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란제리하우스 25. 26. 완결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054회 작성일 17-02-12 11:26

본문

25.짧은 다리의 남자
두형사는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서 경찰서 부근에 있는 음식점으로 들어가서 설렁탕을 한 그릇씩 시켰다. 그들은 밤 10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아직 저녁 식사를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별 성과도 없이 무더운 밤거리를 쏘다니다가는 이제야 허기진 배를 끌어안고 식당을 찾아든 것이었다. 이형사는 소주 한 병을 시켜서 반주로 한 잔하고는 노미에게도 권했다.
"이봐, 왜 얼빠진 사람처럼 그러고 있어? 이제 퇴근길인데 한 잔 받으라구."
이형사는 맞은편 벽에 붙어 있는 광고그림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는 노미를 바라보며 한마디했다.
"잠깐만요. 롱코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어요. 롱코트...!"
"롱코트가 뭘 어쨌다는 거야?"
벽에 붙은 그림에는 유명한 댄스 그룹의 멤버 한 명이 번쩍이는 롱코트 차림으로 소주 한 병을 들고 서서 신세대 소주 어쩌고저쩌고 하는 광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미는 대답도 않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더니 박유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유미 씨, 오동시 씨가 왜 롱코트를 줄기차게 입고 있었던 거죠? 혹시 다리가 짧아서 롱코트를 입고 있었던 건 아닌가요? 맞다구요? 그럼 왜 그걸 우리한테 말 안해줬죠? 뭐라구요? 묻지도 않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구요? 정말 그렇게 비협조적으로 놀 거예요? 뭐라구요? 경찰이 시민을 협박한다구요? 흥, 어디두고 봐요!"
노미는 씩씨거리면서 뭐라고 더 퍼부어대고는 전화를 끊었다.
"대체 무슨 소리야. 오동시가 롱코트가 뭘 어쨌다는 거야?"
"오동시가 출국을 했다구요...!"
그녀는 이제서야 짧은 다리의 남자가 오동시라는 것과 또 그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 오동시가 변장을 한 뒤에 롱코트를 벗어 버리고 출국을 했다는 것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럼 다른 이름으

로 발급받은 여권으로 출국을 했다는 건가? 제기랄, 이거 영 엉망이군. 가만 지금 몇 시지?"
"인터폴에 연락할 생각이라면 관두세요. 벌써 10시 40분예요. 오동시가 탄 비행기가 벌써 파리에 도착했을 시간이고 오동시는 공항을 빠져나갔을 거예요."
"그런가?"
이형사는 갑자기 몰려드는 피로감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은다리의 남자





26.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오동시는 파리 16구의 한 아파트가 가깝게 바라다보이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7층짜리의 클래식한 아파트는 전형적인 파리 부유층의 아파트인데 현관에는 '투르 파노라마'라고 쓰인 동판이 붙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현관으로 다가가서 그 동판을 손으로 쓸어보고는 현관 쪽을 기웃거렸다. 정복 차림의 늙은 경비원이 현관 안쪽에 앉아 있다가 그를 내다보았다. 오동시가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이자 누구를 찾아왔느냐고 늙은 경비원이 친절하게 물었다.
"수지 모를 찾아왔는데 지금 있습니까?"
아파트는 수지 모가 사는 곳이었다. 수지는 투르 파노라마 아파트의 7층 701호에서 살고 있었다.
"오전에 일찍 나가는 것 같았는데 어떻게 오셨습니까?"
"네, 한국유학생인데 이곳에 수지 모가 산다고 해서 한번 들러보았습니다."
오동시는 적당히 둘러댔다. 그는 세계 최대의 수지 모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사람답게 수지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까지 대충은 알고 있었다.
수지는 이 시간 현재, 런던에 있는 미러 우먼(Mirror Woman)지를 방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캐너리 워프 가에 있는 데일리 미러(Daily Mirror)지에서 인터뷰를 하고 비행기편으로 다시 파리로 돌아오게 되어 있었으며 도착 시간은 대충 오후 4시 경이었다.
"그래요? 하지만 수지 양은 지금 없어요."
"괜찮으시다면 뭣 좀 물어봐도 될까요? 혹시 며칠 사이에 한 동양 청년이 수지를 찾아오지는 않았나요?"
오동시는 선량하고도 착한 청년처럼 공손하게 물었다.
"동양 청년이라구요? 그런데 그런 건 왜 묻지요?"
"아, 그 동양 청년이 바로 저와 같은 기숙사를 쓰는 사이거든요. 그런데 수지를 만나러 간다고 나가서는 소식

