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줄루전쟁 (13) - 긴긴들로부 전투, 영국군 2차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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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38회 작성일 16-02-07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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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스토리는 다시 이산들와나에서 영국군이 패배하던 순간으로 되돌아간다. 1월 22일에 노르웨이 교단의 선교기지였던 에쇼웨에 도착했던 피어슨 대령의 부대는 에쇼웨를 전진기지로 만들기로 하고 버려진 선교기지 건물을 보수하고 참호를 파는등 그 인근을 철통 같은 요새로 만들었다. 아울러 투겔라강 하류로 보급대를 보내어 요새화와 농성전에 필요한 추가 보급품을 확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월 24일에 거의 요새화 작업이 완성되려 할 때 비보가 전해진다. 투겔라강 하류를 출발한 던포드 대령(Col. Anthony Durnford)의 부대가 몰살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사실 던포드의 부대는 이산들와나 전투에 개입하였다가 전멸당하였다). 후위에 있던 부대가 전멸당하였다는 것은 피어슨 부대의 보급이 끊기는 동시에 나탈주(州)가 줄루본군의 공격에 완전히 노출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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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쇼웨에 단단한 요새를 구축한 영국군은 3개월을 버텨낸다.



그러나 피어슨 부대는 던포드가 이산들와나에서 전사하였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 본대의 대패소식은 듣지 못한 체 불안한 속에서 이틀을 보내게 된다. 이틀 후인 1월 24일에 뜬금없이 사령관인 켈름스포드로부터 이전의 명령을 모두 취소한다는 전갈을 받게 된다. 켈름스포드는 이전에 내렸던 명령을 모두 취소한다고 전하면서도 이산들와나에서 패했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구체적인 언급은 피한 체 상황이 좋지 않으니 병력의 보존과 유지가 최우선 사항이며 필요할 경우 투겔라강 하류 방면으로 후퇴해도 무방하다는 지시를 한다. 비록 요새화를 시키기는 하였지만 일단 탄약을 제외한 다른 보급품이 부족한데다 사방이 노출되어 있어 농성전이 어렵다는 판단을 한 피어슨은 투겔라강 방면으로 철수를 심각하게 고려한다. 그러나 피어슨이 거의 결정을 하였을 때 보급대가 보급품을 가득 싣고 나타난다. 아울러 피어슨의 보급대는 투겔라 방면으로부터 5개 중대에 이르는 지원병력까지 대동하고 있었다. 애써 구축한 전진기지를 버리고 싶지 않았던 피어슨은 보급품과 함께 추가 병력을 확보하자 에쇼웨에 그대로 남아있기로 하였다.

피어슨의 부대는 에쇼웨에 단단한 요새를 만들어 놓았다. 높이 약 2미터 정도의 방벽이 길이 약 200미터, 넓이 50미터 정도의 직사각형 지역을 둘러싸고 있었고 방벽 앞쪽에는 호(壕)를 판 후 나무 막대기를 뾰족하게 깎아 안에 꽂아 넣었다. 적과 직접 맞부딪히는 방식의 전투를 하는 줄루족에게는 실로 뚫기 어려운 방어벽이었다. 그러나 피어슨은 혹시라도 외부 방벽이 함락될 경우를 대비하여 보유하고 있는 짐마차를 모아 방벽 안쪽에 원형의 라거(laager)를 만들었다. 아울러 외부 방벽위에는 녹채(鹿 砦)를 만들어 더더욱 접근이 어렵게 만들었고 이도 모자라 방벽 외부 700미터까지 모든 장애물을 치웠다. 이를 지키는 피어슨 부대의 총 병력은 정규병 1천 300명, 그리고 추가로 보급대 400명, 총 1700이었다. 병력도 충분했고 방어도 단단했고 새로 보급도 받았으니 농성전을 위한 모든 준비는 갖추어진 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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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쇼웨의 영국군을 괴롭힌 것은 줄루군이 아니라 풍토병이었다. 에쇼웨에서 사망한 영국군 묘지 <ⓒ www.ianknightzulu.com>



