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경험담 588 백열전등의 추억 (야한거 전무)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2,251회 작성일 17-02-08 15:24

본문

야한 글이 아닌데 왜 여기 올리냐고 항의하지 마시라. 경험담이나깐 여기 올린다.
 
80년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남자들은 대부분 알고 있을 양동. 난 백주 대낮에 친구와 둘이 양동엘 갔다. 일어서면 천장이 닿을듯한 골방에는 벗은 백열등 하나만 덩그런히 빛을 내고 있었다. 색기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작은 체구의 처자와 짧게 그리고 허무하게 살을 섞고 서둘러 옷을 입는데 우연히 그녀의 손바닥을 보게 되었다. 푸르스름한 빛깔이 굳은살에 박혀있는 듯한 야릇한 손바닥.
 
그녀는 버스 차장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작은 월급을 받기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죽도록 일하다 보니 그녀의 손바닥엔 동전 독이 퍼렇게 올라 버린 거였다. 그녀는 남자 감독한테 빵땅했다는 협박과 폭력 및 성폭행에 시달리다 마지막 달의 월급도 받지 못하고 도망쳤다고 한다. 경찰에 신고해 봐야 힘없고 빽없는 버스차장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시대였다는 것은 그시대 사람이라면 다 알것이다. (아마 그런 경험때문에 70 80 세대들이 그렇게 권력 빽에 목을 매였는지도 모르지....) 도망쳐서 다달은 곳이 결국 창녀촌...
 
그녀는 경상남도 청도의 어느 두메산골 마을에서 4형제의 맏딸도 태어나 초등학교만 나왔다. 시골에서 하도 살기 히들고 목에 풀칠하기도 힘든 그 시절 집안의 외동아들이자 자신의 유일한 남동생이 시골에서 제일 공부를 잘했었다고 한다. 그 녀는 세끼 끼니도 해결하기 힘든 집안 살림살이에서 벗어나 상경하여 17살 어린 나이에 청계천 봉제 공장에서 잡일 부터 시작해서 미싱공을 하다가 눈이 나빠져서 버스 차장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얼마 되지 않는 월급의 거의 전부를 고향 부모에게 송금하고 자신은 굶어 죽지 않을 만큼만 먹으며 15년의 세월을 보냈다.
 
15년동안 송금한 그녀의 월급으로 외아들은 열심히 학교에 다녔고 서울 명문대학에 합격해서 유학을 왔고 그 어렵다던 고시에 패스하였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눈물이 뭍어나는 차분하지만 당당한 어떤 자부심이 뭍어 있는 천상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나는 이 소설같은 이야기가 진실임을 알았다. 그리고 당연히 궁굼해지는 그 한마디를 묻지는 않았다. '근데 누난 왜 아직 여기 있어?'
 
그녀는 스스로 집안과 연락을 끊었다고 한다. 이미 만신창이 되어 버린 자신이 이제는 짐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며, 더이상 시집도 갈 수 없는 절망적인 현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못생긴 손바닥에 묻어 있는 퍼런 돈독은 고단한 그녀의 삶을 통해 이루어낸 값진 그 무엇을 뜻하는 것이다. 
 
한국이 지금 경제 대국이 된 가장 큰 경쟁력은 바로 누나의 희생이었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의 희생은 어느 나라나 존재하는 것이므로 경쟁력이라고 하기 어렵다.
 
70년대 한국은 바로 청도의 그 농촌 가정이라고 한다면, 지금 2014년 한국은 판사가 된 동생이라고 보면 어떨까? 누나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낸 판사. 이제 한국은 판사가 되었지만 그 누나는 아직도 창녀촌에서 몸을 팔고 있는 형국이라면 너무 큰 과장일까? 이제 우리는 밥 술이나 뜨고 여름에 여행도 다닐 수 있게 되었지만 돌아 보면 아직도 밥을 굶는 결식가정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않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