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1941년 아조프 해 전투 - 결코 부수적이 아니었던 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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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52회 작성일 16-02-07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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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군에게 부과된 임무



아무리 독일 제11군이 분리되어 따로 작전을 펼치더라도 당연히 남부집단군의 여타 부대들과 보조를 맞추어 앞으로 나가야 했다. 당시 대다수의 부대들은 키예프 공략 중이었기에 루마니아 제3군을 포함한 제11군은 남부집단군 본진과의 간격은 물론 길게 늘어진 진격로 우측 면인 흑해 연안 일대를 혼자서 엄호하여야 했다. 따라서 소련의 저항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지만 진격 속도를 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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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집단군 대부분이 키예프 전투에 투입된 동안 제11군은 루마니아 제3군을 이끌고 드네프르 강까지 전진하였다. <출처: 미 육군 사관학교>



그럼에도 불구하고 8월 30일, 제11군은 소련 제9, 18군이 담당하는 드네프르 강 하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령관 쇼베르트(Eugen von Schobert)는 눈 앞에 보이는 소련군을 격퇴할 자신은 있었지만 아직 후방의 키예프와 오데사 점령이 완료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곳을 건너 불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상관인 남부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9월 9일 룬트슈테트는 쇼베르트에게 강을 도하하여 크림 반도를 신속히 점령하고 동시에 강 동쪽의 아조프 해 연안을 확보하여 남부집단군의 남측 측면을 계속 엄호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제11군에게 너무 과중한 임무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OKH(독일 육군 최고사령부)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다. 비록 형식상 OKH를 통했지만 이는 총통의 명령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로 히틀러는 욕심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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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9월 12일 전방 시찰을 위해 관측기를 탑승하기 직전의 제11군 사령관 쇼베르트. 그는 사고로 전사하였고 그의 후임으로 만슈타인이 부임하였다.



이에 쇼베르트는 9월 12일 도하 지점을 직접 살피려 Fi-156 연락기를 타고 일대를 탐색하였다. 그런데 무슨 문제였는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가 탑승한 비행기는 베리슬라브(Beryslav) 인근에 비상 착륙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곳은 소련군이 매설한 지뢰 지대였고 그는 현장에서 폭사하였다. 불의의 사고로 공석이 된 제11군의 후임 사령관으로 부임한 이는 제2차 대전 최고의 명장 중 하나인 만슈타인(Erich Manstein)이었다.




먼저 선택한 곳



전선 가장 북쪽인 레닌그라드 부근에서 제56장갑군단을 지휘하던 만슈타인은 2,000km 떨어진 전선 가장 남쪽의 미콜라예프(Mykolayev)까지 날아와 지휘권을 인수하였고 즉시 현황 파악에 들어갔다. 그는 제11군을 분리하여 크림 반도와 드네프르 강 동쪽을 동시에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두 곳을 제11군(루마니아 제3군 포함)이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면 하나씩 순차적으로 처단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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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반도로 향하는 출입구인 페레코프 협지에 설치한 소련군의 방어물. 키예프 전투가 끝나고 오데사 포위전이 절정으로 치닫던 1941년 9월 초에 독일 제11군은 마침내 이곳에 도달하였다.



만슈타인은 점령보다 소련군 섬멸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지금까지의 패턴대로 스탈린의 눈치를 보기 급급한 소련군은 분명히 현지 사수에만 신경 쓰고 움직이지 못할 가능성이 클 것이므로 독일군이 드네프르 강 전선의 만곡부인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에서 신속히 진격하여 아조프 해 연안의 마리우폴(Mariupol)을 점령한다면 소련 남부전선군(Southern Front)을 쉽게 양단 시켜 궤멸 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는 동안 크림 반도 공략은 적당히 유보시켜야 했다. 외형상 아조프 해 연안을 점령하면 크림 반도 대부분을 고립 시킨 것과 마찬가지니 천천히 점령해도 되는 모양새이기는 했다. 하지만 만슈타인은 제11군의 모든 전력을 쏟아 부어야 크림 반도 점령이 가능하다고 예상하였을 만큼 만만하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다음으로 미룬 것 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예측대로 이후 크림 반도는 피의 무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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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슈타인이 전선을 시찰하는 도중 가을 우기의 진창에 차가 빠져 애를 먹고 있다. 그는 크림 반도 점령에 앞서 소련 남부전선군 섬멸을 구상하였다.



바로 그 즈음 키예프 전투가 독일의 대승으로 끝날 것이 확실시 되자 도시 남측 외곽의 2중 포위망 한 축을 담당하던 독일 제17군 예하 제49산악군단이 드네프르 강 연안으로 진격 방향을 바꾸어 소련 제18군의 압박에 나섰다. 이제 기회가 되었다고 판단한 만슈타인은 9월 21일 예하 부대에게 공격 명령을 하달하였다. 제49산악군단의 진격과 동시에 우측에 있던 제30군단이 소련 제9군을 멜리토폴(Melitopol)로 밀어붙였다.