물론 줄루본군은 피어슨의 부대가 요새를 구축한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줄루왕 세츠와요를 비롯하여 수뇌부는 로크스·드리프트에서의 패배를 상기시키며 요새화한 영국군을 공격하지 말 것을 명령한 상태였다. 이전의 패배를 생각하면 당연한 조치였으나 이는 에쇼웨의 영국군 수비병들도, 그리고 그들을 구하러 오고 있는 켈름스포드의 본대 모두 그냥 내버려두는 결과로 이어졌다. 줄루군은 2월 2일에 잠시 에쇼웨 인근에서 무력시위를 하였으나 영국군이 포격으로 응수하자 곧바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이 공격은 피어슨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그는 켈름스포드에게 지원군을 요청하였으나 응답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어슨은 이산들와나에서의 참패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 어떠한 지원도 어려우리라는 것을 직감하였다. 피어슨은 수비병력의 일부를 철수시키고자 켈름스포드에게 전령을 보냈으나 감감 무소식이었다. 완전히 포위된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2월중에는 에쇼웨에 대한 그 어떠한 공격도 없었고 지루한 일상이 반복되었다.

일상은 지루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줄루왕국의 임피(impi) 대신 풍토병이 피어슨의 병사들을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2월중에 전투는 없었지만 무려 20여명이나 풍토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사기가 떨어지는 마당에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 줄루족에 의한 도발이 전혀 없었음에도 피어슨은 3월초에 약 10km 떨어진 줄루족 크랄을 공격한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일광 반사기(heliograph)를 통한 메시지가 전달이 된다. 구원부대가 3월 13일에 투겔라강 하류지역을 떠나 에쇼웨로 갈 것이니 중간지점으로 이동하라는 신호였다. 에쇼웨에서 긴 농성 끝에 지쳐가고 있던 영국군 병사들에게 이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러나 반가운 것도 잠시, 얼마 후 구원부대의 도착은 4월 1일에나 도착할 것이라는 신호가 역시 반사기를 이용하여 전해졌다. 조급해진 것은 줄루군이었다. 혹시라도 요새화한 영국군에 패배하지 않기 위하여 공격을 삼갔지만 구원군이 에쇼웨의 농성군과 합류하는 것은 막아야 했다. 견제와 감시를 그만두고 공격을 하려 하였지만
행군중 켈름스포드가 워낙 방비를 철저히 하는 바람에 기회가 쉽게 생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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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쇼웨로 이동중인 영국군. 켈름스포드는 이산들와나의 실책을 반복하자 않기 위하여 이동속도를 늦추는 대신 이동 중의 방어에 만전을 기한다.



켈름스포드는 이산들와나에서의 패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천천히 진군하는 중이었다. 저녁마다 라거를 구축하였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정찰을 내보냈다. 아울러 혹시라도 불리한 지형에서 습격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잘 닦여있지만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하여 나아갔다. 그리고는 우여곡절 끝에 4월 1일에 에쇼웨의 농성군이 보이는 인예자네(Inyezane)강 남쪽 강가 긴긴들로부(Gingindlovu)에 이르렀다. 그러나 켈름스포드는 근처에서 줄루군 임피가 기습을 할 기회만 노리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전군을 산등성이에 올려보내고 라거 진영을 만들었다. 켈름스포드의 부대가 위치한 곳은 평지위에 솟은 고지여서 사방으로 수백 미터가 트여있었고 따라서 주변에 대한 완벽한 감제가 가능하였다. 긴긴들로부의 켈름스포드 부대는 에쇼웨의 피어슨 부대를 볼 수 있었고 에쇼웨의 영국군도 켈름스포드 부대가 뻔히 바라다 보였다. 만약 진군을 강행하고자 한다면 하루 정도면 충분히 에쇼웨에 도달할 수 있었으나 문제는 긴긴들로부에서 에쇼웨에 이르는 지형이 영국군에 상당히 불리하다는 것이었다. 수레와 중장비가 건너기 어려운 늪지대가 있었고 이를 천신만고 끝에 통과하더라도 에쇼웨까지는 길게 자란 풀로 덮여있는 바위투성이 황무지였다. 바로 이러한 초원지대에서 긴 풀 아래에 몸을 숨긴 후 이동중의 적을 급습하는, 줄루 임피의 장기가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켈름스포드는 예전의 뼈아픈 패배로 이러한 지형이 사지(死地)가 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고 에쇼웨로 섣불리 진군하지 않았다. 그나마 진지를 구축한 고지대가 영국이 수비하기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였고 이때문에 줄루군이 영국군에게 들키지 않고 습격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었다. 아울러 장애물도 없어 공격군은 수비군의 사격에 완전히 노출되어있었다.




