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1941년 오데사 전투 [1] - 영웅적이었던 소련의 방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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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54회 작성일 16-02-07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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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진정으로 탐내던 보물



1940년 9월 26일, 우크라이나 중앙에 몰려 있던 70여 만의 소련군이 붕괴되며 거대했던 키예프전투(Battle of Kiev)가 막을 내렸지만 그렇다고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소련이 항복을 하지 않은 이상 아직도 갈 길은 멀었다. 이제 막 드네프르(Dnepr) 강을 건너간 독일 남부집단군(Heeresgruppe Süd)은 우크라이나의 동쪽 끝인 돈(Don) 강까지 밀고 들어가야 했다. 어쩌면 이제부터 진정한 싸움이 시작된 것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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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전투에서 포로가 된 소련군. 무려 70여 만 소련군이 소탕되었지만 독일이 진정으로 차지하고자 원했던 곳은 정작 따로 있었다. <출처: (cc) Bundesarchiv>



키예프는 일대의 물산이 집결되는 교통의 중심지이기는 했지만, 그 보다 우크라이나의 수도라는 상징성 때문에 혈전의 무대가 된 측면이 컸다. 만일 스탈린이 쓸데없는 자존심 대결을 펼치지 않았다면 굳이 소련도 엄청난 희생을 무릅쓰고 키예프를 사수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오히려 키예프 남쪽의 흑해(Black Sea)에서 카스피 해(Caspian Sea)에 이르는 남부 우크라이나와 코카서스(Caucasus)가 진짜 중요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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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무진한 석탄과 철광이 매장 된 도네츠크(돈바스)를 소련의 심장으로 소개하는 1921년 제작 된 소련의 선전 포스터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한 흑토(黑土) 지대인 이곳은 소련 인민이 소비하는 곡물의 35퍼센트가 생산되는 유럽에서 가장 커다란 곡창이다. 더불어 돈 강 일대의 도네츠크(Donetsk), 이른바 돈바스(Donbass)에는 무궁무진한 석탄과 철광이 매장되어 있으며, 카스피 해 연안은 너무나도 귀중한 유전이 산재하고 있다. 한마디로 소련의 보물 창고라 할 수 있는 곳이었고 당연히 소련도 이 일대의 중요성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모스크바를 중시했던 군부와 달리 히틀러는 처음부터 이곳에 눈독을 들였다. 특히 편견에 사로잡힌 그에게 열등한 슬라브 인들이, 그것도 증오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이처럼 엄청난 보물을 차지하고 있다는 현실 자체가 불쾌하였다. 그래서 흔히 독소전쟁의 기원에 대해 언급하는 수많은 자료에서 빠짐없이 언급되는 레벤스라움(Lebensraum), 즉 게르만족 생활권 확대의 가장 핵심이 바로 이곳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반드시 싸움이 벌어질 장소



키예프 전투가 끝난 후, 독일 군부는 이 정도면 더 이상 소련의 응전이 없을 것이라 희망하였고 또한 간절히 원하였지만, 전쟁의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소련이 저항을 포기하였다는 증거는 남북으로 2,000여 km가 넘는 동부전선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남부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Gerd von Rundstedt)는 모두가 키예프 전투의 대승에 들 떠 있을 때 앞으로의 작전을 놓고 고민이 많았다.

거대한 우크라이나를 구석구석 빗자루로 쓸고 다니듯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중요한 곳은 반드시 점령하여야 했다. 하지만 줄이고 줄여도 점령하여야 할 곳이 너무 많았다. 우선 흑해를 장악할 수 있는 크림 반도(Crimea), 많은 군수 업체가 산재해 있는 하르코프(Kharkov), 소련 자원의 심장 도네츠크, 돈 강과 아조프 해(Sea of Azov)를 동시에 감제할 수 있는 남부 러시아의 초입 로스토프(Rostov) 등등이 그러하였다.

사실 이들에 대한 공략은 키예프 전투 때문에 가려져 있었다 뿐이지 이미 한창 진행 중이었다. 히틀러가 모스크바 공략에 나선 독일 중부집단군(Heeresgruppe Mitte)의 선봉대인 제2기갑집단을 남쪽으로 돌려서 키예프 공략에 투입하였던 이유도 남부집단군 각 예하 부대들이 한창 공략 중이던 다른 목표들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히틀러는 키예프 못지않게 우크라이나의 다른 곳도 하루 빨리 확보하고 싶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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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데사는 지금도 흑해를 통해 세계와 연결되는 우크라이나의 중요한 관문이다. <출처: (cc) Aktron at wikimedia.org>



물론 점령하는 것과 그곳에서 이익을 수탈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이곳을 독일이 차지하더라도 전쟁 중에 농사를 짓거나 자원을 캐내어 이용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소련도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든다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끄는데 도움이 될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당연히 동부전선의 남부는 처음부터 수많은 격전들이 벌어질 운명이었다. 이미 한창 혈전이 진행 중이던 오데사(Odessa)도 그런 현장 중 하나였다.




