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우만 전투 2 (1941) - 키예프 사수에 총력을 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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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02회 작성일 16-02-07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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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무(前無)하였던 기갑전



소련 남서전선군 사령관 키르포노스(Mikhail P. Kirponos)는 그동안 전투 준비도 철저히 하였고 힘 대 힘의 대결도 마다하지 않았던 저돌적 인물이었다. 그는 키예프를 향하여 전진하는 독일 제1기갑집단을 격퇴하려 즉시 4개 기계화군단을 동원하여 건곤일척의 대결을 시도하였다. 700여대의 전차를 보유한 독일군과 2,500여대의 전차를 동원한 소련군과의 거대한 대결이 소련 점령지였던 폴란드의 브로디(Brody) 일대에서 독소전쟁 개전 다음날부터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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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파 당하는 소련군 전차. 2년 후에 기록이 경신되지만 역사상 최대의 기갑전이 브로디에서 시작되었다. <출처: Bundesarchiv>



이것은 2년 후에 벌어진 쿠르스크(Kursk) 전투 이전에 있었던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갑부대 간의 정면충돌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소련군의 반격에 클라이스트(Ewald von Kleist) 제1기갑집단 사령관은 당황하였다. 서유럽의 육군 강국 프랑스를 일거에 석권하는데 선봉장을 담당하였을 만큼 경험이 풍부하였던 그도 이 정도로 거대한 전차부대와의 정면충돌은 예상 밖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겪어 본적이 없던 전무한 일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소련도 우크라이나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키예프 특별군관구에는 이제 막 배치가 이루어지던 T-34와 KV-1 전차가 제일 먼저 공급되던 중이었다. 흔히 독소전쟁 개전 초에 소련은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 전차만 보유하고 있었다는 상식과 달리 브로디에서 벌어진 격전에 동원 된 소련군 전차 중에서 350여대가 최신예여서 질적으로도 독일군에 밀리지 않았다. 당연히 독일군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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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파 당하는 독일군 3호 전차. 소련군의 격렬한 반격으로 말미암아 독일군도 많은 전차 손실을 입었다. <출처: Bundesarchiv>



6월 30일까지 일주일간 계속된 격전에서 독일이 800여대의 소련 전차를 격파하자 키르포노스가 더 이상의 손실을 막기 위해 후퇴를 지시하면서 고전 끝에 독일은 승리를 거두었다. 대규모 기갑부대의 운용에서 소련군보다 경험이 많았고 개전과 동시에 하늘을 장악한 제4항공군(Luftlotte 4)의 근접 지원 덕분이었다. 하지만 무려 1/4이 넘는 200여대의 전차를 손실하여 이후 작전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고 일주일간 진격이 정체되었다.




소련군의 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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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남서전선군 사령관 키르포노스. 그는 개천 초에 상당히 영리하게 지연전을 펼쳐 독일군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독소전 초기에 있었던 연이은 대승에 가려서 간과하고 넘어가는 경향이 많지만 이처럼 전선의 남부에서 독일은 상당히 애를 먹었다. 물론 앞으로 나가고는 있었지만 격렬히 전투를 치르며 겨우겨우 전진하는 것이었지, 소련군을 소탕하거나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것은 아니었다. 다른 집단군, 특히 초전부터 놀랄만한 대승을 거두고 있던 중부집단군에 비한다면 굳이 전과라고 내세우기 힘들었다.

반면 키르포노스는 예하 부대가 저항하다가 격파 될 기미가 보이면 조금씩 후퇴 시켜 전력을 최대한 보존시키는 전술을 구사하였던 상당히 영리한 인물이었다. 덕분에 후퇴 중에도 1941년 여름의 소련군답지 않게 편제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러한 남서전선군의 효과적인 전과는 스탈린의 시야가 잠시 이곳에서 벗어나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는 점이다.

6월 30일, 독일이 브로디에서 반격에 나선 소련 남서전선군 예하 4개 기계화군단을 물리치고 리비우의 돌출부를 제거하자, 드디어 루마니아 국경에서 대기 중이던 11군과 루마니아군이 베사라비야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실지 탈환이라는 명분으로 열심히 전투에 임하는 루마니아군 덕분에 진격은 순조로웠지만 일주일이라는 시간 차이만큼 남북으로 떨어진 간극은 더욱 멀리 벌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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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우에 진입하는 독일군. 이처럼 돌출부가 제거되면서 루마니아 국경에서 대기하고 있던 독일 제11군과 루마니아군이 진격을 개시하였다. <출처: Bundesarchiv>



독일군의 선봉인 제1기갑집단은 키예프로 직행하였지만 갈수록 애를 먹었다. 하루 빨리 키예프를 점령하고 드네프르 강까지 달려가야 하는데, 소련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키예프 초입에서 전진이 멈추어 버린 것이었다. 포위하려면 북쪽으로 우회하여야 했는데 그곳은 프리페트 소택지여서 진입할 수 없었다. 더구나 벨로루시를 공략하던 중부집단군은 저 멀리 앞서가 두 병단 사이에 약 300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공백지대가 생겼다.




