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보신전쟁(戊辰戰爭) (2) - 근대 일본을 만든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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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36회 작성일 16-02-07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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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보신전쟁(戊辰戰爭) (1)

2.보신전쟁(戊辰戰爭) (2)

3.보신전쟁(戊辰戰爭)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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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벌(天罰)은 정벌을 부르고





“덴츄(天誅)!”

1863년, 에도, 교토, 오사카 등의 거리에는 이런 새된 부르짖음에 이은 칼 부딪치는 소리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양이파 검사들이 개국파, 또는 막부파 인사들을 습격하는 일이 연간 70회 이상 벌어졌다. 그 1년 전에는 에도에서 조슈 양이파가 영국 공사관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사쓰마에서는 “나마무기(生麥) 사건”이 일어났다. 영국 상인 찰스 리처드슨이 번의 최고 어른이던 시마즈 히사미쓰 앞을 말을 탄 채 가로지르다 그 자리에서 참살되었던 것이다. 안세이의 대옥을 진두지휘했던 이이 나오스케 역시 암살되었다. 막부에서는 양이파에 대항하고자 새로 ‘신센구미(新選組)’를 조직했으며, 이에모치 쇼군이 직접 교토로 가서 일왕을 뵙고 ‘정권을 다시 위임해 주시기를’ 청원했다. 일왕이 주장하는 공무합체를 막부도 추구할 것임을 다짐하면서, 다만 과격한 양이파들과는 선을 확실히 그어 달라는 요청을 한 셈이었다. 앞서 오랜 고민 끝에 자신의 이복여동생인 가즈노미야 지카코를 이에모치에게 시집보냈던 고메이 일왕도 저자세로 나오는 쇼군에게 호의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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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센구미가 조슈 지사들을 습격한 이케다야 터. <출처 (cc) mariemon at wikimedia.org>



그러나 갈등은 점점 악화되어, 소수의 칼싸움을 넘어 집단적 무력 충돌로 비화했다. 1863년 8월에는 나마무기 사건을 빌미로 영국 함대가 사쓰마로 진격해 포격전을 벌이는 “사쓰에이(薩英) 전쟁”이 벌어진다. 교토에서는 그와 거의 때를 같이해 “분큐(文久)의 정변”이 일어났는데, 양이파의 과격성을 우려한 일왕의 의중을 살핀 공무합체파가 조슈 번의 병력을 교토에서 몰아냈다. 이는 다시 1864년 6월, 울분에 찬 조슈 양이파들이 역습을 노리다가 선수를 친 막부의 신센구미에게 습격받아 다수가 살해되는 “이케다야(池田屋) 사건”으로, 그리고 7월, 조슈 양이파가 일왕을 납치해 정국을 주도하려 일으킨 “금문(禁門)의 변”으로 이어진다. 금문의 변에서는 궁성 내부에까지 포탄이 떨어지는 가운데 일왕이 허겁지겁 대피하고, 교토에서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져 약 3만 가구가 불에 타는 등 사실상 내전 상황이 연출되었다. 한편 1864년 3월에는 미토 번에서 후지타 도코의 아들인 후지타 고시로 등이 막부 타도를 외치며 거병했다가 진압되는 “덴구당(天狗黨)의 난”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겉보기로는 양이파가 막부파 내지 공무합체파에게 밀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1864년 말에서 1866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 “조슈 정벌”을 계기로 분위기는 역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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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막말 정변의 설계자, 이와쿠라 토모미.







삿쵸 동맹과 대정봉환



조슈는 1861년에만 해도 나가이 우다의 “항해원략책”을 내세우며 공무합체론과 개국론을 지지하는 친막부적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후 기도 다카요시를 비롯한 양이파 지사들이 번의 공론을 장악했고, 1863년에서 1864년까지 양이-도막론의 중심에 서면서 외국 세력 및 막부와 정면충돌하게 되었다. 1864년 8월, 앞서 조슈가 일으킨 도발을 응징하고자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 4개국 함대가 시모노세키 앞바다에 몰려들어 포격전을 펼쳤다. 조슈는 완강히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고, 4개국에 머리를 숙이자 이번에는 막부에서 금문의 변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고 나섰다. 이에모치 쇼군은 사쓰마, 도사, 히젠 등 조슈 인근의 여러 번에 출정 명령을 내리고 토벌군을 친히 지휘하려 했으며, 서양 4개국과의 대결에서 이미 지쳐 있던 조슈로서는 막부군에 대항할 힘도 명분도 부족했다.

