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1941년 오데사 전투 [2] - 영웅적이었던 소련의 방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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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58회 작성일 16-02-07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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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을 벗어난 과정



공격 준비를 완료한 루마니아 제4군은 8월 3일 마침내 드네스트르 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하였다. 바다를 제외한 오데사 외곽 전체를 포위한 체 서서히 앞으로 나갔고, 사실 이것 밖에 사용할 수 있는 다른 작전도 없었다. 방어선을 구축하여 놓았어도 부족한 소련군의 전력으로 모든 곳을 철통 같이 틀어막을 수 없었기에 초반에는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비록 속도는 느렸지만 루마니아군은 빈틈을 통해 방어선을 하나하나 돌파하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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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데사가 한쪽이 바다이고 추축국이 제해권을 잡은 상태도 아니다 보니 루마니아 제4군은 포위망을 압축하여 들어가는 방법 외에 다른 작전을 구사하기 어려웠다.



8월 9일에 이르러 루마니아군은 오데사 전방 60km 지점까지 포위망을 압축하여 들어갔다. 하지만 갈수록 진격 속도가 급속히 줄어들었고 반대로 희생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루마니아군이 앞으로 나길수록 전선이 단축되면서 소련의 방어선은 더욱 단단해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에 아군이 공간의 대부분을 내준 대신 방어선이 촘촘히 연결되면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해 내었던 낙동강 방어전과 비슷한 형국이었다.

8월 13일, 안토네스쿠가 작전을 중지시켰을 만큼 루마니아군의 피해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전력을 정비하여 나흘 후 다시 공세를 재개하였지만 상황이 호전되지는 않았고 8월 말이 되었을 때 루마니아 제4군은 한 개 군단 정도 병력에 해당되는 3만여 명이 전사상 당하는 커다란 출혈을 입었다. 이는 소련군의 2배 이상 되는 커다란 손실이었다. 단지 전선의 상황은 우세하지만 한마디로 수지가 맞지 않는 장사였다.

9월이 되어도 상황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오데사 도심에서 20km 지점까지 전진하였지만 더 이상 앞으로 나가기 두려웠을 정도였다. 소련은 당시 키예프 전투 때문에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흑해 함대를 통해 고립된 오데사에 지속적으로 병력과 보급품을 공급하고 함포 사격을 통해 화력도 지원하여 주었다. 덕분에 전력이 열세였음에도 소련군은 용기를 잃지 않고 극렬히 저항을 계속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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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데사 전투 당시 소련군 포병의 모습. 그들은 지금까지 독일이 경험한 나약한 소련군이 아니었다.






막을 내린 전투



루마니아 제4군 사령관 키우페르카(Nicolae Ciupercă)는 안토네스쿠에게 부대를 재편하여 전력을 한 곳으로 집중시켜 전선의 일각이라도 돌파해보겠다고 보고하였다. 충분히 타당한 계획이었지만 소련의 역공을 우려한 안토네스쿠는 현재 상태로 계속 압박하라고 지시하고 대신 독일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키예프 전투와 크림 반도 진격으로 정신이 없던 독일 남부집단군도 당장 이들을 지원할 여력이 부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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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데사 전선을 방문하여 상황을 보고받는 안토네스쿠. 그는 예상외의 손실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9월 4일, 1개 사단 규모의 독일 증원군이 도착하였지만 이들의 합류만으로 전선의 상황이 바뀌기는 힘들었다. 오히려 9월 14일에 이르러 탄약이 고갈되며 공세를 중단하여야 했을 정도였고 반면 소련군은 계속적으로 충원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9월 16일, 독일군이 키예프 동쪽을 차단하며 거대한 포위망을 완성하자 상황은 급변하였다. 전력의 일부를 빼내어 오데사 공략에 전용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반면 키예프의 몰락이 확실시 된 이상 소련이 오데사를 사수하여야 할 의미가 사라졌다. 사실 소련에게 그 동안 오데사는 크림 반도와 키예프에 가해지는 독일의 압력을 감소시키기 위한 미끼와 같았다. 독일 공군의 위협을 무릅쓰고 해상을 통한 지원을 계속하며 오데사의 생명을 연장시켰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STAVKA(소련군 최고 사령부)는 오데사를 포기하겠다고 결정하였고 스탈린도 이에 동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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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철수 후인 1941년 10월 16일 도심으로 진입하는 루마니아 제4군



10월 14~15일 사이, 심야에 대대적인 해상 철수가 개시되었다. 흑해 함대는 가용할 수 있는 모든 군함 및 민간 선박을 총 동원하여 35만에 이르는 병사와 민간인을 크림 반도 남단의 세바스토폴(Sevastopol)로 옮겼다. 엄밀히 말하면 그 동안 뛰어난 방어전을 수행했던 정예 병력을 또 하나의 흑해 연안 요충지인 세바스토폴 사수에 투입한 것과 같았다. 그리고 10월 16일 루마니아 군이 시내에 진입하면서 마침내 혈전은 막을 내렸다.




