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경험담 세상에 없는 사랑(살아남은 자의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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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2,412회 작성일 17-02-08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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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오후의 한가로움을 오랫만에 tv를 보면서 보냈다.
예상을 했었지만 역시 눈물 바다였다.
혈육을 만나는 기쁨.. 그 기쁨이 눈물로 표현 되는 장면을 보며서 나 또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2년전 오늘,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화장터에서 한 줌의 연기로 하늘 나라로 돌려 보내고 너무나 기가 막혀 눈물 한방울도 흘리지 못했었다.
그 친구는 너무나 남자 다웠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맘 씀씀이도 깊었고, 불쌍한 이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그리고 학교에서도 항상 모범생인 친구 였다.
물론 여자 친구들에게도 인기가 있었고, 모든 선생님들도 역시 그 친구의 그러한 모습을 귀여워 하였었다.

"따르릉"
"여보세요?"
"아빠야? 나 성욱이 인데, 지금 형아랑 집에 가고 있어..."
"지금 어딘데?" "형아가 구미쯤 가고 있데, 고속도로상이야."
"그래, 비가 오니 , 형아보러 조심해서 운전 하라고 해라."
"성욱아, 조금 있다가 보자..." "그래, 아빠."

이 대화가 그 친구와 내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 였다.
8년 하고도 열흘을 그 친구는 내 곁에 있었다.

며칠전 지리산 계곡에서 게릴라성 집중호우로 수 십명이 생명을 잃었다는 뉴스를
접한지 얼마가 지나지 않았다.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는 정신없이 귓가를 때리고...
창 밖을 보니 비가 내리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나는 아들을 기다리며 시계를 보았다. 밤 11시 30분.
새벽 4시쯤이면 도착을 하겠구나.... 라고 생각하며 보던 책을 펴 들었다.
책을 보다가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곧 도착을 하겠구나 생각하며 나는 깜박 잠이 들었다.

누가 내 방문을 두드린다.
"아빠, 홍수가 난거 같아요."
큰 아들 목소리다. 방문을 열고 전기를 스위치를 올리니, 불이 켜지지를 않는다.
전기가 나간 모양이다.
후레쉬를 찾아 응접실로 나가니 발목이 물에 잠긴다.
후레쉬를 들고 현관 문을 여니 약간의 물이 응접실로 밀려 들어 온다.
집 뒤에 있는 하수도가 막혀 있나 보다, 생각하고 하수도를 확인 하러 가보니,
하수도가 막힌것이 아니라, 집 뒤로 흐르는 하천이 범람하고 있었다.
빗 줄기는 진짜로 양동이로 쏟아 붓는 다는 표현이 어울릴정도로 그렇게 내리고 있었다.
무엇부터 해야 하나.....?
당황이 되니 무엇부터 해야 할지...
우선 응접실에 들어와서 tv 를 들고 주차장에 있는 차에 실었다.
그리고 또 아이들 방에가서 video와 tv를 챙겨 들고 나오는데, 물이 벌써 허리 까지 차 올라 오고 있었다.
식탁에다가 들고 있던 video와 tv를 그냥 놓고 휴대폰만 챙기서 큰 아들 손을 잡고 집 옆으로 지나가는 철길 위로 피신을 했다.

전원 생활이 좋아서 , 서울에서 약간 떨어진 아주 조용한 동네로 이사를 간지 딱 10년 . 뒤에는 경치가 좋은 산이 있고 그리고 산 앞에는 항상 맑은 물이 흐르는 하천이 있고, 그리고 우리집 옆에는 하루에 두번씩 다니는 기차 철길이 있었다.
여름 철 비가 온 후에는 영화 "흐르는 강물 처럼" 에 나오것과 같이 나는 두 아들과 항상 견지 낚시를 했었고, 추운 겨울 철에는 썰매를 만들어 두 아들과 시간을 보냈었고, 가을 철에는 하천 뚝에 심어져 있던 밤 나무에서 밤을 줒던 그러한 하천이었다.
하천 뚝에는 이 맘때쯤이면 항상피던 "하늘나리 꽃"과 "달맞이 꽃"이 언제나 더운 여름을 식혀 주던 그러한 하천이었다. 요즈음 보기 힘들다는 "반딧불"이도 있었다.
그 하천이 지금 범람을 하고 있는 것이다.

