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줄루전쟁 (14) - 검은 제국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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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40회 작성일 16-02-0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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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들와나에서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있는 영국군. 켈름스포드는 이산들와나의 패배이후 작정하고 복수를 위한 작업에 매달린다.





“당신의 병력을 집결시키고 꼼짝 말고 있기 바라오! 분산된 병력으로 더 이상의 작전을 금지하는 바이오! 이 전문을 받는 즉시 응답하고 최근의 상황에 대하여 보고하시오! 당신의 무응답에 실로 기가 막힐 지경이오!”

1879년,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영국-줄루전쟁(Anglo-Zulu War)이 종막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던 6월 30일에 새로이 남부 아프리카 영국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월즐리(Garnet Wolseley)중장이 ‘전임’ 사령관인 켈름스포드경(Lord Chelmsford)에게 보낸 전문이다.

6월초에 케이프 식민지에 도착한 월즐리는 하루 빨리 지휘권을 인수받고자 하였으나 6월 30일까지도 여전히 ‘전임’ 사령관인 켈름스포드가 전문을 무시하면서 지휘권을 넘겨주지 않자 그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신임 사령관은 병력을 맡지 못하고 있고 전임 사령관이 명령을 무시하면서 싸움을 위하여 대군을 몰고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싸우고자 하는 줄루의 충신들



그러나 ‘전임’인 켈름스포드는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이산들와나의 패장’으로서 지휘봉을 내려놓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쉬지않고 진군을 계속한 영국 침공군은 7월 1일에 줄루왕국의 수도 울룬디에서 불과 몇 km떨어진 화이트 움폴로지강(White Umfolozi)강변에 와있었다. 다른 방향에서 진격해온 뉴디게이트 소장의 지대(支隊)와 우드의 별동부대도 도착하면서 켈름스포드가 특별히 공을 들여 꾸린 2차 침공군이 하나의 대부대로 모였다. 그동안 영국군은 캄불라와 긴긴들로부에서 줄루의 대부대를 격파하면서 자신감을 회복하고 이산들와나 패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이제 켈름스포드는 이제 줄루왕국에 대한 복수를 완성하려 하였고 줄루왕국 수도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줄루의 임피들이, 심지어 국왕 직속의 본군마저 연이어 격파당하면서 수세에 몰리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줄루왕국에는 전사로서 자신들의 명예를 위하여, 그리고 왕국의 명예를 위하여 싸우고자 하는 전사들이 있었다. 특히 이산들와나와 긴긴들로부 전투에서도 활약하였던 음-시쵸(UmCijo) 임피의 전사들중 일부는 영국군에게 패배한 후에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최후까지 영국군과 싸우겠다는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심지어 이들은 국왕 세츠와요가 최후의 협상책으로 국왕 소유의 하얀 소들을 영국군에게 넘기려 하자 강을 가로막고 국왕이 이러시면 안 된다며 오직 건곤일척의 전투만이 있을 뿐이라고 하면서 소들을 넘겨주기를 거부하였다. 결국 협상을 위한 마지막 선물은 전해지지 못하였고 최후의 협상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이제 남은 것은 울룬디의 광야에서 자웅을 겨루는 것 뿐이었다.




복수에 미친 켈름스포드와 최후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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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룬디 전투에서의 켈름스포드. 그는 명령과 전문을 모두 무시하고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줄루왕국에 복수하고 자신의 명예를 찾으려 하였다.



