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1941년 로스토프 전투 [2] - 마침내 독일의 진격이 멈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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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40회 작성일 16-02-07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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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역습을 노리다



소련 남서전역(Southwest Theater, 구 키예프 특별관구)을 담당한 티모셴코(Semyon Timoshenko)는 제1기갑군을 제외하고 독일 남부집단군 여타 부대의 움직임이 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제56군과 후방에서 재건을 완료한 제37군을 소련 남부전선군 방어선에 전진 배치하여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이들은 지쳐 있던 제9, 12, 18군을 대신하여 여차하면 앞으로 달려 나갈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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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가을 전선에서 작전 회의를 펼치는 티모셴코(우). 그는 제2차 대전 당시 그다지 의미 있는 전과를 올리지는 못한 인물이지만 로스토프 전투에서 소련이 독소전쟁 최초의 전략적 승리를 거두는데 크게 일조했다.



11월 17일, 독일 제1기갑군은 250여 킬로미터를 전진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북쪽에서 보조를 맞추어야 할 제17군이 여전히 미우스 강 일대에 그대로 머물고 있어 제1기갑군 좌익이 길게 노출되어 버렸다. 티모셴코는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준비를 완료한 소련 남부전선군에게 진격 명령을 하달함과 동시에 공군으로 하여금 독일군 후방을 공격하도록 조치하였다.

독일 제4항공군(Luftflotte 4)의 반격으로 소련 공군의 작전기들은 하염없이 격추되어 나갔지만 마리우폴과 타간로그에 위치한 독일군 전방 보급기지들을 집요하게 공격하였다. 비록 독일군을 격퇴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소련군의 격렬한 반격으로 말미암아 제1기갑군의 북쪽과 가운데를 담당하던 제49산악군단과 제14장갑군단은 진격이 돈좌되었다. 룬트슈테트의 우려대로 전력이 충분히 재편되지 못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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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토프 시내에 진입한 제3장갑군단 소속의 1호 대전차자주포(Panzerjager Pz1). 하지만 도시를 점령하자마자 포위당한 형국이었다.



오로지 남쪽의 제3장갑군단 만이 앞으로 계속 전진하고 있었고 11월 20일에 로스토프 시내에 진입하여 돈 강 하구에 교두보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군사적으로는 도시를 점령하였으나 사방에 소련군이 포진하여 너무 위험한 상태였다. 함께 진격하다가 멈춘 제49산악군단과 제14장갑군단이 그나마 북쪽을 받치고 있었지만 만일 소련군이 이들을 뚫고 타간로그까지 남하한다면 제3장갑군단은 꼼짝 없이 도심에 포위당할 운명이었다.




총통의 명령을 어기다



룬트슈테트는 심각하게 후퇴를 고려하였지만 정작 로스토프 점령에 고무된 히틀러는 OKH를 통해 마이코프로 계속 진격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하지만 소련군의 반격은 이어지고 있었고 도심 점령지로 향한 독일군의 보급은 완전히 차단되다시피 하였다. 클라이스트는 만일을 대비하여 제3장갑군단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일단 좌측에 있던 제14장갑군단을 뒤로 후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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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26 전차를 앞세우고 로스토프 탈환에 나선 소련군. 당시 소련은 모스크바 방어에 주력하였기 때문에 로스토프 전투에 투입 된 장비가 그다지 좋은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련은 독일을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룬트슈테트는 격분한 히틀러에게 불가피한 조치임을 설명하였다. 이처럼 보급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도시를 계속 점령하고 있는 것은 너무 무의미하였고 위험하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육상을 통한 연결로는 차단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히틀러는 즉시 공중 보급을 하여 줄 테니 도시를 사수하라고 명령하였지만 11월 24일까지 고작 Ju 52 수송기 20여 기 분량의 보급품만 공수되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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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대전 당시 활약한 독일 기갑부대의 명장인 제1기갑군 사령관 클라이스트는 상관인 룬트슈테트의 지시에 따라 총통의 명령을 어기고 부대를 후퇴시켰다.



11월 25일 새벽, 제56군이 얼어붙은 돈 강을 건너 도시 남쪽으로 진격한 것을 시작으로 소련군의 대대적인 반격이 개시되었다. 며칠 간 도시 곳곳에서 벌어진 시가전에서 압도적인 소련군이 독일군을 서서히 밀어 붙였다. 더 이상 로스토프 사수는 무의미하였고 11월 28일 클라이스트는 직권으로 철수를 명령하였다. 타격을 입은 제3장갑군단이 탈출에 성공하자 어렵게 북쪽을 사수하던 제49산악군단과 제14장갑군단도 후퇴에 돌입했다.