봄 모내기 철이 되어서 논에 물들이 받아 지고 나면 나는 항상 개구리 소리와 벗을 하여 잠을 청하던 그러한 동네 ....
너무나 살기가 좋아서 친구들이 우리 집에 아이들과 함께와서 자연 공부도 하고
휴일날 온 가족이 놀러를 오던 그러한 동네 였고, 돈 벌어서 이러한 곳에 살고 싶다고, 집 지을 땅 좀 사 달라고 하던 그러한 동네...
친구 4명과 그 자리가 너무 좋아서 터를 잡고 산지가 어언 10년이란 세월이 지났고, 네 가구만 단촐하게 사는, 큰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그러한 곳이 었다.

그 동네가 이제는 지나면서 고개를 돌려 보기도 싫은 그러한 동네로 내 맘 속에 각인 되어 있었다.

큰 아들 손을 잡고 밀려 오는 물을 피해 철길로 올라 갔다. 그러나 그곳도 우리의 안전한 피신처는 되지를 못했다.
잠시후 물은 그 철길을 위협할 정도로 차 올라 오고 있었다. 다시 큰 아들과 나는 철길 옆의 산으로 피했다.
대구에서 올라 오고 있는 작은 아들 안전이 궁금했다. 시간을 보니 새벽 4시 30분
벌써 도착을 했을 시간이다.
휴대폰으로 작은 아들과 같이 서울로 올라 오고 있는 조카에게 아무리 전화를 해도 전화 신호만 가고 조카는 받지를 않고, 우리집 보다 좀 떨어져 있는 동생에게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았다.
혹시 조카가 동생네 집으로 먼져 간 것은 아닐까? 왠지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 갔다.
어둠이 거칠때 까지 산에 피해 있다가 큰 아들과 함께 마을 회관으로 가니, 동네가 온통 난리다.
2년전 그 날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그래서 모두가 휴가를 가던 , 내가 살던 동네로 많은 피서객을이 몰려 오던 그러한 시절이었다.
피서객들이 많이 야영을 하던 하천의 상류는 벌써 아수라 장이 되었던 모양이다.
여기 저기서 울부짇으며 이름을 부르는 소리.....

날이 밝아 오면서 빗 줄기는 가늘어 졌다.
우선 동생네의 안전이 궁금하여 동생이 살던 집으로 발길을 돌리니, 다리는 끊어져 있었고 모든 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무거운 마음으로 마을 회관으로 발길을 돌리다가, 동네의 안면이 많은 청년이 "형님 동생이 울면서 마을 회관으로 올라 갔어요. " 라는 말을 들었다.
가슴이 두근 두근 뛰었다. 불길한 예감이 맞아 들어 가지 말아야 할텐데...
회관에 도착을 하니, 동생이 울면서..
"형, 성욱이랑 소이랑 처남이 떠내려 갔어...."
말을 듣는 순간 땅 바닥에 털퍼덕 주져 앉았다..
어째서 이런 일이 내게 일어 난단 말인가....
뉴스에서 많은 사건과 사고의 소식을 들어도 나와는 상관 없는 일 인줄 알았는데...
이런일이 나에게 진짜로 일어 나다니..

