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1915년 서부전선 [3] - 잊혀진 그해 격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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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854회 작성일 16-02-07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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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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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켄하인은 어쩔 수 없이 동부전선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었지만 서부전선에 대한 시선을 한 번도 거둔 적이 없었다. 그는 이프르를 다시 주목하였다. <출처: Het Leven, Spaarnestad Photo>



일단 여론에 밀려 동부전선을 우선하게 되었지만 팔켄하인은 여전히 서부전선에 미련이 많았다. 1914년 여름처럼 대대적인 공세를 펼칠 수는 없어도 전략적 우위는 계속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나름대로 지금까지는 선방하고 있었지만 독일이 방어로 전환한 직후부터 연이어 가해지고 있는 연합군의 공세를 그저 방관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서서히 살아나고 있는 연합군의 기를 꺾기로 결심하였다.

팔켄하인의 눈에 이프르가 들어왔다. 지난 번 공세에서 돌파구를 열었지만 8만의 희생을 보고 제풀에 주저앉았던 이유를 면밀히 분석한 그는 너무 목표가 과했다는 점을 인식하였다. 그래서 돌출부 제거보다 이제르(Yser) 강에서 이프르에 이르는 중간에 위치한 필켐 능선(Pilckem Ridge)을 장악하는 제한적인 작전을 구상하였다. 사실 전력보충은커녕 오히려 동부전선으로 차출당한 형편이다 보니 대대적인 공세로 나갈 수도 없었다.

만일 이곳을 독일이 점령한다면 연합군의 후퇴를 유도할 수는 없어도 이프르, 랑에마르크(Langemarck)를 견제할 수 있어 추후 작전을 펼치는 데 용이할 것은 틀림없었다. 이번에도 알브레히트 공작(Albrecht, Duke of Württemberg)이 이끄는, 7개 사단으로 구성된 독일 제4군이 공격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이들은 지난 1차 이프르 전투에서 손실을 입은 후 간신히 재편되었지만 전력이 많이 약화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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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패배 후 전력을 충원하여 재편된 독일 제4군이 다시 한번 이프르 점령에 나설 예정이었다.



반면 이곳의 방어는 인도,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에서 온 부대들로 구성된 영국 제2군과 알제리, 모로코 식민지에서 동원된 병력으로 구성된 프랑스군, 그리고 약간의 벨기에군으로 이루어진 총 8개 사단이 담당하고 있었다. 지난 전투 후 긴급 충원된 말 그대로 다국적 연합군들로, 병력은 약간 앞섰지만 우세를 장담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워낙 출신이 다양하여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악마의 노란색 안개



이처럼 독일이 쉽게 선공에 나설 수 있을 만큼 전력이 앞섰던 것은 아니었지만 팔켄하인이 공세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새롭게 투입한 무기의 효과를 믿었기 때문이었다. 제1차 대전의 지옥 같은 잔인함을 상징하는 또 다른 단어가 되어 버린 독가스였다. 독일의 화학자인 하버(Fritz Haber)가 만든 염소 가스는 인류의 전쟁사에 등장한 최초의 독가스는 아니었지만 전후 1925년에 있었던 제네바협정에서 사용을 금지하였을 만큼 치명적이고 잔인한 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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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가스를 살포하는 모습. 바람의 방향을 맞추어야 했으므로 공격을 하는 이들도 사용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무기였지만 살상력이 워낙 뛰어나 전쟁 후 국제조약을 통해 공식적으로 사용을 금지하였다.



종전 이후 전쟁사위원회에서 그라벤스타펠(Gravenstafel) 능선이라 명명한 이제르 강 남측에 위치한 프랑스군 진지를 향해 1915년 4월 22일 독일이 대대적인 포격을 개시하면서 2차 이프르 전투(Second Battle of Ypres)의 막이 올랐다. 포격이 끝난 후 진지에 매복해 있던 프랑스군은 곧바로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 독일군을 상대하기 위해 경계를 펼쳤지만 그들이 보았던 것은 마치 안개처럼 다가오는 노란색의 연기였다.

독일의 포격 종료 후 5,730개의 가스통에서 분출된 염소 가스가 프랑스군 방향으로 흘러들자 6km에 이르는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1만 명 정도의 프랑스군 병사 중 절반이 순식간에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일시적으로 눈이 멀어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틈을 노려 마스크를 착용한 독일군이 랑에마르크와 필켐을 순식간에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더 이상의 공격은 단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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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 참호를 점령한 독일군이 독가스 공격을 받고 고통 속에 죽어간 프랑스 병사를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참상을 목도한 병사들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꺼릴 정도였다.



일단 예비대가 부족하기도 했지만 독가스에 의한 참상을 직접 목도하면서 아직 가스가 제거되지 않은 곳까지 섣불리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사실 독가스는 1월 31일에 있었던 동부전선의 볼리모우 전투(Battle of Bolimów)에서 러시아군을 상대로 먼저 사용되었으나 풍향이 맞지 않고 가스통이 동결되어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하지만 2차 이프르 전투에 등장한 독가스는 사용하는 이조차 두려워할 만큼 무서운 위력을 발휘하였다.




