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보신전쟁(戊辰戰爭) (1) - 근대 일본을 만든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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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05회 작성일 16-02-07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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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전쟁의 서막인 도바 후시미 전투의 부분을 담은 그림.



목차


목차

1.보신전쟁(戊辰戰爭) (1)

2.보신전쟁(戊辰戰爭) (2)

3.보신전쟁(戊辰戰爭) (3)




이미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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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말(幕末)의 전투만큼 세상에서 슬픈 사건도 없다. 그것은 우리 일본의 동족간의 전쟁이며, 막부군, 관군 모두가 스스로 올바르다고 믿은 채, 각각의 길로 자신들의 진실을 다했던 전쟁이다. 다만 흘러가는 한순간의 차이에 따라, 어떤 자는 관군이 되고 또 어떤 자는 막부군이 되었으며, 무사도(武士道)에 따라 목숨을 바쳤다.
- 나카무라 가쓰고로, [보신 전쟁 위령비](1969)

보신 전쟁은 ‘근대 일본을 만든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일본은 막부 통치에서 왕정으로, 쇄국에서 문명개화로, 전통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전환했다. 그러나 그 실체는 나카무라 가쓰고로의 평가나 [료마가 간다]에서 [바람의 검심]에 이르는 여러 현대의 대중서사에서처럼 장렬하고 숭고했던 싸움은 아니었다. 심지어 일본 역사에서 그다지 새로운 사건도 아니었다. 일본은 매우 일찍부터 이중적이고 경계가 모호한 통치 시스템을 가져 왔으며, 그 시스템이 덜걱거릴 때마다 어김없이 ‘천하대란’은 일어났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반복, 그 속의 새로움



일본은 개국 이래 한결같이 내려온 왕통을 ‘만세일계(萬世一係)’라며 자랑한다. 중국이 명에서 청으로 바뀌고, 왕씨 고려가 이씨 조선으로 바뀌는 식의 역성혁명을 한 번도 겪지 않으며 수 천 년을 이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찌감치 왕권이 유명무실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왕이 실권을 잃은 때는 이미 10세기 경이었으며, 1185년에 미나모토 요리토모에 의해 가마쿠라 막부가 수립된 뒤로는 7백년 가까이 일본의 정치는 막부가 담당해왔다. 정치변동에 따라 최고권력은 이 가문에서 저 가문으로 옮아갔지만, 중국이나 일본처럼 왕조를 새로 세울 필요를 느낄 만한 실질적 왕권이란 게 없었기에 만세일계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뒤집어 말하면 비록 실권을 거머쥐었더라도 아득한 시절부터 내려온 왕조를 없애고 스스로 왕이라 내세우기에는 막대한 부담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왕은 막부에 맞설 권력이 없고, 막부는 왕을 없앨 권위가 없는 모호한 체제. 이를 저명한 일본학자 마리우스 잰슨은 “막부와 조정은 서로를 공경했다”는 말로 풀이했다. 막부는 자기 뜻대로 제후를 봉하고 관직을 정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일왕의 시중을 드는 하인들도 일왕이 일단 임명할 수 있으나, 막부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일방적으로 교체되었다. 하지만 막부는 일왕에게서 쇼군(정이대장군)으로 임명되어야 막부로서 행세할 수 있었으며, 형식적이지만 “천황을 받들어 명령하시는 모든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수행하겠나이다. 혹시라도 천황께 불손한 일을 저지른다면 신불(神佛)의 벌을 달게 받겠나이다”라는 맹세를 올렸다. 쇼군은 일왕을 직접 대하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가끔 일왕을 알현하는 자리에서는 조정의 서열에 따라 6등급의 좌석에 앉아야 했다. 막부 시대 초기에는 막부에 반기를 드는 일왕도 나오고, 중세 유럽의 대립교황처럼 친막부 일왕과 반막부 일왕이 동시에 세워져 대립하는 일마저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막부는 일왕의 권위를 더욱 세워 줌으로써 스스로의 권위도 높이는 정책을 썼으며 일왕은 교토의 궁성에 들어앉아 의례적 행사만 주관하고 정치에 간섭하지 않음으로써 이에 보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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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선(朱印船). 17세기 초까지 일본의 공인 해외무역선이었으나 이후의 쇄국정책으로 폐지된다.