시간이 하루가 흐른 후 동네 사람들과 지방에 살고 있는 형님들과 동생 , 그리고 tv 뉴스에서 내 소식을 들은 친구들 , 모두가 일주일 동안 하천을 뒤졌다.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는 잠수부를 동원 하였고 , 흙이나 쓰레기가 떠내려와 산을 이룬 곳은 장비를 동원하여 뒤져 보았다.
8월의 무더위에 떠내려온 동물들이 부패하는 악취, 여기저기서 울려오는 경찰백차와 병원 차들의 사이렌 소리..
전쟁터도 이러한 아수라 장은 아닐것이다. 몇 해전 무너진 삼풍 백화점.. 하지만 그 백화점에서는 사람들이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 않에 있지를 않았던가?
어디에서 우리 아들을 찾는 다는 말인가??
아~~ 우리 아들과는 이렇게 헤어져아 하는 가보다.
시신이라도 수습을 하여야 할텐데....
몇 십킬로의 하천을 어떻게 이렇게 뒤져야 한단 말인가??
살고 있던 동네와 가까운 병원은 이 잡듯이 뒤져 보았고 , 옆 도시의 병원도 매일 매일 체크를 했다.
나도 탈진 하고 온 가족이 탈진 할 즈음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ooo병원 영안실인데 한 번 와 보세요."
늦은 저녁시간 나는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
병원 지하 환풍기에서 나오는 악취, 병원 영안실 직원의 안내를 받아서 확인을 했다.
제발 우리 아이 였으면... .. 죽은 자식을 찾는 아빠의 간절한 심정이 였다.
하지만 영안실에 누워있는 아이는 우리 아이가 아니었다.
발길을 돌려 나오다가 다시 영안실로 들어 갔다.
혹시 아이가 발견될 당시,
아이가 입고 있던 옷이라던가 뭐 다른것은 없냐고 물어 보았다.
팬티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내가 대구에 할머니 댁에 갈때 챙겨 주었던 팬티 였다.
기름 범벅이 된 팬티 였지만 , 그 팬티는 분명 낮이 익은 팬티 였다.
다시 한번 아이를 찬찬히 살펴 보았다.
그 당시 연예인 들이 많이 하던 염색. 우리 아이도 내가 미장원에 대리고 가서 앞 머리 약간 만 브릿지 했던 흔적이 있었다. 앞 머리에 갈색으로 탈색된 흔적이 분명 있었다.
우리 아들은 사고 현장에서 약 20킬로 미터 떨어진 곳에서 발견이 되었다고 직원은 말을 했다.

그렇게 8일 만에 내 아들 성욱이는 주검으로 내 앞에 나타 났다.
성욱이를 찾기 만을 간절히 기다리던 가족. 친지들에게 전화를 했다.
"성욱이를 찾았어."
"그래? , 축하한다." 죽은 자식 찾은 일이 뭐 그리 축하 할 일이던가?
하지만 그 때는 그랫었다.
찾아야 한다는 것 , 그 생각 밖에 머리 속에 없었고 , 모두들 안타까워 하던 일 이 었다.
잠시 후 가족들과 친구들이 병원으로 몰려 오기 시작을 했다.
그런데, 아이 영정을 만들 사진이 없었다.
물론 집에는 아이들과 함께 한 수 많은 사진들이 앨범을 꽉 채우고 있었지만,
집 마져도 물에 다 떠내려 가고 없었다. 진짜로 숫가락 몽둥이 하나도 없다는 표현이 적절할것이다.
내가 살던 집은 이미 하천 바닥이 되어 버렸고, 사람이 살던 곳이라고 할 만한 흔적은 하나도 없었다.
친구가 학교로 가서 입학때 생확 기록부에 붙여 놓았던 사진을 찾아와서 영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틀 후, 그러니 제 작년 광복절날 우리 아들은 진짜로 한 줌만의 흔적을 남겨 놓은 채 내 곁을 떠나가 버렸다.