멈추어버린 진격



광활한 러시아에서 전선을 촘촘히 연결하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축 처진 형태로 계속 방치할 수는 없었다. 우선 전력의 효율적인 배치가 곤란하고 또한 그 틈새로 소련군의 반격이 있을 가능성도 컸으므로 단축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전선 양익을 파고 들어가 일거에 섬멸하여야 했지만 소련군이 영리하게도 단계적으로 철수하다 보니 남부집단군이 가진 한 개의 창만으로는 포위망을 형성하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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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로가 극도로 제한되어 양면 포위전을 사용하기 어려웠던 남부집단군은 돌파구 형성에 애를 먹었다. <출처: Bundesarchiv>



당시 남부집단군의 창은 제1기갑집단이었는데, 전신이 1940년 5월 창설된 클라이스트 기갑집단(Panzergruppe Kleist)이다. 비록 역사는 짧지만 역사상 세계 최초의 야전군 급 기계화 부대인 제1기갑집단은 프랑스 전역에서 전사에 길이 남을 놀라운 돌파전의 선봉이 되어 명성을 드높였고, 이후 독소전쟁 직전에 벌어진 유고슬로비아 침공전 당시에는 불과 열흘 만에 점령을 완수한 신흥 명문 부대였다.

소련 침공을 앞두고 새로 창설된 제2, 4기갑집단의 사령관들인 구데리안(Heinz Guderian)과 회프너(Erich Hoepner)가 불과 1년 전 프랑스 전선에서는 이 부대 예하의 장갑군단장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위상을 알 수 있을 정도다. 이처럼 누구보다도 전선 돌파에 경험이 많았던 제1기갑집단도 소련의 방어선을 쉽게 뚫지 못하였다. 거기에다가 초반에 브로디에서 있었던 격전으로 인하여 소모가 컸지만 보충된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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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갈수록 독일군의 피해도 늘어났지만 보충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았다. <출처: Bundesarchiv>



지금까지 독일군이 지나 온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은 원래 반소, 반러 감정이 있었고 스탈린 철권통치에 의해 피해를 많이 당한 곳이었다. 이후 나치의 악랄함을 접하면서 착각임을 알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여겼을 만큼 우호적이었다. 따라서 점령지나 후방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고 독일군은 오로지 전투에 몰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예프 앞에 이르러 더 이상 나갈 수 없었다.




스탈린의 관심으로 바뀐 상황



소련의 3대 도시이자 우크라이나의 수도라는 점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키예프는 상당히 중요한 도시다. 우크라이나와 코카서스에서 생산된 물산과 자원이 이곳에 집결하고 소련 전역으로 공급되는 길목이어서 전략적 비중이 엄청났다. 히틀러나 OKH 모두 침공 작전을 수립하였을 때 예외 없이 우선 점령 목표로 지적하였을 만큼, 정치적인 상징성이 큰 모스크바보다 오히려 중요한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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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은 신임을 하고 있던 부됸니를 새로운 키예프 특별군관구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하지만 그는 상당히 무능한 인물이었다.



스탈린도 이곳의 전략적 위상을 알고 있었지만 당장 눈앞의 위협인 스몰렌스크의 방어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최 측근인 부됸니(Semyon M. Budyonny)를 7월 10일 키예프 특별군관구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는데, 그는 무능한 소련 장군의 전형으로 스탈린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맹종하는 스타일이었다. 스탈린은 부됸니를 내세우면 자신의 뜻대로 부대를 이끌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였던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키예프 지역의 방어선이 강화되었다. 그런데 쓸데없이 간섭을 일삼는 스탈린과 달리 현지에 서둘러 부임한 부됸니는 일단 남서전선군 사령관 키로포노스에게 계속 작전에 관한 재량권을 부여하였다. 덕분에 무조건 앞으로만 돌진하다가 산화하고 있던 벨로루시 일대를 방어 중인 소련군과 달리 상황에 맞게 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모스크바에 있던 스탈린이 키예프에 눈길을 돌리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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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은 키예프를 방어하기 위해 인근에 있던 모든 전력을 집중시켰다. <출처: RIA Novosti>



그는 인근에 있던 부대들을 모아 키예프 방어에 우선적으로 투입하도록 지시하였다. 스탈린은 스몰렌스크에서 키예프에 이르는 방어선을 반드시 사수하여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이런 태세는 군사전략상 필요라기보다는 스탈린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 사수를 외치다 참사를 당한 민스크에서의 경험이 있었음에도 그는 아직도 자신의 군사적 능력이 대단하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5.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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