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1915년 갈리폴리 전투 [2] - 만용이 빚은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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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79회 작성일 16-02-07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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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어진 전쟁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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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인근 이스티녜 만에 정박 중인 독일의 순양전함 괴벤. 영국 함대의 추격으로부터 피난처를 제공했을 만큼 오스만 제국과 독일의 관계는 돈독하였다.



오스만이 동맹국에 전격 가담할 수 있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독일의 역할이 컸다. 독일은 일단 지리적으로 멀었고 또한 1871년에야 겨우 통일을 이루었기에 오스만과 직접적으로 이해타산이 부딪힐 일이 거의 없었다. 뒤늦게 제국주의 팽창 대열에 동참한 독일은 전략적으로 오스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오스만 또한 그 동안 툭하면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던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비해 독일과의 교류가 상대적으로 편했다.

양측의 꾸준한 구애에도 불구하고 아직 참전을 결정하지 않았지만 이미 독일은 오스만군 지휘에 깊숙이 개입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더불어 8월 10일 지중해에서 작전을 벌이던 독일 해군의 괴벤(SMS Goeben)과 브레슬라우(SMS Breslau)가 영국 함대의 추격을 피해 다르다넬스(Dardanelles) 해협으로 들어온 후 독일 해군이 실질적으로 오스만 해군을 통솔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오스만은 대외적으로 중립임을 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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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참전을 이끈 엔베르 파샤



하지만 연합군과 교전만 벌이지 않았다 뿐이지 이런 관계라면 오스만의 시계추는 이미 동맹국 측으로 기운 상황이었다. 마침내 1914년 11월 1일 전쟁 참가에 적극적이었던 권력 실세이자 국방장관인 엔베르 파샤(Enver Paşa)의 주도로 오스만은 지하드(성전)라는 명목으로 연합군에게 전쟁을 선언하였다. 이렇게 오스만의 입장이 정확히 파악되자 러시아를 필두로 영국과 프랑스가 곧바로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제 제1차 대전은 중동으로까지 순식간 확대되었다. 오스만과 러시아가 접한 카프카스에 새로운 전선이 생겨났고 중동 일대에서 식민지 경영에 힘쓰던 영국, 프랑스와 오래 전부터 이곳을 지배하고 있던 오스만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어쩌면 그 동안 신중하였던 오스만이 동맹국에 가담하였던 이유 중 하나가 이때까지의 전황만 본다면 동맹국에 유리한 형국으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만만해서 나온 오판



사실 1914년 말까지만 해도 이 전쟁이 앞으로 4년간 계속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따라서 먼 앞날의 일보다 당장의 전황이 오스만에게는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오스만은 이번 기회에 러시아를 카프카스에서, 영국과 프랑스를 중동에서 완전히 몰아내면 17세기 이후 서서히 잃어가던 제국의 위엄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하였다.

오스만은 동맹국 측에 가담하면서 제일 먼저 자기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봉쇄하였다. 아나톨리아(Anatolia)와 갈리폴리(Gallipoli)반도 사이에 놓여 있는 다르다넬스 해협은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병목지점으로 이곳이 막히자 러시아와 영국을 바다로 연결하여 주던 주요 통로 중 하나가 순식간 차단되었다. 이제 서부전선의 영국, 프랑스와 동부전선의 러시아를 연계하는 통로는 북해만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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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장관 당시의 처칠. 그는 영국의 해군력을 과신하여 무모한 작전을 주도하였고 그 결과 불명예스럽게 퇴진하여야 했다.





다르다넬스 해협은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유일 통로다. 그 중 갈리폴리 반도는 이곳을 감제할 수 있는 전략 거점이다. <출처 (cc) Interiot at wikimedia.org>




조급해진 영국은 길목을 막고 있던 오스만을 분쇄할 계획을 입안하였다. 내각에서 일사천리로 승인된 작전의 골자는 영불연합군이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해 오스만 제국의 심장인 이스탄불로 직접 진격하는 것으로 입안자는 해군 장관 처칠(Winston Churchill)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쇠하였어도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쳐 육백여 년을 호령하던 오스만의 잠재력을 처칠은 너무 무시하였다. 그리고 그 대가는 엄청났다.

피로 얼룩진 갈리폴리 전투는 이렇게 오판에서 시작되었다. 사실, 제1차 대전 당시의 여타 전선과 비교하여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는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많다. 특히 서부전선의 지옥과 같았던 여러 전투에 비교하여 그런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서부전선에서의 피해가 경악할 수준이어서 그런 것이지 중근동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도 결코 간과하고 넘어갈 수 없을 만큼 치열하였다.