덫으로 달려 든 소련군



이처럼 크림 반도 초입이 훤히 열리자 헤르손 일대에서 진격을 개시한 제54군단이 요새화 된 페레코프 지협 입구에 도달하였고 9월 24일 크림 반도 점령을 위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하지만 만슈타인은 결코 서둘지 않았다. 우선 소련의 방어막이 강력하여 무리하다가는 손실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도 했지만, 그 보다는 소련의 시선이 이쪽으로 몰릴수록 아조프 해 연안의 점령이 쉬울 것이라는 판단도 작용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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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54군단은 9월 24일 페레코프 지협을 공격하며 크림 반도 공략을 시작하였다.





소련 남부전선군은 독일의 크림 반도 점령을 저지하기 위해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였다. 하지만 이는 만슈타인이 원하던 상황을 스스로 연출한 것이었다.




만슈타인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점령보다 크림 반도를 소련의 시선을 분산시킬 수 있는 적당한 미끼로 생각한 것이었다. 이제 키예프 전투가 독일의 대승으로 종결되었으므로 소련은 전선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쿠르스크(Kursk)~하르코프~도네츠크를 연결하는 선까지 물러나서 방어선을 구축하여야 했다. 그렇다면 이미 그 시점에서 크림반도와 아조프 해 연안은 과감히 포기하는 것이 타당하고 STAVKA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크림 반도에 미련이 많았던 스탈린은 키예프 참사에도 불구하고 판단을 유보하였다. 연속된 패전으로 사기가 꺾여 이전처럼 현지 사수 고집을 노골적으로 부리지는 못하였지만 그렇다고 남부전선군의 후퇴를 지시한 것도 아니었기에 소련 군부는 여전히 스탈린의 눈치만 보았다. 그 틈을 타서 만슈타인은 공군의 협조 하에 예하 포병 전력을 모두 집결시켜 화력을 쏟아 부은 후 9월 29일 페레코프를 돌파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자 크림 반도 외곽 아조프 연안에 집결하고 있던 소련 남부전선군이 반격을 개시하였다. 페레코프를 차단하여 크림 반도 안으로 들어온 제54군단의 뒤통수를 치겠다는 의도였다. 남부전선군 사령관 랴비셰프(Dmitry Ryabyshev)는 상대적으로 약한 루마니아 제3군을 노렸고 초기에는 성과를 보이는 듯하였다. 하지만 이런 모양을 일부러 유인하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소련군 스스로 덫에 빠져드는 상황이었고 만슈타인은 쾌재를 불렀다.




결과



이번 기회에 소련군을 안으로 끌어들여 일거에 쓸어버리겠다고 결심한 만슈타인은 크림 반도로 한창 진입 중이던 제54군단에게 진격 속도를 늦추라고 명령 내렸다. 여차하면 이들도 회군시켜 섬멸전에 투입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상황을 보고 받은 남부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는 제54군단은 계속 전진하라고 지시한 대신 인접한 제17군과 제1기갑집단 예하의 일부 부대들의 지휘권을 만슈타인에게 부여하고 힘을 보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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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폴을 향해 진격 중인 독일 제14장갑군단 소속의 3호 돌격포



이에 따라 제1기갑집단 예하 제3, 14장갑군단 그리고 제17군 예하 제49산악군단이 이번 작전에 투입되었다. 제49산악군단이 루마니아 제3군을 지원하는 사이에 두 개 장갑군단이 앞으로 달려 나온 소련 제9, 18군의 배후를 잘라버리기 위해 아조프 해를 향해 돌격을 개시하였다. 그렇게 250여 km를 신속하게 내달린 끝에 10월 3일 독일군 기갑부대들은 마리우폴에 입성하였다.

말 그대로 순식간 벌어진 일이었다. 소련 제9, 18군은 독일의 배후를 끊겠다고 앞으로 달려 나왔지만 정작 자신들이 포위망 안에 갇혔다는 황당한 사실을 깨달았다. 즉시 후퇴에 돌입하였지만 이미 빠져 나갈 곳이 없었다. 지금까지 독소전쟁 발발 이후 계속 그래왔듯이 소련군은 무의미한 저항을 계속 하다가 10월 7일 항복하면서 12일 동안 벌어진 아조프 해 전투(Battle of the Sea of Azov)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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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포 된 소련군 포로가 10만에 이를 만큼 아조프 해 전투는 독일의 엄청난 대승이었다. 하지만 70만이 궤멸된 키예프 전투가 끝난 지 불과 보름 만에 벌어진 결과여서 그런지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독소전쟁 발발 이후 지금까지 벌어진 여타 전투들의 전과가 워낙 크다 보니 아조프 해 전투를 소홀히 취급하는 경향이 크지만 소련은 약 3만의 전사상자에 더해 무려 10만여 명이 포로가 되며 제9, 18군이 궤멸되는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이제 독일은 배후를 걱정하지 않고 크림 반도 공략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도네츠크를 거쳐 러시아의 초입인 돈 강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진격로가 활짝 열렸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5.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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