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1915년 갈리폴리 전투 [3] - 만용이 빚은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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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78회 작성일 16-02-07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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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온 병사들



영국은 전략을 원점에서 재검토 하여야 했으나 임기응변적인 처방으로 즉시 공격을 재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영국이 상륙군으로 동원한 주력 부대는 저 멀리 오세아니아의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서 파견한 ANZAC(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군이었다. 이들은 이집트 카이로에 집결하여 반복적인 상륙훈련을 받았는데 아직까지 전선에 투입된 적이 없어서 실전감각이 부족하였고 전쟁의 무서움도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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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폴리 해안 절벽에 설치된 ANZAC 소속의 뉴질랜드군 야전 캠프. 이들은 자신만만하게 전투에 동원되었지만 가장 커다란 비극을 당한 주인공이 되었다.



준비를 마친 연합군은 해밀턴 장군의 지휘 하에 드디어 1915년 4월 25일, 상륙을 개시하기로 하는데 계획은 의외로 단순하였다. 해안에 상륙한 전초부대가 해안선에 교두보를 설치하면 후속하여 주력이 상륙하고 이후 해안가에서 전열을 정비하여 언덕 위에 있는 오스만군을 향해 공격을 개시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작전이라는 것이 굳이 복잡할 필요는 없지만 영국의 계획은 너무 어설펐다.

그들은 언덕 위의 진지를 쉽게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자신하고 있었기에 상륙한 후 어떤 방법으로 그들보다 위치의 우위를 누리고 있는 오스만을 제압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교두보 확보가 가장 어려운 난관이라 판단하였다. 해안가에 확실한 거점을 확보하면 그 이후는 일사천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런 안이함은 이후 해안가를 피로 물들이는 비극의 단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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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전의 현장 중 하나인 스핑크스 고지. 해안가에 상륙한 연합군은 오스만군이 정상에 진지를 구축하고 내려다보는 이런 가파른 고지를 기어 올라가 점령하여야 했다. 하지만 돌격부대를 엄호할 기갑장비나 항공 전력은 전무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정작 오스만은 적의 상륙을 해안가에서 막을 생각이 없었다. 가파른 고지 위에 자리 잡은 오스만군은 연합군이 숨이 턱이 찰 정도로 힘들게 기어서 고지 위로 다가오면 하나하나 차근차근 처단해 나갈 생각이었다. 지금처럼 항공기와 기갑부대를 이용한 돌파는 꿈에서나 가능하였기에 연합군이 구사할 수 있는 작전은 바다 위에 있는 해군의 포격으로 탄막을 형성하여 보호를 받은 상태로 상륙군이 작전을 펼쳐야 했다.




잘못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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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19사단을 지휘하던 무스파타 케말(Mustafa Kemal). 불굴의 신념으로 전투를 이끌었던 그는 이후 터키 공화국의 국부가 된다.



1915년 4월 25일 06시, 갈리폴리 반도 인근에 집결한 연합군 해군의 대대적인 포격이 개시되면서 오스만 요새주변은 곧 엄청난 화염에 휩싸였다. 아무리 참호를 깊게 파고 준비하고 있다 하여도 오스만군도 피해를 완벽히 막을 수는 없었다. 지난 2월과 3월에 연이어 있었던 포격전에서 파괴되었던 진지들이 응급 복구한 상태였지만 또다시 이어지는 불벼락을 완벽히 막아내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이때 연합군은 탄막을 방패 삼아 능선의 부근까지 일사분란 하게 진격을 하여야 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아주 사소한 실수가 엄청난 비극을 만들었다. 포격과 연이어 이어지는 보병의 돌격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곧바로 진행되어야 하는 작전이다. 포격의 효과가 사라질 만큼 충분한 시간이 경과한 이후에 아군이 돌격한다면 작전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즉 적절한 시차가 작전의 성공을 담보하는 기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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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군도 많은 타격을 입었지만 연합군의 무능으로 말미암아 신속히 복구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그러려면 작전에 투입된 제 부대간의 철저한 준비와 통신망 확보가 필요하고 항상 시간이 엄수되어야 한다. 어처구니없는 사실이지만 연합군은 작전 시작 전에 시계를 맞춰보는 기본도 지키지 않았다. 바다 위에서 화력을 지원할 해군과 돌격할 육군 지휘관의 시계가 몇 분의 차이를 보였다는 자체가 승리를 바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결국 포격 직후에 들이닥칠 것 같았던 연합군이 보이지 않자 오스만 진지는 신속히 보강되었다.

그때서야 진지를 향하여 기어오르는 연합군 모습이 포착되었고 이들은 준비를 마친 오스만군의 환영 인사를 받았다. 일선 장교들은 작전이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하였으나 후방에 있던 지휘부는 돌격명령만 남발하였고 결국 참호 밖으로 뛰어나간 수많은 병사들은 외마디도 지르지 못하고 하염없이 사라져 갔다. 이러한 1915년 4월 25일 새벽의 모습은 장장 8개월 간 계속될 갈리폴리에서 있었던 엄청난 피바다의 작은 시작일 뿐이었다.




