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우만 전투 3 (1941) - 운명적인 결정을 이끈 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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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17회 작성일 16-02-07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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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 대신 닭



1930년대 중반 공포의 대숙청으로 권력을 공고히 한 스탈린은 전쟁 초기에 세세한 부분까지 일일이 간섭하려 들었다. 피 바람 속에서 살아남은 많은 소련군 지휘관들은 실력도 부족하였지만 대부분 예스맨들이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스탈린의 간섭에 감히 항명할 수 없었고 오로지 눈치만 보았다. 그래서 스탈린의 명령을 받들어 무모한 작전을 펼치다 독일군에게 무참히 패배하기를 반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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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렌스크 전투에서 포로가 된 소련군. 개전 초에 계속 된 스탈린의 간섭은 소련이 기록적인 패배를 당하는 데 크게 일조하였다.



1941년 여름에 연이어 있었던 독일의 놀라운 대승 이면에는 이처럼 소련의 한심한 사정이 숨어있었다. 특히 전쟁 초기의 스탈린은, 마치 전쟁 말기의 히틀러처럼 군부의 판단이나 조언을 무시하고 후퇴 금지를 반복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고집 때문에 연이어 대패를 기록하자 이후부터 참견을 자제하게 되는데, 이것이 전쟁 끝까지 모든 것을 챙기려 하였던 히틀러와 결정적 차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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룬튜슈테트는 키예프 대신 우만을 먼저 점령하여 소련군을 각개격파하기로 결심하였다.



어쨌든 바바로사 계획에서 키예프는 독일의 최우선 목표였지만 남부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는 2중, 3중으로 계속 방어선이 강화되고 있는 이곳에만 매달리면 전선이 심각하게 단절될 수 있을 것이라 우려하였다. 그는 키예프 특별군관구를 쪼개어 따로따로 처단하기로 결심하였다. 일단 뚫기 힘든 남서전선군에 매달리지 않고 남쪽 외곽에 있던 남부전선군을 먼저 박살내려 한 것이다.

독일 남부집단군이 선택한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키예프에 집중된 남서전선군의 정면을 독일 제6군이 견제하며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동안, 제1기갑집단과 제17군이 키예프 남쪽 외곽으로 멀리 우회한 후, 최대한 빨리 깊숙이 남하하여 우만(Uman) 일대에 포진하고 있는 남부전선군의 뒤통수를 강타하기로 한 것이다. 한마디로 키예프라는 꿩 대신 우만이라는 닭을 먼저 잡는 것이었다. 물론 도시의 점령이 아니라 그곳에 몰려있는 소련군의 섬멸이 목표였다.




제1기갑집단의 진격



독일 남부집단군이 원래 예정 된 키예프의 점령을 일단 유보하고 이러한 전략을 쓰기로 결심한 이유는 그 동안 소련군이 예비대를 효과적으로 투입하면서 적절한 속도로 후퇴하는 방어 전략을 구사하였기 때문이었다. 천혜의 방어선인 드네프르 강까지 소련군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을 그냥 방치하고 있다가는 추후 작전 전개가 심각하게 어려울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룬트슈테트는 그런 최악의 경우까지 염두에 두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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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점령보다 소련군 섬멸이 우선이라 생각한 룬트슈테트는 제1기갑집단에게 최대한 빨리 우만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하였다. <출처: Bundesarchiv>



어떻게든 전선을 돌파하여 소련군의 일부라도 먼저 소탕하여야 했다. 계속 앞으로 전진하고는 있었지만 소련군의 섬멸이 없는 점령은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개전 초기에 뚜렷한 전과가 없자 히틀러가 노골적으로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분명히 여타 집단군과 비교하여 남부집단군의 진격은 뒤졌고 가시적인 성과도 없었다. 그것은 독일 군부의 최고 연장자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던 룬트슈테트의 자존심 문제이기도 했다.

7월 15일, 제1기갑집단과 제17군이 키예프 남쪽 가도를 통해 진격을 개시하였다. 독일군은 외곽으로 그냥 통과할 예정이었지만 부됸니는 이를 독일군이 남쪽에서 키예프를 공격하는 것으로 오판하여 서쪽에 배치된 제5, 26군을 긴급 철수시켜 도심에 배치된 제21, 37군에 합류시켰다. 덕분에 키예프 서쪽 전면의 전선이 단축되고 소련군이 한 곳에 더욱 집중되었는데 이것은 독일이 내심 원하던 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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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1기갑집단은 키예프를 우회 남하하여 우만 북쪽을 차단하였다. 소련은 독일의 이런 진격을 키예프를 남쪽에서 공격하는 시도로 오판하였다. <출처: Bundesarchiv>



키예프에 소련군이 집중되면 될수록 이곳을 우회하여 우만으로 향하는 독일의 진격은 그만큼 수월하였기 때문이었다. 제1기갑집단이 지토미르(Zhytomyr)에서 키예프 남쪽으로 급속 전진하여 16일에 코지에틴(Koziatyn)을 점령하자 우만에 몰려 있던 소련 남부전선군의 북익이 순식간 차단되었다. 독일 육군의 자부심인 제1기갑집단이 독소전쟁 개전 이래 최고의 돌파를 보여주던 순간이었다.