파멸: 긴긴들로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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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신상담한 켈름스포드가 줄루군을 격파하기 위하여 준비한 7파운드 야포와 개틀링건 <ⓒ gmic.co.uk>



와신상담하며 재침공을 준비한 켈름스포드는 상당한 수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일단 정규군만 3390명이었고 여기에 백인과 원주민으로 구성된 민병대 2280명이 더해졌다. 여기에다 3문의 야전포, 4개의 24-파운드 로켓발사대, 개틀링 기관총 2문등 보유한 화력도 상당하였다. 이러한 병력이 감제 고지 위에서 단단한 요새를 구축하고 모든 무기의 발사준비를 끝마친 채 적의 돌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군이 섣불리 수비대형만 풀지 않으면 영국군이 질래야 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줄루군에 있어 남은 방법은 두 가지,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영국군을 유인해 내거나, 아니면 피해를 감수하고 정면 공격하는 것이었다. 4월 1일은 아무일 없이 지나갔고 다음 날 새벽에도 역시 조용했다. 켈름스포드는 잠시 이동을 할 것인가를 놓고 망설였으나 때마침 내리는 안개비로 인하여 땅이 젖어있어 이동이 쉽지 않았고 비록 보이지는 않더라도 근처에 줄루의 대군이 있는 것은 확실했기 때문에 섣불리 움직이지 않기로 하였다. 그러나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어 새벽 4시경에 나탈 민병대 기마병들을 깨워 정찰을 내보냈고 만약 줄루군을 발견하거든 먼저 도발하여 영국군 라거요새쪽으로 유인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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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들로부 전투의 주축을 담당한 제 91 하이랜더 보병대 <ⓒ britishbattles.com>



기마병들이 정찰을 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약 5시 45분경, 정찰병들과 보초들로부터 보고가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줄루군이 공격을 개시했다는 것이다. 정찰병들은 재빨리 라거 요새로 복귀하였고 얼마 후 줄루군 병력이 나타났다. 이 병력은 인근에 있던 줄루군 임피의 좌측 뿔, 즉 좌익에 해당하는 부대였다. 이들은 강을 넘어 영국군 진지의 북쪽을 향하여 진격하여 왔고 이에 영국군 부대는 개틀링건으로 한 차례 위협사격을 가하였다. 개틀링건의 파공음이 들리면서 총탄이 빗발치자 이 줄루군 부대는 추격을 멈추고 즉시 주변의 긴 풀 사이로 몸을 낮추었다. 그러나 줄루군의 특성상 공격이 일단 시작되면 멈출 수가 없었다.

공격은 재개되었고 줄루군은 수많은 소총과 개틀링건이 대기하고 있는 영국군 진지 앞으로 돌격을 개시하였다. 빗발치는 총포탄이 수많은 전사들의 육신을 찢어놓는 속에서도 30야드 지점까지 접근하였으나 진지 앞에 구축한 장애물 때문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리고 지근거리여서 제 60소총연대의 소총탄과 개틀링 건에서 쏟아지는 총탄 중 빗나가는 것은 거의 없었다. 무수한 전사들이 쓰러지고 줄루 좌익의 돌격은 완전히 꺾였다. 그러나 줄루 전사들은 전투를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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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감제고지를 장악하고 단단한 방벽뒤에서 싸우는 영국군의 화력앞에 줄루군의 돌격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 britishbattles.com>





긴긴들로부 전투도. 줄루군은 사방에서 총공격을 펼치지만 단단히 준비한 영국군의 화력 앞에 철저히 격파당한다. <ⓒ britishbattles.com>




북쪽 방면으로의 공격이 좌절된 줄루군은 공격의 방향을 돌려 영국군 진지의 왼쪽으로 향했고 동시에 두 번째 임피가 영국군 진지의 뒤쪽에 나타나서 돌격을 시작하였다.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방면에서 공격하여 수비병들 사이에 혼란을 유발하려 한 것이다. 비록 라거 진지에 도달하지는 않았지만 진지 뒤쪽에는 엄폐물이 많아 줄루군은 영국군의 사격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었고, 계속되는 사격에도 물러나지 않고 위치를 고수하였다. 그러나 물러나지 않을 뿐 진격할 수는 없었고 여기서도 하나 둘씩 전사들이 쓰러지기 시작하였다. 켈름스포드는 진지에서 이루어지는 맹렬한 사격 때문에 줄루군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배로우 대위의 지휘하에 일단의 기병대를 왼쪽으로 내보내 줄루군을 습격하게 하였다. 마찬가지로 나탈 민병대 기병들을 뒤쪽으로 보내어 그 곳에 있는 줄루 병력을 쳤다.

