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키예프 전투 [4] - 사상 최대의 포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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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36회 작성일 16-02-0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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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



키예프 전투 참가를 위해 제2기갑집단이 우회한 사건은 독소전쟁의 모든 것을 틀어져 버리게 만들었다. 가뜩이나 보급에 문제가 많던 중부집단군은 핵심 전력이 이탈하면서 모스크바를 앞에 두고 진격이 멈추었고, 전력을 회복하여 공격을 재개하였을 때는 소련군의 방어선이 강화되어 있었다. 당황한 히틀러는 북부집단군(Heeresgruppe Nord)의 제4기갑집단을 중부집단군 예하로 보내 전력을 강화시켰지만 효과는 미진하였다.

북부집단군은 바바로사 작전 당시에 유일한 고속기동부대였던 제4기갑집단을 중부집단군에게 넘겨주게 되자 돌파력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결국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 초입에서 더 이상 안으로 전진을 할 수 없어 도시를 점령하지 못하고 외부에서 봉쇄만 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독일은 키예프를 점령한 대가로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라는 또 다른 전략 거점을 점령할 수 있었을 절호의 기회를 상실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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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을 시찰하는 독일 북부집단군 사령관 레프와 제18군 사령관 퀴흘러. 북부집단군은 핵심인 제4기갑집단을 내주게 되면서 레닌그라드 점령 직전에 진격 속도가 급격히 저하되었다. 모두 키예프 전투의 여파였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pedia.org>



대부분의 전사를 살펴보면 키예프 전투에 대한 평가는 거의 대동소이하다. 간단하게 전술적으로는 독일의 대승, 하지만 전쟁 전체적으로 볼 때 전략적인 실책이라 정의한다. 그런데 이러한 분석에서 한 가지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소련의 입장을 배제하고 오로지 승자인 독일의 입장에서만 분석하였을 때나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전투로 인해 발생한 시간이라는 팩트도 다르게 접근할 수 있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소련이 시간을 얻은 것이 아니라 독일이 시간을 잃어버린 것이 맞다. 적어도 키예프 전투 종결 당시까지 양측 모두 시간의 중요성에 대해 그리 생각을 많이 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후 전쟁의 양상 때문에 그렇게 평가되었을 뿐이다. 엄밀히 말해 소련 입장에서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얻게 된 시간을 독소전쟁에서 승리한 이유로 삼을 수 없는 처지다.




그 동안 간과하였던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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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쟁 초기에 있었던 소련의 연이은 대패에 스탈린의 책임이 컸다.



스탈린이 키예프 사수를 엄명하였던 것이 처음부터 시간을 얻기 위해서였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소련은 스탈린의 강요로 키예프 전투를 거시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지 못하였고 이를 전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도 없었다. 당시 독일이 전쟁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미 적진 한가운데서 반 이상 포위된 도시를 무의미하게 방어하려다가 어마어마한 전력을 순식간 산화시켰다는 점은 시간을 얻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핑계를 댈 수 없다.

독소전쟁처럼 규모가 큰 전쟁에서는 불가피한 희생이 벌어질 수도 있지만 고집 때문에 하나의 도시를 사수하려고 한 달 동안 무려 70여 만을 희생시켰다는 점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엄청난 실책이다. 이미 7월에 키예프를 포기하고 전선을 단축한 후 차근차근 반격을 준비하자고 주장한 주코프(Geogry K. Zhukov)가 사수를 고집한 스탈린에 실망하여 총참모장직을 스스로 내려놓았던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참사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스탈린에게 있다.

전후 소련 스스로 가장 수치스러운 패배였다고 결론 내린 것처럼, 소련은 굳이 이러한 희생을 바치지 않고도 충분히 방어전을 펼칠 수 있었다. 개전 직후에 벌어진 민스크의 패배는 독일의 기습에 의한 것이었다 치더라도 그 다음에 있었던 스몰렌스크 전투는 스탈린의 현지 사수 고집이 불러 온 참패였다. 그렇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스탈린은 키예프에서 오히려 더 큰 패배를 같은 이유로 자초하였다.

엄청난 희생이 예상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스탈린의 눈치를 보기에만 급급한 소련 군부는 다른 대안을 떠올리기 힘들었다. 이처럼 독일이 키예프 전투로 결정적 시간을 잃어버렸다는 평가와 달리 소련에게는 한 사람의 어이 없는 고집에 의한 치욕적인 패배였다. 이미 천만 이상의 국민을 굶겨 죽이고 숙청하여 죽여버린 흡혈귀에게 70만의 목숨은 벌 것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고 당연히 비판 받아야 할 실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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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전투에서 포로가 된 소련군. 결론적으로 독일의 입장에서는 결정적인 시간을 잃었지만 소련이 키예프를 희생시켜가며 시간을 끌었다는 증거는 없다. <출처 : Bundesarchiv>