결과



엄밀히 말해 이런 피바다가 계속하여 연출된 책임은 연합군의 계속된 만용 때문이었다. 연합군은 비록 해안에 상륙은 하였지만 단지 그것이 끝이었다. 연합군은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계속하여 제자리에만 머물러야만 했다. 반면 오스만군은 영리하게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그들은 엄청난 포격에도 불구하고 참호에 웅크리고 밖으로 나오지 않은 상태로 꼭꼭 숨어있다가 고지를 향해 기진맥진 기어 올라오는 연합군을 향하여 기관총 세례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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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를 향해 돌격하는 ANZAC 병사들. 이런 멋진 모습과 달리 그들은 오스만 제국군이 난사하는 기관총 세례에 생을 마감하였다.



사실 오스만군도 연합군 못지않은 인명피해를 보고 있었지만 인내심이 더 강하였다. 그들은 갈리폴리 해안을 연합군의 블랙홀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결국 더 이상 피해를 감당할 수 없던 영국은 패배를 인정하여야 했다. 하지만 무려 8개월 간 계속된 전투가 같은 모양으로 일관하였다는 것은 어쩌면 오스만군이 잘 싸웠다기보다는 연합군이 무능하였다는 표현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1916년 1월, 굴욕을 감수하고 연합군이 병력을 철수시킴으로 갈리폴리를 적신 피가 멈추었다. 결과는 너무 참혹하여 작전에 투입 된 총 40만 연합군중 무려 25만의 사상자를 내었는데, 이는 영국군 전투사 최대의 치욕이었다. 만일 이런 피해를 대가로 승리를 거두었다면 어느 정도 위안도 거두었겠지만 연합군은 오스만 정복은커녕 갈리폴리 해안 일대에서만 피를 흘리고 맴돌다가 사라져가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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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을 통해 후송 대기 중인 연합군 부상병들. 어쩌면 살아서 갈리폴리를 나갈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그들은 행운아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영국은 세계 최강의 해군을 보유하고 있다는 만용으로 육군과 공조도 없이 너무나 쉽게 전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쓰디쓴 실패를 맛보고 나서야 겨우 육군의 도움을 받기로 하였지만 결코 예전의 잘못을 반성하거나 개선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작전 시간이나 통신처럼 가장 기초적인 협력도 하지 않고 그들은 따로따로 작전에 돌입하였다. 그리고 무모한 돌격만 감행하여 갈리폴리 해안선을 피바다로 만드는데 주력하였을 뿐이었다.




의의



반면 승리를 거둔 오스만의 출혈도 대단하여 연합국과 비슷한 25만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갈리폴리 지역은 초토화되었을 만큼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하지만 오스만은 갈리폴리를 방어하는데 있어서 최고 지휘관부터 말단의 병사까지 일치단결하였다. 그들은 무서운 투혼을 보여 주었고 이것은 연합군이 적을 얕잡아보고 만용을 부려 대책 없이 전투를 개시하였던 것과는 진정으로 대비되는 진정한 용기의 표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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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폴리 전투 종결 직후의 오스만군. 사실 이들도 연합군과 비슷한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불굴의 용기를 발휘하여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위정자의 무모한 판단으로 전쟁에 대책 없이 뛰어든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지 똑똑히 알게 되었다. 이후 터키는 이때의 교훈을 결코 잊지 않아 제2차 대전 당시에 추축국과 연합국의 계속적인 구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쟁말기까지 참을성을 가지고 전쟁에 개입하는 행위를 최대한 자제하였다. 또 다시 남의 전쟁에 무턱대고 뛰어들 경우 겪을 수도 있는 고통을 한시도 잊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양국의 병사들은 최선을 다하였지만 너무나 달랐던 방법과 내용 그리고 그 참혹한 결과는 역사의 교훈이 되었다. 분명 양국의 지휘관과 병사들은 용기 있는 행동을 겉으로는 보여주었지만, 막상 역사에 하나는 어이없는 만용으로 또 다른 하나는 진정한 용기로 기록되었다. 만용과 용기는 이처럼 비슷하면서도 그로 인한 결과는 엄청나게 차이가 많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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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폴리 격전 현장에 세워진 연합군측 추모비 <출처 (cc) Harvey Barrison>



전투가 끝난 지 거의 60여 년이 지난 1973년, 터키는 당시 적이었던 연합군 참전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더 이상 전쟁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전투가 펼쳐진 갈리폴리 지역을 추모공원으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이곳은 당시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한 호주와 뉴질랜드 인들의 후손들이 그들의 만용을 반성하기 위하여 현재도 많이 찾는 굴욕의 성지가 되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5.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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