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경험담 [폴라베어] 나의 난봉기 5 - 옛날에 이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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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3,138회 작성일 17-02-08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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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신촌 출신입니다.  원래 제 고향은 남쪽바다인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신촌에 있었습니다.
 
제가 84학번이니까 (아유 쪽팔려...) 제가 대학에 입학한 것도 이미 20년이 넘었네요...  기억도 아련한 그 봄의 그 거리...  신촌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제공했었지요...
 
계명미용실 아가씨들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우리를 유혹했고, 골목골목 떡볶이 아줌마들은 10년이 지나도 같은 자리에서 돈을 벌고 있고, 오랜 역사를 가진 식당과 커피숍들은 우리에게 추억을 제공하고, 세월이 지나도 당구장에는 학생들의 얼굴만 바뀐 채 우라마시, 하꼬마시, 오오마시, 레지 (이거 부산 가면 니쥬마시라고 합니다... 그게 더 맞는 표현입니다), 짱꼴라 (이것도 부산 가면 기리가시라고 합니다), 히키, 히네루, 카라쿠 등등의 용어를 쓰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 곳이죠...
 
☞ 여기서 잠깐...
 
이 글의 주제는 '추억코드'에 관한 것입니다.  허영만의 만화 '오! 한강' 에 보면 '지나간 일은 모두 추억이 된다' 라고 하고 있고, 제가 군대 있을 때 유격훈련을 들어갔더니 썬글라스 낀 교관의 첫마디는 '세월이 지나면 모든 것은 잊혀진다' 더군요...  이놈의 추억은 남자에게도 그렇지만 여자에게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  대략 30대 중반만 되면 추억코드의 자극에 무지 약해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나쁘게 말하자면 착각을 이용하는 것이구요...
 
그녀와 내가 만난 것은 채팅이 아니었습니다...  오랜만에 정상적인 인간관계였죠...
 
그냥 거래상대로서 만나서 이런 저런 일들을 겪고 나서 계약 직전까지 갔다가 안되어서 저도 좀 미안했던 차였구요...  그래서 밥이나 한그릇 사겠다고 제의했고...  그녀도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자면서 식사라도 하자고 해서 만난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집은 여의도라고 했고 저희 집은 목동이었는데, 어디 참 만날 곳이 마땅치가 않더군요...  전화로 한창을 서로 의논하다가 제가 갑자기 '신촌 어때요?' 라고 했고, 그녀도 오케이를 하더군요...
 
어느 식당에서 뭘 먹었는지...  뭐 그런거야 중요한 것 아니잖습니까...
 
원래 술 마실 계획도 없었습니다...  그냥 식사니까...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중 제가 이 동네 출신임을 밝히자 그녀는 반색을 하면서 자기는 이 동네 옆학교 출신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뭐 솔직히 학교 다니면서 그 학교랑 가까이 지낸 적도 없었지만 그래도 30대 후반에 만나니 반갑더군요...  따져보니 학번도 같구요...
 
제가 던진 한마디 : 그럼, 우린 같은 시절을 공유한 것이네요...
 
네...  그 당시 일들은 우리만 압니다...
 
플라스틱귀걸이에 청치마 패션...  여름이면 흰 티셔츠를 입어서 여학생들의 브래지어가 비치던 그 모습...  김수철의 노래 '못 다 핀 꽃한송이' 가 유행하면서 언밸런스파마를 한 여학생들의 머리를 '못다핀꽃한송이파마' 라고 놀리던 얘기...
 
갑자기 너무 분위기 좋아지고...  전 이렇게 됐으니 술 한잔 하자고 제안했고...  자주 가는 술집이 있냐는 말에, '요즘 이 동네 안 오지만 예전 그 집 있는지 모르겠다' 라고 하면서 신촌명물거리를 걸어가면서...
 
제가 노래 한곡 불러줬습니다...  차분히 말이죠...
 
근데 그게 멋진 노래가 아니라 바로 이미자의 노래였죠...
 
'옛날에 이 길을...  꽃가마 타고...'
 
바로 '아씨'라고 하는 60년대 드라마 주제곡이었습니다...  그리곤 또 불렀죠...
 
'길을 걸었지 누군가 곁에 있다고 느꼈을 때 나는 알아버렸네...'
 
☞ 여기서 잠깐...
 
남자는 시각에 약하고 여자는 청각에 약하다고들 합니다...  진짜인지 거짓말인지는 잘 모르지만, 아뭏든 남자는 여자 생긴 것을 먼저 보고 여자는 남자 목소리에 크게 반응하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제가 덩치는 산만 하고 얼굴은 조폭이지만 목소리는 그런데로 괜찮다고들 하더군요...  그것이라도 있어서 다행입니다...
 
우리의 분위기는 좋아졌고, 찾아간 술집은 주인만 바뀐채 같은 이름으로 있더군요...
 
술 한잔 먹고...  술 두잔 먹고...  술 한병 먹고...  술 두병 먹고...
 
어느새 우리는 반말을 하고 있었고...  그러다...  Deep Kiss...  (솔직히 그때까지도 제 정신은 말짱했습니다...  키스 잘못 하면 * 된다는 것 정도야 알지만....  누누히 말씀 드리지만...  쪽팔린건 순간이고 추억은 영원하지 않습니까?)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여관방으로 잡아 끌었고...  그녀는 딱 한마디 하더군요...
 
'오늘만이야...'
 
그래...  오늘 만이지... 계속 가면 나도 골치 아프지...
 
그녀...  요즘도 가끔 일 때문에 연락합니다...  서로 엄청나게 친합니다만 더 이상은 하지 않습니다...
 
폴라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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