하지만 일왕과 쇼군, 조정과 막부가 일본정치의 전부는 아니었다. 일본은 일찍부터 수십 개의 쿠니(國)가 중앙의 구심력에 대해 만만치 않은 원심력을 갖고 병립해왔다. 에도 막부 시대에 지방세력은 막부가 임명한 제후들, 다이묘(大名)가 다스리는 번(藩)들로 정리되었으며, 수백의 번 중에는 전래의 쿠니를 온전히 다스리는 봉록 10만 석 이상의 웅번(雄藩)에서 1만 석을 조금 넘는 군소 번까지 다양하게 있었으나 다이묘들의 영지를 합치면 일본 국토의 4분의 3에 달했다. 막부는 번주(藩主)를 임명, 해임하고 다른 번으로 이봉(移封)하거나 봉토를 늘리고 줄일 권한을 가졌다. 또 부유한 번이라 해도 하나 이상의 성(城)을 짓지 못한다거나 번의 규모에 비례해 설정된 기준대로 병력을 보유해야 한다고 강제했으며, 필요에 따라 막부를 위해 병력이나 노동력을 제공하도록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각 번은 독자적인 행정, 사법체계를 가졌으며, 막부에 인력을 제공할 의무는 있어도 납세의 의무는 없었다. 따라서 각 번은 하나의 독립적인 왕국처럼 번주의 뜻에 따라 운영되었으며, 서양 문물을 들인다거나 독자적으로 화폐를 주조한다거나 등등까지 자율에 맡겨졌으므로 번에 따라 색다른 풍토와 문화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런 복잡하고 모호한 시스템은 시대가 달라져도 기존의 제도와 세력을 쓸어버리지 않고 새로운 질서에 습합(習合)해온 일본 특유의 패턴의 결과이기도 했다. 이미 10세기에 힘을 잃은 일왕이 계속 존중을 받고 있고, 그 힘을 처음 대신했던 문벌귀족들은 구게(公家)라는 이름으로 일왕 주변에서 조정을 구성하고 있었으며, 쿠니의 독립성은 시대에 따라 불거져 나오기도 하고 움츠러들기도 했으되 막번체제에서 유지되고 있었다. 그것은 고유의 신토(神道)와 불교,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주자학으로 강화된 유교가 서로 배척하지 않고 묘하게 공존하고 있던 것과 비슷했다.

문제는 그런 묘한 공존 상태가 새로운 변화와 충격에 따라 흔들릴 때였다. 13세기 여몽 연합군의 일본 침략은 비록 실패했지만 가마쿠라 막부가 힘을 잃고 아시카가 막부로 교체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 아시카가 막부는 명나라의 공무역 금지 영향으로 지방세력의 상당수는 밀무역-해적(왜구)의 길로 각자도생을 하게 되는 15세기의 혼란기에 통제력을 상실했고, 1467년부터 1477년까지의 ‘오닌(應仁)의 난’에서 지방세력들은 각자 지지하는 쇼군 후보를 업고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대결을 펼친다. 이후로도 아시카가 막부는 약 백 년 동안 존속하지만, 그 실체가 일왕처럼 유명무실해짐에 따라 구심력을 완전히 잃은 지방세력들이 할거하며 격렬히 상쟁하는 ‘전국시대’가 펼쳐진다. 그리고 17세기 초,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의 유력자가 되자,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의 또 한 차례의 동-서군 대결을 거쳐 에도에 막부가 선다. 따라서 19세기 중엽, 도쿠가와 막부 체제가 오랜 평화 끝에 다시 한 번 흔들리기 시작했을 때, 어김없이 찾아온 ‘천하대란’은 반복되는 역사라는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단지 반복이 아닌 새로움도 있었는데, 그런 흔들림을 가져온 외부의 충격이 바로 서양 세력, 그리고 근대화의 압력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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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 제독(가운데)과 그의 막료들을 그린 일본인의 그림.






쿠로후네의 위협



1543년에는 다네가시마에 표착한 포르투갈 인들에 의해 조총이 전해지고, 1549년에는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자비에르가 최초의 선교사로서 일본에 왔으며, 1595년에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천주교도 무장들과 함께 프로이스, 세스페데스 등이 조선 땅을 밟는 등, 16세기 일본은 서양과 활발한 교류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말년에 기독교를 박해하는 입장을 취했으며, 도쿠가와 막부도 그런 방침을 계승했다. 기독교의 가르침이 기존 종교의 가르침이나 일본의 관습과 부딪치는 데가 많았고(가령 자살을 금지하는 교리 때문에 일본인들이 명예로운 최후로 여겨온 할복이 거부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도 할복의 명을 거부하고 평민과 마찬가지로 처형당했다), 대만이나 인도 등이 선교를 명목으로 들어온 서양인들에 의해 식민지화되었다는 사실이 거슬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616년부터 1635년에 이르는 잇따른 포고령으로 기독교의 선교나 서양인의 활동을 금지하며, 무역은 중국과 네덜란드에게만, 히라도와 나가사키 두 항구에서만 허용하는 ‘쇄국정책’을 펼치게 되었다. 그에 대한 반발로 1637년, 기리시탄(기독교 개종자)이 많던 규슈의 시마바라에서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나자 막부의 배외 정책은 더욱 굳어져서, 히라도의 개항도 취소하고 기독교인은 개종하지 않으면 처형한다는 엄격한 탄압을 실시했다.