이 없어서요. 경찰에 신고를 할까도 생각을 했습니다만......."
오동시는 의도적으로 경찰을 들먹였다.
"바로 어제 오후 3시경에 한 동양 청년이 찾아와서 이곳에 수지 모가 사는냐고 물어보기는 했어요. 하지만 그 청년은 일본인 같던데...."
"맞습니다. 그 친구는 일본 유학생인데 지독한 수지 모의 팬이죠. 그런데 그 친구가 다른 말은 하지 않았나요? 그냥 수지에 관해서만 묻고 돌아갔나요?"
경비원은 이곳을 찾아온 마쓰다 히사오를 본 것 같았다.
"그래요. 일본 청년은 수지 양이 이곳에 사는지 언제 오면 수지 양을 만날 수 있는지 등을 묻고 돌아갔어요."
경비원은 오동시가 경찰을 들먹인 덕분에 귀찮은 표정을 드러내면서도 참을성 있게 대답을 해주고 있었으나, 오동시는 그만 물러나기로 했다.
그는 노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정중하게 하고 걸음을 옮기면서 다시 한 번 시계를 보았다. 오후 1시였으며 익명 메일의 72시간이 되기까지는 아직 4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는 투르 파노라마의 아파트 입구가 훤하게 보이는 벤치에 앉아서 마쓰다 히사오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20분쯤 그렇게 기다린 뒤에 벤치 옆에 있는 공중전화로 다가가서 서울에 있는 박유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오동시의 음성을 듣자마자 반가운 나머지 울먹이기부터 했다.
"유미 씨, 나는 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 자, 그만 울음 그치고......."
"어때요? 지내시기는 괜찮은가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보다 서울에는 별일 없지?"
"형사들이 가끔 기웃거리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일도 없어요.... 사장님, 근데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어쩌면 크게 혼이 나더

라도 말을 해야겠어요."
유미는 뭔지는 모르지만 뜸을 들였다.
"어서 말을 해봐.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좋아요. 저를 용서해주시지 않아도 말을 해야겠어요.... 사실, 그 익명 메일 있잖아요? 그거 제가 보낸 거예요."
"뭐라구? 익명 메일을 유미가?"
오동시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면서 반문했다.
"네, 사장님이 미워서, 다른 여자에게만 빠져 있는 사장님이 미워서 그런 짓을 했던 거예요."
"그럼 그 20억원을 내놓으라는 협박도 유미가 했다는 거야?"
"네, 제가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하지만 사장님에게서 정말로 20억원을 받아낼 생각은 조금도 없었어요. 그냥 얄미운 사장님 마음 고생이나 시키자는 생각이었어요......!"
유미는 이렇게 말하면서 흐느꼈다.
"그럼 그 72시간이니 뭐니 하는 것도 거짓 협박 중의 하나겠군."
"맞아요. 용서해 주세요......!"
오동시는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낮은 한숨을 내쉬고는 조용하게 말했다.
"됐어. 유미야. 이제 됐으니까 그만 울어."
그는 정말이지 유미가 익명 메일을 보낸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럼 어쨌든 이제 수지에게 위해를 가할 사람은 없어졌으며 모든 위험은 사라진 것인가?
하지만 도쿄상업흥신소 직원인 고바야시 지쥰의 정보에 의하면 광적인 컬렉터인 마쓰다 히사오는 파리로 간다고 하지 않았는가?
오동시는 마쓰다를 직접 만나서 어떤 방법으로든 확인을 하기 전까지는 안심할 단계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정말 용서해 주실 건가요?"