위기 속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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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이프르 전투에서 영국 제2군을 이끈 스미스-도리언. 상당히 경험이 많고 유능한 인물이었지만 영국원정군 사령관 프렌치와 사사건건 충돌하여 결국 사임하였다.



잔인한 대량 살상 무기의 사용에 따른 비난과 별개로, 이처럼 독일은 돌파구를 신속히 열었지만 정작 후속 작전이 미흡하였다. 어쩌면 처음부터 목표로 하였던 필켐 능선을 확보하였기에 팔켄하인이 그 정도에서 만족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프르와 랑에마르크 사이가 텅 비어 있던 바로 이 순간이 제1차 대전을 통틀어 독일 쪽에서 전쟁의 향방을 가를 수 있었던 결정적 순간이었다.

만일 이때 독일이 충분한 예비대가 있어서 진격을 계속하였다면 영불해협까지 신속히 내달릴 가능성도 높았다. 이처럼 준비 부족과 안이함이 겹쳐서 독일 제4군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때 스미스-도리언(Horace Smith-Dorrien)이 이끄는 영국 제2군이 생줄리앙(St. Julien)에 신속히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우물쭈물하던 독일군이 다시 진격을 계속하려 했지만 격렬한 영국군의 저항에 막히기 시작하였다.

4월 24일, 독일이 다시 독가스를 앞세워 공격을 개시하였고 6,000여 명에 이르는 캐나다군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공포에 질려 도망가던 프랑스군과 달리 영연방군은 손수건을 물에 적셔 입을 틀어막고 격렬히 저항하였다. 이 정도면 상당히 분투하였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대단한 선전이었지만 영국원정군 사령관 프렌치는 스미스-도리언에게 즉각 반격을 개시하여 실지 탈환에 나서라고 명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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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군도 독가스 공격에 엄청난 피해를 보았지만 손수건 등으로 마스크를 만들어 격렬히 저항하였다.



일단 명령이 과도하기도 했지만 공세로 나서려면 프랑스 포병의 지원이 절대 필요하였다. 하지만 장담과 달리 도움을 받을 수 없자 실망한 스미스-도리언은 안전지대로 후퇴하여 방어선을 재구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분노한 프렌치는 스미스-도리언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제5군단장 플러머(Herbert Plumer)를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현지에 부임한 플러머도 추후 공세를 위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후퇴가 불가피함을 역설하였다.




2차 이프르 전투의 결과



이때 조프르의 대리인으로 북부전선의 프랑스군을 총괄하는 포슈(Ferdinand Foch)가 나름대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2개 사단을 동원하여 공격에 나섰지만 독일군의 반격에 막혀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의도는 좋았지만 각각 작전을 따로 벌이는 연합군 간의 불협화음은 여전하였다. 결국 프렌치는 플러머에게 철수를 허락하였고 영국 제2군은 5월 1일을 기해 5km 후방으로 물러나 이프르 전방에 방어선을 새롭게 구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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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병사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이프르를 놓고 벌일 싸움은 여전히 더 남아 있었다.



영국군이 물러나자 독일군이 진격을 개시하여 5월 5일, 생줄리앙을 점령하였다. 하지만 연합군이 비록 전략적으로 후퇴를 선택하였어도 순순히 공간을 내주었던 것은 아니었다. 광활한 아르투아 지역이 그렇듯이 이프르 일대도 대부분 평야지대다. 따라서 구릉에 불과한 조그만 무명의 언덕들에 마치 한국전쟁 당시의 격전으로 말미암아 명명된 수많은 고지들처럼 이름이 부여되었다.

앞서 언급한 필켐, 그라벤스타펠이 그런 곳인데, 그만큼 이 일대에서 많은 격전이 벌어졌다는 의미다. 이프르 동남쪽 호허(Hooge) 인근에 있는 프레첸베르크(Frezenberg)와 벨레바르드(Bellewaarde) 능선도 마찬가지다. 독일은 이프르로 향하는 길목인 이곳을 공격하여 5월 25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프르 70km 남쪽의 아라스(Arras)와 비미(Vimy) 일대에서 벌어진 격전으로 인해 독일 제4군은 공세를 멈추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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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이프르 점령에는 실패하였지만 도시의 3면을 감싸는 전략적 포위망을 완성하였다.



약 한 달간에 걸쳐 벌어진 2차 이프르 전투에서 연합군은 이프르를 지켜내는 데는 성공하였다. 하지만 35,000여 명의 독일군 사상자보다 2배나 많은 88,000여 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고 5km 정도 밀려나 이프르의 삼면이 독일에게 점령당했다. 이렇게 미완의 상태로 구축된 전선은 앞으로도 2년간 계속 이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이프르에 흘려야 할 피가 지금까지 있었던 2차례의 혈전으로도 부족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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