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1915년 서부전선 [2] - 잊혀진 그해 격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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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87회 작성일 16-02-07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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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아르투아 전투의 결과



프랑스의 공세는 보름도 되지 않아 서서히 한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애당초 충분한 포병 전력을 준비하지 못했기에 곳곳에서 문제가 속출하였던 것이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화력 지원에 나섰지만 중포들은 기동력이 부족하였고 애당초 설정한 작전 구역도 너무 넓었다. 반면 독일은 지난 1차 이프르 전투 이후 동부전선으로 일부 전력이 차출되었지만 방어로 전환하면서 진지는 더욱 단단하게 축성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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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전략적 방어로 노선을 수정하면서 참호를 더욱 단단히 강화하였다.



프랑스는 독일의 방어막에 막혀 계속 제자리를 맴돌아야 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희생만 늘어나 1915년 1월 20일이 되었을 때 결국 진격을 멈추어야 했다. 그러자 곧바로 독일군이 반격을 개시하여 프랑스군을 밀어내었으나 그들도 기세를 계속 유지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프랑스는 2월 16일 다시 공세를 재개하였지만 상황은 한 달 전과 다르지 않았다. 프랑스건 독일이건 계속하여 전선의 주도권을 잡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처럼 주고받기 식으로 이루어진 격전은 돌출부 양쪽으로도 확산되어 어느덧 서부전선 전체에서 일상화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제1차 대전 당시에 서부전선에서 벌어진 지옥의 격전들이 워낙 많다 보니 1914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프랑스가 벌인 동계공세를 소홀히 취급하는 경향이 많지만 프랑스가 25만, 독일이 15만의 사상자를 냈을 정도로 내용은 상당히 격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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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1914년 동계공세는 실패하였지만 독일도 더 이상 전쟁을 확대하기 곤란한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선의 변화는 없다시피 하였고 결국 3월이 되자 프랑스는 작전을 중지하여야 했다. 조프르는 “이제 프랑스가 우위에 섰다”고 선언하지만 군사적으로 1차 아르투아 전투(First Battle of Artois)는 참담하게 실패한 작전이었다. 그런데도 우위를 주장하였던 이유는 프랑스의 패망을 막았다고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1870년에 있었던 보불전쟁처럼 프랑스가 참담하게 굴복할 가능성은 사라진 것이 확실했다.




따로 놀기



조프르는 처음 동계공세를 준비할 때 전선 북쪽을 담당하던 영국군도 함께 공격에 나설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1]편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영국군은 아직 손실을 회복하는 데 급급할 만큼 상황이 나빴고 더구나 오스만 제국을 침공하기 위해 일부 병력을 차출하기까지 했다. 결국 마음만 급했던 프랑스는 공세로 전환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서둘러 작전을 펼치다가 낭패를 보았던 셈이다.

어이없지만 이처럼 같은 편 정황까지 제대로 모르고 있었을 만큼 프랑스와 영국은 별개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던 1918년에 가서야 겨우 연합사령부 결성에 합의할 정도였으니 그 이전의 난맥상은 굳이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다. 영국원정군 사령관 프렌치(John French)의 주도로 1915년 3월 10일부터 실시된 누브 샤펠 전투(Battle of Neuve Chapelle)도 전쟁 초기의 협조 미비를 여실히 보여주었던 예다.

어처구니없지만 프랑스의 동계공세가 막을 내리던 그 시기에 영국은 별도의 공세를 계획하고 있었다. 당연히 공세를 벌인다면 프랑스와 영국이 사전에 치밀히 협조하여 함께 움직이는 것이 좋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영국군이 한창 재편 중일 때 제대로 의사타진도 하지 않고 부족한 전력으로 서둘러 공세에 들어갔고 정작 영국군이 준비를 마치고 공격에 나서려 하자 두 달간 이어진 공세를 유야무야 끝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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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 총사령관 조프르(좌)와 영국원정군 사령관 프렌치. 연합군은 작전 실시와 관련하여 협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사전 협조 미비로 공세 날짜를 조율하지 못한 덕분에 영국은 단독으로 라 바세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누브 샤펠 공략에 나섰다.




결국 3월 10일 영국은 단독으로 공세에 나서야 했다. 프렌치는 영국 쪽으로 돌출된 누브 샤펠을 점령하고 있던 독일군 바바리아 7군단을 몰아내고 전선을 단축하기로 결심하였다. 인도군단과 제4군단으로 구성된 영국 제1군이 작전에 나설 예정이었는데, 지휘는 헤이그(Douglas Haig)가 담당하였다. 프렌치는 영국원정군이 보유한 재고의 20퍼센트에 해당되는 포탄 10만 발과 4.5인치 중포를 포함한 60여 문의 야포를 헤이그에게 지원해 주었다.