진지에 있던 영국군의 막강한 화력에 그렇지 않아도 큰 타격을 받은 줄루군은 영국군 기병대의 출현에 그 사기가 급격하게 꺾였고 무질서한 후퇴를 시작하였다. 줄루 전사들은 후퇴 중에도 영국군 기병들에게 사냥 당하듯이 쫓겼다. 비록 영국군이 완전히 대비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는 하지만 잘 만든 진지에서 사격하는 영국군에 정면 돌격한 줄루군이 치른 대가는 엄청났다. 진지 주위에서만 700명에 가까운 시신이 발견되었다. 전장에 남겨진 부상자들은 전투 종료 후 영국군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아울러 많은 전사들이 부상을 입은 몸을 이끌고 겨우 도망했고 도주 중에도 많은 수의 전사들이 영국군 기마병들의 총격을 받아 쓰러졌다. 알려진 사상자만 1100명에 달했고 많은 부상자들이 고향으로 가는 와중에 목숨을 잃었지만 정확한 숫자를 알 길은 없다. 그러나 본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상황에서 대부분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으로 판단되며 총 사상자수가 2000명은 넘었으리란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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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의 화력에 기세가 꺾인 줄루군은 영국군 기병의 반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 britishbattles.com>



긴긴들로부 전투에서 줄루 임피가 대패하면서 줄루왕국은 결정적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영국과의 전투를 위하여 모은 야전 병력 중 마지막으로 건재하던 병력이 패하였기 때문이다. 켈름스포드군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진격할 수 있었고 다음 날인 4월 3일에 백-파이프(bag pipe) 소리도 드높게 에쇼웨의 수비군의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 기간 더위와 질병, 그리고 적병들의 기습을 버티며 농성하고 있던 에쇼웨의 영국군 수비대는 켈름스포드 부대의 출현에 환호작약하였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영국군



본군을 포함하여 연이어 대부대가 꺾인 줄루왕국은 위기에 처했고 줄루왕 세츠와요는 형세가 매우 불리해졌음을 인정해야 했다. 실질적으로 군사적으로 영국군을 물리칠 방법이 없었고 외교적인 협상에 의존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산들와나에서 패하여 자존심이 땅에 떨어진 켈름스포드는 협상에 소극적이었다. 오히려 그는 병력증강에 박차를 가하였고 줄루왕국을 더욱 더 약화시키기 위하여 일부 병력을 동원하여 접경지대 인근의 줄루족 크랄에 대한 습격을 지시하였다. 이로 인하여 줄루 전사들에 의한 보복습격 역시 늘어났고 나탈주에 살고 있는 흑인 원주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켈름스포드를 비롯한 군부는 이를 빌미로 ‘나탈의 안전을 위하여’ 습격의 규모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나탈의 민병대를 동원하고자 하였다. 나탈의 부지사(副知事)인 벌워(Henry Gascoyne Bulwer)는 민병대는 식민지를 지키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지, 침공군에 동원될 수 없다며 반대하였고 나탈 지방의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벌워는 군부에서 가하는 압력에 견딜 수 없었고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탈의 민병대가 소위 ‘줄루접경지대에 대한 습격’에 참여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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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겔라강을 건너 줄루왕국으로 진입하고 있는 켈름스포드의 침공군