소련군이 추격을 멈추지 않자 룬트슈테트는 클라이스트에게 제1기갑군을 안전지대인 미우스 강까지 완전히 후퇴하도록 조치하였다. 놀란 히틀러는 즉시 현지를 사수할 것을 재차 엄명하였지만 그 동안 지나친 간섭에 질렸던 룬트슈테트는 사임 의사를 표명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고 자신의 의지대로 제1기갑군의 후퇴를 완료하였다. 독일 군부의 최고연장자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던 그가 할 수 있었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결과



지금까지 대승만 거듭해온 독일군이 후퇴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던 히틀러는 12월 1일 룬트슈테트를 해임하고 후임으로 군부 내 대표적인 친 나치였던 라이헤나우(Walther von Reichenau) 제6군 사령관으로 하여금 남부집단군 사령관을 겸임하도록 조치하였다. 라이헤나우는 클라이스트에게 총통의 명을 따르라고 지시하였지만 정작 그 또한 제1기갑군의 후퇴가 불가피함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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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일 제1기갑군 사령부를 방문하기 위해 마리우폴 공항에 도착한 히틀러. 즉시 최전선까지 날아 왔을 만큼 제1기갑군의 후퇴는 히틀러를 격분시켰다.



사실 전선의 어려움은 비단 제1기갑군만이 아니라 전체 독일군에서 동시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남부집단군 사령관을 교체한 것만으로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히틀러는 다음날 2,000km를 날아 와 마리우폴에 위치한 제1기갑군 사령부를 전격 방문하였다. 동행한 라이헤나우는 후퇴가 어쩔 수 없었던 상황임을 설명하였지만 히틀러는 여전히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직접 확인한 현장은 예상 외로 심각하였다.

특히 제1친위사단을 이끌고 로스토프 도심에서 치열하게 격전을 치렀던 충복 제프 디트리히(Josepp "Sepp" Dietrich)의 보고는 히틀러의 고집을 꺾게 만들었다. 오히려 어려운 가운데 룬트슈테트와 클라이스트가 대단히 잘 싸웠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막무가내였던 히틀러도 내년 봄까지 미우스 강을 따라 전선을 구축하고 부대 재편에 들어가도록 하는데 동의하면서 전투는 막을 내렸다.

로스토프 전투(Battle of Rostov)는 소련이 승리하였지만 단지 공간을 탈환하였을 뿐이지 독일군을 궤멸시키거나 격파한 것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독일이 지쳐서 더 이상 싸우기 어려워 스스로 물러난 것에 가까웠다. 이 전투에서 독일은 약 20,000명의 인명 손실을 보았고 소련은 약 30,000명의 피해를 입었기에 동 시기에 벌어진 여타 전투와 비교하였을 때 그다지 판이 컸던 전투라고 보기도 어렵다.




의의



하지만 로스토프 전투는 독소전쟁 발발 이후 소련이 거둔 최초의 전략적 승리였기에 내포된 의의는 기간이나 규모를 훨씬 능가한다. 당연히 그 동안 전쟁 발발 이후 계속된 참패로 말미암아 사기가 떨어졌던 스탈린은 물론 소련군과 인민에게도 커다란 용기를 심어주었다. 특히 당시는 모스크바를 사수하기 위해 동부전선 중앙부가 거대하게 불타오르고 있던 시점이라서 더욱 소련에게 끼친 영향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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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엄청난 희생과 피해를 입었음에도 여전히 항전을 계속하였다. 이런 모습에 독일은 질려갔고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반면 독일에게는 암울한 미래의 시작이었다. 전쟁 발발 이후 5개월 동안 독일은 엄청난 소련 땅을 점령하고 400여 만에 이르는 소련의 병력과 무수한 장비를 붕괴시켰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이 정도면 독일의 승리로 끝나는 것이 타당하였지만 전쟁의 끝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소련이 반격에 성공하면서 언제까지 싸움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답게 독소전쟁의 싸움터도 넓었지만 특히 우크라이나와 남부 러시아 일대는 전쟁 내내 가장 격렬하였던 장소였다. 독소전쟁에 기록된 엄청난 격돌들이 바로 이 일대에서 연이어 벌어졌고 당연히 엄청난 피로 대지를 적셨다. 1941년 가을부터 초겨울 사이에 오데사, 크림 반도 초입, 아조프 해 연안, 하르코프, 로스토프 일대에서 연이어 벌어진 여러 전투들에서 죽거나 다친 이들이 무려 50만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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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이 되어 미우스 강 일대를 중심으로 전선이 구축되면서 우크라이나 일대는 크림 반도를 제외하고 일단 전쟁이 소강상태로 빠졌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앞으로 더 큰 싸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출처: 미 육군 사관학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만과 키예프에서 벌어진 격전의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여타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벌어진 여러 전투들을 간과하는 경향이 많다. 그만큼 독소전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했다. 하지만 전쟁은 이제 단지 시작이었고 마치 꺼지지 않는 들불처럼 계속 이어지는 소련의 놀라운 항전 의지로 말미암아 격렬함과 강도는 더욱 세어져 갔다. 이제 전쟁이 언제 끝나게 될 지는 당사자인 독일, 소련 모두 예측하기 어렵게 되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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