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1915년 갈리폴리 전투 [1] - 만용이 빚은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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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54회 작성일 16-02-0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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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대한 착각



1914년 7월 23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게 최후통첩을 보낸 이상 전쟁은 예정되어 있었다. 지금도 전쟁이 벌어질 경우 외교적으로 선전포고라는 요식 행위를 벌이지만 전쟁을 선포하는 측이 압도적인 전력을 갖고 있지 않다면 대개 기습 직전에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쟁을 벌이기로 한 이상 반드시 이겨야 하고 그렇기 위해서 무엇보다 군사적 이점이 큰 기습의 효과를 최대한 누려야 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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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집령에 의거 동원된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병사들이 자신만만하게 전선으로 향하고 있다. 당연히 최후통첩을 받은 세르비아도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20세기 초만 하여도 준비도 갖추지 않은 상대를 기습 공격하는 행위를 명예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5일 후인 7월 28일 전쟁이 개시되었을 때, 세르비아도 충분히 마음을 먹고 어느 정도 전쟁할 준비를 갖추고 있던 상태였다. 지금 기준으로 본다면 말도 안 되는 어이없는 체면치레였지만 지금으로부터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이처럼 나름대로 형식을 갖추어 전쟁을 치르러 하였다.

살육과 파괴가 필연적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이번 전쟁의 잔인함을 제대로 예견하지 못하였기에 벌어진 착각이었다. 특히 보불전쟁 이후 지난 40년 동안 유럽에서 강대국 간에 충돌이 없었기에 전쟁의 무서움을 시나브로 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오판은 두 나라 사이에서만 벌어져야 할 전쟁이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이 참전하는 거대한 블랙홀로 변하도록 만드는데 크게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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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불전쟁 당시인 1870년 메츠 전투에서 프로이센에게 항복하는 프랑스군. 이후 40년간 유럽에서 강대국 간의 전쟁은 없으면서 전쟁의 두려움을 망각하였다. <출처: Conrad Freyberg(1842~1915)>



치열한 제국주의 팽창 경쟁으로 말미암아 전쟁이전부터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좀 더 이성적으로 판단하였다면 판이 커져서 제1차 대전으로까지 증폭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아무리 삼국동맹이니 삼국협상이니 혹은 쌍방 간 비밀협약이니 하는 것 등으로 참전 의무를 부과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렇게 쉽게 전쟁에 뛰어든다는 것은 사실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전쟁을 쉽게 생각하였다는 증거다.




누구나 뛰어들고 싶었던 전쟁



직접 전쟁을 결정하는 권력자나 집권 세력뿐만 아니라 언론이나 교육계처럼 사회를 선도하는 계층은 물론 어쩌면 전쟁으로 인해 가장 어려움을 겪을 대상인 보통 사람들도 전쟁을 무서워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보니 전쟁을 선언했을 때 환호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그 동안 정치적, 사회적으로 대립이 극심하였던 독일, 프랑스, 러시아 같은 나라에서는 즉각 정쟁이 중단되고 전선으로 앞 다투어 달려 나가려 했을 정도였다.

전 유럽에서 예외 없이 나타난 이런 현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광기 이외의 단어는 떠올리지 못할 정도다. 유럽에서 30년 평화는 없다는 말처럼 역사가 쓰여 진 이래 유럽에서 전쟁은 일상이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있었던 대부분의 전쟁은 전선에서만 벌어졌고 싸움은 군인만 하는 것이기에 정작 전쟁의 무서움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처럼 매스컴이나 영상 자료가 발달되지 못하여 간접적으로 체험하기도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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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사당 앞에서 독일의 전쟁 선언을 듣고 환호하는 베를린 시민들. 이렇게 전쟁을 찬양하는 모습은 비단 독일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라 전 유럽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한마디로 미친 시대의 자화상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세르비아의 전쟁이 어떻게 세계 대전으로 비화하였는지 알려주는 당시 신문 삽화




제1차 대전의 원인을 살펴보면 전쟁이라는 수단을 통해 갈등을 해결 보려 하였을 정도로 이미 대립이 극심하였던 것은 사실이나 모로코 사건과 발칸 전쟁에서 보듯이 강대국 간의 직접 충돌을 자제하려는 모습은 당시에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전쟁의 길로 들어서자 직접적인 이해가 얽히지 않은 많은 나라들의 참전까지 뒤를 이었다. 한마디로 이렇게 열린 거대한 도박판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서부영화를 보면 술집에서 주인공이 싸움을 하면 아무런 관련도 없는 주변 사람들이 갑자기 패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흔하게 묘사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를 향해 포격을 시작하였을 당시의 유럽이 마치 그러하였다. 이렇게 싸움이 벌어지자 전쟁 터 주변에 있던 나라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참전을 결정하였다. 그러한 나라들 중에는 한 때 세계를 호령했던 오스만 제국(이하 오스만)도 있었다.