이 서양과의 교류 문제가 19세기 중엽에 기존 시스템의 요동을 불러왔다. 네덜란드, 독일, 그리고 미국이 잊을 만하면 ‘쿠로후네(黑船)’를 보내 통상을 요구해 오자 일본 전역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1842년에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패배하여 강제로 개항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은 전율 그 자체였다. 막부는 이에 불안한 내정(마침 기근이 계속되었고, 그에 따라 막부와 번의 재정이 고갈되는 한편 ‘오시오(大塩)의 난’ 등의 농민반란이 1830년대부터 꼬리를 물고 있었다)을 개혁하고자 추진 중이던 ‘텐포(天保) 개혁’에 외정 개혁의 과제도 추가했다. 근검절약을 강조하고, 농촌 인구가 늘도록 도시로의 이주를 엄금하며, 상인들의 독점조합을 해체해 자유 상거래를 촉진하는 등의 정책에다, 서양식 화포와 증기선을 수입하거나 중국, 네덜란드 외의 국가에도 통상을 허용하는 조치 등을 고려한 것이다.

그러나 텐포 개혁은 결국 막번체제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채, 그 병폐를 더욱 두드러지게 만든 채로 실패한다. 가령 번들 사이의 교류를 차단했기 때문에(번들이 힘을 합쳐 중앙에 대항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흉년이 들지 않은 지역의 양식을 기근에 시달리는 지역으로 옮기는 일이 봉쇄됨으로써 기근의 피해가 극복되지 못했다. 막부는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번주를 교체할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해, 동부의 부유한 번들을 막부 직할령으로 삼으려 했다. 막부가 운용할 수 있는 농산물이 많아지면 그것으로 구제에 나서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해당 번주들 눈에 ‘우리가 갖은 애를 써서 살찌워 놓은 고장을 막부가 날름 삼키려 하는’ 것으로만 비쳤고, 전에 없는 완강한 반대에 부딪친 막부는 결국 계획을 포기한다. 이렇게 공공 물류가 차단된 채 상업만 자유화되자 폭리를 취하는 상인들의 발호로 민생은 더욱 어려워질 뿐이었다.

서양에 먹히기 전에 자체적으로 서구화를 추진하려던 것도 벽에 부딪쳤다. 다름 아닌 일왕과 조정이 오랜 침묵을 깨고 불만을 표시했기 때문이었다. 교토의 궁성에 틀어박힌 채 세상 돌아가는 일을 잘 모르던 일왕은 ‘신국(神國)’ 일본에 서양의 사악한 문물을 들일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막부의 위상이 일왕에 대해서나 각 번들에 대해서나 실추 일로에 있던 1853년, 미국의 매슈 페리 제독이 에도 바로 앞쪽의 우라가 만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했다.

구로후네는 전에도 왔었지만, 그처럼 막부의 바로 코앞까지 밀고 들어와 고압적으로 위력을 과시한 적은 없었다. 페리는 미국 독립기념일 축포를 빙자해 함포가 일제히 공포탄을 쏘도록 했으며, 이는 일본인들에게 충분한 위협이 되었다. 더구나 쇼군 이에요시의 병이 심했던 참이라 막부는 더더욱 당당히 맞서지 못했고, 페리가 ‘내년에 다시 올 테니, 그 때도 통상을 수락하지 않으면 멸망시켜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다음 홍콩으로 유유히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페리는 과연 이듬해에, 개월 수로는 겨우 반 년 만에 돌아왔으며 이번에는 배가 열 척, 병력이 천육백으로 전쟁이라도 벌일 기세였다. 결국 막부는 페리가 카나자와에 상륙하도록 했으며, 그와 카나자와 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2백여 년 만에 개국한 것이었다.




존왕양이와 공무합체



카나자와 조약의 내용은 “하코다테를 개항하고, 미국 영사를 시모다에 주재시키며, 필요에 따라 미국 선박에 연료와 물을 공급한다”는 것으로, 페리가 강력히 요구했던 본격적인 수호통상조약보다는 수준이 낮은 것이었다. 그래도 개국은 개국이었다. 2년 뒤인 1856년에는 이 조약에 의거해 미국의 타운젠드 해리스가 총영사로 시모다에 찾아와, 정식 통상 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막부는 2년 만에 이를 받아들였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네덜란드와도 비슷한 조약을 맺었다. 고메이 일왕은 노발대발했다. 사안이 워낙 중대하다고 여긴 막부는 이제껏 독자적으로 정무를 처리하던 관행을 깨고 이례적으로 조정과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자신의 단호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막부는 결국 서양인들에게 나라를 고스란히 열지 않았는가? 이럴 바에는 뭐하러 ‘폐하의 뜻’을 말씀해 달라 했단 말인가? 고메이는 수백 년 이래 처음으로, 막부와 맞서서 왕의 목소리를 낼 결심을 했다. 그는 1858년 6월, 이세 신궁 등에 제사를 지내면서 “가미카제(神風)를 보내시어 서양 오랑캐들을 물리치시며, 불충한 무리들을 쓸어버리소서”라고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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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메이 일왕. 철저한 양이론자였다.





