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1941년 1차 하르코프 전투 - 작았던 규모 하지만 너무나 컸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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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60회 작성일 16-02-07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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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재개된 진격



키예프 전투와 아조프 해 전투가 끝난 후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를 정점으로 해서 드네프르 강을 따라 축 쳐져 있던 독일 남부집단군 관할 전선은 수미(Sumy)에서 크라스노라드(Krasnohrad)를 거쳐 마리우폴에 이르는 선으로 대폭 단축되었다. 이제 모든 전력을 일렬로 나란히 배치하여 바바로사 계획 수립 당시에 예정 된 목표인 도네츠 강을 향해서 광활한 동부 우크라이나의 평야를 가로질러 진격을 재개하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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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전투 종결 후 보로실로프그라드로 진격하던 독일 제17군 병사들의 모습. 계속된 전투로 인하여 상당히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제6군이 발루이키(Valuyki)로, 제17군이 보로실로프그라드(Voroshilovgrad, 현 루한스크)로, 제1기갑군(10월 5일 제1기갑집단에서 확대 개편)이 로스토프로 각각 달려갈 예정이고 그러는 동안 제11군은 후방에서 크림 반도를 청소하면 되었다. 반면 이들을 막아야 할 소련의 남서전선군(Southwestern Front)과 남부전선군은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은 상태였다. 계속 충원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지난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입은 손실이 너무 컸다.

이제 재개된 공세의 우선 목표는 우크라이나 영내에 남은 마지막 요지이자 소련의 3대 기계 공업 도시인 하르코프였다. 이곳은 발루이키를 향해서 진격할 제6군이 점령하기로 예정되었다. 도시의 위상이나 전략적 이유 그리고 지금까지의 전쟁 양상을 놓고 판단한다면 당연히 격전이 벌어져야 할 곳이었지만 의외로 전투 기간이나 규모는 짧고 작았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놀랍게도 소련이 하르코프를 포기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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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7월 29일 주코프 후임으로 소련군 총참모장에 오른 샤프슈니코프가 스탈린의 지시 사항을 받아 적고 있다. 10월이 되어서부터 스탈린은 계속된 실책을 깨닫고 서서히 군부의 작전에 개입하는 행위를 줄이기 시작하였다.



충격적인 키예프 전투가 끝난 지 불과 열흘 만에 아조프 해 전투에서 또 다시 참사를 겪은 스탈린은 이제 자신이 군사적으로 무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군부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는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어쨌든 이러한 변화는 시간이 갈수록 군부에 대한 간섭을 늘려가던 히틀러와 대비되는 모습이었고 이후 독소전쟁 결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포기한 도시



키예프 전투 후 독일의 다음 전략 목표는 모스크바였다. 스탈린은 모스크바에 계속 남아서 소련을 사수하겠다고 외쳤지만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래서 남은 전력을 긁어 모아 수도 방어에 우선 투입할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여타 지역에 대한 방비는 소홀해 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쟁 수행을 위해 중요한 우크라이나를 순순히 내 줄 수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군부가 후퇴지연전을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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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코프는 우크라이나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사통팔달로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이자 기계 공업이 발달하였다. <출처 (cc) Dmitry Sleduk>



독소전쟁을 거시적으로 본다면 독일과 소련이 한 번씩 크게 치고 받은 전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최초 개전 시점부터 독일이 최대로 팽창하였을 때까지 점령하였던 곳은 이론상으로 최소 2번은 반드시 전쟁터가 되어야 했다. 당연히 전선 상황에 따라 점령과 탈환이 수시로 반복되며 수 차례 싸움이 벌어진 곳도 많았다. 그 중에서도 하르코프는 무려 4번이나 격전이 벌어진 독소전쟁의 대표적인 싸움터였다.

10월 20일 벌어진 제1차 전투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소련이 포기하였기에 이후 벌어진 제2, 3, 4차 전투에 비해 규모가 작고 기간도 짧았다. 소련은 방어에 제216(소총)사단, 한 개 사단만 투입하였던 반면 공략에 나선 독일군은 약 3배 규모의 제55군단이었다. 지금까지의 전과를 고려한다면 당연히 소련이 이길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르코프가 가지고 있던 중요성까지 망각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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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코프에 위치한 코민테른 열차공작창(KhPZ)에서 제작 중인 초기 형 T-34. 소련은 도시를 포기하였지만 도시 안에 있던 전략 설비는 후방으로 옮기는데 성공하였다.