누브 샤펠 전투의 결과



서둘러 참전하면서 그동안 화력 부족 때문에 겪었던 고통이 이번에는 없을 것 같았다. 또한 사전 항공 정찰을 통해 독일군의 배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여 포병에게 공세와 더불어 타격할 목표물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알려주었다. 한 달 전에 실패로 끝난 프랑스의 동계공세에 비해 작전 규모가 훨씬 작았지만 준비는 철저하였다. 그런 만큼 초전의 모습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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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브 샤펠 전투 기록화. 영국은 초전 기습으로 돌출부 제거에 성공하였지만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여야 했다.



35분간 90여 발의 포탄이 독일군 참호에 정확히 내리꽂혔고 곧바로 약 3km의 전선에서 보병들이 일제히 진격하여 우왕좌왕하던 독일군을 몰아내고 1km를 전진하는 데 성공하였다. 적어도 작전 첫날 프렌치가 목표로 하였던 돌출부를 제거하면서 목표를 달성한 것은 맞았다. 하지만 곧바로 독일군의 증원부대가 속속 투입되면서 이미 후방에 견고하게 구축하여 놓은 방어 진지를 점령하고 강력히 저항하자 더 이상 전과를 확대하기 어려웠다.

보병의 진격에 발맞추어 포병도 이동을 하면서 화력을 계속 지원해 주어야 하지만 영국은 그런 점을 소홀히 하였다. 초전의 모습은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였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덕분에 하루가 지나자 전선의 모습은 이전처럼 상대편 참호로 진격하다가 기관총의 세례에 사라져가는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둘째 날이 되자 오히려 노출되어 있던 영국군의 희생이 더욱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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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 포병의 지원은 훌륭하였으나 보병의 진격 속도를 맞추지 못해 시간이 흐를수록 고전하였다.



헤이그는 포병의 이동을 완료하였지만 정작 이렇게 피아가 가까이 엉겨붙어서 싸울 때는 지원할 수 없었다. 결국 늘어나는 희생을 감당할 수 없던 헤이그가 3월 12일에 공세를 중단하면서 누브 샤펠 전투는 막을 내렸다. 영국은 일단 돌출부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불과 3일 동안 13,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독일도 12,00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지만 애당초 전력이 열세였고 초전 기습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선방한 전투였다.




혈전의 무대가 될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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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려면 되도록 돌출부를 제거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독일군과 연합군 모두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선이 정리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전쟁 내내 양측의 전략이 상충된 아르투아 일대에서 격전이 계속되었다.



1차 이프르 전투 이후부터 이처럼 벨기에의 플랑드르와 연결된 프랑스 북부의 아르투아 일대에서 치열한 교전이 계속 벌어지면서 이곳은 서부전선의 핵심지역으로 떠올랐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곳을 중심으로 전선이 돌출되었기 때문이다. 고착된 전선은 방어에 유리한 지형지물을 따라 형성되기는 하지만 어느 한 곳이 툭 튀어 나온 것은 경계나 전력의 운용 면에서 상당히 어려움이 많다.

그래서 되도록 돌출부를 제거하여 전선을 펴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한국전쟁 당시 휴전선의 전략적 위치를 고려하여 개성을 포기한 사례도 있지만 한창 공방이 오갈 경우에는 일단 자신들이 점령하고 있는 곳을 기준으로 전선을 일직선으로 단축시키고자 한다.

결국 돌출부를 제거하겠다는 명분은 같았지만 독일은 솜(Somme) 강까지 진격함으로써, 반대로 프랑스는 아벤느(Avesnes)까지 탈환함으로써 이루기를 원했다.

아르투아는 이처럼 양측 모두 제일 먼저 돌파하여야 할 곳에 위치하여 결국 어느 한 쪽이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지 않는 한 혈전의 무대가 될 운명이었다. 더구나 참호전으로 상징되는 제1차 대전의 서부전선은 1914년 11월을 넘어서면서부터 지도상에 그어진 전선의 움직임이 거의 없을 정도로 팽팽한 대치가 계속되다 보니, 대치의 양상이 상당히 격렬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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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이프르 전투 당시 파괴된 클로스 홀. 5개월 만에 다시 격전의 현장으로 바뀔 운명이었다.



전선이 고착된 이후부터 더 이상 전쟁 초기의 폭풍 같은 진격이 불가능하여 비록 어느 한 쪽이 전선의 일각을 점령하였더라도 곧바로 반격이 이루어졌기에 결코 안심할 수 없었다. 같은 곳을 두고 여러 차례 전투가 벌어진 것은 당연하였다. 그중 1914년 가을에 전투가 벌어졌던 이프르(Ypres)가 가장 대표적인 격전지였다. 당시 어느 쪽도 승리를 주장하지 못한 상태로 전투가 종결되었기에 다시 싸움이 벌어질 것은 확실하였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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