요시다 쇼인. 그의 존왕양이론은 여러 조슈 파 지사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일왕이 ‘왕정복고’를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구상은 ‘공무합체(公武合體)’, 즉 조정과 막부가 하나가 되어 공동으로 도출한 ‘공의’에 따라 난국을 타개하자는 것이었고, 막부에 요구하는 것은 직접적인 결정권이 아니라 지침을 제시할 권한이었다. 그런 입장은 막부 쪽에서도 대체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안팎으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막부 혼자서 모든 책임을 지고 가는 일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전혀 다른 시대의 신호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다. 대체로 일본의 서쪽과 남쪽 끝의 번주들과 그들이 키우던 일부 사무라이들, 나중에 ‘지사(志士)’로 불리게 될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오랑캐를 물리치기(征夷)” 위한 명목으로 전권을 위임받은 막부가 서양인들의 요구에 맥없이 굴복하고, 왕명까지 무시하는 상황은 한 마디의 구호를 요청하고 있었다.



“존왕양이(尊王攘夷)!”

왕을 받들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존왕양이란 본래 유교적 개념으로, 임진왜란 이래 꾸준히 발전해온 일본 유학의 토양에서 싹튼 개념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선구적 양이론자들은 미토 번의 후지타 도코(藤田東湖, 사이고 다카모리의 스승이었다)나 조슈 번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다카스기 신사쿠,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의 스승이었다) 같은 유학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선 말의 척사론자들처럼 서양 문물은 일체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은 아니었으며, 보다 적극적으로 서양식 제도개혁을 추진하려 했던 카츠 카이슈, 고다이 다이스케 등과 같이 서양의 군사력과 기술력을 본받아 부국강병을 이룩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그 최대 걸림돌은 막부였으며, 막부를 쓰러트리고 일왕을 중심으로 일본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만 중국이나 인도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신념에 따라 그들이 전개한 ‘막부 타도(倒幕) 운동’은 한편으로 일본적 시스템의 동요에 따른 지역 세력의 분기와 대립이라는 성격도 띠었다. 양이론자들이 주로 배출된 조슈, 사쓰마, 미토 등의 번은 모두 세키가하라 당시 ‘서군’에 속하여 도쿠가와에 대항했던 번들이었다. 그 번주들은 텐포 개혁 때에 막부의 무능을 절감했고, 자체적인 부국강병책을 써서 번의 실력을 한껏 키워 놓았다. 한편 불안해진 막부는 1858년 7월에 “안세이 대옥(安政大獄)”을 일으켜, 사쓰마와 미토 번주에게 근신령을 내리는 한편 조슈 번의 요시다 쇼인을 감금, 끝내 처형한 것을 비롯하여 양이파 백여 명에게 크고 작은 형벌을 가했다. 그리고 도쿠가와 가문의 피가 섞인 마쓰다이라 가문이 다스리는 아이즈 번에 ‘교토 수호직’이라는 새 직책을 부여하고 일왕과 조정의 감시 및 불온한 번들의 억제 역할을 맡겼다. 이에 맞서 사쓰마의 시마즈 모치히사 번주는 “저희 번이 교토로 들어가 궁성을 수호하겠다”고 일왕에게 건의하는 등 막부 방침에 반대함을 노골적으로 밝혔다. 2백 년도 더 전에 일본을 둘로 나눴던 동군-서군의 대결의 장은 차근차근 재조합되고 있었다.

참고문헌

  • Romulus Hillsborough, [Samural Revolution](Tuttle Publishing, 2014), 도널드 킨, [메이지 천황](다락원, 2002), 마리우스 잰슨, [현대일본을 찾아서](이산, 2006), 太田保世, [戊辰戰爭と東北の格差](勉誠出版, 2012), 箱石大, [戊辰戰爭の史料學](勉誠出版, 2012), 木村幸比古, [圖說 戊辰戰爭](河出書房新社, 2012), 마쓰우라 레이, [사카모토 료마 평전](더숲, 2009), 시바 료타로, [명치라는 국가](이십일세기정보전략연구소, 1994), 아사오 나오히로 외, [새로 쓴 일본사](창작과비평사, 2003), 우치무라 간조, [대표적 일본인](기파랑, 2011), 이시이 다카시, [메이지유신의 무대 뒤](일조각, 2008), 장인성, [메이지유신 : 현대 일본의 출발점](살림, 2014), 함동주, [천황제 근대국가의 탄생](창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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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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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5.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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