그러나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는데, 사쓰마를 비롯한 여러 번들이 조슈 정벌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인 것이다. 당황한 막부는 실력 행사 대신 설득으로 방향을 바꿨고, 결국 조슈 번에서 금문의 변과 깊이 관련된 중신 세 명의 목을 바침으로써 제1차 조슈 정벌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 여러 번들이 조슈 정벌에 소극적이었던 까닭은 복합적이었는데, 번 내에서 ‘혼자서 막부뿐 아니라 서양 4개국과 장렬히 싸워온 조슈’에 대한 동정론이 팽배했고, 번주의 입장에서는 이제 서양과의 무역이 본격화된 마당에 막부가 무역권을 독점하고 있던 것이 못내 불만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독자적으로 서양과 교역할 수 있다면 막대한 이익을 볼 텐데’하는, 양이론과는 정반대의 꿍꿍이가 있었기에 막부의 권위를 높이는 일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제대로 간파하고, 틈을 비집고 들어감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삿쵸(薩長)동맹”이었다. 도사 번 출신의 사카모토 료마는 사쓰마와 조슈, 두 웅번이 힘을 합친다면 막부를 쓰러트릴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전력으로 이들을 설득했다. 두 번은 본래 도쿠가와를 좋아하지 않는 점에서 입장이 비슷했다. 그러나 사쓰에이 전쟁으로 외세의 힘을 실감한 사쓰마는 적극적인 개국론을 주장하게 되고, 따라서 양이론을 고집한 조슈와는 길이 갈라졌다. 분큐의 정변이나 금문의 변 과정에서 사쓰마가 조슈를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함에 따라 두 번은 거의 원수지간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료마의 중재는 차차 힘을 발휘했고, 조슈도 무조건적인 양이론의 비현실성을 실감한 상태에서, 존왕양이와 막부 타도라는 목표에서 양이를 슬쩍 유보한 ‘왕정복고’의 기치 아래 마침내 두 번은 손을 잡았다(1866년 3월).

이와 때를 같이해 제1차 정벌 이후 망명했던 기도 다카요시 등의 양이파도 다시 복귀해 조슈의 정권을 장악하니, 막부는 제2차 조슈 정벌에 나선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더 나빴다. 사쓰마를 비롯한 번들이 막부의 명령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가운데 거의 혼자 힘으로 조슈와 맞섰으나, 신식 무기와 정에 병력으로 덤비는 조슈 군을 당하지 못하고 참패한다. 게다가 친정에 나섰던 이에모치 쇼군이 각기병으로 오사카 성에서 사망하고 만다. 1866년 7월, 그의 나이 겨우 스물이었다. 정벌이 실패로 돌아간 가운데 차기 쇼군의 자리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돌아갔다. 그는 미토 번 출신으로, 안세이 대옥 때는 아버지인 전 미토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와 함께 처벌을 받기도 했던 ‘반체제 인사’였다. 그가 쇼군으로 뽑혔음은 반 막부 세력을 달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반영한 것이었으나, 요시노부는 일본사 최후의 쇼군이 되고 만다.

1867년 1월, 고메이 일왕이 사망한다. 37세로 아직 젊은 나이의 급작스러운 죽음이었으므로 암살 의혹이 일었으나 분명한 증거는 없었다. 아무튼 초지일관 양이론과 공무합체론을 펼쳐온 그가 사라지고, 이제 16세인 무쓰히토(메이지 일왕)가 계승함으로써 정국은 더더욱 막부에 불리해졌다. 메이지는 아버지와 달리 외국 문물에 호의적이었던 데다, 구게 중에서 존왕론의 중심인물이던 이와쿠라 토모미에게 새 일왕 즉위에 따른 대사령으로 족쇄가 풀린 양이파들, 이제는 ‘유신지사’라 불러야 할 반막부 인사들이 힘을 합침으로써 그동안 공무합체를 내세워 조정의 권위를 업고 있던 막부 쪽은 명분과 세력 양면에서 고달픈 처지가 되었다.

결국 1867년 10월에 사쓰마와 동맹을 맺은 도사 번에서 요시노부 쇼군에게 “대정봉환(大政奉還)”, 즉 위임되어 온 대권을 왕에게 반환하는 결정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으며, 조정이 삿쵸에 밀명을 내려 막부를 토벌하려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을 실행한다. 1867년 10월 14일이었다. 그러나 “천황이 아직 연소하시므로 당분간 외교권은 막부가 유지한다”고 천명하고, 정이대장군의 직책과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로 되어 있는 막부 직할령도 그대로 보유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권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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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봉환도.