키예프 인근에서 격파 된 소련군 장비들. 당연히 이런 피해를 소련이 일부러 당하려 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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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악행을 열거하면서 거론한 대표적인 군사적 실패가 키예프 전투였다. 그만큼 전투사적 의의와 별개로 소련에게는 치욕이었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pedia.org>



1956년, 제20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스탈린을 격하시킨 흐루시초프(Nikita S. Khrushchev)의 장장 4시간에 걸친 역사적 연설에서, 독소전쟁 초기의 패배에 스탈린의 책임이 크다며 거론한 예가 바로 키예프 전투다. 현지에서 정치국원으로 방어전을 이끌다가 마지막 순간에 비행기 편으로 간신히 탈출한 경험이 있던 그는 스탈린의 아집과 독선으로 얼마나 많은 인민들이 필요 이상의 고통을 받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만일 소련이 패배를 당하였어도 이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겪지 않았다면 추후 전쟁 수행에 있어 훨씬 수월하였을 것임은 불문가지다. 결국 소련은 피할 수도, 혹은 충분히 줄일 수도 있었던 참화를 스스로 자초한 셈이었다. 다시 말해 키예프 전투는 독일에게 전쟁 역사상 최대의 전술적 승리를 거둔 대신 시간을 잃어버린 아쉬운 순간이었지만, 소련에게는 독재자의 아집으로 말미암아 필요 이상의 피를 흘린 멍청한 패배였을 뿐이다.

단지 위안을 삼는다면 덕분에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를 지킬 수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히틀러가 주력을 남쪽으로 돌려 키예프를 공략하기로 명령하였을 때,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이가 구데리안이었다. 그는 집중화된 기갑부대를 최초로 창안하고 운용하였던 선구자답게 속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어서 기회가 찾아 왔을 때 최대한 돌파 하여 적의 종심을 신속히 타격하여야 승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인물이었다.

당연히 우선이 속도였고 후방에서 전의를 상실한 적들의 소탕은 그 다음 문제였다. 하지만 1941년 겨울 전에 모스크바를 점령했더라도 이후 전쟁의 방향은 어떻게 바뀌었을지는 단정할 수 없다. 당시의 모든 상황을 고려한다면 설령 모스크바를 독일이 점령하여도 소련은 프랑스처럼 항복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키예프의 희생은 결코 독소전쟁 승리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변명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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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를 잡았을 때 돌파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 구데리안조차도 소련의 놀라운 저항의지를 알지 못하였다. <출처: Bundesarchiv>






의의



독일은 최대한 속도를 내어 소련의 준비가 이루어지기 전에 버릴 것은 버리고 나중에 처리할 것은 과감히 다음으로 미루어야 했는데, 결과적으로 키예프는 이를 놓치게 만든 결정적인 블랙홀이 되었다. 일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작전 관할 밖에 있던 주력부대의 진공 방향까지 돌려서 키예프 함락에 투입하였을 만큼 조바심을 냈지만 결과적으로 히틀러는 물밖에 튀어나와 서서히 죽어가던 고기를 잡고자 너무 서둘렀던 것이다.

독소전쟁 초기에 독일의 준비는 생각보다 부족한 점이 많았는데, 그 중 보급은 고질적 문제였다. 하지만 그보다 엄청나게 간과하고 있던 부분은 소련의 항전의지였다. 소련은 독소전쟁 발발 직후에 보유한 500만 중 1941년 12월전에 무려 400만을 소모시켰지만, 여전히 500만의 병력이 계속 전선을 사수하고 있었다. 이러한 놀라운 복원 능력은 어떤 독일의 전략가들도 상상하지 못한 커다란 변수였다.

소련은 밀려나는 와중에도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산업 시설들을 통째로 뜯어 우랄산맥 동쪽으로 이동시켰다. 반대로 우랄산맥 동쪽에 주둔하던 병력들이 속속 유럽으로 건너왔고 전국에서 동원된 병력이 전선에 투입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독일의 예정 진격로에는 참호가 깊게 파여지고 거대한 방어물이 속속 들어섰다. 연속된 패배에도 불구하고 전쟁개시 석 달이 되자 소련은 더욱 강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단순히 70여 만의 대병력이 한 달도 안 되어 완전히 몰락하였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키예프 전투는 전사에 기록될만한 인상적인 전투였다. 독일은 대승에 즐거워하였고 소련은 경악하였지만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 전투에 대한 결론은 즉시 내릴 수 없었고 현재까지도 논란이 계속 되고 있는 중이다. 한마디로 키예프 전투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보다 해석할 수 있는 역사적 의의가 그 이상으로 많았던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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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키예프 교외의 마을. 이 전투에 담겨 있는 의의는 독소전쟁 전체를 관통할 만큼 컸다. <출처: AP>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5.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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