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혼자하는 즐거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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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2,754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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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수집
음식 문화 수준이 높기로 이름난 이 지역에서도 특히 미식가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벨에르 가든'은 좋은 요리만 파는 것이 아니라 호텔까지 딸려 있어 금상첨화였다.아침에 늦잠을 자도 무방한 사람들은 웬만하면 여기서 묵기를 원했다. 느지막이 일어나 아무 부담 없이 음식을 즐기고 길을 떠나면 되기 때문이었다. 가까이 있는 스위스에는 치즈 말고는 별 요리가 없었다. 농어 찜이 고작이고 그리종 지방산 포도주의 맛은 별로 탐탁치가 않았다.

벨에르 가든의 또 다른 매력은 주인의 노래 실력이 수준급이라는 것이다. 주인은 젊은 시절에 요리와 성악, 두 가지 재능을 앞에 두고 고민하다가 결국 주방을 선택하고 말았지만 성악가의 길을 걸었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성공을 했을 것이다.때때로 그는 주방의 벌겋게 달아오른 냄비 앞에서 청춘 시절을 회상하며 유명한 아리아를 멋들어지게 불러 젖혔다. 상호('벨에르'는 아름다운 아리아라는 의미)에서 이미 힌트를 얻은 손님들은 그를 식당으로 불러 앙코르를 청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전혀 빼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지방에서 썩기에는 너무 아까운 목소리로 한 곡조 뽑으면 식사에 곁들인 포도주로 얼굴이 불그스름해진 청중들은 아낌없이 박수를 쳤다.

꽤 유명한 오페라에도 출연한 적이 있는 주인 겸 주방장, 크리스티앙 모르네씨는 결국 요리사라는 직업을 택했지만 연예계 인사들과의 교분도 만만찮았다. 그런 연유로 파리 순회 공연 팀들은 부근을 지나가게 될 경우 꼭 이 벨에르 가든에 들렀다. 연예인들은 아름다운 경관과 풍미의 닭요리를 즐길 뿐만아니라 '동업 종사자'라는 명목의 할인 혜택도 받고 식사 때는 아름다운 노래까지 곁들여져 기꺼이 그렇게 했다. 떠날 때는 방명록에 사인을 하고 몇 줄 헌사만 적어 놓으면 그만이었다.

손님들의 성격, 직업, 나이, 술 취한 정도가 천차만별이었던 만큼 방명록의 내용도 풍부하고 다양했다. 은막의 여왕이었던 에드위지 F. 부인과 영화감독 겸 배우였던 사샤 기트리씨가 조금은 오만 방자해 보이는 경구를 실었는가 하면, 명 사회자 쟈크 마르탱과 피에르 D씨는 요리 이름을 빌어 경쟁적으로 저속하지만 재치 있는 말장난을 했다. 정치인들의 글쓰는 수준은 훨씬 떨어졌다. 경관이 수려한 장소에서 식사를 해 즐거웠다는 정도의 찬사가 고작이었다. 어쨌든, 이 보배로운 방명록이 이 명소에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되었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모르네에게는 쉴새없이 목청을 돋구고 노래하는 괴벽 워낙 손님들이 그것을 좋아하니까 종업원들은 웃고 참았다 외에 이상한 취미가 또 하나 있었다.명사 손님이 방을 비우면 그에게 바로 연락을 해야 하고, 그가 직접 방을 살펴보기 전에는 아무도 그 방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평소에 그가 워낙 너그러운 사람이었고, 또 그런 경계심이 유명 인사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종업원들은 어리둥절해 했다. 게다가, 그렇게 열심히 방을 살피고 난 뒤에 아무런 하자도 지적하지 않는다는 것이 더욱 이상했다.

간혹 잘못된 것을 발견하면 그 마음씨 고운 사장님도 화를 내는 일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의 괴벽이 전혀 자신들에게 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종업원들은 그냥 모른척하고 넘겨버렸다.

삼십 년 동안 변함없이 벨에르 가든의 하루가 그렇게 흘러갔다. 아침부터 평화로운 노랫소리가 퍼지고.... 모르네 사장은 종업원들에게 일을 지시할 때도 노래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크리스티앙 모르네에게도 은퇴할 시기가 찾아왔다. 가든을 팔고, 부근의 땅에 새집을 지어 이사를 했다. 거실은 최고 명당자리에 유리함을 설치하고, 그 속에, 저 소중한 방명록 세 권을 보관했다.

이사 몇 달 후,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나는 그에게 방명록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만, 이건 정말 소중한 개인 소장품이야. 자화자찬이 아니라, 정말 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을 거야." 그가 말했다.

"물론이지, 자네 방명록은 정말 훌륭해. 근데, 과장이 좀 심한 거 아냐?" 내가 물었다.