이러한 습격의 목적은 줄루왕국과의 최후의 일전에 앞서 많은 병력을 동원하는 동안 줄루군이 쉬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세인트헬레나와 모리셔스에 주둔하고 있던 정규병력이 다시 동원되었고 여기에 나탈의 민병대 병력이 추가되었다. 병력이 모이자 켈름스포드는 이 병력을 3개의 지대로 나누어 에쇼웨에서 합류한 병력과 새로이 모인 병력을 포함한 약 9200명을 제 1지대로 편성하고 피어슨 대신 자신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크릴록(Henry Crealock) 소장에게 그 지휘를 맡긴다. 제 2지대 역시 정규군과 의용병, 민병대의 혼성부대였는데 10100명이었고 뉴디게이트 소장(Maj. Gen. Newdigate)이 지휘관이 되었다. 제 3지대는 작전에 따라 융통성있게 활용될 수 있는 3000명정도의 별동대(flying column)로 편성하여 캄불라에서 줄루본군을 격파한 후 준장으로 승진한 우드(Evelyn Wood)의 지휘하에 두었다. 총 병력 약 23,000명, 줄루전쟁이 시작된 후 가장 대규모의 영국군 병력이었다. 병력도 병력이지만 야포 24문, 그리고 캐틀링 기관포 포대(Battery) 역시 추가되어 화력도 막강했다. 줄루 왕군이 와해된 상태에서 과한 병력과 화력이었지만 이산들와나의 참패를 경험한 켈름스포드는 어떠한 도박도 하려 하지 않았다. 캄불라와 긴긴들로부 두 번의 큰 승리가 있었지만 사실 켈름스포드의 관점에서 이는 이산들와나의 패배를 만회한 것에 불과하였다. 이산들와나의 전투는 켈름스포드의 1차 침공군이 나탈접경지대를 넘어 줄루왕국으로 쳐들어가면서 발생한 것이었고 이산들와나에서 패배로 인하여 영국군은 나탈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영국군이 두 차례의 큰 전투에서 줄루군을 무찔렀으나 접경지대에서 줄루군을 몰아낸 것에 불과했을 뿐 엄밀히 말해 진격을 한 것이라 할 수는 없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전쟁이 처음 시작하던 당시의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특히 긴긴들로부 전투는 본격적인 침공에 따른 승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고립된 부대에 대한 구출작전의 일환이었다. 재차 침공을 위해서는 장기적이고도 본격적인 준비가 필요했지만 그렇다고 줄루군을 쉬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때문에 줄루군을 괴롭히면서도 동시에 준비를 진행할 수 있고 준비가 끝난 후에는 바로 진격할 수 있는 접경지대에서 때를 기다렸다.

침공준비와 관련한 켈름스포드의 독단적인 행보로 인하여 식민지 군부와 본국 정부간 관계는 좋지 않았다. 그러나 둘 다 줄루왕국을 타도의 대상으로 여겼다는 점에서는 관점이 일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전쟁의 당사자가 된 케이프식민지, 보다 정확하게는 나탈 주민들은 전쟁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줄루왕국과의 전쟁이 발발함으로 인하여 나탈 주민들은 언제 줄루군이 쳐들어올지 몰라 초비상인 상태에서 몇 개월째 지내고 있었고 경계태세를 풀 수 없었기 때문에 전쟁 피로가 누적되고 있었다. 케이프 식민지같이 사람도 많고 항구를 통하여 들어오는 물자도 많은 곳이라면 모르겠지만 나탈 같이 가난하고 인구도 많지 않은 식민지가 전쟁기지가 되면 그 경제적/사회적인 부담은 상당할 수 밖에 없었다. 상시적인 경계태세로 생업에 전념할 수 없었고 아울러 성인 남성들이 민병대에 빈번하게 차출되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타격도 상당하였다. 아울러 수천명의 군인들이 상주하게 되면서 이들을 유지하기 위한 물자 역시 만만치 않았고 여기에다 전쟁준비를 한다고 새로이 들어오는 물자는 모두 군수품 명목으로 징발하였다. 심지어 나탈에서 일부 품목, 예를 들어 신선한 곡물이나 채소 등의 가격이 폭등하면서 일반 주민들은 돈을 주고도 구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군인들보고 나가라고 할 수도 없었다. 줄루왕국을 들쑤셔놓은 상태에서 그나마 군병력이 없다면 줄루군으로부터 나탈을 방어하는 것은 온전히 주민들의 책임이 되기 때문이었다. 나탈 주민들은 군사들의 주둔이 그리 달갑지 않았지만 그들을 ‘용납’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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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Zulu Dawn]에서의 켈름스포드 경(Peter O’Toole분) 과 세츠와요 (Simon Sabela분). 긴긴들로부에서의 패배 이후 수세에 몰린 세츠와요는 평화를 거의 구걸하다시피 하였으나 설치(雪恥)를 원하는 켈름스포드는 협상과 본국의 명령조차 거부하고 최후의 전투를 위하여 진격한다.