켈름스포드와 영국군 지휘부는 이전 패배를 기억하면서 극도의 신중을 기하였다. 각 부대는 도착하자마자 라거를 만들었고 다음 날에는 각자 부대의 라거를 가까이 옮겨 이어붙이는 고된 작업까지 하였다. 이도 모자라 침공군의 주둔지 뒤에 있는 작은 언덕에 돌로 요새를 만들고 수비부대를 두었다. 그러나 전투의 의지를 불태웠던 줄루군은 영국군이 강으로 물을 길러오면 가끔씩 사격을 하기는 하였지만 사흘동안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전장의 상황이 의외로 조용하자 켈름스포드는 기병대장 불러(Redvers Buller)로 하여금 화이트 움폴로지강을 도강하여 건너편 들판을 수색하게 하였다. 불러의 기병대가 강을 건넜을 때 이상하게도 들판에는 아무도 없고 몇몇 염소몰이들만 한가로이 오가고 있을 뿐이었다. 불러는 염소몰이들을 잡아들인 뒤 들판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보았다. 그는 정찰을 하면서도 혹시나 하여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본대를 호위하는 병력을 양옆에 두었다. 줄루전사들이 습격을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갈래로 나뉜 기병대가 아무리 수색해 보아도 줄루군은 속된 말로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남부 아프리카에서 수많은 전투를 치른 일이 있는 불러는 불안했다. 높은 언덕이 없으며 완만한 구릉과 들판이 펼쳐져 있고 긴 풀로 덮여있는 이러한 지형은 두 다리로 뛰는 줄루군이 기습하기 딱 좋은 곳이었던 것이다. 줄루군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지만 불러는 자신의 감을 믿기로 하고 병사들에게 말을 탄 체로 아무도 없는 벌판을 향하여 일제사격을 명하였다.

수십 정의 소총이 일제히 발사되고 총탄이 날아가자 수천에 이르는 줄루전사들이 일제히 긴 풀 아래에서 나타났다. 3천에 달하는 줄루 선발대는 원래 영국군 본대가 강을 건너오면 기습하려 하였는데 불러의 기병대가 총을 일제히 발사하자 영국군이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한 줄 알고 일제히 몸을 일으켜 튀어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너무 빨리 자신들의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풀밭위로 나온 줄루전사들은 불러의 기병대밖에 보이지 않자 약간 실망하였지만, 이내 영국군에게 노획한 소총으로 일제 사격을 한 뒤 특유의 돌격을 감행하였다. 이와 더불어 양 옆에서도 줄루군이 나타났고 특유의 빠른 주력으로 앞으로 움직였다. 불러의 부대 뒤로 돌아가 에워싸서 정찰대가 탈출하기 전에 섬멸하려는 의도였다. 이왕 노출된 이상 다시 숨거나 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이윽고 무려 5천명의 줄루군이 불러의 정찰대를 잡기 위하여 일제히 움직였다. 그러나 줄루의 대병이 움직였음에도 불러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비록 3명의 영국군 기병이 총에 맞고 말에서 떨어지고 4명이 부상당하기는 하였지만 불러의 ‘감’덕분에 대부분의 기병대원들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들은 말에서 내리지 않아 즉시 후퇴할 수 있었고 일부 말에서 떨어진 부상병들도 무사히 구출하여 영국군 진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소규모의 영국군을 잡기 위하여 5천이라는 대병력이 움직였지만 빠른 속도로 도주하는 영국군을 따라 잡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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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에 앞서 방진을 형성하고 있는 영국군



