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보신전쟁(戊辰戰爭) (3) - 근대 일본을 만든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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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45회 작성일 16-02-07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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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보신전쟁(戊辰戰爭) (1)

2.보신전쟁(戊辰戰爭) (2)

3.보신전쟁(戊辰戰爭)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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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를 점령하라!



쇼군 부재의 상황에서 ‘막부를 위해 계속 싸우자!’는 입장을 내세운 사람들로는 아이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쇼나이 번주 사카이 타다즈미, 그리고 막부군의 장군 에노모토 다테아키, 요시노부의 가신이던 시부사와 세이이치로, 코요진부다이(甲陽鎮撫隊)로 이름을 바꾼 신센구미의 곤도 이사미 등이 있었다. 1868년 2월에는 시부사와 세이이치로 등이 쇼군이 칩거 중인 우에노를 중심으로 쇼기다이(彰義隊)를 창설했고, 그 며칠 전에는 신정부가 다루히토 왕자를 동정대총독(東征大總督)에 임명하여 에도로 출정시켰다. 동정군은 히코네(彦根)를 통하는 도산도(東山道)와 나고야, 슨푸를 통하는 도카이도(東海道) 두 길로 나뉘어 에도로 진군했다. 에도에서는 도산도상에 있는 요충지인 고후를 먼저 점령하도록 코요진부다이를 출정시켰는데, 거리가 훨씬 가까웠음에도 악천후 등으로 시일을 허비하여 신정부군의 이타가키 다이스케(도사 번), 이지치 마사하루(사쓰마 번) 등이 먼저 고후에 입성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수 백에 불과했던 코요진부다이는 삼천의 신정부군을 상대로 분전했으나 결국 패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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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노 전쟁도.



한편 도카이도의 신정부군은 3월 초 에도에 도달했고, 3월 15일부터 에도를 두들겨 부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영국 공사 해리 파크스의 중재로 신정부군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에도 측의 가쓰 가이슈 사이에 4월 3일 회담이 이루어지고, 에도는 4월 11일에 정부군의 무혈입성을 허용했다. 그러나 에도 전체가 신정부군에게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다. 막부군의 에노모토 다테아키, 오토리 게이스케, 신센구미의 히지카타 토시조 등이 11일을 전후해 에도를 탈출했다. 이들 중 일부는 후나바시 신궁(船橋神宮)에서 신정부군과 격돌했으나 패퇴하고, 그 패잔병들은 일부 번에서 병력을 충원하여 우쓰노미야 성을 점령해 농성했지만 4월 23일, 신정부군의 대대적인 포격전에 견디지 못하고 붕괴한다. 또 다른 쪽은 쇼기다이, 아이즈 번 병력 등과 합세해 전투를 계속했다.

쇼기다이는 근신 중인 쇼군의 경호가 원래 목적이었으나, 에도 입성과 함께 쇼군이 미토 번으로 옮겨지자 독자적으로 활동을 시작, 쇼군이 있던 간에이지에서 린노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을 중심으로 농성을 개시했다. 린노지노미야는 본래 일본 왕실에서 배분이 높은 사람이었는데, 조정과의 중재를 해달라는 막부의 간청을 받아들여 슨푸에 머물던 동정대도독 다루히토를 찾아가 요시노부에 관대한 처분을 해 줄 것을 부탁, 대략 수락을 얻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왕족임에도 막부를 돕는다 하여 신정부군 병사들에게 갖은 조롱과 모욕을 당한 일이 분했던지, 에도로 들어간 다음 쇼기다이의 설득에 넘어가 쇼군을 대행하게 된 것이었다.

5월 15일, 신정부군은 조슈 번의 오무라 마스지로가 지휘하는 일만 이천의 병력으로 우에노 간에이지를 포위공격했다. 이에 맞서는 쇼기다이는 삼천. 병력 차이도 차이였지만 신정부군은 쇼기다이가 상상도 못했던 신병기를 들고 나왔다. 외국에서 수입한 암스트롱포는 쇼기다이의 화기가 닿는 한참 밖에서 우에노를 마구 짓찧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위패가 모셔진 간에이지의 사당도 불을 뿜으며 무너져 내렸다. 쇼기다이도 우에노도 곤죽이 된 상황에서 신정부군의 정예병력이 구로몽(黑門)을 돌파해 들어왔다. 단 하루 만에, 쇼기다이의 희망은 짓밟혔으며 린노지노미야는 북쪽으로 달아나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의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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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다이 번이 전쟁 중 암스트롱포에 대항해 사용한 목제 대포. <출처 (cc) World Imaging>