켈름스포드는 긴긴들로부 전투 이후 4월과 5월을 전쟁 준비로 보낸다. 그리고 마침내 6월 3일에 진격명령을 내린다. 2차 침공군의 행렬은 장관이었다. 2만이 넘는 병력이 먹고 쓸 보급품의 수송에 수레 600량, 소 8000마리와 나귀 1000마리가 동원되었다. 영국 대군이 진격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줄루왕 세츠와요는 외교와 협상으로서 영국군의 침공을 막으려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줄루군은 본군이 와해된 상태였고 전사들은 물론 국민들의 사기가 바닥을 헤매고 있어 병력을 모으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영국군의 수송행렬은 남아프리카의 거친 초원지대를 거의 기어가다시피 했기 때문에 기동성 좋은 줄루군에 의한 기습의 위험이 적지 않았고, 만약 그리 되면 큰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그러나 줄루군은 이때까지도 이전의 패배에서 제대로 회복이 되지 않은 상태였고 세츠와요는 불리한 상황에서 영국군을 자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영국군 수송대를 공격하지 않았다. 이는 영국의 침공을 방치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세츠와요는 영국군을 공격하지 않는 대신 여러 차례 사절을 보냈고 6월 4일에는 사절 2명을 보내 휴전의사를 밝혔으며 그 조건을 문의하였다. 켈름스포드는 6월 6일에 줄루어를 아는 네덜란드인을 보내며 휴전의 조건을 밝혔으나 진격을 멈추지는 않았다.

멈추지 않는 진격에도 불구하고 줄루족이 전혀 공격을 하지 않자 영국군은 그동안 전투로 인하여 손을 놓고 있던, 해묵은 숙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바로 이산들와나 전사자들의 장례를 치러주는 것이었다. 전투 종료 후 돌무덤에 급히 묻은 소수를 제외하고 대다수의 전사자 시신은 이때까지도 죽을 때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산들와나의 전장에 널브러져 있었다. 새로이 편성된 침공군에 참여하게 된 마셜 소장(Maj. Gen. Marshall)은 뉴디게이트 소장의 허락을 받고 일단의 병력을 이끌고 이산들와나로 향하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산들와나 전투 이후 전장(戰場)근처에 풀과 곡식이 무성하게 자라 전사자들의 끔찍한 시신들을 덮어주었다는 것이다. 이산들와나에 도착한 병력은 먼저 1차적으로 살아남은 병력이 도주한 이른바 ‘도망자의 여울(Fugitive’s Drift)쪽을 수색하였다. 이들은 줄루군에 따라 잡혀 참살된 무수한 시신을 발견하였는데 대부분 나탈 기마순찰대 (Natal Mounted Police)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말과 나귀의 시신들까지 그대로 마차에 묶인 체로 죽어있어 마셜의 병사들에게 후퇴 당시의 혼란을 그대로 상기시켜주었다. 한편 본(本)전장에 도착하자 마지막까지 줄루군에 맞서 싸운 던포드와 기병대원들의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인근에는 보병 방진을 만들고 최후까지 저항한 24연대 병사들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 마셜의 병사들은 기병대와 기마 순찰대의 시신은 수습하였지만 24연대 병사들의 시신들은 그대로 두었다. 같은 부대에서 한솥밥을 먹은 동료들이 그들을 거두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한 것이다.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천천히 진격을 하던 침공군 사령관 켈름스포드는 6월 16일에 월즐리가 근처에 와있다는 전갈을 받고 상당히 긴장한다. 적어도 본국의 명령에 의하면 켈름스포드는 지휘권을 월즐리에게 넘겨야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켈름스포드는 전갈을 받고도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진격의 속도를 높인다. 만약 지휘권을 넘기면 자신의 손으로 전쟁을 마무리 지을 수 없음은 물론이고 이산들와나의 치욕을 되갚아줄 기회가 영영 사라지는 것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켈름스포드는 월즐리가 보낸 전문에도 응하지 않고 월즐리를 보러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전에는 월즐리와 본국 정부의 요구에 응할 생각이 없었고 계속해서 들어오는 전문을 무시한 체 줄루왕국의 수도인 울룬디로 행군을 계속하였다. 제 2차 침공군은 줄루왕국 영토 안 깊숙이 진격을 하면서 진격로 중요 지점 마다 임시 요새 겸 보급창을 구축하고 현직 지휘관들, 또는 과거 유명 지휘관들의 이름으로 명칭을 삼았다. 6월 17일에 이산들와나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구축한 마샬 요새(Fort Marshall)를 비롯하여, 이후의 뉴디게이트 요새(Fort Newdigate), 나폴레옹 요새(Fort Napoleon), 그리고 던포드 항구(Port Durnford) 등의 시설이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켈름스포드는 블랙(Black)중령이 거느린 24연대 병력을 이산들와나로 보냈고 이들은 사흘에 걸쳐 이산들와나에서 죽은 동료들을 묻고 장사 지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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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으로부터 케이프 식민지의 영국군 지휘권을 받은 월즐리(Garnet Wolseley). 지휘권을 인수하려 무던히 애를 썼지만 고의로 무시하는 켈름스포드 때문에 전쟁이 실질적으로 끝난 후에야 지휘권을 받게 된다. <ⓒ www.suffolkregiment.org>