"그래, 대신 우리의 수지 홈페이지나 잘 운영해줘. 아, 그리고 통장에 내가 넉넉하게 돈을 넣어놓았으니까 운영 경비와 유미의 월급은 직접 인출해서 사용하도록 해."
"알겠어요. 그런데 앞으로 어디로 어떻게 연락을 하죠?"
"아직은 호텔에 머물고 있는 처지니까 나중에 안정이 되면 연락을 줄게."
"시키는 대로하겠어요. 그보다 사장님은 식사 제때제때 하시면서 건강에 조심하세요.... 그런데 수지와의 일은 잘 진행이 되고 있는 건가요?"
"글쎄.... 그건 아직 뭐라고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아냐. 그럼 오늘은 이만 끊어."
통화를 끝낸 오동시는 다시 벤치로 돌아와서 앉았다.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이 등에 작은 배낭을 둘러멘 한 젊은 동양 남자가 투르 파노라마 아파트 앞으로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오동시는 순간적으로 마쓰다 히사오! 하고 생각했다.
그는 벌떡 일어서서 짧은 다리로 달려갔다. 그의 주머니에는 조금 전에 파리의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찌그러진 납파이프 하나가 있어서 든든했다. 그는 여차하면 마쓰다의 얼굴을 납파이프로 후려쳐서 으깨어놓을 생각이었다.
배낭은 경비원과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경비원이 오동시를 발견하고는 손짓을 하면서 가리켰다.
"바로 이 사람이 당신을 찾았어요."
배낭에게 하는 소리였다. 배낭이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오동시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170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얼굴은 갸름한 편이었으며 안경을 꼈고 선량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배낭은 오동시가 막연하게나마 그리고 있던 광적인 컬렉터 마쓰다 히사오의 모습은 아니었다.
오동시는 혹시 잘못 본 게 아닌가 해서 자신도 모르게 롱코트 주머니 속에서 움켜쥐고 있던 납파이프를 슬며시 놓았다.
"저를 찾으셨다구

요?"
배낭이 오동시를 쳐다보면서 일본어로 물었다. 그는 오동시를 일본인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마쓰다 히사오?"
오동시가 역시 일본어로 물었다. 그는 죽은 호다리 세이이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사내였다.
"그렇습니다만 저를 찾으셨다구요?"
"일본에서 수지 모의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마쓰다 히사오 맞습니까?"
"그렇습니다만...."
"그럼 속옷 컬렉터 마쓰다 히사오죠?"
배낭은 대답하기가 쑥스러운지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한때는 속옷 컬렉터였습니다만 지금은 아닙니다. 벌써 오래 전에 냄새나는 속옷 따위는 없애 버렸죠."
"그럼 피의 속옷 수집가 버크(BUC)는 뭡니까?"
"실례입니다만 누구시죠?"
배낭이 물었다.
"저는 한국에서 수지 모의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오동시입니다."
"그럼 그 유명한 미스틱타워를 운영하시는 분인가요?"
"맞습니다."
"반갑습니다. 진작에 한 번 만나뵙고 싶었습니다."
배낭이 반가워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악수를 청해 왔다. 오동시는 영문은 모르겠지만 일단은 마쓰다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그렇게 훌륭한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분이 어떤 분인지 상당히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혹시 호다리 세이이찌라고 알고 계십니까?"
"그런 이름이라면 처음 듣는데요. 대체 왜 그러시죠? 저한테 무슨 의문이 많으신 것 같은데...? 그렇죠?"


오동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그렇습니다."
"하긴 그럴만도 합니다. 버크니 뭐니 하면서 주간지에서 그렇게 써댔으니 모르는 분들은 오해를 하실만도 합니다. 어떠한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부분을 궁금해 하시는 것 같아서 말씀을 드립니다만 저와 버크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간지에 실린 버크, 마쓰다 히사오에 관한 기사는 저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건 제 이야기가 아니고 주간지에서 일부러 선정적으로 써댄 글이거나 또 누군가 제 이름을 팔아서 모방 범죄를 저지른 것을 주간지에서 그렇게 써댄 겁니다."
"그럼 실례입니다만 여자의 속옷을 강제로 벗긴 일이 한 번도 없다는 건가요?"
"아, 아닙니다. 제가 그런 일을 한 번도 안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딱 한 번 여자의 속옷을 강제로 벗겨서 처벌을 받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저에 관한 기사가 나가고 나자 여기저기서 속옷을 벗기는 사건이 유행처럼 일어나게 된 것이고 그 사건의 대부분을 제가 저지른 것으로 되어 버린 겁니다. 심지어는 제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발생한 사건도 제가 교도소를 빠져나와서 그런 범죄를 저지르고 다시 교도소로 들어갔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사실은 제가 이곳 프랑스로 이민을 오게 된 것도 이제는 더 이상 버크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죠."
"예, 그렇군요."
이건 의외였다. 그렇다고 마쓰다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동시는 좀더 확인할 것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분의 이야기에 따르면 마쓰다 씨는 얼마 전에 오사까에 사는 어느 컬렉터에게 마쓰다 씨의 컬렉션을 팔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도 설명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건 사실입니다. 제가 이민 비용을 마련하려고 오사까에 있는 분에게 팔려고 했죠. 결

