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키예프 전투 [3] - 사상 최대의 포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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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37회 작성일 16-02-0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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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의 아집



키예프 후방이 차단되기 시작하자 지금까지 도시를 정면에서 견제하고 있던 독일 제6군이 전진을 개시하였다. 또한 남측에서 제17군이, 북쪽에서 제2군이 포위망을 동시에 좁혀왔다. 소련군은 사방에서 밀고 들어오는 독일군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역부족이었다. 도대체 어느 곳부터 막아내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키예프를 포기하고 후퇴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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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은 포위망을 압축하여 들어갔고 소련군은 각개 격파 당하면서 소멸되기 시작하였다. <출처: AP>



포켓에 갇히게 된 소련 남서전선군 사령관 키로포노스(Mikhail Kirponos)는 계속 키예프에 머물러 항전하다가는 회복하기 힘든 참담한 패배가 예견되어서 전략적 후퇴를 건의하였고, 신임 총참모장 샤포슈니코프(Boris Shaposhnikov)도 여기에 동조하였다. 하지만 이런 당연한 주장에 브레이크 걸고 나선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스탈린이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키예프를 사수하라고 재차 엄명을 내렸다.

민스크, 스몰렌스크, 우만에서의 패배도 바로 이러한 스탈린의 개입 때문에 벌어진 참사였다. 그 동안 스탈린의 최측근으로 어느 정도 의견을 개진할 수 있던 키예프 특별관구 사령관 부됸니(Semyon Budyonny)도 퇴각을 주장하였으나 9월 13일 그마저 해임시켰다. 그런데 기껏 새로운 현지 사령관으로 등용한 인물이 바로 직전에 있었던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참패한 티모셴코(Semyon Timoshenko)였다.

이제 소련 군부에서 스탈린에게 간청할 사람은 없어졌다. 오히려 스탈린은 자신이 임명한 샤포슈니코프나 티모셴코를 제치고 직접 키르포노스에게 연락하여 절대로 자신의 허락 없이 키예프를 포기하지 말 것을 엄명하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흡혈귀 스탈린은 자신을 전쟁의 신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이제 키예프에 몰려 있던 소련군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의미 없는 사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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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남서전선군 사령관 키르포노스. 그는 개천 초에 상당히 영리하게 지연전을 펼쳤던 인물이었으나 스탈린을 두려워하여 막판에 후퇴시기를 놓쳤고 결국 전사하였다.





신임 키예프 특별관구 사령관으로 부임한 티모셴코. 그는 지난 핀란드 침공전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사실 대단한 전과라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바로 직전에 있었던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대패를 당하였던 인물이었다.







패배보다 무서운 것



9월 16일, 구데리안 기갑집단 예하의 제3전차사단과 제1기갑집단의 제16전차사단이 키예프 동쪽의 로흐비챠(Lokhvytsia)에서 조우하면서 거대한 포위망이 완성되었고 이제 소련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신임 키예프 특별관구 사령관 티모셴코는 그래도 혹시나 하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저항을 지시하였지만, 결국 3일 만에 키예프에 고립된 남서전선군에게 철수를 명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대안이나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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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흐비차에서 독일군 기갑부대가 연결됨으로써 키예프는 배후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pedia.org>



그런데 여기서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졌다. 키르포노스가 공식 문서로 명령을 내려 줄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는 티모셴코에게 구두 명령만으로 절대로 부대를 움직일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철수의 당위성은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는 상황이었지만 실행은 그 다음의 문제였다. 그는 민스크에서 부대를 철수시켰다가 스탈린을 격노를 사서 사형당한 서부전선군 사령관 파블로프(Dmitry Pavlov)의 비참한 최후를 잘 알고 있었다.

1930년대 말 이후 소련은 스탈린을 제외한 그 어떤 이들도 언제 어떠한 죄목으로 목숨을 잃을지 몰랐던 공포의 시기였다. 이 때문에 키르포노스는 추후 스탈린이 책임을 물을 때 회피할 수 있도록 구두 명령을 완강히 거부하였던 것이었다. 결국 9월 19일, 전전긍긍하며 스탈린의 눈치를 보았던 총참모장 샤포슈니코프는 키예프는 포기하되, 프셀(Psel) 강까지만 퇴각을 허락하는 공식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동안 잘 싸웠던 키르포노스는 막판에 자신의 목숨만 염려하여 80만 대군의 후퇴 시기를 놓친 한심한 지휘관이 된 셈이었지만, 결국 키예프에서 전사하였다. 사실 이러한 눈치 보기는 티모셴코나 샤포슈니코프를 비롯한 모든 소련 군부의 지휘관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스탈린에 대한 공포는 대단하였다. 이처럼 흡혈귀의 전횡과 눈치만 보는 장군들의 소심함으로 인하여 전쟁 초기에 소련은 연이은 참패를 경험하였다.