비극의 서막



영국이 작전을 성공하려면 다르다넬스 해협 양편에 전개된 오스만의 해안포대와 요새들을 함포사격으로 사전에 무력화시킴과 동시에 병력이 상륙하여 점령하여야 했다. 당연히 거점을 장악할 육군이 투입이 수행되어야 하는 작전이었다. 그런데 처칠은 육군의 참여를 처음부터 무시하였다. 그는 모두의 반대를 물리치고 세계 최강인 영국 해군의 화력만으로도 충분히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는 만용을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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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오스만군을 지휘할 당시의 오토 폰 잔더스(중)와 그의 참모들. 그는 실질적으로 갈리폴리 전투의 승리를 이끈 주역이었다.



1915년 2월 19일 영불연합함대의 전함들이 대대적인 포격을 개시하면서 역사적 전투는 막이 올랐다. 연합군은 오스만 앞바다를 앞마당처럼 휘젓고 다닐 자신은 있었지만 육지의 목표를 점령하여야 최종적으로 승리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처칠은 마치 식민지 개척 당시에 함포를 몇 방만 쏘아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여러 곳의 무릎 꿇게 만들었던 과거만 생각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오스만도 적함을 향해 화력을 퍼부을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완료한 상태였다. 지원 나온 독일 육군의 잔더스(Otto von Sanders)의 지휘 하에 저항에 나선 오스만은 연합군 함대가 해안포 사정권 내로 진입하자 반격을 개시하였다. 뜻밖의 반격에 연합국 함대는 당황하였지만 포탄을 주고받으면서도 해안포 사정권 밖으로 물러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너무나 잘못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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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다넬스 해협 부근에 집결한 연합군 함대. 영국 해군이 주축으로 구성된 함대는 육군의 상륙을 염두에 두지 않고 단독으로 갈리폴리 공격에 나섰다.



영국은 육지의 해안포대와 마치 함대함 포격전 같은 방식으로 대결을 벌이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보였다. 해안포대는 파괴되어도 복구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전함은 침몰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었다. 서로 일대일로 포대를 교환하는 피해를 입었더라도 그에 따른 결과는 엄청났다. 일주일간의 포격전 끝에 양측의 손실은 커져갔지만 연합군 함대의 피해는 인내를 초월하는 수준까지 다다르게 되어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무모했던 만용



이후 전력을 추슬러 3월 18일 영불연합함대는 제2차 공세에 나섰으나 작전에 투입 된 16척의 전투함 중에서 5척이 격침 또는 대파되는 참담한 실패를 겪었다. 이에 영국 해군 총사령관인 피셔(John Fisher)가 처칠의 무모한 도전에 대한 항의하는 표시로 스스로 사임하였고 만용을 부렸던 처칠도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하지만 이것도 앞으로 있을 학살극의 그저 그런 서막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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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장갑 순양함 룬(SMS Roon)에 장착되었던 210mm 구경의 거포가 오스만의 해안포로 이용되었다.



그런데 사실 그 당시가 오스만에게 가장 커다란 위기의 순간이었다. 연합군 함대의 피해도 컸지만 이들로부터 엄청난 포격을 당한 갈리폴리 고지의 오스만군도 많은 피해를 입어서 만일 이때 연합군이 상륙하였다면 방어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처칠의 만용으로 인하여 연합군은 해군만의 단독작전으로 이번 침공전을 시도하였기에 막상 이곳에 상륙시켜 점령할 병력이 없었다.

결국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초전에 참담한 피해를 맞본 연합군은 3월 12일에서야 영국 중동원정군 사령관 해밀턴(Ian Hamilton)에게 해군을 도와 갈리폴리에 전개된 오스만군을 제압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육해군의 합동작전은 당연히 옳은 선택이었으나 너무 늦었다. 주변에 당장 동원할 병력이 없었고 시간이 갈수록 호기는 사라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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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3월 18일 격침 된 영국 전함 이리지스터블(HMS_Irresistible). 함대함 전투처럼 오스만 제국군 해안포대와 벌인 포격전의 결과는 영국 해군에게 더 치명적이었다.



이렇게 6주의 시차를 두고 이루어진 연합군의 다음 공격은 탄약과 병력 부족으로 허덕이던 오스만군이 원기를 회복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초전에 갈리폴리를 방어한 오스만은 즉시 10만의 병력과 장비를 충원 받아 요새를 재건하고 방어선을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강화하는데 성공하였다.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침략자를 격퇴하겠다는 오스만의 의지는 실로 경이로웠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5.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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