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키예프 전투 [2] - 사상 최대의 포위전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538회 작성일 16-02-07 09:05

본문















14548035048901.png





먼저 처단하여야 할 곳



히틀러는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모스크바를 향한 다음 진격을 한창 준비 중이던 독일 중부집단군(Heeresgruppe Mitte)의 우측 선봉인 제2기갑집단을 90도 남쪽으로 꺾어서 키예프로 남하시키기로 결정하였고 여기에 더해 제2군도 함께 동행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는 제2기갑집단이 북쪽에서, 남부집단군의 송곳인 제1기갑집단이 남쪽에서 키예프 후방인 동쪽으로 동시에 돌격하여 거대한 봉쇄망을 완성하도록 지시하였다.





14548035064157





히틀러는 제2기갑집단에게 키예프로 남하하고 제1기갑집단이 북상하여 키예프를 포위하라고 지시하였다. <출처: (cc) Gdr at wikipedia.org>



사실 독소전쟁 이전부터 히틀러는 우크라이나와 남부 러시아의 전략적 가치가 모스크바 같은 상징적 목표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비록 여러 이유로 주공을 모스크바로 향한 중부집단군에게 부여하고는 있었지만 한시도 이곳에 눈을 뗀 적은 없었다. 히틀러는 모스크바 함락을 반드시 1941년 중으로 달성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찬성하면서도 우크라이나의 복잡한 상황도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때문에 모스크바의 대문인 스몰렌스크를 함락시키자마자 곧바로 진격을 가하지 않고 주력을 꺾어 키예프로 돌리는 기상천외한 작전을 명령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당연히 모스크바 공략을 담당한 중부집단군 지휘부와 선봉장을 자임하던 제2기갑집단 사령관 구데리안(Heinz Guderian)의 반대는 격심하였고 여기에 OKH의 여러 브레인들도 동조하였다. 그들은 기회를 잡았을 때 적의 수도를 점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럼에도 히틀러가 이런 결심을 한 이유 중 하나가 소련군의 붕괴가 빠르다는 점이었는데, 엄밀히 말해 독일이 예상하던 이상이었다. 그 동안 바바로사 작전의 주공을 중부집단군에 두고 있었지만 민스크와 스몰렌스크에서의 연이은 대승으로 인하여 소련군이 심하게 붕괴되었으므로 중부집단군 전력 일부를 남부집단군 지역으로 돌려도 모스크바 점령에는 그다지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었다.





이미지 목록



1
14548035072548




2
14548035081719



스몰렌스크 전투 당시 예하 부대인 제3기갑사단을 방문하여 사단장 발터 모델과 환담하는 제2기갑집단 사령관 구데리안. 그는 모스크바로의 진격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였으나 총통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출처: (cc) Bundesarchiv>





1941년 OKH에서 작전을 간섭하는 히틀러. 앞줄 좌에서 우로 육군 총사령관 브라우히치, 히틀러, 참모총장 할더. <출처: (cc) Bundesarchiv>







올바른 선택이었다는 주장



내심 모스크바 보다 키예프를 우선시하고, 예상보다 전황을 낙관적으로 보고 내린 히틀러의 이러한 결정은 이후 독소전쟁의 커다란 변곡점이 되었다. 이 때문에 아직도 사학자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많은 갑론을박이 오간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후에 히틀러가 깊숙이 개입하였던 스탈린그라드(Stalingrad), 쿠르스크(Kursk), 벌지(Bulge) 전투와 달리 이때의 결정을 옹호하는 의견도 상당히 많다는 점이다.

위에서 언급한 많은 전투들은 히틀러의 간섭으로 실패한 작전의 사례로 자주 언급되지만 키예프 전투는 조금 다르다. 결과적으로 바바로사 작전을 완전히 틀어버릴 정도가 되었기에 히틀러의 결정이 잘못되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오히려 당시 입장을 고려한다면 그의 결정이 당연한 것이고 타당한 조치였다는 주장도 많다. 우선 역사상 보기 드문 엄청난 대승을 이끌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 보다 모스크바에 대한 정체성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모스크바 점령이 전쟁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교전국의 수도를 점령한다는 것은 전략적으로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지만, 만일 저항을 멈추지 않는다면 단지 상징적이고 심리적 효과만 있을 뿐이다. 사실 모스크바가 소련의 수도이고 교통의 중심이지만 이러한 상징적인 의미 외에는 이곳을 점령하여 얻을 수 있는 메리트가 크다고는 보기 힘들었다.