독일군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던 T-34 전차를 비롯하여 수많은 장비가 생산되는 곳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것이 설명될 정도다. 소련이 전쟁을 지속하려면 하르코프의 공업 시설은 반드시 지키고 보존하여야 했다. 독일이 이곳을 당연히 탈취할 목표로 정한 이유도 당연하였다. 소련은 비록 도시를 포기하기로 결정하였지만 산업 시설을 분해하여 우랄 산맥 너머의 안전지대로 옮기기로 하고 즉시 임무에 돌입하였다.




진짜 중요하였던 임무



공장 노동자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들이 달려들어 거대한 공장과 시설들을 속속 분해하여 열차에 실었다. 그런데 이는 비단 하르코프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니었고 독일의 위협에 놓인 모든 소련의 공업 지대에서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소련은 당장 밀리고 있었지만 독일에게 굴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옮겨진 시설은 이후 반격과 승리의 알찬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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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을 받아 파괴 된 하르코프 역. 독일군이 진입하는 바로 그날도 설비를 적재한 철수 열차가 출발하였다. 이런 의지는 소련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하르코프에 산재한 70여 개 공장의 주요 설비가 신속히 해체되어 실려 나가기 시작하였고 반출이 불가능한 장치나 시설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도시가 함락되던 10월 24일, 포탄이 떨어지는 가운데에서도 마지막 열차가 역을 출발하였을 만큼 소련의 의지는 강고하였다. 어렵게 설비를 실은 열차들은 우랄 산맥을 넘어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의 안전지대로 가서 화물을 하역하였고 대신 현지에서 징집한 병력을 태우고 다시 전선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놀라운 업적 뒤에는 그 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제216사단의 경이적인 분투가 숨어있었다. 거대한 평원 위에 건설된 하르코프는 독일이 다양한 통로를 선택하여 공격을 펼칠 수 있지만 병력이 적었던 소련은 도시 외곽에 방어선을 구축하기조차 어려웠다. 따라서 독일은 그냥 압도적인 전력으로 도심으로 파고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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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코프 도심에서 소탕전을 벌이는 독일군.



그런 예측대로 전투가 벌어지자마자 소련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궤멸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전에 이동의 자유를 보장받았던 제216사단은 독일의 진격 속도와 발맞추어 도심으로 물러나며 방어에 임하였다. 이기고 있었지만 포위망을 완성한 것도 아니었고 시간만 질질 흘러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닥치자 당황한 독일군은 도심에 대대적인 포격을 가하며 소련군의 마지막 숨통을 끓으려 하였다.




결과



제216사단은 서쪽 외곽에서 도심으로 후퇴하면서 도심을 방패 삼아 격렬하게 저항하였으나 10월 23일이 되었을 때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들은 다음날 마지막 열차가 출발하는 그 순간까지 역 주변을 영웅적으로 사수해 내었다. 이처럼 필사적으로 임무를 다한 제216사단은 벨고로드(Belgorod)에 포진해 있던 소련 제38군이 확보하여 준 후방 통로를 이용하여 탈출에 나섰다.

10월 24일, 마침내 무주공산이 된 시내로 독일군이 밀려들어오면서 제1차 하르코프 전투(First Battle of Kharkov)는 종결되었다. 독일은 도시를 점령하였지만 하르코프가 지닌 진짜 중요한 가치였던 산업 시설 확보는 실패하였다. 만일 독일의 점령이 빨랐거나 아니면 대대적인 공습 등으로 설비의 철수를 방해하였다면 훗날 독일이 치러야 할 곤혹스러웠던 순간은 좀 더 늦게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규모에 비해 의의가 너무 컸던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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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10월 24일 하르코프를 영웅적으로 방어한 소련 제216사단이 탈출에 성공한 직후 도심으로 진입 중인 독일 제55군단.



당시 하르코프는 피난민이 몰려들면서 인구가 150만 명까지 인구가 늘어난 상태였지만 독일군의 점령 전에 탈출한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스탈린 통치하에서 많은 박해를 받았기에 시민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은 독일군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해방자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심각한 오판이었음이 밝혀지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독일은 슬라브인이라면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정리해 버려야 할 열등 인종으로 여겼고 특히 공산주의자라면 백주에 살해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하르코프는 순식간 공포의 현장으로 바뀌었고 특히 2만 명에 이르던 유태인들은 잔혹하게 학살되었다. 가혹 행위에는 친위대뿐만 아니라 독일 국방군도 앞장섰으며 도시 중앙의 자유 광장(Dzerzhinsky Square)은 학살 장소로 변모하였다. 이처럼 독소전쟁은 너무 잔인하였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5.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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