이제 줄루군의 실체가 드러난 이상 영국군으로서도 더 이상 공격을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영국군은 다음 날 새벽같이 기상하여 울룬디를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새로이 구축한 전진기지를 수비할 1150명(영국군 900명, 흑인 보조병 250)을 제외하고 약 5300명의 병력은 일찍 준비를 마치고 오전 6시 45분에 화이트 움폴로지강의 도강을 완료하였다. 바로 전 날 줄루군의 공격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불러의 기병대가 선봉을 맡았고 이들은 재빨리 가까운 감제고지를 장악하고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불러의 기병대가 벌판을 질주할 때도, 그리고 본대가 강을 떠나 거친 계곡을 통과하는 동안에도 불과 하루전에 맹렬하게 풀밭에서 달려나오던 줄루군은 보이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선지는 모르지만 영국군의 무사통과를 사실상 허용한 것이다. 심지어 습격에 유리한 넓은 계곡지대를 통과한 영국군은 오전 7시 30분에 켈름스포드의 명령에 따라 공격대형으로 전환하였다. 이전의 보어인들은 물론이고 캄불라와 긴긴들로부에서도 “라거(laager) 구축 후 화력으로 격파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승리의 공식이었지만 켈름스포드는 이러한 공식을 과감히 포기하였다. 영국군이 취한 대형은 남부 아프리카에서 그 위력이 증명된 수레 라거가 아니라 바로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기병대를 꺾었던 것과 같은 보병방진(Infantry square)이었다. 켈름스포드는 이전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줄루의 임피들이 실질적으로 기병대와 같은 기동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19세기 전반 이후 영국군의 기본적인 대형은 새로이 개발된 총기의 위력을 극대화시킨 선형진(線形陣)이었으나 기동성 좋은 부대에 의한 우회공격을 허용할 수 있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켈름스포드는 발 빠른 줄루 임피에 대항하기 위하여 전(全) 방향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가능한 보병 방진 전술을 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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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루군은 벌판에서 영국군을 에워싸자 승리를 예상했으나 오히려 영국군 방진의 위력을 절감하면서 참담하게 패한다.



켈름스포드가 보병 방진을 택한 이유는 또 있었다. 물론 보병 방진이 줄루 임피의 기동력에 보다 잘 대응할 수 있다는 전술적인 판단도 있었지만 켈름스포드는 요새를 짓거나 라거를 구축하지 않고도 영국군이 야전에서 정정당당히 줄루군과 격돌하여 무찌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만약 라거나 요새에 의존하지 않고도 줄루군을 쳐부술 수 있다면 줄루군과 줄루왕국에 대한 심리적인 타격이 엄청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우선 우드 준장의 별동대가 방진의 전반부를 형성하고 뉴디게이트의 제 2지대 병력이 후반부를 만들어 4개의 면을 이루었다. 각 면에 배치된 병력은 여러 개의 중첩된 열(列)의 형태로 포진하였다. 그리고 중간의 공간에는 50대의 보급품 수레와 병원 역할을 하는 수레, 지휘관들과 탄약 보급을 맡은 병사들이 있었다. 각 면(面) 뒷편 중간에는 야포와 개틀링등 중화기가 배치되었고 또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1개 중대의 예비병력이 각 면 뒤쪽에 배치되었다. 켈름스포드는 수레대신 병력을 이용하여 ‘인간라거’를 형성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병대를 양 옆으로 배치하여 기습에 대비하였다.

거대한 방진을 이룬 켈름스포드의 군은 서서히 앞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불러가 보아둔 언덕으로 올라가 360도 시야를 확보하였다. 영국군 병력이 울룬디에 점차 가까이 다가가고 있음에도 오전 8시까지 줄루병력은 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이에 불러의 기병대가 다시 정찰을 나갔고 언덕 위쪽에 있는 ‘음빌라네’라는 개천을 지나 앞의 벌판에 진입하였을 때였다. 갑자기 줄루의 대병력이 긴 풀 속에서 일어났고 기병대를 향하여 공격해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줄루의 후속병력들이 연이어 뛰어나왔다. 줄루군 역시 자신들에게 유리한 지형을 골라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고 영국군이 포진한 언덕을 중심으로 말발굽 모양의 대형을 형성하여 비록 느슨하기는 하지만 영국군을 3면에서 포위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공격이 시작되면 포위망를 완성할 예비대를 대기시키고 있었다. 이들 병력과 먼저 격돌한 것은 양 옆에 있던 기병대였다. 영국군 기병대는 1만 5천에 이르는 줄루군의 진격을 멈출 요량으로 그들을 요격했고 8시 45분에 영국군 기병대 일부와 줄루군이 조우하면서 짧은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는 본격적인 공격이 아니었기에 기병대는 잠시 싸우는 척 하다가 재빨리 후퇴하였다.