14548035096256





19세기 중반의 모스크바. 설령 독일이 키예프 대신 이곳을 먼저 점령하였어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많다.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정권 수뇌부를 일거에 생포하기도 현실적으로 힘들고 모스크바 시민들을 볼모로 삼아 소련 정권에게 항복을 요구하여도 그들이 순순히 응하지 않을 것은 명약관화하였다. 때문에 당장 현실적인 위험인 키예프에 모여든 소련군을 해결하지 않고 그냥 앞으로 나가 모스크바를 먼저 점령하여도 그다지 전쟁의 향방을 바꿀만한 성과는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주장



이에 반하여 모스크바 점령이 전쟁의 종결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의견에 대부분이 동의하면서도, 그래도 예정대로 중부집단군이 모스크바로 진군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도 많다. 전술한 바와 같이 키예프의 소련군은 엄청난 대군이었지만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고 사기도 낮아 반드시 사수하겠다는 의지가 결여된 상태였다. 더구나 아직은 스탈린이나 공산 정권에 대한 일반 병사들의 충성도도 높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전선 남부에서 그 동안 후퇴 지연전을 적절히 펼치며 유연한 작전을 펼칠 수 있었던 지금까지와 달리 키예프 전투 개시 시점에 이르러서는 스탈린이 군부에게 이곳을 사수할 것을 엄명하여 놓아 움직일 수 없던 상태였다. 때문에 키예프를 봉쇄시킨 후에 천천히 소탕하여도 충분히 섬멸이 가능 하였을 것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남부집단군 또한 로스토프로 그냥 직진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 의견도 많다. 한 번 진격이 멈추고 전선이 정체되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지난 제1차 대전 당시에 뼈저리게 경험한 바 있었다.

그런데 어느 결정이든 소련의 능력을 낮게 평가하였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사실 히틀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독일 지휘관들은 당시에 거의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개전 2개월 만에 독일은 최대 1,500킬로미터를 진격하였고 무려 300만의 소련군을 붕괴시켰다. 사실 이 정도의 피해를 극복하고 전쟁을 계속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후 승리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을 정도로 소련의 보충 능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이미지 목록



1
14548035106417




2
14548035115609



현지사수를 엄명 받았지만 소련군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예상을 벗어난 소련의 엄청난 보충 능력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등공신이다. <출처: AP>




1941년 가을까지 독일은 이러한 소련의 잠재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다. 당시 소련에게 필요한 것은 전력을 재정비할 시간이었는데, 비록 엄청난 희생을 당연하다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결론적으로 소련은 피를 바친 대가로 시간을 얻었다. 반면 독일군은 수많은 승리를 기록하였지만 충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보급로가 길어져 계속 진격하는데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위기에 빠진 소련군



민스크에서와 달리 중부집단군이 스몰렌스크 점령에 애를 먹은 것처럼 시간이 갈수록 앞으로 나가기 힘들었다. 엄밀히 말해 전력을 보충하고 전력을 재편하여야 할 시점이었는데, 바로 이때 우측 주먹인 제2기갑집단을 남부로 보내게 되자 중부집단군의 진격 속도는 더욱 감퇴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독일 침공군 전체의 유일 예비대였다가 얼마 전에 중부집단군에 배속된 제2군도 함께 남부로 이동하여야 했다.

1941년 8월 17일, 제2기갑집단은 모스크바를 목전에 두고 방향을 돌려 키예프를 향하여 남하를 개시하였다. 구데리안은 모스크바를 지척에 두고 진격로가 바뀌어 불만이 많았지만 명령에 따라 제2기갑집단을 이끌고 500킬로미터를 남하하여 키예프 북부 외곽에 도달하였다. 이때 히틀러는 구데리안을 달래려고 제2기갑집단을 '구데리안 기갑집단(Panzergruppe Guderian)'으로 부르도록 조치하였다.





14548035128922





중부집단군에 배속 되었던 독일 제2군도 함께 남하를 시작하였다. 이들은 키예프 북쪽을 봉쇄할 예정이었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pedia.org>



독일군의 이동을 뒤늦게 포착한 STAVKA(소련군 최고사령부)는 키예프 북쪽에 포진한 브리얀스크 전선군(Bryansk Front)을 이동시켰지만 한발 늦었다. 구데리안은 방어선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 소련 제13, 40, 21군을 차례대로 분쇄하며 1941년 8월말에 키예프 북부의 세임 강(Seim) 북단까지 진출하였다. 동시에 독일 남부집단군은 남쪽에서 주력인 제1기갑집단을 병진시켰고 이들은 드네프르 강 만곡부를 따라 그대로 북상하여 키예프 남단에 이르렀다.

구데리안 기갑집단이 세임 강을 도하하여 남부집단군의 제1기갑집단과 연결되면 키예프는 배후가 완전히 차단되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세임 강 남단은 전형적인 우크라이나 평지여서 독일군을 저지할 자연적인 장애물도 없었다. 때문에 소련군은 키예프에 물려있는 제5, 21, 26, 37군 등 남서전선군(Southwestern Front) 주력을 신속히 드네프르 강 동쪽으로 후퇴시켜 전선을 새롭게 구축하여야 할 상황이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5.07.0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