복수에 나선 루마니아



독일은 바바로사 계획(Operation Barbarossa)에 무려 350만의 엄청난 침공군을 동원하였음에도 만성적인 병력 부족에 시달렸을 만큼 고민이 많았다. 특히 동부전선의 반 정도가 될 정도로 넓은 섹터를 담당하는 남부집단군의 상황은 더욱 나빴다. 지형적인 여건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커다란 관할 지역에서 원활히 작전을 펼치려면 병력 부족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했던 남부집단군에게 루마니아는 천군만마 같은 존재였다.

원래 루마니아는 중립을 지키던 나라였지만 1940년 7월 소련에게 베사라비아(Bessarabia)와 북부코비나(Northern Bukovina)를 강제로 빼앗긴 이후 독일과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그 해 11월 23일 추축국에 전격 가담하였다. 사실 추축국에 가담하였다고 해도 참전 의무까지 있었던 아니었지만 루마니아는 70여 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독일과 함께 소련을 침공하였을 만큼 적극적이었다. 실지(失地) 회복이라는 명분과 동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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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쟁 발발 직전인 1941년 6월 10일 베를린을 방문하여 히틀러와 회담하고 나오는 안토네스쿠. 그는 루마니아를 제2차 대전의 주요 참전국으로 만든 당사자였다.





개전 초기 베사라비야 일대를 회복하면서 포로가 된 소련군을 감시하는 루마니아군




그런 의도대로 루마니아는 1941년 7월 초 잃어버린 국토를 회복하였다. 바로 이때 히틀러가 루마니아의 실권자인 안토네스쿠(Ion Antonescu)에게 한 가지 구미 당기는 제안을 하였다. 독일군을 도와 소련 영토로 함께 진격한다면 남부그(Southern Bug) 강까지의 영토를 루마니아가 실효 지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당근이었다. 7월 31일, 고심 끝에 안토네스쿠는 히틀러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루마니아군은 공격을 개시하였다.

덕분에 제1기갑집단, 제6, 17군이 키예프 포위에 가담하느라 단독으로 남부 우크라이나로 진격할 제11군의 부담이 컸던 독일 남부집단군은 상황이 호전되었다. 비록 보유한 대부분의 장비가 구식이어서 속도는 느렸지만 루마니아 제4군은 묵묵히 진격을 계속하였고 8월 2일, 드네스트르(Dniester) 강 하구에 도착하였다. 이곳 너머에는 서남부 우크라이나의 요충지이자 흑해 연안의 주요 항구인 오데사가 놓여 있었다.




혈전의 장소



현재도 여러 나라의 국경인 흑해를 장악하려면 반드시 차지하여야 할 여러 요지들이 있는데, 오데사도 그 중 하나다. 그래서 오데사는 오래 전부터 툭하면 전쟁의 무대가 되고는 했다. 흑해가 내해(內海)고 이곳에 투입된 양측 해군력도 그다지 강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해군이 자유롭게 활동하며 배후에서 지원을 하는 것과 오로지 육지에서만 작전을 펼치는 것의 차이는 컸다. 당연히 독일은 이곳을 차지하려 하였다.

반면 우만(Uman)에서 20여 만의 소련군이 궤멸되기 일보 직전이었고 키예프 일대도 위기가 고조되고 있던 중이었던 소련은 오데사를 지원할 여력이 부족했다. 루마니아 제4군은 약 16만이었던 반면, 이곳을 지켜야 할 소련군은 제9군과 해안경비군으로 구성된 약 3만5천이었다. 당연히 독일 남부집단군 사령부는 루마니아 제4군 단독으로 손쉽게 오데사 점령이 가능할 것으로 예측하였다.

하지만 오데사의 소련군들은 전의를 상실하면 앞 다투어 항복하기 급급했던 지금까지의 소련군과 전혀 달랐다. 이들은 외곽에서 도시로 향하는 전면에 참호를 깊게 파고 대전차 무기로 구성한 두터운 3중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기갑 장비가 부족하자 징발한 STZ-5 농업용 트랙터에 철판과 무장을 덧붙여 급조한 총 68대의 NI 전차를 만들어 전선에 투입하였을 만큼 전투 의지도 충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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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데사 전투 당시 전선으로 이동 중인 루마니아 제4군





트랙터를 급조하여 제작한 소련의 NI 전차. 이처럼 소련은 최선을 다하여 오데사를 방어하였다.




이처럼 소수의 소련군이 용기를 잃지 않고 방어전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추축국의 해군력으로 오데사의 해안을 차단할 능력이 없어 오로지 전면으로 돌파하는 것 외에 다른 공격 방법을 쓸 수 없다는 점도 한 몫 하였다. 한마디로 압도적 병력으로도 포위전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구조였다. 소련의 해군력이 강하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수준이어서 방어전 내내 든든한 지원을 하여 주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5.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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