전쟁의 불길 속에 꽃은 덧없이 지고



1868년, 무진년도 중반을 넘어가면서 전쟁은 다른 국면으로 들어갔다. 도바-후시미에서 막부군과 신정부군이 정면 충돌했던 것이 제1단계, 이후 쇼군이 퇴장하면서 친막부파의 잔당을 소탕하는 것이 제2단계였다면 다음 단계는 친막부 번들의 저항을 진압하는 과정이었다. 막부에 가장 충실했던 번인 아이즈는 쇼나이 번과 “아이쇼우(会庄) 동맹”을 맺었고, 센다이, 요네자와, 후쿠시마, 야마가타, 에치고 등등 도호쿠(東北) 지방의 번들은 “오우에쓰 열번(奥羽越列藩) 동맹”을 맺고 신정부에 대항했다. 그야말로 동군과 서군의 본격 대결인 셈이었다. 이렇게 전국이 치열해지면서 전쟁 특유의 장렬한, 또는 잔혹한 장면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정부군은 도바-후시미 전투 이래 고유의 군가를 부르면서 행군했는데, 이를 동양 최초의 군가로 보기도 한다.



각하! 각하! 저기 말 앞에 나부끼는 게 무엇입니까?

힘껏 싸워라! 힘껏 싸워라!

모르느냐? 그것은 역적을 토벌하라는 깃발이니라!

힘껏 싸워라! 힘껏 싸워라!


그 도바-후시미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는 “원군이 시급합니다. 단 1개 소대로 적의 맹공격을 막아내고 있습니다!” 하는 전령의 외침에 “보내 주마! 너희가 하나도 빠짐없이 전사한 다음에 말이다!”라고 대답했다 해서 명성을 얻었다. 막부군 측의 히지카타 토시조는 우쓰노미야 공방전에서 도망치는 아군 병사를 단칼에 베어버리고는 “퇴각하는 자는 누구든 이렇게 된다!”고 외쳐 사기를 돋웠다고 해서 역시 명성을 얻었다. 나카무라 가쓰고로의 한탄처럼 서로 입장은 정반대지만, 저마다 무사도에 따라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는 정신이 도쿠가와의 오랜 평화 끝에 살아나고 있는 듯했다. 아니, 그것은 정신 따위가 아니라, 순전한 광기, 명분은 어찌됐든 베고 죽이고 정복하고 싶다는 광기는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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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전쟁도.



전쟁이 길어지며 사무라이만이 아니라 소년과 소녀까지 전선에 등장하고 있었다. 1868년 7월, 신정부군은 아이즈 번과 오우에쓰 동맹이 힘을 합쳐 점령한 시라카와 성을 맹공격했다. 뺏고 빼앗는 공방전 속에 개전 이래 가장 많은 전사자가 나왔는데, 그 중에는 아이즈 번에서 온 ‘니모토마쓰 소년대’ 22명도 있었다. 20세의 기무라 쥬타로가 이끄는 이 소년대는 12세에서 17세의 소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시 전장이 아이즈 번 본진으로 옮겨진 8월, 아이즈 방위군에는 나카노 다케코가 이끄는 ‘여자대’와 소년으로 편성된 ‘백호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아직 10대였던 이들이 막번체제가 무엇이고 존왕양이가 무엇인지, 충성이란 무엇이며 왜 해야만 하는지, 알면 얼마나 알았겠는가. 그러나 쉽게 끓어오르는 그들의 젊음을 전쟁의 신은 철저히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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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지카타 토시조. ‘마지막 신센구미 조장’으로 최후까지 신정부에 항전했다.



가장 위험한 곳에 뛰어들어, 가장 허무하게 죽어간 그들. 특히 백호대는 한창 싸우던 중 와카마쓰 성에서 실수로 불이 일어나 검은 연기가 치솟는 것을 보고, ‘우리가 졌구나!’라고 오인한 나머지 전원 그 자리에서 할복하여 짧은 삶을 마쳤다는 전설을 남겼다. 그 ‘장렬하고 충의로운 정신’은 메이지의 세상에서도 오랫동안 미담으로 남아, 훗날 가미카제를 외치며 적진에 뛰어드는 젊은이들의 뇌리에까지 새겨질 것이었다.

