드는 새로이 임명된 사령관이 오기 전에 다시 공격하여 전쟁을 끝내야만 했다. 다행히 줄루왕 세츠와요가 줄루왕국의 경계를 넘어서 공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기에 이산들와나와 로크스 드리프트 이후 두 달 간 줄루왕국과 영국간의 대규모 전투는 없었다. 켈름스포드는 이 시간을 이용하여 병력과 물자를 다시 모았고 새로이 모인 병력과 물자의 일부를 3월 7일에 전진기지라고 할 수 있는 더번으로 옮겨 놓았다. 일단 켈름스포드의 목표는 자신의 패배로 인하여 고립된 전진 부대와 다시 합류하고 대부대를 편성하여 줄루왕국과 세츠와요에게 복수하는 것이었다.

위에서도 보았듯이 일선 부대들이 고립되어 있었기는 하지만 동원령으로 인하여 줄루왕국의 병력이 중앙군에 집중된 상태에서 중앙군은 이들 부대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다. 때문에 고립여부와는 상관없이 이 부대들의 사정은 어렵지 않았다. 케이프 영국군 수뇌부에게 정작 큰 골칫거리는 바로 줄루왕국과의 접경지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불안감이었다. 줄루왕국 북쪽의 작은 마을인 뤼네베르그(Luneberg)도 이러한 마을 중에 하나였다. 비록 본격적인 침공은 없었지만 줄루왕국과 연계된 부족들의 습격이 잦았던 지라 인근의 백인 주민들은 늘 불안하였다. 그러나 영국군이 이산들와나에서 패배한 이후 국경 인근 부족들은 점점 더 공격적으로 변하였고 1879월 2월 11일에는 이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과 약탈이 있었다. 결국 영국 식민지 관리들은 이를 좌시할 수 없다고 여기고 뤼네베르그에 터커 소령(Maj. Charles Tucker) 휘하 4개 중대병력을 파견하였다.

일단 병력이 뤼네베르그에 자리를 잡자 2월 말에는 이 수비대가 필요로 하는 탄약과 물자를 18개의 마차에 싣고 모리아티 대위(Capt. David Moriarty) 인솔 하에 뤼네베르그로 보냈다. 이들은 며칠 후 3월 12일에 뤼네베르그에서 8km 떨어진 인톰베(Intombe)강 유역에 이르렀다. 원래는 강폭이 좁아 충분히 도강할 수 있는 곳이었으나 때마침 물이 불어나 하워드 소위(Lt. Henry Harward) 휘하 35명의 선봉대만 강을 건너고 나머지 병력은 물자와 탄약을 실은 마차들을 삼각형 라거 형식으로 배치하고 야영하였다. 라거 구축에 성공하고 보초까지 세워두었으니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병사들은 잠을 청하였다. 새벽 4시경 갑자기 총성이 울리면서 병사들이 총을 들고 텐트에서 나왔으나 30분이 지나도 아무런 일이 없자 보초가 그냥 과민반응하였다 여기고 다시 텐트로 들어갔다. 그러나 총소리가 한 발밖에 들리지 않은 이유는 은밀히 접근한 줄루전사들에게 보초가 습격을 당해 제대로 경고를 할 틈도 없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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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톰베 강가에서 영국군 보급대를 급습하는 줄루전사들



아침이 되자 안개가 걷히고 줄루전사들이 일제히 쳐들어왔다. 라거를 구축했음에도 경고도 없이 기습을 당한 본대는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그대로 밀렸다. 일부는 반격하려 하였지만 결국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고 그나마 후퇴하던 병사들은 강물에 빠져 익사했다. 강 건너에서 소란을 듣고 깨어난 선봉대가 대형을 갖추어 지원사격을 하였지만 강을 건너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선봉대는 하워드 소위의 지휘하에 ‘철수’를 명목으로 일제히 뤼네베르그쪽으로 도주하였고 뤼네베르그에 있던 터커 소령에게 상황을 보고하였다. 터커소령은 구조대를 편성하여 인톰베로 향하였지만 뤼네베르그의 지원병들이 왔을 때 이미 인톰베의 줄루군은 철수하고 있었고 상황은 종료된 후였다. 물자의 호송을 맡았던 104명의 영국군 중 60명이 전사하였고 9만발에 해당하는 탄약과 물자가 탈취되거나 파괴되었다. 보초를 1명밖에 세워놓지 않은 부주의로 인하여 막대한 물자와 60명의 병력을 잃은 것이다. 인톰베의 패배 이후 역시 책임론이 불거졌으나 하워드 소위가 전역하는 선에서 일단락되었다.




전세역전: 흘로바네와 캄불라



캄불라에 병력을 주둔시킨 우드 대령은 모리아티보다는 나은 지휘관이었다. 캄불라의 고지대를 차지함으로써 감제고지를 확보하고 요새화를 통하여 캄불라 고지를 철옹성으로 만들었다. 일단 캄불라 고지의 중앙에 전투부대를 배치하고 마차와 수레들을 빽빽이 이어 붙여 라거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고지 동쪽의 높은 언덕에 지휘소를 배치하여 전투부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아울러 그동안 줄루족의 크랄을 습격하여 얻은 소와 염소들은 별도의 라거를 만들어 보호하였다. 솔선수범하는 지휘관으로서 그는 아침에 병사들보다 일찍 기상하였고 주변 정찰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침에 가장 먼저 말에 올라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정찰활동을 직접 지휘하였다. 병사들에게는 친절하면서 자신에게는 엄격한 지휘관이었던 우드는 아침마다 부대와 군영을 점검하고 수비태세가 완벽함을 확인한 연후에야 정찰을 떠났다. 낮에는 스포츠와 함께 장작 패기 등의 노동으로 병사들의 무료함을 달랬고 저녁마다 음악병들에 의한 연주회를 개최하였다. 이 때문에 우드 대령의 부대는 사기가 높았지만 유일한 불만이라 한다면 저녁에 자기 전에 군장을 갖추어 입고 취침하는 것이었다. 언제 어디서 적에 의한 기습이 이루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였으나 전투복장으로 자야 하는 것을 반기는 병사는 없었다.