영국군의 의도는 줄루군을 전투준비를 완료한 영국군 방진방향으로 줄루군을 끌어들이려는 것이었지만 모습을 드러낸 줄루 전사들은 일단 진군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일제히 창으로 방패를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또 다른 전사들은 리듬을 맞추어 발로 땅을 굴렀다. 전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흥분을 고조시킴은 물론 때에 맞추어 전군(全軍)을 일제히 돌격시키기 위한 일종의 사전 의식이었다. 켈름스포드는 공격을 기대하였다가 줄루군이 멈추어서자 줄루군을 도발할 목적으로 방진 앞쪽의 개울가에 대기하고 있던 기병대 병력으로 하여금 줄루군 방향으로 사격을 명령하였다. 기병대는 사격 후 재빨리 방진 안으로 후퇴하였지만 줄루군에 의한 갑작스런 돌격은 없었다. 줄루군은 방패 두드리기와 발 구르기를 멈추더니 영국군을 향하여 천천히 진격해왔다. 밖에 나와있던 기병대 병력이 방진 전방에서 모두 비켜나자 영국군은 줄루군이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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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진 안쪽에서 본 전투. 방진의 앞대열이 돌격해오는 줄루전사들을 사격하고 있다.



줄루군 병력이 2천야드(1800m) 거리에 다다랐을 영국군의 9파운드 야포와 7 파운드 야포가 불을 뿜으며 포탄을 쏟아내기 시작하였다. 영국군 야포에서 발사된 ‘깡통포탄(canister)’이 깨지면서 무수한 쇠구슬이 튀어나와 그들의 동료들을 쓰러뜨리기 시작했지만 용맹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줄루전사들은 멈추어서기 보다 오히려 진격속도를 높였다. 영국군의 화력에 의하여 많은 피해를 입기 전에 영국군 방진에 돌입하여 그들의 장기(長技)인 접근전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날 울룬디앞에 모인 영국군 병력은 이산들와나에서 허둥대던 1차 침공군과는 그 준비태세에서부터 달랐다. 이산들와나의 패장(敗將) 켈름스포드는 패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철저한 준비를 하였고 특히 이산들와나에서 패배의 원인이 되었던 탄약보급의 미숙을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였다. 줄루군이 가까이 오자 영국군 보병들에 의한 소총 사격이 시작되었다. 영국군 방진의 각 면에 배치된 병사들은 기본적으로 4열로 포진하고 있었다. 한 열이 먼저 발사하고 총탄을 장전하는 사이 다음 열이 사격하는 순차사격 방식을 채택하여 진격하고 있는 줄루군 대형에 끊이지 않는 탄환의 비를 선사하였다. 줄루군은 정면으로는 물론 옆으로 우회하여 돌격을 시도해 보았지만 영국군이 형성한 방진은 줄루군이 어느 방향으로 돌진해오건 간에 압도적인 화력으로 그 돌격을 좌절시켰다. 이따금씩 노획한 소총으로 이루어지는 줄루 사수들의 어설픈 사격에 의하여 피해가 발생하기는 하였지만 방진에 틈이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일부 전사들은 방진으로부터 30야드(27m) 지점까지 나아갔지만 이들도 결국 영국군의 총포(銃砲)가 형성하는 탄막을 뚫지 못하였다. 전투가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줄루군은 아껴두고 있던 예비대까지 투입한다. 이 예비대는 영국군 방진의 남서쪽 코너로 돌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영국군은 9파운드 화포를 돌려 이 예비대를 사격하였고 방진을 삼킬 듯이, 파도같이 빽빽이 달려오던 전사들의 대열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뒤이어 개틀링 기관총과 소총탄 세례가 이어졌고 잠시 후 예비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영국군의 철저한 준비는 줄루군에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줄루군의 돌격이 시작된지 채 30분이 지나지 않아 영국군 방진 주위로 돌격하는 줄루전사는 없었다. 영국군의 사격이 그만큼 압도적이고 무자비했던 것이다. 무수한 시신이 방진 주변을 덮고 있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전사들은 삼삼오오 대형을 이탈하고 있었다. 켈름스포드는 반격의 시점이 다가왔음을 알고는 드루리-로우 대령(Col. Drury-Lowe) 휘하 제 17기창대 (17th Lancers)에게 돌격을 명하였다. 이전에 정찰을 나갔던 불러(Redvers Buller)의 기병대도 반격대열에 합류하였다. 줄루군은 넓게 트인 벌판에서의 회전(會戰)이면 영국군을 충분히 무찌를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울룬디에서는 영국군이 일부러 넓은 들판으로 나왔고 수레 뒤에 숨지 않았음에도 방진을 이룬 영국군의 화력에 무참하게 꺾였다. 자신했던 벌판에서의 야전에서도 패한 만큼, 승리에 대한 일말의 기대마저 자라지고 줄루 전사들의 후퇴는 곧 무질서한 패주로 변하였다. 전사들은 전장 인근의 ‘논드위고’라는 마을로 들어가거나 말이 달릴 수 없는 황무지 방향으로 도주하였다. 또 다른 전사들은 그들이 진격해왔던 언덕을 넘어 영국군 화기의 사정거리 밖으로 달아나고자 하였다.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는 영국군은 달아나는 적들이라 해서 그냥 두지 않았다. 그들의 앞으로 다가오는 전사들은 없었고 모두 멀리 달아나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그들에게 야포로 사격을 가했다. 멀리 달아나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믿었다가 포탄에 맞아 죽는 줄루전사들이 부지기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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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의 사격에 쓰러지는 줄루군. 일부 전사들은 30야드 거리까지 접근하였지만 이날 줄루전사들의 창에 죽은 영국군은 거의 없었다.