국은 다른 분에게 팔았습니다만.... 하지만 그 컬렉션은 범죄를 저지르면서까지 만든 건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모두 정상적인 방법으로 어렵게 구해서 만든 것을 판 거죠. 그리고 이제 그런 컬렉션은 제게 하나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짓을 하지도 않을 거구요."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혹시 저에게 전자메일을 보낸 적이 있습니까?"
"없는데요."
"그럼 다크러브(darklove)란 ID를 알고 있습니까?"
"처음 듣는 ID인데요."
"실은 제가 한국에 있을 때 마쓰다 씨가 보낸 메일을 여러 번 받은 적이 있습니다. 내용은 주로 수지 모에 관한 것이고요."
"그래요? 저는 한 번도 오동시 씨께 메일을 보낸 적이 없는데요. 그럼 누군가가 인터넷에서까지도 나를 팔아서 버크의 흉내를 냈다는 건가요?"
"그 말이 정말입니까?"
"그럼요. 제가 오동시 씨께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여전히 마쓰다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잠깐만요. 혹시 호다리 세이이찌는 한국에서 피살된 사람이 아닌가요? 얼마 전에 일본에서 신문을 보다가 그런 기사를 본 것 같아요."
"맞습니다, 그런 기사가 났었죠."
"그런데 바로 그 호다리 세이이찌가 저 마쓰다 히사오 행세를 했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마쓰다 씨 행세를 하면서 제 사무실에 몇 번 놀러와서 이것저것 구경까지 하고는 했습니다."
"그랬군요. 그래서 저를 만나자마자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물으셨군요?"
"사실 그랬습니다."
"그런데 호다리 세이이찌 씨는 왜 죽은 건가요?"
오동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기에서 실수를 할 수는 없었다.
"그건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한국에서 본 신문기사에 의하면 벌거벗은 온몸에 베이비 파우더를 하얗게 칠한 변태의 모습으로 죽어서 그런 지 아무래도 성적인 문제로 죽은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고 있더군요."
"상상이 됩니다. 커다란 어른이 발가벗은 채로 온몸을 하얗게 칠하고 죽어 있는 모습...! 그런데 그 남자가 저를 사칭하고 다녔다니 갑자기 끔찍한 생각이 다 드는군요."
마쓰다는 정말 몸까지 가볍게 떨었다.
"그런데 범인은 잡혔나요?"
"아직 수사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쓰다 씨는 수지 모를 만나러 오신 모양이죠?"
"그렇습니다. 파리로 아주 이사도 왔고 해서 한 번 만나보려고요. 이제 수지 모 홈페이지는 파리에서 해볼 생각이거든요."
"어쨌든 마쓰다 씨의 모든 일이 잘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럼 오동시 씨도 수지 모를 만나러 오신 건가요?"
"그런 셈이긴 합니다만.... 마쓰다 씨, 제게 어려운 부탁이 있는데 좀 들어주실 수 있을런지요? 제가 한국에서부터 마쓰다 씨를 사칭하고 다니는 사람을 보고 또 버크에 관한 기사도 보고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제게 마쓰다 씨의 신분증명서를 좀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마쓰다는 처음에는 불쾌한 표정을 드러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오동시 씨께서 이러는 것도 다 제 잘못이니까요. 제가 여자 속옷을 강제로 벗기는 사건만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겠죠?"
"미안합니다."
하지만 오동시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마쓰다는 주머니에서 여권과 이민 관계 서류를 꺼내어 그에게 보여주었다. 틀