결과



두 달이 넘게 벌어진 오데사 전투(Siege of Odessa)는 루마니아 제4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지만 피해는 훨씬 컸다. 최대 35만의 병력을 투입하였던 추축국은 17,000여 전사자를 포함하여 92,000여명의 인명 피해를 보았던 반면 최대 12만에 이르렀던 소련군은 42,000여명의 손실을 입었다. 일부 자료에는 소련의 피해가 더 컸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소련군이 대단히 선전하였다는 점에서는 별다른 이견(異見)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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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독소전쟁 당시에 소련군이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수행하였던 오데사를 영웅 도시로 선정하고 발행한 기념우표



일방적으로 독일에게 몰려다니던 독소전쟁 초기에 이처럼 소련군이 적은 전력으로 압도적인 적을 곤경에 빠뜨린 예는 브레스트(Brest) 요새 전투 외에는 없다고 보아도 될 정도다. 상대가 전력이 뒤진 루마니아여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듬해 독일 제11군이 세바스토폴 공략 당시에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루마니아가 못한 것이 아니라 소련군이 잘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사실 1940년에 있었던 됭케르크(Dunkirk) 철수나 1942년의 스탈린그라드(Stalingrad) 전투처럼 점령 목표가 바다나 거대한 강에 접해있을 경우 포위 섬멸전을 펼치기가 곤란하다. 소련은 그러한 이점을 최대한 살려 적의 공격을 순차적으로 거부시키며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수행하였다. 그래서 1965년 5월 8일, 소련 당국이 정한 최초의 6개 영웅 도시 중에 스탈린그라드 등과 더불어 오데사가 포함된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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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군의 감시 하에 소개되는 오데사 거주 유태인들. 이들 대부분은 잔인하게 학살되었다.



하지만 루마니아가 너무 많은 피해를 입고 힘겹게 점령해서인지 모르지만 오데사는 이후 잔혹한 전쟁 범죄의 현장이 되었다. 점령 후인 10월 22일 소련군이 후퇴 직전 은밀히 매설한 폭탄에 70여 명의 루마니아군 장성이 폭사하자 시민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보복 학살극이 벌어졌다. 특히 유태인과 집시는 우선 격멸 대상으로 분류되어 그 해 12월 말까지 약 10만 명의 무고한 생명이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되었다.




크림으로 향해 열린 문



오데사 전투가 한창 절정으로 치닫던 1941년 9월의 우크라이나는 한마디로 거대한 불바다였다. 키예프 일대에 거대한 소련군 부대가 몰려 있음이 확인되었을 때 남부집단군은 전진이냐 섬멸이냐의 선택에서 하나만 결정하여야 했다. 그런데 히틀러가 이 두 가지 과업을 동시에 진행하겠다고 하면서 판이 엄청나게 커졌던 것이다. 덕분에 중부의 모스크바와 북부의 레닌그라드에 가해지던 독일의 압박이 줄어들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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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반도와 아조프 해 연안의 모습. 전략적으로 워낙 중요한 요지다 보니 이곳에 대한 히틀러의 관심은 컸다. <출처: (cc) NormanEinstein at Wikimedia.org>



남부집단군은 제1기갑집단, 제6, 17군이 중부집단군에서 파견 나온 제2기갑집단, 제2군의 도움을 받아 키예프를 포위하였고 루마니아 제4군이 오데사를 공략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제11군이 루마니아 제3군을 이끌고 흑해 연안의 또 하나의 전략 요충지인 크림 반도로 진격하고 있었다. 너무 과한 모습이었지만 히틀러가 어느 한 곳도 놓치지 싫어하였을 만큼 흑해 연안의 남부 우크라이나는 상당히 중요한 곳이었다.

우크라이나 남단과 너비가 8km에 불과한 페레코프(Perekop) 지협(地峽)으로 연결되어 흑해로 불쑥 튀어나온 크림 반도는 흑해와 아조프 해를 감제할 수 있고 우측의 케르치(Kerch)를 통해서는 곧바로 코카서스로 연결이 가능한 위치에 놓여 있다. 이처럼 전략적으로 가치가 큰 크림 반도는 유사 이래 이곳을 거쳐 간 민족들은 물론 일대에 힘을 과시하려는 당대 강대국들이 수시로 간섭하며 혈전을 벌였던 피의 장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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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네프르 강 일대에서 전방을 관측하는 독일 제11군 소속 병사. 이들에게는 크림 반도 점령과 아조프 해 인근 제압이라는 막중한 임무가 부여되었다.



독일이 이곳을 점령하려고 했던 것도 소련이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수호하겠다고 나선 것도 너무 당연하였다. 처음에 소련은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Dnipropetrovsk)에서 헤르손(Kherson)에 이르는 거대한 드네프르 강 하류를 방어선 삼아 멀리서부터 크림 반도를 보호하려 하였다. 다행히도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던 독일 제11군의 진격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아니 엄밀히 말해 속도를 내기가 어려웠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5.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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