1868년 7월 말, 시라카와 못지않은 끈질긴 공방전 끝에 에치고 번의 나가오카 성이 신정부군에게 떨어졌다. 이로써 중요한 무기 공급처를 잃은 막부군은 저항력이 바닥나기 시작했고, 동맹을 이탈하는 번들이 잇달아 나왔다. 9월 초, 오우에쓰 동맹 맹주로 추대되어 ‘동무(東武)황제’로까지 불리고 있던 린노지노미야는 신정부에 ‘참회서’를 보내고 개인적으로 항복할 뜻을 전했다. 막부군은 요시노부 쇼군에 이어 다시 한 번 지도자의 뒷꽁무니를 목격한 것이다. 9월 22일에 아이즈 번이 항복했으며, 며칠 뒤 에노모토 다케아키, 오토리 게이스케, 히지카타 토시조 등은 북쪽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이 전쟁의 마지막 전장으로 향하는 배였다.




머나먼 북쪽에서 싸움은 끝나다



일본 최북단의 홋카이도는 그 넓이(남한보다 약간 작은 정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혹한지로서 인구가 많이 살지 않는다. 에조(蝦夷)로 불리며 야만족이 우글대는 변방 취급을 받고 있던 1860년대 당시에는 지금보다 더했다. 그러나 1868년 12월, 센다이를 거쳐 아이즈에서 건너온 에노모토 다케아키 등은 이 지역을 다스리던 하코다테로 쳐들어가서 서양의 트라스 이탈리엔 축성법에 따라 지어진 독특한 요새, 고료가쿠(五稜郭)를 점령했다. 언젠가 이리로 서양인들이 침략해 올 것을 대비해 서양식으로 지은 성이었는데, 정작 같은 일본인끼리의 내전에서 최후의 싸움터가 될 운명이었으니 묘한 일이었다. 에노모토는 더욱 묘한 일을 했다. 한편으로 지금껏 죽도록 싸워온 메이지 신정부에 “에조를 개척하고 싶으니, 우리를 에조 개척사업자로 승인해 달라”는 청원을 보냈다. 그리고는 고료가쿠에서 구 막부체제도 신정부 체제도 아닌, “민주주의 원칙에 따른 공화국 정부”를 수립했다. 대통령에 해당하는 총재에 에노모토가 앉고 부총재에 마쓰다이라 타로, 육군봉행(장관) 오토리 게이스케, 육군봉행 대우 히지카타 토시조 등의 인선이었다.

당연히, 메이지 정부가 뜬금없는 공화국을 인정할 리 없었다. 1868년 9월 말에 쇼나이 번의 항복을 받아 혼슈 동북 지방을 완전 평정한 신정부군은 곧바로 북쪽으로 진격했다. 아직도 막부 편이던 프랑스의 은근한 원조, 지리적 조건 등으로 쉽게 평정되지 않자, 미토 번주이자 요시노부 전 쇼군의 친동생이던 도쿠가와 아키타케를 토벌에 종군케 하여 적 군심의 동요를 노리기도 했다. 또 12월 말에는 당초 막부가 주문한 것이나 외국의 중립 방침에 따라 일본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던 미국 전함, 스톤웰 잭슨 호도 입수하여 홋카이도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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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고료가쿠의 전경. <출처 (cc) 京浜にけ>



싸움은 1869년의 새해가 밝은 뒤에도 한동안 이어졌지만, 모든 면에서 ‘에조 공화국’이 불리함은 불을 보듯 뻔했다. 히지카타 토시조는 미야코 항에 정박 중이던 신정부군의 신식 전함을 탈취해 전력 차이를 뒤집자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지만, 실패한다. 이후 일방적인 전투 속에서 프랑스 군사고문단이 먼저 탈출하고, 나가이 타카시 등 동지들도 승산 없는 싸움과 굶주림에 지쳐 항복했으나 에노모토, 히지카타 등은 항전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1869년 4월 말, 신정부군이 원군을 받아들이고 전열을 일제히 점검하는 모습이 보였다. 5월 11일, 총공격으로 고류가쿠를 함락시킬 참이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에노모토 등은 그 하루 전날 밤에 거나한 술잔치를 벌였다. 마치 “저녁은 지옥에서!”를 외치던 3백 명의 스파르타 전사들처럼, 이승에서의 마지막이 될지 모를 잔치를 즐겼던 것이었다. 최후의 신센구미 조장, 히지카타는 휘영청 빛나는 달을 바라보며 즉흥시를 지었다. “칼끝에 빛나는 달빛이여, 참으로 사랑스럽도다. ......비록 내 육신은 에조의 흙에서 썩더라도, 내 영혼은 언제까지나 동쪽의 주군을 지키리라.”

