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1941년 로스토프 전투 [1] - 마침내 독일의 진격이 멈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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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43회 작성일 16-02-07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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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전략 변화



소련이 동부 우크라이나의 요충지인 하르코프를 과감히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은 STAVKA(소련군최고사령부)가 본격적으로 전쟁을 지휘하게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련 군부는 그들의 선조가 외침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응하여 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침략자들이 일일이 차지하기 힘들만큼 엄청난 국토를 방어에 적극 이용하기로 결심하였다. 소련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과감히 공간을 내주기로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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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0월 20일 소련이 전략적으로 방어를 포기하면서 스탈리노에 무혈 입성하는 독일 제10산악사단.



남쪽의 마리우폴이 함락되고 북쪽의 하르코프가 독일군에 점령당할 위기에 처한 이상 중간에 위치한 스탈리노(Stalino, 현재의 도네츠크 시)도 계속 확보하기 어려웠다. 일대에서 채굴되는 지하자원이 집결하여 소련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출발점인 도네츠크의 중심지인 이 도시는 만일 스탈린이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면 무의미하게 현지 사수에 나서다 수많은 손실을 볼 운명이었을지도 몰랐지만 이제는 전선 단축을 위해 과감히 포기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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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이 철수 전에 독일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파괴한 스탈리노의 공장 시설.



그렇다고 STAVKA가 순순히 내준 것은 아니었다. 130여 년 전 나폴레옹을 상대로 펼쳤던 청야(淸野)전술이 다시 한 번 재현되면서 독일이 점령 후 사용할 수 없도록 주요 시설과 자원이 철저히 파괴되었다. 완전히 초토화시킬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도시 기능이 온전히 작동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10월 20일 독일 제1산악사단은 폐허가 된 텅 빈 스탈리노를 점령했다.

전쟁 개시 후 쉼 없이 앞으로 달려만 왔던 독일 남부집단군은 연이어 승리를 얻었지만 몹시 지쳐서 하르코프 전투가 끝난 10월 24일이 되었을 때, 더 이상 앞으로 나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사실 이는 비단 남부집단군만의 문제가 아니라 고질적인 보급 문제로 독일군 전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마침 그 즈음 가을 라스푸티차(Rasputitsa, 봄에 눈이 녹거나 가을에 눈이 왔을 때의 길이 질퍽질퍽한 시기)가 절정에 이르면서 독일군의 진격은 완전히 멈추어버렸다.




더 이상 나갈 수 없다



사실 공격이 멈추게 된 것보다 더 큰 문제는 후방에서의 보급과 충원도 함께 중단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공세종말점(攻勢終末點, 공세를 유지할 수 있는 한계점)에 다다르면 당연히 부대는 재편에 들어가야 하지만 독일의 상황은 상당히 어려웠다. 10월 중에 남부집단군을 지원하기 위해 독일 본토에서 병력과 화물을 싣고 떠난 750여 편의 열차 편 중에서 전선 부근까지 제때 도착한 것은 25퍼센트 정도 밖에 되지 않았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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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빙기와 가을 우기에 라스푸티차가 발생하면 이동이 극도로 제한 될 수밖에 없다. 독소전쟁 당시에 독일에게는 겨울 혹한보다 더 무서웠던 자연 현상이었다.



소련은 동쪽으로 갈수록 남북으로 넓어지지만 반대로 조밀하였던 철도는 넓게 산개하는 형태여서 철도에서 먼 곳은 보급상태가 더욱 나빴다. 독일은 현지에서 약탈한 우마차까지 총동원하여 보급에 나섰지만 엄청난 진흙의 대지를 돌파하기 어려웠다. 항공편도 활주로가 진흙으로 바뀌면서 이착륙이 어려운 곳이 부지기수였다. 탄환은 떨어졌고 병사들은 굶주림에 지쳐갔다. 독일 남부집단군은 하르코프 점령 후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진격이 멈춘 10월 중순이 되자 남부집단군 관할 전선은 제6군이 하르코프, 제17군이 도네츠크 강 서안, 제1기갑군이 미우스(Mius) 강 하구의 요충지인 타간로그(Taganrog)까지 다가간 상태로 형성되었다. 오로지 제11군만이 진격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담당하는 작전 구역은 이제는 후방이 되어버린 크림 반도였다. 당연히 남부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의 고민은 커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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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에서 잠시 잠을 청하는 독일군의 모습. 그 동안 쉼 없이 있었던 격전으로 말미암아 병사들은 피로도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 즉시 병력 충원이나 교대가 요구되는 상황이었지만 독일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였다. 그만큼 독일은 전쟁 수행 능력이 소련에 비해 절대 열세였다.



원래 키예프 전투 종결 후 남부집단군은 일단 부대를 재편하여야 했지만 여전히 사방에서 계속 출몰하는 소련군과의 싸움을 멈출 수 없었고 히틀러도 중단 없는 진격을 명령하여 피로도는 극심한 상황에 이르렀다. 당장 그럴 것이라고 예상되지는 않지만 만에 하나 이처럼 부대 간 간격이 벌어지고 보급이 바닥난 순간에 소련이 반격을 개시한다면 상당히 위험할 것이라고 룬트슈테트는 생각하였다.