이에 조정과 막부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다가, 1867년 12월 9일에 이와쿠라 토모미와 사츠마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이 모의하여 어전회의에서 “왕정복고의 대호령”이 나오게 되었다. 일왕이 외교권을 포함 전권을 행사하며, 요시노부를 정이대장군에서 물러나게 하고(해임이라기보다 직책 자체의 폐지로), 그 영지도 일체 반환하도록 한다는 내용이었다. 막부와 외국은 이를 일종의 쿠데타로 간주했다. 막부 체제의 법규로는 그런 일을 쇼군과 협의도 없이, 아직 어린 일왕의 독단으로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외국은 서로 입장 차이를 보이는 가운데(영국은 신정부, 프랑스는 막부를 응원하였다) 당분간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고, 요시노부는 “호령을 기꺼이 받들고 싶으나 직속 부하들의 동요를 살피는 게 먼저”라는 모호한 대답을 했다. 이제 전쟁의 도화선은 기름이 듬뿍 먹여진 채 작은 불꽃만 튀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불꽃은 12월 23일, 에도에서 튀어올랐다. 에도 성에 누군가 방화를 하자 막부군은 에도 성 안에 있던 사쓰마 번 공관의 수비병들을 의심했고, 싱갱이 끝에 총격전이 벌어지고 사쓰마 공관이 불타 버리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에 양측은 모두 상대방의 잘못이라며 흥분했다. 결국 조정에 대항하기를 주저해온 요시노부는 “최근의 사태는 불충한 일부 구게와 사츠마, 조슈가 어린 천황을 겁박하여 벌어진 일이니, 조정을 위하여 역적들을 치고자 하나이다”라는 출사표를 교토로 보내고는 에도에서 거병했다. 때는 1868년 1월 1일, 무진년(戊辰年)이 막 시작되었을 때였다. 보신(戊辰) 전쟁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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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바 - 후시미 전투도.






날뛰는 말과 휘날리는 깃발 - 도바 후시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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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 전쟁에서 사용된 금기(錦旗).



무진년에 시작했다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전부터, 적어도 조슈 정벌 때부터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고 봐도 좋을 보신 전쟁. 그 전쟁은 또 시작하자마자, 사실상 한 번의 전투로 적어도 절반 이상이 끝나 버렸다. 그것은 조정에 대항하면서도 조정을 받들 수밖에 없는 막부의 모호한 정체성 때문이었다.

당시 사쓰마-조슈 동맹군이 거의 전부였던 신정부군은 오천, 막부군 만 오천 이상의 병력이었다. 그러나 신정부군은 무기와 훈련 수준이 높았던 반면, 막부군은 프랑스식으로 조련한 정예병에 갑자기 동원되어 끌려나온 농민병이 혼재함으로써 신정부군을 압도할 전력상 우위는 없었다. 싸움은 막부 직속 보병대는 도바 가도로, 아이즈 번 및 구와나 번 병력과 신센구미는 후시미 가도로 길을 나눠 교토로 진격하다가 먼저 도바 가도에서 충돌이 일어나면서 시작되었다. “길을 비키지 않으면 힘으로 뚫고 나가겠다!”는 막부 측 타카가미 토모하카의 외침에 신정부군(사쓰마 번군)이 포격으로 응답하고, 포탄 한 발이 막부군의 포좌에 명중하여 큰 폭발이 일어나자 말 한 마리가 놀라 도바 가도를 내달렸다. 주인 없는 말이 괴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달려가는 모습을 막부 병사들은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왠지 불길한 전조처럼 여겨졌다. 후시미 쪽에서 폭발 소리를 들은 실질적인 신정부군 총사령관 사이고 다카모리(정식 사령관인 닌노지미야 요시아키는 오래 승려 생활을 한 인물로 군사 문제에는 백지였다)는 “이 포성은 실로 백만의 우군과 같았다”고 술회했다.