림없이 그는 마쓰다 히사오였고 프랑스 이민국의 승낙을 받아서 이민을 한 사람이었다.
"이제 저에 대해서 믿어주시겠습니까?"
오동시는 마쓰다에게 다시 악수를 청했다. 이제 마쓰다를 완전히 믿을 수 있었다. 마쓰다는 더 이상 위험 인물도 아니었다. 프랑스 이민국에서 발행한 이민 서류가 말해주듯이 만약 마쓰다가 일본 주간지의 기사대로 그런 범죄를 저질렀다면 마쓰다는 절대로 프랑스로 이민을 올 수가 없는 것이었다.
"물론입니다. 이제 괜찮다면 저는 마쓰다 씨와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두 사람은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했다.
"그럼 나중에 또 만나기로 하죠."
오동시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수지 양을 만나러 오신 게 아닌가요? 조금 더 기다리면 수지 양이 올 것 같은데?"
마쓰다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처음에는 저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다른 급한 일이 있어서요. 저는 나중에 수지 양을 만나도록 하겠어요."
오동시는 투르 파노라마 아파트를 한번 올려다보고는 그곳을 벗어났다. 그리고 약 30분 가량이 지났을 때, 투르 파노라마 아파트 앞에 리무진 한 대가 정차하더니 그곳에서 수지가 내렸다. 그러자 현관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마쓰다가 반색을 하면서 수지에게 다가갔다.
"수지, 안녕하세요? 저는 일본에서온 마쓰다 히사오입니다."
"마쓰다 히사오? 아, 들어본 일이 있는 것 같아요. 제 홈페이지를 운영하시죠?"
"네. 기억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수지는 손을 내밀어서 악수를 청했다. 그러자 어디선가에서 나타난 건장한 사내 하나와 무술로 단련된 것같은 근육질의

늘씬한 여자가 나타나서 그들 사이에 끼여들었다.
"당신들은 누구죠?"
수지는 조금은 불쾌한 듯 언성을 높였다.
"왜 자꾸 나를 따라 다니면서 귀찮게 하는 거죠?"
"죄송합니다만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어느 분으로부터 수지 양을 경호하라는 부탁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 임무를 수행하는 중입니다. 용서하세요. 팬과의 가까운 접촉은 가급적 자제하시는 게 좋습니다."
근육질의 여자가 부드러우면서도 정확한 어조로 대답했다.
"누가 내 경호를 부탁했죠?"
"저희들은 모릅니다. 저희는 지시 받은대로 하고 있을 뿐입니다."
수지는 보디가드 차림의 낯선 사내들이 얼마 전부터 주위에 맴돌고 있어서 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터였다.
"어쨌든 그건 좋아요. 하지만 이 분은 일본에서 내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분이니까 괜찮아요. 이제 자리 좀 비켜 주시겠어요?"
그러나 경호원들은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나서 공손한 자세로 서 있을 뿐 더 이상 물러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만나서 반가와요, 마쓰다 씨."
수지는 마쓰다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마쓰다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며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이렇게 뵙게 되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어쩐 일이시죠? 놀러오셨나요?"
"실은 사정이 있어서 아주 이민을 왔습니다. 앞으로는 이곳에서 수지 양의 홈페이지를 운영할 생각이죠."
"고마워요. 저는 마쓰다 씨 같은 팬이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저 혹시 오동시 씨는 만나보셨나요?"


"오동시 씨요? 그 분을 어떻게 아시죠?"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동시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벌써부터 두근거리고 있었다.
"조금 전에 이곳에서 만났는데 오동시 씨가 파리에 계신 걸 몰랐나요?"
"파리에 오동시 씨가요?"
"아, 모르고 계셨군요.... 오동시 씨는 다른 급한 일이 있다고 하면서 갔는데요."
"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왜 오동시가 그냥 갔을까를 생각했다. 그리고 마쓰다를 얼른 돌려보낸 그녀는 달리듯이 그녀의 701호로 올라와서 서울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박유미가 받았다.
"오동시 씨가 파리에 왔다고 하는데 무슨 소리인가요?"
수지는 다짜고짜 물었다.
"맞아요. 사장님은 지금 파리에 계세요."
"어쩐 일이죠?"
전화 저쪽의 유미는 왠일인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오동시 씨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불길한 예감이 언뜻 스쳐갔다. 얼마 전에 한국 경찰이 전화로 찾으면 어쩌고 하면서 부탁한 말도 마음에 걸렸다.
"유미 씨, 무슨 일이 있다면 내게도 말해주세요."
"이런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사장님은 도피 중이세요......."
"왜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오동시 씨가 큰 죄라도 저지른 건가요?"
유미는 울음기가 섞인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사실은 모두가 수지 씨를 위해서 벌어진 일이에요. 그래서 사장님이 지금 큰 죄를 짓고 파리에 계신 거라구요. 어쨌든 제가 자세한 내용을 곧 메일로 보낼 테니까 읽어보세요. 그러면 모든 걸 알게 될