큰 아이가 돌이 되기 전에 4번이나 병원을 입원 했기에 , 아이 키우는 일은 너무나 힘이 들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성욱이는 그러한 걱정을 불식시켜 주는 그러한 아이 였다.
아이를 키우는 재미가 이런 것이 구나, 라고 생각하게 하는 아이 였었다.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아이의 능력은 발휘가 되기 시작을 했다.
우선 선생님은 성욱이가 창의력이 다른 아이 보다 월등하다고 하셨고, 그리고 남을 배려 하는 맘이 남다르다고 하셨다.
2 학년이 되면서 성욱이와의 대화에서 친구와 같은 맘으로 나는 대화를 했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가 친구와 같은 관계가 젤로 좋은 관계라는 말을 어른들 한테 들은 적이 있었다.
서로에게 벽이 없었다.
맘의 문을 열고 하고 싶은 말은 서로에게 다 했다.
아빠의 사업이 어렵다고도 했고, 성욱이는 학교에서의 여자 친구 얘기도 했다.
그래서 성욱이는 생일 같은날 선물은 요구 할때도 아빠의 주머니 사정을 먼저 생각하고 선물을 요구 했었다.
그러한 일들이 지금은 더욱더 내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일이지만 ....

아이들이 기다리는 그 해의 '어린이 날' 도 성욱이는 아빠와 자전거를 타고 자기가 다니는 학교에 가서 같이 놀아주는 일로 선물을 대신 할 수 있다고 했다.
아빠는 자전거가 없다고 하니, 친구 아빠의 자전거를 빌려와서 같이 가자고 하던 아이 이다.
그날 나는 녹슬은 자전거를 타느라고 무지 힘이 들었었다.
그가 보낸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생일도 아빠의 사업이 힘이 들다고 , 햄버거로 두개로 생일 파티를 끝냈던 아이 , 그래서 내가 미안해서 책 한권을 사주는 것으로
이 세상에서 마지막 생일인 7월 25일을 그렇게 보냈던 아이 이다.

50년 만에 만난들 어떠 하리....? 살아 있으면 그렇게 만나는데...

졸지에 삶의 터전과 살림집을 물에 떠내려 보내고, 형제와 친구들의 도움으로 동네 지하방으로 살림집을 옮기고 나는 매일 술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누런 봉투하나를 우체부가 가지고 왔다.
봉투를 열어보고 나는 또 한번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영정 사진을 만들고자 하여도 사진 한 장이 없어서 학교에 있는 증명 사진으로
영정사진을 만들었는데..
성욱이 사진 몇장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방학 후 Ymca 캠프가서 찍은 사진이 그 안에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 아들의 흔적이라 함은 캠프가서 찍은 사진 몇장이 전부이다.



우리는 언제 만나니? 성욱아....!
요즈음에 왜 꿈에 잠시 나타나서 안타까움만 남겨 놓고 가는 거니...?
힘껏 내 품에 안기지도 않고....
너는 분명 하늘에서 별이 되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 아빠도 별이 되어 성욱이 옆에 가는 날까지 성욱이를 잊지 않고 열심히 살께...
아빠와 형아 잠시도 너를 잊지 않는 단다...
손주들 중에서도 유난히 너를 사랑하셨던 할아버지도 지금 아빠와 같이 살고 있단다
오늘 할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아빠는 보았단다.
그 눈물의 의미가 무었인지 아빠는 할아버지에게 물어 보지 않아도 알지.
어른들은 물어 보지 않아도 알수가 있단다.
할아버지도 아빠와 같은 심정이 었을 것이야.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엄마도 너를 항상 기억 하리라 믿는다.
예쁜 별이 되어서 , 너를 기억하고 사랑 했었던 모든 사람들을 지켜 봐 다오.
사랑한다..... 성욱아......




사고후 만 3년이 지났군요. 지금은 부인과 이혼후 큰아들 성우와
그리고 성우 할아버지와 이렇게 3대가 살고 있습니다.
저는 새로운 직장을 구해 열심히 살고 있지요

이글은 2년전 8월16일날 남북이산 가족 상봉무렵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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