결과



부됸니는 바로 이때 결정적인 오판을 하였다. 제1기갑집단이 키예프의 남측 관문인 드네프르 강 연안의 체르카시(Cherkasy)까지 직진하리라 본 것인데, STAVKA(소련군 최고사령부)도 같은 생각을 하였다. 이곳을 독일이 장악하면 흑해에서 키예프로 향하는 수운과 철도가 차단될 수 있었다. 그런데 비록 오판이었지만 이때 키예프에 매몰된 부대들 중 일부라도 체르카시로 옮겨 방어에 나섰다면 이후 더 큰 참사를 막을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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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에 몰려 있던 소련군을 체르카시로 이동 전개하였다면 이후 대참사를 막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제한하였고 이것은 대패의 빌미가 되었다. <출처: RIA Novosti>



하지만 스탈린의 키예프 사수 엄명으로 인하여 소련군을 이곳으로 이동 시킬 수 없었다. 그러자 부됸니는 욕심이 생겼다. 제1기갑집단의 측방이 길게 노출되자 잘만 하면 남서전선군과 남부전선군 사이에 독일군을 가두어 놓고 섬멸할 수 있을 것으로 본 것이었다. 그런데 직진할 것 같던 제1기갑집단의 선봉대인 제14장갑군단이 갑자기 방향을 우측으로 꺾어 우만 후방의 페르포마이스크(Pervomaisk)를 향해 남하하였다.

하지만 경악할 일은 따로 벌어지고 있었다. 제1기갑집단에 눈이 팔린 사이에 다른 쪽에서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부됸니는 몰랐다. 7월 20일이 되자 독일 제17군이 빈니차(Vinnytsia)를 통과하여 우만 정면에 나타난 것이었다. 더불어 루마니아에서 진격한 독일 제11군이 우만 남측의 두보사리(Dubossary)를 향해 북상하고 있었다. 독일이 제공권을 완벽히 장악한 바람에 항공 정찰이 어려워 독일군의 이동을 놓치는 경우가 많아서 벌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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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오판한 사이에 우만 일대에 포진한 30만의 소련 제6, 12군은 순식간 포위당하였다.



이제 우만에 몰려 있던 소련 제6, 12군이 나갈 곳은 동쪽밖에 없었다. 하지만 스탈린의 현지 사수 엄명에 따라 움직일 수 없었고 우왕좌왕 하는 사이에, 8월 2일이 되자 제1기갑집단과 제11군이 우만 동쪽인 페르포마이스크에서 연결되면서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무려 30만의 소련 남부전선군이 몰살될 위기였다. 불과 한 달 전 민스크에서 참혹한 경험이 있었음에도 스탈린은 여전히 후퇴를 불허하였다.




의의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에 부됸니나 남부전선군 사령관 튜레네프(Ivan Tyulenev)는 기량은 물론 소신도 부족하였다. 전형적인 예스맨들이었던 이들은 스탈린을 설득하거나 자신의 의도대로 판단하여 부대를 후퇴시킬 용기가 없었다. 당시 소련은 중부의 스몰렌스크에서 50만, 남부의 우만에서 30만의 소련군이 거의 동시에 포위당한 상태였다. 이들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후퇴였는데 문제는 스탈린이 이를 용납하지 않았고 이에 장군들은 눈치만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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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만 전투에서 전사한 소련군과 파괴 당한 장비. 스탈린의 사수 엄명 때문에 탈출이 늦어지면서 참사를 당하였다. <출처: Bundesarchiv>



전쟁에서 이기려면 전력의 보존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스탈린은 몰랐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때로는 공간도 내주어야 했는데, 어마어마한 국토를 지닌 소련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커다란 이점이었다. STAVKA를 이끌던 주코프(Georgy Zhukov)도 연속된 패배로 말미암아 눈이 뒤집힌 스탈린의 독단을 저지할 수 없었다. 결국 후퇴가 허락되지 않은 우만에 포위된 소련군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저항하다가 산화하는 것이었다.

스몰렌스크의 소련군이 항복한 8월 5일이 되었을 때, 간신히 스탈린의 허락을 얻어낸 부됸니가 드녜프르 강 동안으로 철수하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장비와 무기를 버린 병력들이 허겁지겁 포위망을 뚫고 빠져 나왔지만, 10만의 전사상자와 더불어 10만 명이 독일의 포로가 되면서 8월 8일 우만의 소련군은 항복하였고 독일 남부집단군은 바바로사 작전 개시 6주 만에 기록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이제 다음은 잠시 처단을 미룬 키예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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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만 함락으로 인하여 키예프 일대에 거대한 돌출부가 형성되었다. 이후 격렬한 논쟁 끝에 내려진 이곳의 처리에 관한 결정은 독소전쟁의 향방을 결정하게 되었다. <출처: 미 육군 사관학교>



그런데 우만이 함락되면서 주변의 소련군들이 모두 키예프로 밀려들어가는 바람에 돌출부는 더욱 커졌고 그 만큼 공략하기도 어려워졌다. 그렇다 보니 키예프 돌출부를 먼저 제거하자는 주장과 어차피 고립되었으니 천천히 처단하고 그냥 앞으로 나가자는 의견이 대립하였다. 결국 독일은 하나의 선택을 강요 받게 되었고 이때 히틀러는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이 선택은 이후 독소전쟁의 향방을 좌우한 결정적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5.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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