거예요. 그리고 사장님이 수지 씨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요....... 수지 씨, 부탁이 있어요. 제발 우리 사장님을 사랑해 주세요. 비록 다리가 짧은 남자이기는 하지만 수지 씨를 너무나 사랑하고 있어요. 제가 질투가 나서 견딜 수 없을 지경으로 말예요. 하지만 지금은 수지 씨에게 모든 걸 양보하겠어요."
"잘 알았어요."
수지는 전화를 끊고 잠시 후에 인터넷에 접속해서 유미가 보낸 메일을 받아서 읽어나갔다. A4 용지로 한 장 분량은 될 메일이었는데 그 내용은 수지를 울리기에 충분했다. 메일에는 오동시가 수지를 얼마나 사랑하고 괴로워 하는지에서부터 호다리 세이이찌를 죽이게 된 원인까지 자세하게 적혀 있어서 그녀를 더욱 슬프게 했다.
그녀는 나직하게 오동시를 불러보았다. 그녀는 오동시가 만약에 나타난다면 진심으로 사랑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오동시는 어쩐 일인지 그 이후로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가도 오동시는 소식이 없었다.
하지만 수지는 초췌해진 모습으로 그를 기다렸다.







27.빅토리아 시크릿

1988년 4월 22일 오후 4시에 수지는 뉴욕 맨하튼의 5번가에 있는 빅토리아즈 시크리트에 조금은 성숙해지고 조금은 더 우수에 찬 모습으로 나타났다.
빅토리아즈 시크리트가 새로운 매장을 개설하면서 6층 건물 전부를 수지 모의 포스터로 장식을 했던 것이다.
그녀는 엄청나게 큰 가위를 들고 테이프 커팅을 하기 위해서 입구로 걸어갔다. 수많은 기자들과 카메라맨들은 그녀가 얼른 커팅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기자들 틈에 조용하게 서 있는 멋진 한 남자를 발견하고 거의 숨을 멈출 뻔했다.
"동시 씨...!"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추어선 그녀는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정말 그 남자는 오동시였던 것이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오동시의 키가 15센티미터 정도는 더 커진 것 같았으며 이번에는 롱코트를 입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극히 정상인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잠시 실례한다는 말을 남기고는 오동시에게로 다가갔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그리고 이렇게 키가 큰 건 또 뭐죠? 정말 오동시 씨가 맞나요?"
그녀는 눈을 의심했다.
"맞아요, 수지. 난 분명히 오동시입니다. 지금은 기자들도 있고 하니까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하기로 하고 한 가지만 말해 줄게요. 이제 난 더 이상 짧은 다리가 아닙니다. 프랑스에서 사지연장술로 다리 길이를 늘렸거든요. 그래서 그간 수지에게 연락을 하지 못했던 겁니다."
"아, 알겠어요. 그만하세요."
수지는 눈물을 흘리며 만류했다. 기쁨 때문인지 연민 때문인지 모를 눈물이 마구 흘러나왔다. 그러자 기자들은 여기저기서 카메라셔터를 눌러댔다.
그녀는 오동시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기를 기다려서 그

의 손을 끌고 테이프 커팅 장소로 갔다. 그리고 말했다.
"제 약혼자를 소개하겠어요. 이름은 오동시이고 한국에서 오신 사업가입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제 홈페이지 미스틱타워를 운영하는 운영자이시기도 합니다. 축하해주시면 고맙겠어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박수 소리가 터져나오며 카메라플래쉬가 터지고 방송카메라가 돌진해왔다. 지금까지 미스틱타워의 운영자는 단 한 번도 매스컴에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기자들은 오동시와 수지의 얼굴을 찍어대기에 아주 바빴다.
"축하해요, 오동시 씨. 저는 빅토리아즈 시크리트 사장인 비버리 뱅크스예요.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어요?"
우아한 중년 여성이 다가와서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무슨 부탁이시죠?"
"수지 양과 함께 오동시 씨가 테이프 커팅을 해주시면 더욱 영광이겠어요."
"좋습니다."
"고마워요. 역시 멋진 분이시군요. 내가 조금만 더 젊었다면 수지 양과 함께 결투라도 했을 텐데요. 호호호......!"
수지와 오동시는 커다란 가위를 같이 들고 개업테이프를 잘랐다. 그러자 박수와 카메라 플래쉬가 요란하게 터지며 두 사람과 빅토리아즈 시크리트의 개업을 축하해 주었다.


- 끝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