영국군 제 17 기창대(17th Lancers) 의 반격




재빨리 달아나지 못하고 뒤쳐진 전사들은 기병대의 먹잇감이 되어 근거리에서 총을 맞거나 창에 찔려 죽었다. 영국군 기병들은 앞에서건 뒤에서건 가리지 않고 줄루전사들을 쏘고 찔렀다. 물론 달아나는 전사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많은 수의 전사들이 창을 앞으로 세우고 달려드는 기병들을 보고도 피하지 않고 마치 투우사같이 창을 피한 다음 손으로 잡아 기병들을 쓰러뜨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용감한 전사들도 대부분 다른 기창병이 근거리에서 쏘는 총에 맞아 죽었다. 일부 전사들은 도저히 도망갈 수 없다고 생각되면 그 자리에서 멈추고 뒤돌아 서서 당당하게 기창병들의 창을 맞이하였고 전사답게 죽었다. 그러나 비겁하게 죽었건 용감하게 죽었건, 줄루군은 처참하게 패했다. 방진 주변에서 총포탄에 그대로 절명한 전사들의 수가 500명이 넘었고 중상을 입어 움직이지 못하는 전사들이 1천명이 넘게 쓰러져 있었다. 부상자들의 대부분은 나탈 민병 기병대와 흑인 병사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아울러 패전 후 도주하는 과정에서 기병대의 창이나 총에 맞고 죽은 전사의 수가 600에 달하였다. 2천명이 넘는 전사들이 죽고 다쳤고 이제 줄루 왕국의 수도인 울룬디를 지키는 전사는 아무도 없었다. 영국군 스스로도 예비대까지 합쳐 거의 2만이 되는 줄루군을 이리 쉽게 꺾은 것이 놀라웠다. 전투는 채 1시간을 가지 않았고 방진을 이룬 보병들이 소요한 탄약은 1명당 약 7발정도에 불과하였다. 중화기에 의한 화력지원과 흔들리지 않는 순차사격, 그리고 돌격을 고집한 줄루군의 전술에 기인한 결과였고 결과는 일방적이었다. 영국군의 피해는 전사자 18명에 부상자 85명으로 사상자 100여명 남짓이었지만 줄루군의 사상자는 2천이 넘었다.