노쇠한 제국의 참전



앞에서 제1차 대전의 비이성적인 시작 모습을 언급하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보호하거나 쟁취할 이익이 없다면 결코 전쟁에 뛰어들지는 않는다. 어처구니없이 판이 커져 갔지만 그렇게 된 이유에는 이처럼 전쟁을 통해서 대내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더불어 이익을 챙기려 하였던 욕구가 컸던 것도 사실이다. 1914년 11월 1일, 오스만이 동맹국 가담을 선언하며 전쟁에 뛰어들어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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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11월 1일 성직자(Shaykh al-Islām)가 성전이라는 명목으로 제1차 대전에 참전하겠다고 선언하는 오스만



16세기 절정기 당시의 오스만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다스린 초강대국으로 군림하였지만 어느덧 19세기 들어 유럽 측으로부터 빈사상태인 환자라고 불리는 모욕을 받기에 이르렀을 만큼 국력이 쇠퇴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기독교를 신봉하는 유럽 국가들은 오스만의 안위를 위협하는 가장 위협적인 적대세력이었다. 엄밀히 말해 유럽과 오스만의 사이가 좋았던 적은 없었다.

특히 제국주의 시대 들어서 오스만은 자신들의 외곽인 중근동으로 세력을 넓히는데 혈안이었던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사이가 나빴다. 하지만 단지 이 때문에 오스만이 동맹국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고 크림전쟁에서 알 수 있듯이 경우에 따라서는 같은 편에 서서 싸우기도 하였다. 오히려 제1차 대전 참전 당시의 상황만 놓고 본다면 같은 편인 오스트리아-헝가리, 불가리아와 사이가 좋은 관계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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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말기인 1917년 10월 15일, 이스탄불을 방문한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를 환영하는 오스만의 술탄 메흐멧 5세



발칸 반도의 이해관계를 놓고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벌인 대립은 수 백 년에 이를 만큼 뿌리가 깊었고 불가리아는 불과 2년 전에 있었던 제1차 발칸 전쟁 당시에 오스만을 몰아붙인 발칸동맹의 당사자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이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불가리아와 동맹국을 결성하기로 한 것은 한마디로 그쪽 편에 붙어 싸우면 나중에 취할 수 있는 이익이 많을 것이라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어느 편에 붙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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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중근동으로 세력 확대를 노리던 독일은 베를린, 비잔티움(이스탄불), 바그다드를 연결하는 철도를 구상(이른바 3B 정책)하였을 정도로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에 신경을 많이 썼다.



제1차 대전이 개시되자 서유럽의 영국, 프랑스와 흑해를 거쳐 러시아를 연결하는 길목에 위치한 오스만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따라서 연합국 측에서도 오스만을 자기편으로 끌어 들이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많은 회유책과 더불어 군함을 파견하여 압박을 가하는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하였다. 전쟁 이전부터 외교적, 군사적으로 우호 관계를 다져 놓았던 독일도 당연히 영향력 확대에 힘을 썼다.

이런 국제 상황에 발맞추어 오스만 내부에서도 중립을 지킬 것인지 전쟁을 참전할 것인지, 만일 전쟁에 뛰어든다면 어느 편에 붙어서 싸울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주로 관망하자는 이들이 대부분이어서 1914년 8월 2일 오스만과 독일이 연합 협정을 맺은 후 동원령이 선포되고 독일 군사 고문단이 오스만군을 실질적으로 지휘 하였음에도 오스만 정부는 중립을 선언하였을 정도였다.

반면 오스만 역사 상 처음으로 유럽 각국 모두가 같은 편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바로 이때 적극 참전하여 실지 회복처럼 실리를 취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그렇다면 누구 편에 붙어 싸움을 벌이는가가 문제였는데, 사실 오스만에게 친구라고 부를 만한 국가는 없었다. 물론 국제 관계에서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는 말은 낯선 것이 아니지만 기독교 문명권에서 이슬람의 맹주인 오스만 은 여전히 경원 시 되던 상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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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승리한 후 400여 년 간 발칸반도를 지배한 오스만 제국은 유럽 기독교 세계의 가장 큰 위협으로 존재하면서 경원 시 되었다.



당연히 이를 잘 아는 오스만도 전쟁에 뛰어든다면 가장 위협적인 상대를 제거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크림 전쟁 이후 카프카스를 거쳐 이라크로 남하를 시도하고 한편으로 발칸반도로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러시아가 오스만에게는 당장의 눈엣가시였다. 러시아와 싸운다면 영국, 프랑스와도 적이 되어야 했고 반면 사이가 나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같은 편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더 큰 이익을 취하려는데 이는 문제가 아니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5.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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