도바, 후시미 두 곳 모두 막부군의 병력이 우세했으나, 신정부군은 화력을 집중시켜 적의 전열을 흐트러뜨리면서 정예 병력으로 종심 돌파를 시도함으로써 승기를 잡았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대포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바로 금기(錦旗)였다. 일왕의 명을 받아 움직이는 관군이라는 표시인 이 깃발은 사실은 아직 정식으로 내려지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대정봉환 즈음에 이와쿠라 토모미 등이 모의하여 미리 사적으로 대량 제작해 보관해온 것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적진에서 나부끼는 금기를 본 상당수 막부군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특히 농민들은 ‘우리는 역적을 토멸하는 관군이라는 소리를 듣고 이 자리까지 왔다. 그런데 이제 보니 우리야말로 역적으로 몰릴 형편이 아닌가?’ 생각한 나머지 무기를 던지고 줄행랑치기 시작했다. 자신만만한 호령으로 전투의 막을 열었던 타카가미 토모하카도 도망쳤다. 전투 이틀 만에 패색이 짙자 막부군은 일단 후퇴하기로 하고 요시노부 쇼군과 가까웠던 요도(淀千) 번의 성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뜻밖에 요도 번은 신정부군에 붙어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추격해온 신정부군과 교전하여 또 크게 패배한 막부군은 그 다음 날에는 오토코산(男山)의 좌우에 포진하여 유리한 지형에서 적과 싸우려 했으나, 이번에는 쓰(津) 번이 배반하여 후방에서 막부군을 공격해왔다. 금기의 위력은 병사 차원만이 아니라 번 차원에서도 막부를 뒤흔들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막부군은 결정적으로 패배한 채 오사카 성으로 퇴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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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도 성에서 퇴각하는 막부군.



그런데 금기의 힘으로 사기가 결딴난 쪽은 그뿐이 아니었다. 총사령관 스스로까지 금기 앞에 좌절했다! 오사카 성에서는 앞으로의 대책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는데, 대장들은 ‘시급한 것은 떨어진 사기를 올리는 일이다. 쇼군께서 친히 진두에 서시면 병사들의 사기가 회복될 것이다’며 쇼군의 적극적인 행동을 촉구했다. 반면 아이즈 번의 가로였던 진보 쿠라노스케는 ‘에도로 돌아가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분노한 무인들의 기세에 눌려 냉정한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요시노부 쇼군이 ‘다수의 뜻대로 내일 싸움에는 앞장서겠다’고 하여 회의는 끝났다. 그러나 그날 밤, 요시노부는 아이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구와나 번주 마쓰다이라 사다아키, 진보 쿠라노스케 등 소수의 사람들만 데리고 몰래 성을 빠져나와 배를 타고 에도로 돌아가 버렸다. 총사령관의 ‘탈영’이었다! 날이 밝고 쇼군이 사라졌음을 안 대장들은 낙심천만하여 오사카에서 나와 각자의 영지로 돌아갔고, 전투는 끝났다. 훗날 요시노부는 ‘금기가 나오자 싸울 뜻이 사라졌다’고 술회했다. 그가 천하의 겁쟁이여서 결국 막부의 시대를 끝장냈다는 평가가 오래도록 이어지고 있지만, 그는 ‘쇼군은 왕명을 받들어 싸우고 다스리는 자’라는 명분을 끝내 외면하지 못했던 것이다.

요시노부는 그 뒤로도 한동안 갈팡질팡한 모습을 보였다. 1월 15일에는 영국 등 외국에 “외교권은 아직 내게 있으니 교토 정부와 단독 협상하면 조약 위반이다”라고 경고했다가, 1월 17일에는 교토로 “도바-후시미 전투는 제 뜻이 아니고 일부 강경파의 소행이었으니 용서해주시기 바란다”라고 서한을 보냈다가, 19일에는 프랑스의 로시 공사와 회견하며 “지금 신정부라는 것은 사실상 삿쵸 동맹일 뿐이며, 저들이야말로 역적”이라고 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2월 12일에는 마침내 입장을 분명히 했다. 에도를 나와 우에노의 칸에이지(寬永寺)에 칩거하면서 ‘근신’하기로 한 것이다. 이제 2백여 년 만의 동-서군 대결에서 동군의 대표는 일찌감치 전선에서 퇴장하고, 싸움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 Romulus Hillsborough, [Samural Revolution](Tuttle Publishing, 2014), 도널드 킨, [메이지 천황](다락원, 2002), 마리우스 잰슨, [현대일본을 찾아서](이산, 2006), 太田保世, [戊辰戰爭と東北の格差](勉誠出版, 2012), 箱石大, [戊辰戰爭の史料學](勉誠出版, 2012), 木村幸比古, [圖說 戊辰戰爭](河出書房新社, 2012), 마쓰우라 레이, [사카모토 료마 평전](더숲, 2009), 시바 료타로, [명치라는 국가](이십일세기정보전략연구소, 1994), 아사오 나오히로 외, [새로 쓴 일본사](창작과비평사, 2003), 우치무라 간조, [대표적 일본인](기파랑, 2011), 이시이 다카시, [메이지유신의 무대 뒤](일조각, 2008), 장인성, [메이지유신 : 현대 일본의 출발점](살림, 2014), 함동주, [천황제 근대국가의 탄생](창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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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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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5.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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