"자네가 직접 판단해 보면 알겠지. 헌데, 그전에 들려줘야 할 비밀 이야기가 하나 있네. 내가 손님들이 짐을 챙기고 방을 비우기가 무섭게 손님방에 뛰어 들어가던 거 자네도 아마 기억할 거야. 그건 수건 나부랭이의 수를 세기 위해서가 아니었어. 그건 내게 좀 독특한 수집벽이 있었기 때문이었어. 자 이제 방명록을 펴보게." 그가 미소를 지으면서 덧붙였다.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영예는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코메디 프랑세즈(프랑스 국립극단)의 한 여자 단원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녀가 한 장식글자 서명이 반세기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좀 기이했던 것은 서명 아래에 아주 가늘고 꼬불꼬불한 검은 철사 세 가닥을 유리테이프로 붙여 놓았다는 것이었다.

"이게 뭔가?"

"여사께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게 한 선물이야. 기념 유품이라고나 할까. 그녀가 자고 일어난 침대시트에서 내가 공들여 채집한 거지."

"말도 안돼."나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냐, 사실이야."나는 딸꾹질을 하면서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각 페이지마다, 수확의 정도에 따라, 외롭고 쓸쓸하게 한 가닥 또는 작은 수풀을 이룰 정도로 무성하게, 털들이 붙어 있었다. 힘차고 활달한 갈색 털과 곱고 부드러운 금발이 끊임없이 계속되면서 서명자들이 제각기 독특한 영감에서 남긴 헌사들을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모르네가 다시 객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두서없이 누가 가짜 금발이었고 누가 진짜 붉은 털이었는지를 설명했다. 한 침대에서 두 개의 서로 다른 털 더미를 발견했을 경우, 누가 누구를 밤중에 침대로 몰래 끌어 들였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어떤 방법을 썼는지도 이야기했다. 수백 개가 넘는 봉투 속에 보관해 두었던 털들을 정리해 그 걸작을 만드는데 자그마치 육개월이 소요되었다는 허풍도 잊지 않았다.

내가 그의 말을 막으며 말했다.

"들어봐, 이건 너무 훌륭해, 자네 혼자만 간직해서는 안되네. 기사를 하나 써야겠어. 허락해 주겠나? 자네 이름과 상호는 밝히지 않겠네. 정말, 재미있는 기사가 될 거야...."잠시 생각한 뒤에 그가 말했다.

"오! 내 이름을 밝혀도 좋아. 무슨 일이 있을라구? 자네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기사화할 내용은 내가 선택하는 거야."

그가 쉽게 결정해 준 걸 다행으로 여기며, 나도 그의 조건을 서둘러 받아들였다.

"자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야지.... 근데 각 페이지마다 질이 조금씩 다르다는 얘긴가?"

나는 벌써 작은 특종감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퓰리쳐 상까지는 못 받겠지만 그래도....

"좋아, 시간 버리지 말고 바로 시작하지. 사십삼 페이지를 열어봐."

여배우, 갸비 M.이 발가벗고 하는 식사에 대해 가식 없이 적어놓았다. 완벽했다.

오십일 페이지. 농담 좋아하는 학술원 회원, 마르셀 A.가 주방장이라는 단어로 케케묵은 삼행시를 지어놓았다. 보기 싫지는 않았다.

칠십삼 페이지. 코미디언 F.가 주방장의 손끝에 자신의 미뢰가 간지럽힘을 당해 좋았다고 썼다. 재치가 돋보였다.

"이건 좀 어려워. 백이십육 페이지. 잘 봐, 말다툼하는 것 같지? 장클로드 B.와 그의 친구 이브 M. 이 둘은 호모였어. 둘 다 갈색 털을 가졌고.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자네에겐 증거물의 불확실성에 대해 두세 줄 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몰라."

"그리고, 백오십구 페이지. 여배우 캬트린느 D. 머리와 거기 색깔이 같은 진짜 블론드야. 옆에 있는 것은 그녀의 애인 것이야. 독일사람이었지.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어, 그냥 그렇게 된 거야."

나는 연신 웃으며 메모를 했다. 처음 두 권이 끝났다.

"드디어 마지막 권이야. 난 이게 제일 나은 것 같애."그가 셋째 권을 펴면서 말했다.

"그런데, L. 시장 부인은 요즘 어떻게 지내?"

그가 펼친 페이지에 실려있는 금발의 증거물이 내게 이미 오래된 과거의 한 순간을 떠오르게 했다. 어느 주말이었다. 나는 그때의 일을 영원히 묻어 두고 싶었다.

"고약한 놈 같으니!"

나는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메모했던 것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모르네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 하도 웃어서 얼굴까지 다 시뻘개졌다.

"어이 친구! 뭘 바라는 거야? 명사 축에 끼일려면 그 정도는 각오해야지! 자, 그만하고, 지네트에게 맛있는 거나 만들어 달래자. 에, 또 그리고 자네한테 무슨 노래 하나 불러줄까? '진주 조개잡이'가 좋을까? '웃음의 나라'가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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