불타는 울룬디와 줄루왕국의 멸망



영국군은 지체없이 울룬디로 진격하였고 세츠와요를 찾았지만 그는 이미 며칠 전에 다른 크랄로 이동한 상태였다. 약 11시 40분경, 수도가 거의 비어있는 것을 확인한 영국군은 남아있는 주민들을 몰아낸 다음 울룬디에 불을 질렀다. 아울러 그 주위에 있는 크랄들과 마을에도 불을 질렀고 울룬디와 그 인근 지역을 뒤덮은 불은 몇 일간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올랐다. 줄루왕국이 실질적으로 멸망하는 순간이었다. 다음 날, 켈름스포드는 거의 한 나절을 달려 란트만스-드리프트 (Landtmann’s Drift) 라는 마을에 도착하였고 이 곳에서 월즐리에게 대승을 거두었음을 알리는 전문을 보낸다. 이어 줄루왕국을 멸망시킨 켈름스포드의 본군은 나탈주의 인톤자네니라는 곳으로 물러나왔고 이후 세인트-폴(St. Paul)에 구축한 요새로 철수하였다. 7월 15일 침공군이 세인트-폴에 왔을 때 그곳에는 월즐리 중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켈름스포드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고 예전의 패배를 설욕하였다. 이제 더 이상 지휘권을 유지할 수도, 그리할 이유도 없었고 지휘권을 월즐리 중장에게 넘긴다. 천신만고 끝에 지휘권을 인수받기는 하였지만 전쟁이 끝난 마당에 월즐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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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에서 승리한 영국군이 줄루왕국 수도인 울룬디를 불태우고 있다.



한편 7월 15일에 지휘권을 넘기고 사령관직에서 사임한 켈름스포드는 불과 이틀 후인 7월 17일에 영국으로 가는 배에 오른다. 본국 정부에서는 켈름스포드의 처리를 놓고 갑론을박하였다. 공과(功過)가 극명하게 엇갈렸기 때문이다. 정찰을 게을리하여 이산들와나에서 대패하고 1차 침공을 망친 것도 모자라 2차 침공을 준비하면서 본국 정부와 신임 사령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독단적인 행동을 하였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본국 정부와 케이프 식민정부의 의도대로 줄루군과 줄루왕국을 격파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은 인정되어야 했다. 결국 울룬디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공이 인정되어 바스 기사단 대십자장(Knight Grand Cross of Bath)을 받지만 이후 본국에서 이루어진 조사과정에서 혹독한 비판을 받고 결국 다시는 야전에서 지휘봉을 잡지 못한다.

한편 나탈에 남겨진 월즐리의 임무는 울룬디에서 도주한 줄루국왕 세츠와요를 잡는 것이었다. 월즐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침공군 병력을 넓게 전개하여 줄루왕국의 영토 어디엔가 숨어있는 세츠와요를 찾으려고 하였지만 속된 말로 꽁꽁 숨어버린 세츠와요는 좀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줄루전사들은 물론이고 오랜 전쟁에 지친 줄루왕국의 백성들도 그들의 왕을 넘겨주려 하지 않았다. 줄루전사들은 수적인 열세에도 아랑곳없이 영국군에 맞서 싸웠고 영국군은 울룬디에서 마지막 임피를 격파한 후에도 수없는 소규모 전투를 치러야 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줄루 전사들이 다시 목숨을 잃었다. 또한 국왕의 행방을 알 수 없어 조급해진 월즐리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였다. 보이는 크랄마다 샅샅이 뒤졌고 부족민들에게 국왕의 행방을 대라며 총포를 앞세워 위협했다. 그러나 이러한 위협에도 말을 하지 않자 월즐리는 자신이 허언(虛言)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크랄과 마을들을 불태웠고 이렇게 없어진 크랄과 마을이 수십개에 달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왕국이 불타고 백성들이 고통 받는 것을 보면서도 모습을 들어내지 않던 세츠와요는 결국 오지(奧地)인 응고메 삼림지대에 있던 한 크랄에서 발견되었고 월즐리가 거느린 병사들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영국군에게 사로잡힌 세츠와요는 먼저 포로로서 케이프타운으로 보내지고 이후 영국으로 이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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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츠와요는 영국군을 피해 도주하였으나 결국 응고메 지역의 외딴 마을에서 월즐리의 병사들에게 체포되고 포로로서 영국으로 이송된다.