다음 날 아침, 신정부군은 예정대로 총력으로 공격했다. 히지카타는 5백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응전하여 용맹스럽게 분투했으나, 총알 세례를 받고 쓰러졌다. 그래도 그 분투에 힘입었던지 함락은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이미 싸움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일주일 뒤, 마침내 고류가쿠 성 위에 백기가 올랐다. 1869년 5월 18일, 보신 전쟁의 종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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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사절들과 보신 전쟁의 종결을 축하하는 메이지 일왕.






살아남은 자의 슬픔



전쟁이 끝나고, 곧바로 이루어진 처분은 옛날 동서 대전 때와 다름없어 보였다. 사쓰마, 조슈 등 정부 편에 선 번은 봉록이 올랐고, 아이즈, 센다이 등 반대편에 선 번은 감봉 및 일부 인사의 처결을 당했다. 그러나 이 일련의 과정, 개국과 보신 전쟁이라기보다 ‘메이지 유신’으로 불리게 될 이 과정의 끝은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막번 체제의 모순점과 서양 열강과 경쟁해야 할 필요성은 오랜 봉건체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정부는 1869년에 “판적봉환(版籍奉還)”, 1871년에 “폐번치현(廃藩置県)”을 실시하여 지방의 자율성을 없애고 모든 백성이 신분의 상하 없이 오직 국가에만 충성하도록 하였다. 세금도 병력 징집도 중앙정부에서 총괄하는 근대 국가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물론 갈 길은 아직 멀고 험했다. 특히 근대국가의 수립 결과 하루 아침에 실업자가 되고, 1876년의 폐도령(廢刀令)에 따라 생명처럼 여기던 칼도 차지 못하게 된 사무라이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메이지 정부는 외국 침략을 검토했다. 대만, 류쿠, 조선이 그 대상이었으며 특히 조선에 대해서는 대원군의 철저한 쇄국정책에 대한 반발에다 대륙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한론(征韓論)”이 일찍부터 나왔다. 그러나 논란 끝에 그 계획이 일단 무산되자 실망한 메이지 유신 3걸의 하나, 사실상 보신 전쟁 최고의 공로자였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고향 가고시마로 돌아가 있다가 1877년에 반란을 일으킨다. 이른바 “세이난(西南) 전쟁”이었다. 여기서 가고시마가 진압되면서 사무라이의 시대는 종말을 고한다. 사실 보다 앞서 보신 전쟁에서, 사무라이의 칼보다 신식 소총과 암스트롱포, 회전식 기관포 등이 전세를 장악했던 때, 이미 종말은 내려져 있었다고 하겠지만. 존왕양이라는 이상을 꿈꾸던 사무라이들의 비분강개에 힘입어 이루어진 메이지 유신과 보신 전쟁. 그러나 그 막이 내릴 즈음 살아남은 것은 존왕도(중국이나 조선 같은 왕정이 아닌 입헌군주정이 되었으므로), 양이도, 유신지사들도 아니었다. 그 전쟁은 전쟁터에 돋아난 여름 풀처럼 덧없는 것이었을까? 장차 일본인, 한국인, 중국인 등 수많은 동아시아인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게 될 군국주의 괴물이 태어나는 요람이었을 뿐일까? 아니, 그 전쟁을 통해서도 역사는 분명 진보의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의 본보기, '이상의 실현은 오직 무력으로서만 가능하다'는 본보기는, 그런 진보의 대가로 지나치게 큰 슬픔을 요구하게 된다.

참고문헌

  • Romulus Hillsborough, [Samural Revolution](Tuttle Publishing, 2014), 도널드 킨, [메이지 천황](다락원, 2002), 마리우스 잰슨, [현대일본을 찾아서](이산, 2006), 太田保世, [戊辰戰爭と東北の格差](勉誠出版, 2012), 箱石大, [戊辰戰爭の史料學](勉誠出版, 2012), 木村幸比古, [圖說 戊辰戰爭](河出書房新社, 2012), 마쓰우라 레이, [사카모토 료마 평전](더숲, 2009), 시바 료타로, [명치라는 국가](이십일세기정보전략연구소, 1994), 아사오 나오히로 외, [새로 쓴 일본사](창작과비평사, 2003), 우치무라 간조, [대표적 일본인](기파랑, 2011), 이시이 다카시, [메이지유신의 무대 뒤](일조각, 2008), 장인성, [메이지유신 : 현대 일본의 출발점](살림, 2014), 함동주, [천황제 근대국가의 탄생](창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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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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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5.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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