바로 지휘권을 인수받을 줄 알고 기다리던 월즐리(Garnet Wolseley) 중장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했고 6월 말에 이르러 그의 짜증은 폭발직전이었다. 그는 케이프에 도착한 이후 계속하여 켈름스포드에게 전문을 보냈으나 연락이 없자 나탈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전문을 보내고 수일을 기다리기를 반복하였다. 월즐리는 급하게 침공군의 뒤를 쫓아가며 자신의 지휘권 인수를 관철시키려 하였다. 그는 일단 나탈 해안에 있는 던포드 항구까지 배를 타고 간 후 육지에 내려 침공군을 따라잡으려 하였으나 겨울이 가까워오면서 풍랑이 일어 육로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월즐리는 더번에서 육로로 나탈 내륙으로 가면서 일단 켈름스포드에게 재차 전문을 보내 제 1 지대와 합류할 것이며 혹시라도 후퇴하게 되면 자신이 있는 위치로 올 것을 주문하였다. 그러나 켈름스포드는 세츠와요의 ‘협상’제의와 월즐리의 압박을 모두 무시하고 진격을 강행하였다. 마침내 켈름스포드의 침공군은 6월 28일에 울룬디에서 불과 30km떨어진 지점까지 진출한다.

협상 제의에도 켈름스포드 부대가 진격을 멈추지 않자 세츠와요는 다급해졌다. 최대한 모을 수 있는 전사들을 모으는 한편 마지막으로 싸움 없이 전쟁을 멈추려는 생각에 재차 사절을 보낸다. 6월 30일, 월즐리의 전문이 켈름스포드에게 당도한 것과 동시에 세츠와요가 보낸 두 번째의 사절단이 침공군 앞에 나타난다. 켈름스포드가 이전에 제시한 조건대로 줄루군이 보유한 총기를 반환하고 코끼리 상아를 선물로 보냈지만 켈름스포드는 줄루왕이 조건을 완전히 충족시키지 못했다며 평화협상제안을 거절한다. 이때 줄루왕국의 수도인 울룬디 앞에는 어찌어찌 긁어 모은 1만 5천의 전사들이 만약을 대비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켈름스포드는 다음 날까지 울룬디 근처에 모인 임피들을 해산시킬 것을 요구하였으나 세츠와요와 줄루전사들이 이러한 영국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리 만무하였다.

한편, 기다리다 못한 월즐리는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6월 30일의 전문을 통하여 켈름스포드에게 호통을 친다.



“당신의 병력을 집결시키고 꼼짝 말고 있기 바라오! 분산된 병력으로 더 이상의 작전을 금지하는 바이오! 이 전문을 받는 즉시 응답하고 최근의 상황에 대한 보고하시오! 당신의 무응답에 실로 기가 막힐 지경이오!”

켈름스포드의 귀에는 평화를 구걸하는 세츠와요의 말도, 당장 지휘권을 넘기라는 월즐리의 호통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군은 줄루왕도 울룬디로부터 불과 5마일, 즉 8km밖에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의 명예를 회복시켜줄 전투를 불과 8km 남겨두고 있었던 것이다. 줄루왕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전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5.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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