또 다른 전쟁의 불씨



한편 켈름스포드와 함께 영국을 실질적으로 전쟁으로 내몰은 원흉인 케이프 총독 프레르경(Sir Henry Bartle Freres)은 자신을 승리에 일조한 영웅으로 자임하였다. 또한 새로이 ‘점령한’ 줄루왕국의 영토가 자신에게 주어지리라 내심 기대하였다. 그러나 본국 정부가 취한 조치는 프레르의 기대를 산산조각 내어버렸다. 군령권을 가지고 있는 월즐리에게 줄루족 영역에 대한 통치권까지 주어진 것이었다. 일단 줄루왕국을 지도에서 지워버린 영국으로서는 줄루족이 다시 뭉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월즐리에는 이를 위하여 줄루왕국의 영역을 13개의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에 친영(親英) 추장들을 ‘임명’하였다. 줄루왕국을 분할통치하려는 의도를 명확히 드러낸 것이다. 세츠와요는 3년동안 영국에서 보낸 후 분할된 영토를 통치하는 왕으로서 돌려보내지지만 힘을 잃은 왕을 반기는 추장들은 없었다. 1882년에 나탈로 돌아온 세츠와요는 다시 울룬디를 수도로 세우지만 라이벌로 등장한 추장 우지베부(UziBhebu)와 그를 지지하는 보어인 용병들의 공격을 받았고 이 전쟁에서 중상을 입고 은칸들라(Nkandla)로 철수한다. 자신의 땅에서 쫓겨난 것이다. 한때 줄루왕국을 호령하고 대영제국과 맞섰던 거대한 체격의 세츠와요는 몸과 마음 모두 병이 든 상태였다. 그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고 1884년 약 60세의 나이로 에쇼웨에서 세상을 떠난다. 세계제국에 맞섰던 국왕에게 어울리지 않는 죽음이었고 이로서 남부 아프리카에 세워지고 있었던 ‘검은 제국’은 그 마지막 흔적까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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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포로생활중의 세츠와요.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려 하였으나 반겨주는 이가 없었고 라이벌 추장과의 싸움 이후 건강이 급격히 약화되어 사망한다. 오른쪽 사진은 남아공 은칸들라(Nkandla)에 있는 세츠와요의 무덤 <ⓒianknightzulu.com>



비록 줄루왕국은 없어졌지만 전쟁의 불씨가 꺼진 것은 아니었다. 비록 영국과 줄루왕국간 전쟁의 소용돌이에 잠시 묻히기는 하였지만 영국인들을 적대시하고 있는 것은 줄루족을 비롯한 흑인들뿐만이 아니었다. 원래 케이프의 주인이었다가 내륙으로 쫓겨난 ‘백인부족’ 보어인들 역시 영국인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사실 줄루족이 크게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일시적으로 싸움을 멈추기는 하였지만 영국과 보어인들 간의 갈등의 골은 매우 깊었다. 줄루전쟁이 끝나자 보어인들의 불만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줄루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인들의 오만한 태도는 마치 기름이 가득한 들판에 횃불을 던져놓은 것과 같았다. 결국 줄루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부 아프리카는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5.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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