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경험담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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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2,410회 작성일 17-02-08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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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살의 봄 대덕연구단지에서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한 나는 첫월급이 나온날 나는
나의 평생의 수입중 1/10을 나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이웃을 위해 쓰기로 결정햇고...
대구에 잇는 어느 복지원의 초등학교 4학년 여자아이 경아(가명)와 자매결연을 맺엇습니다.
한달에 한번 또는 두 번..토요일 오전근무를 마치고 대구로 내려가 아이를 만났고....
아이가 필요한 것은 없는지... 그리고 어디 아프지는 않은지 보살피곤 햇습니다.
참..기억에 많이 남는건 짜장면을 무지 잘 먹는다는것과 당시 켄터키 치킨을 그토록
맛있게 먹는 아이는 본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아이의 일주일 용돈이 200원 이엇는데...한달에 1000원도 안되는 돈을 모아서
생일 선물을 사서 제게 건내곤 햇지요...
평소에 원에서는 허드레 옷을 아무거나 걸치다가 제가 데리러가면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들이를 나섰는데.... 그 옷 마져도 제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해 28살의 가을에 저는 음악과를 나온 후배랑 결혼을 햇고....
아내랑 함께 대구의 복지원을 방문햇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아내는 나보다 경아를 더 챙기고 돌보앗었지요.
아예 방학이 되면 아내는 경아를 데리고와 우리집에서 머물며.... 여름휴가를 떠낫고...
특히 휴가철 지리산 야영장등에서 텐트를 치고 자는걸 참 좋아햇지요.
경아는 해마다 1년 그 여름의 휴가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곤 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아내는 두 아들을 낳앗고...
경아에게는 골치아픈 개구쟁이 동생이 둘이나 생기게 되엇습니다.
경아는 여상을 들어가 고등학생이 되자 방학이 오면 아예 우리집에서 동생들을 도맡아 밥을 챙겨주고...
살림꾼이 되엇지요....
그후 경아는 고3이 되어 복지원의 규정상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독립을 해야했는데...
제가 저희 집으로 경아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후 1년간 저희집에 머무르다 구미의 공단에 취직이 되엇고....
경아는 회사에서 제공한 기숙사로 들어갓지요....
그리고 경아와는 일주일에 한번 두 번씩 통화를 햇는데..어느날 방을 얻어 기숙사를 나갔고...소식이 끊어졌습니다....
그리고 1년반의 시간이 지났고.....
어느날 갑자기 경아에게서 전화가 왓습니다..
경아는 전화를 들고 한참 울먹이다...."아저씨...아저씨........ 그이가..그이가...."
하면서 말을 잇지 못하는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기가 어디인지 물었고... 차를 가지고 구미로 내려갔는데.... 구미공단의
어느 주택가 길옆에서 만난 경아는 홀몸이 아니엇습니다.
그래서 자초지종 이야기를 들어보니..
공장에서 어떤 오빠를 만나 동거를 하게 되엇는데...
아이를 낳을날이 가까워지자.. 당초 결혼을 하겟다던 남자는 차일피일 미루다 약속을 어기고 집을 나갔고..
경아는 그 남자의 집에 찾아갔지만 문전박대를 당하고 쫓겨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경아를 태우고 대전으로 왔고 다음날 아내와 경아랑 함께 그집을 방문했습니다 그쪽 시어머니될
아주머니께서 "저년이 우리아들 고드겨서 아까지 배고와서 우리아들 신세 망쳣다고..
어찌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우리 경아를 학대하던지...
경아를 위해 참으려고 노력은 했지만... 도저히 해결의 가망성이 보이지 않앗습니다
그래서 애기 아빠될 남자에게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 물엇더니...
"내가 아 배라고 한것도 아닌데..지가 알아서 해야지..왜 나한테 묻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아내와 함께 경아를 데리고 비통한 맘으로 집으로 돌아왔고...
다음날 병원엘 갔는데..이미 임신 7개월이 넘었고.....지금 아기를 떼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다고...하더군요...
그해 겨울 경아는 이쁜 딸을 낳았습니다.
병원에서 퇴원하여 경아와 애기를 데려온지 1주일 출생신고를 해야하는데...
그날저녁 경아는 작은방에 누웠고...아내는 오빠 뜻대로 하세요....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애기의 이름을 X리라고 짓고 저희 가족의 호적에 올렸습니다.
출산후 말을 잃은 경아는 가끔씩 아기를 안고 하염없이 울엇고...
저는 아기는 아저씨가 키워 줄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했었습니다.
그리고 출산후 한달이 지난 어느날..경아는 잠시 복지원에 다녀 오겠다고
집을 나갔고... 그날밤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날밤 새벽 2시...
대구의 경찰서로부터 전화가 왔고... 시신의 신원을 확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날 구미로 내려간 경아는 애기의 아빠집으로 찾아가 한번만 만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애원을 했고...
그집 가족들의 문전박대와 모욕속에 절망한 경아는..
추운겨울저녁 그집 문앞에서 극약을 먹고 자살을 햇습니다.
경북대학교 영안실에서 본 경아는 마지막까지 한맺힌 눈을 감지 못했고....
저와 아내가 굳어가는 경아의 몸을안고 오열할때 경아가 남긴 마지막 피붓이는
끊어지지 않는 애절한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햇습니다.

그리고 애기의 아빠집에서 우리도 잘못한게 있으니..장례는 치르주겟다고..
제의를 햇고... 저는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고..
이틀후 경아의 시신은 복지원에서 함께 큰 친구와 저의 가족과 함께...
저의 고향 부산으로 출발을 했습니다.

부산영락공원에서 화장을 위해 이동수례로 옮겨진 경아는 화장장 유리문 마지막 이별의 문앞에서
멈추어서 움직이지 않앗고....
나는 경아의 애기를 그 관위에 앉히고 약속했습니다.
"아저씨가 이 아이를 휼륭히 키워 대학은 물론 대학원까지 마쳐 주겠으며...
대한민국 최고의 신랑감에게 시집을 보내어 주겠다"고....
그러자 경아를 실은 수례는 구르기 시작햇고...
그날 경아는 한줌의 재가되어... 저의 고향 선산에 묻혔습니다.

이제 그후로 2년..젖먹이 어린아기는 걸음마를 시작햇고....
저는 세상에서 가장 이쁜딸을 가진 아빠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번씩 아기를 안고 있으면.... 왠지 모를 눈물이 흐르고...
끓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수 없는 것은 아직도 이나이에 맞는 인격을 갖추지
못한 때문인가 봅니다.

이제 저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맺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 경아의 이쁜딸.....
사랑하는 내딸 X리의 아름다운 결혼 이야기는 여러분이 저에게 들려주십시오.

그때가 올때까지....
저는 우리딸 X리를... 모든 이들이 꿈속에 그리는...
대한민국 최고의 신부로 키워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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