상상을 초월한 결과



키르포노스가 예하 부대에게 동쪽으로 포위망을 뚫으라고 명령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오히려 퇴각 명령이 하달되자 소련 남서전선군은 예하 부대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중구난방으로 갈가리 쪼개진 소련군들은 포위망 안에서 가볍게 각개 격파되는 운명을 맞이하였고 단지 10만이 탈출에 성공하였다. 구데리안 기갑집단이 남하한지 약 1개월만인 1941년 9월 26일에 종결된 키예프 전투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소련군 제5, 21, 26, 37군이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고 제38, 40군 또한 재편에 오랜 시간이 필요할 정도의 막대한 피해를 입고 만신창이가 되었다. 20여 만의 소련군이 전사하였고 50여 만의 소련군이 독일의 포로가 되는, 전무하고 앞으로도 재현되기 힘든 엄청난 패배를 당하면서 소련 키예프 특별관구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것은 제2차 대전은 물론이거니와 역사상 단일 전투로 벌어진 사상 최대의 전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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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전투 직후에 모스크바에서 촬영 된 소련군 기동부대의 출정 모습. 소련은 엄청난 패배에도 굴복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애당초 작전을 반대하던 구데리안조차 환호하였을 정도였다. 앞서 벌어진 우만 전투를 포함하여 두 달 동안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무려 100만 명의 소련군이 궤멸되면서 동부전선의 남부는 순식간 힘의 공백 지대가 되었다. 사실 이 정도 타격을 입었다면 어지간한 나라는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련은 상상을 초월하는 나라였고 독일은 그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침공 이후 이 전투가 종결된 1941년 9월말까지 독일은 무려 400여 만의 소련군과 그에 해당하는 군비를 붕괴시켰다. 그리고 북부 발트해에서 남부의 흑해에 이르는 1,700킬로미터의 전선을 구축하여 서부러시아를 완전히 독일의 군화발아래 굴복시켰다. 이제 독일은 얼마 남지 않은 소련의 목숨을 거두면 될 것으로 예상하였다. 적어도 이 시점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이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



하지만 소련은 독일이 상상하는 이상의 엄청난 거인이었다. 독일은 소련이라는 빙산의 머리 부분을 순식간 녹여버렸지만 물밑에 잠겨 있는 부분이 얼마 정도의 크기인지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키예프 전투 후 독일이 마음만 먹으면 쉽게 전선을 몰아붙일 것 같아 보였는데 현실은 전혀 그러하지를 못하였다. 소련은 여전히 항전을 외치며 달려 나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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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전투 종결 후 생포된 소련군 포로. 이 전투에서 총 70여 만의 소련군이 붕괴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항전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출처: AP>



독일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고 고개를 꺄우뚱 거리면서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을 중부집단군으로 원상 복귀시켜 키예프 공략으로 일시 중단되었던 바바로사 작전을 다시 진행하려 하였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 러시아의 짧은 가을은 끝나가고 있었다. 소련은 키예프를 희생한 대가로 천금 같은 시간을 벌었던 것이었고 그 틈을 이용하여 모스크바 앞에 거대한 방어막을 구축하였다.

모스크바를 다시 주공으로 정한 후, 모든 전력을 집중하여 태풍작전(Operation Typhoon)이라 새롭게 명명한 공세를 독일이 재개하였을 때 앞을 가로 막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늦가을 장마로 인한 엄청난 진흙 지대가 벌어지는가 싶더니 눈이 내리면서 기온이 곤두박질쳤고 그렇게 쳐 부셨는데도 계속해서 나타나는 소련군은 독일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그때서야 독일은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을 지도 모를 것이라는 예감을 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키예프 전투가 이후 두고두고 논란거리가 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바로 전쟁 승리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시간을 놓쳤다는 점이었다. 보급의 문제가 있기도 하였지만 진격이 한번 멈춘 후 다시 공세를 재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역사가 똑똑히 알려주고 있는데도 독일은 눈앞에 보인 거대한 먹잇감을 놓치기 싫어 결정적 실기를 하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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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모스크바로 다시 향하려 하자 라스푸티차(봄에 눈이 녹거나 가을에 눈이 왔을 때의 길이 질퍽질퍽한 시기)가 시작되었다. 키예프 공략으로 시간을 잃은 독일군은 앞으로 나가는데 애를 먹기 시작하였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pedia.org>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5.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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