코카서스로 향한 관문



그런 우려대로 지난 아조프 해 전투에서 붕괴된 소련 제9, 18군이 신속히 재건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룬트슈테트는 현 전선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부대를 충분히 재편한 후 1942년 봄에 공세를 재개하는 것이 좋겠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10월 21일 OKH는 이를 기각하고 즉시 돈 강까지 진격하라는 지시를 하달하였는데, 사실 이는 히틀러의 명령이었다. OKH 지휘부도 룬트슈테트의 주장이 옳다고 보았지만 총통의 지시에 토를 달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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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집단군에 배속된 이탈리아 파견 군단(CSIR)을 격려차 방문한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안내하는 룬트슈테트. 그는 진격을 멈추고 부대를 재편하자고 주장하였지만 히틀러가 거부하였다.



오히려 OKH는 제6군이 보로실로프그라드, 제17이 스탈린그라드, 제1기갑군은 코카서스를 점령하라고 지시하였다. 하지만 명령을 내린 OKH도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룬트슈테트는 OKH에 항의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느덧 독일 군부의 자부심이었던 OKH는 히틀러의 명령을 그대로 전달하기만 하는 출납기관으로 바뀌어 버렸던 것이다.

아직은 날씨가 나쁘고 여전히 진흙 구덩이가 난무하여 움직이기 곤란했지만 히틀러가 명령을 내린 이상 남부집단군은 전진을 하여야 했다. 그러려면 아조프 해에 접한 돈 강 하구의 요지인 로스토프를 우선 점령하여야 했다. 모스크바 북동쪽의 야로슬라블(Yaroslavl) 지방에 있는 로스토프와 구분하기 위해 흔히 로스토프 온 돈(Rostov-on-Don)이라 불리는 로스토프는 코카서스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남부 러시아의 출입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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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토프는 유럽에서 코카서스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다. 룬트슈테트는 내키지 않았지만 이곳으로 진격하여야 했다.



이곳의 점령은 독일이 제2차 대전을 시작한 후 최고의 전과를 계속하여 보여준 제1기갑군이 담당하기로 하였다. 반면 독일의 움직임을 확인한 소련군의 대응도 기민하였다. 로스토프를 독일이 점령하면 코카서스의 마이코프(Maykop) 일대에서 생산되는 석유의 공급 통로 중 하나가 차단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전쟁 수행을 위해 석유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면 이곳을 호락호락 독일에게 내줘서는 곤란하였다.




포기할 수 없는 도시



STAVKA의 최우선 과제가 모스크바 일대의 위기 해소였음에도 남부의 요충지 스탈리노와 하르코프를 그냥 내주며 전의를 불사른 이유는 로스토프 방어를 위해서였다. 소련은 전선을 단축시키고 독일의 진격이 주춤한 틈을 타 무너진 남부전선군의 복구를 완료하여 전선에 재배치했고 코카서스 일대를 담당하기 위해 막 창설 한 제56군도 로스토프로 증파하였다. 또한 키예프 전투에서 해체 된 후 재 창설 중인 제37군의 투입도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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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0월 전선으로 가는 열차 앞에서 잠시 여흥을 즐기는 소련군. 비록 선전 사진 속의 모습이기는 하지만 소련의 충원 능력은 경이적이라 할 만큼 빨랐다.



반면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보급도 제대로 보충 받지 못한 제1기갑군의 전차들은 아직 라스푸티차가 한창 중임에도 어쩔 수 없이 시동을 걸었다. 전쟁 개시 후 지금까지 독일 남부집단군은 약 150여 만의 소련군을 소탕하고 독일 본토의 2배가 넘는 땅을 점령하였음에도 히틀러는 결코 만족해하지 않았다. 욕심 많은 총통이 계속 돈 강을 향해 진격하라고 채근하자 어쩔 수 없이 그들은 공세에 나살 수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11월 초 가장 선두에 섰던 제14장갑군단이 로스토프 북쪽 외곽을 차단하기 위해 노보샤흐틴스크(Novoshakhtinsk)를 향하여 진격을 개시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날씨는 나빴고 계속 내린 비로 인하여 생긴 거대한 진흙 구덩이에 빠진 전차의 무한궤도는 헛돌기만 하였다. 그러는 사이 로스토프 일대에 대한 방어선은 더욱 깊게 파지면서 강화되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보름 가까운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가자 히틀러의 짜증은 극에 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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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기갑군은 로스토프를 향하여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악천후로 인하여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독일이 진격에 난항을 겪고 있던 11월 13일부터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면서 지면이 단단하게 얼어붙기 시작하였다. 예상보다 빨리 찾아온 1941년 겨울로 인해 라스푸티차가 사라지자 제1기갑군은 마침내 속도를 높여 앞으로 내달릴 수 있었다. 독일 제1기갑군 사령관 클라이스트(Ewald von Kleist)는 소련군 방어선이 더욱 공고해지기 전에 신속히 전선을 돌파하여 로스토프를 외곽에서부터 크게 포위하기로 마음먹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5.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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