우드의 주변정찰은 단순히 적 병력의 움직임에 대비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위무(慰撫)의 성격도 띄고 있었다. 우드는 주변의 부락들이 영국과 줄루 국왕 사이에서 불안해 하고 있는 점을 이용하여 그들을 설득하여 줄루왕국으로부터 떼어놓으려고 한 것이다. 개별 부락이나 부족이 하나 넘어 올 때마다 줄루왕국의 힘은 그만큼 약해지는 것이었다. 우드의 이러한 위무는 효과를 발휘하였고 많은 수의 부락들이 영국군에게 투항하였다.

그리고 3월 13일에는 의외의 거물이 ‘귀순’의사를 밝혔는데 바로 줄루국왕의 이복동생 중 한 명이었던 우하모(Uhamo)라는 추장이었다. 전쟁을 피하여 움폴로지강 상류 인근의 동굴에 숨어있던 우하모는 부족민 700명을 대동하고 3월 13일에 캄불라의 영국군 진영에 투항하였으며 우드대령에게 나머지 부족민들에 대한 호위를 부탁하였다. 처음에는 적지(敵地)에서 이동 중인 많은 수의 피난민들을 호위하는 것은 어렵다며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으나 이윽고 영국군 지휘관들은 영국에 호의적인 우하모 세력을 확보할 경우 줄루왕국에 상당한 정치적 타격을 줄 수 있으리라 여기고 피난민들을 데려오기로 하였다. 우드 대령은 360명의 기병과 함께 우하모 휘하의 전사 200여 명을 보내어 나머지 피난민들의 이동행렬을 보호하게 하였는데 그 수가 900여 명에 달하였다. 이로서 우드 대령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적국 국왕의 동생과 전사 200명을 포함한 적국 국민 1600여 명을 확보한 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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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로바네의 지형도. 인들로바네라고도 불리우며 주변의 평지에서 솟아오른 일종의 탁자형 대지(Mesa)이다. 우드의 영국군 병력은 이곳에 있던 소들을 탈취하고 줄루병력을 소탕하려고 공격에 나섰으나 줄루본군이 예상보다 빠르게 도착하면서 위기에 몰리게 된다.



우드 대령이 성과를 올리고 있을 때 켈름스포드에게서 오랜 만에 전갈이 도착하였다. 에쇼웨에 고립되어 포위된 다른 영국군 지대를 구출하기 위하여 진격하고 있으니 줄루 본군이 에쇼웨의 포위군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양동(陽動)작전을 시행하라는 것이었다. 우드는 그동안의 정찰을 통하여 인근의 흘로바네(Hlobane) 고지에 많은 수의 소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줄루 왕국의 중요한 자산이기에 1000명의 아바쿨루지 전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만약 흘로바네를 공격한다면 줄루본군은 그 군을 나누어 흘로바네를 지키러 와야 할 것이고 에쇼웨로 향하는 켈름스포드의 영국군 본대가 싸워야 할 적이 줄어드는 것이었다.

흘로바네는 두 개의 고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높은 고지와 상대적으로 낮은 고지가 같이 붙어있는 지형이었다. 3월 27일 새벽, 레드버스 불러 중령 (Lt. Col. Redvers Buller)이 이끄는 기마대와 우드 대령이 이끄는 혼성부대의 합동작전으로 이루어졌다. 줄루족의 소들은 대부분 높은 고지에 있었는데 불러 중령의 부대는 낮은 고지대 동쪽 끝에 있는 벼랑 사이에 난 가파른 길을 올라가 높은 고지대를 점령하고 낮은 고지에 대기하고 있던 러셀 중령(Maj. Russell)의 병력이 소를 몰아서 내려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해가 채 뜨기도 전에 거친 폭우가 몰아쳤고 중간 중간 동굴에 숨어있던 줄루족들이 진격하고 있던 영국군에 사격을 가하면서 기습의 효과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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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로바네 공격 중 갑자기 나타난 줄루 본군을 맞아 악전고투하고 하고 있는 영국군



불러의 특공부대가 벼랑을 올라가 공격하는 동안 우드 대령의 본병력은 작전을 수월하게 하기 위하여 동굴에 숨어서 공격하는 줄루 전사들에 대한 소탕에 나섰다. 이들은 줄루병력을 동굴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지만 이 과정에서 우드의 참모인 캠벨 대위가 전사하는 등 적지 않은 사상자가 나왔고 우드 대령 자신도 위기에 몰렸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부상을 당하지 않은 나머지 병력은 높은 고지대로 올라가 불러의 작전을 도왔다.

흘로바네에 대한 공격이 거의 성공하는 듯싶더니 오전 10시 30분경에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줄루의 대병력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예사 병력이 아니라 줄루왕국의 총리대신인 음니야마 부텔레지(Mnyama Buthelezi)가 지휘하는 22000명의 줄루 본군이었던 것이다. 사실 이들의 병력수가 많아 이동속도가 느려 적어도 다음 날 (3월 29일)까지는 도착하지 못하리라 예상했는데 하루 빨리, 그것도 본군 전체가 나타난 것이다. 어찌보면 우드의 양동작전이 성공한 것이라 볼 수도 있지만 정작 우드와 그의 병력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5.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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