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최선을 다한다고 최선이 아닌 이유 - 경고등이 켜진 십대의 연료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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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64회 작성일 16-02-06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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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이상해져 버린 것 같아”

원섭이는 최근 몇 달 사이 자신이 뭔가 이상해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중학교에서는 상위권을 차지했고, 고등학교에 와서도 한눈 팔지 않고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극장도 2년 넘게 가지 않았고, 주말에도 학원을 빠지지 않았다. 이런 노력의 보상이라도 받듯 선생님, 부모님도, 원섭이 자신도 도 1 년만 더 지금처럼 고생하면 충분히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 중요한 시기에, 언제부턴가 이상한 낌새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작은 짜증이었다. 아침에 늦잠을 잔 탓에 부리나케 학교로 가려는데 엄마는 밥 한 숟갈이라도 먹고 가라고 붙잡았다. 그런데 식탁에 앉아 허겁지겁 밥을 입안에 넣는 순간 확 뱉어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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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무진장 열심히 했는데..왜 이런 거지? 무서워.. <출처: corbis>


“뭐야! 너무 뜨겁잖아!”

“아이고, 미안해 새로 한 밥이라…”

원섭이는 수저를 확 내려놓고 학교로 와버렸지만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엄마에게 소리를 지른 것이 처음이었다. 두 시간 동안 참고서를 잡고 있어도 진도는커녕 집중이 전혀 되지 않았다. 2주후에 전국단위 시험을 치르는데 이러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피곤은 풀리지 않고 눈을 부릅뜨기도 힘들다. 저녁시간이 되어도 배가 고프지 않고 책상 위에 엎드려 잠시 눈을 붙이려 해도 잠이 오질 않는다.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집에 오자 엄마가 이런 저런 간식을 챙겨주었지만 입맛이 없다. 책상 앞에 앉아 오늘 공부한 내용을 복습하고 싶었지만 머리 속은 복잡하고 몇 페이지 풀어본 문제집에는 틀린 것과 실수한 것들이 가득하다. 갑자기 겁이 났다. 내가 바보가 된 게 아닌가? 머리가 망가진 걸까?

‘나 무진장 열심히 했는데..왜 이런 거지? 무서워..’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했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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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업 영역에서 성취를 거두는 사람일수록 강박적으로 ‘열심히’ 하는데 몰두를 하다가 마음의 에너지가 고갈되어버릴 수 있다. <출처: gettyimages>


원섭이가 잘못한 것이라고는 열심히 최선을 다한 것 밖에 없다. 학원을 땡땡이 치는 것은 상상 해본 적도 없고, 친구들과 PC방에 가거나 농구를 하더라도 정해진 시간만큼만 했다. 시간이 아까워서 가족모임에도 나가지 않았다. 어떤 과목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조금 모자란 부분이 있다면 특강을 듣거나, 보강을 했다.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왜 이런 중요한 시기에 이런 고비가 찾아오는 것일까?

원섭이의 문제는 ‘너무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그게 말이 되냐고? 그렇다. 충분히 말이 된다. 열심히 하는 것, 최선을 다하는 것은 분명히 옳고 당연한 일이다.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원섭이는 바람직하게 살고 있다. 더 많은 아이들이 원섭이처럼 성실하게 노력을 하지 않아 문제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꼭 ‘최선’과 ‘열심히’가 삶의 마스터 키는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내 삶의 족쇄가 되어버릴 수 있다. 특히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을 한 경험이 있고, 성실과 꾸준함이 자신의 장점이라고 여기는 사람일수록, 학업 영역에서 성취를 거두는 사람일수록 강박적으로 ‘열심히’ 하는데 몰두를 하다가 마음의 에너지가 고갈되어버릴 수 있다.

우리의 마음 안의 에너지는 유한하다. 쓰고 나면 채워야 한다. 아무리 십대라 급속충전이 된다고 해도, 하루 종일 머리를 쓰고,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삶을 반복하고, 주말에도 쉬지 안고 공부만 한다면 에너지는 결국 바닥을 보이게 된다. 마르지 않을 것 같은 우물이라도 두레박으로 계속 물을 퍼내기만 하면 언젠가는 말라버리는 것과 비슷한 원리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부모들은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아니, 얘가 왜 이래? 보약이라도 지어 먹여야 하나? 아님 곰국이라도 끓여야지’

‘며칠 지나면 나아지겠지. 지금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러나 곰국을 먹는다고, 며칠 쉰다고 상태가 나아지지는 않는다. 아이의 내면은 마치 물고기가 채 자라기도 전에 마구잡이식으로 어획을 해서 황폐해져 버린 어장과 같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너무 어린 나이에 빨리 달리기 시작한 것,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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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시작하는 출발점이 다르다.


생각해보면 부모 세대와 지금의 십대는 인생의 달리기를 시작하는 지점이 달랐다. 부모세대는 공부를 제법 하던 사람이라고 해도 빨라야 중학교, 일반적으로는 고등학교를 들어간 다음부터 공부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대학에 들어가고, 사회생활을 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부모세대의 친구들 중에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놀다가 마지막 1년 동안 죽도록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간 신화의 주인공들이 한 명씩은 꼭 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오늘날에는 유치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고생문이 열린다.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영어 공부도 해야 하고, 읽어야 할 책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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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는 유치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고생문이 열린다.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영어 공부도 해야 하고, 읽어야 할 책도 많다. <출처: gettyimages>


사교육 현장에서는 초등학교 4학년이면 대학이 결정된다며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라고 부추긴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아무 생각 없이 상담을 받으러 갔다가 학원 선생님으로부터 “이미 늦었지만 지금이 마지막 기회니 열심히 하면....”이라는 무서운 지적을 받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들면서 뭐라도 시켜야 할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이런 식이다 보니 대학이라는 결승점을 향해 달리기를 시작하는 시점이 슬금슬금 당겨지게 된 것이다. 지금은 부모세대에 비하면 최소 10년은 일찍 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니, 먼저 달리기 시작해, 앞쪽에서 선두권을 유지하던 아이일수록 지치는 시기 또한 일찍 찾아 올 수 밖에 없다. 고등학생 때, 혹은 대학에 들어간 후 퍼져버리는 아이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부작용을 알면서도 옆에서 먼저 달리기 시작하니 나 역시 가만히 있지 못하는 현실이다.

오래 전부터 믿어온 나쁜 신화도 이런 일이 생기는데 한 몫 한다. 바로 ‘올백 신화’다. 어학계열인 국어와 영어, 수리계열인 수학이나 과학 모두 탁월하면서, 예체능까지 완벽한 올백은 초등학생 시절에는 가능한 점수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후에는 불가능한 일이고, 또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올백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가 타고난 천재이거나, 평가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초등학교 저학년 시기에 각인된 ‘전 과목 올백의 맹목적 추구’는 그런 사람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게 되고, 모든 과목에서 우수해야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만들었다. 고등학교 내신관리라는 것도 모든 과목에서 빠짐없이 잘하는 사람으로 만들려는 욕심이 만들어낸 시스템이다. 한 문제 차이로 격차가 벌어지는 이 시스템에서 아이들은 고등학교 3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번이라도 삐끗하거나 실수를 하게 되면 최상위권 대학은 영원히 꿈도 꾸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그러니 십대들이 ‘실수하지 않기’, ‘모든 면에서 완벽해지기’에 대한 강박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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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저학년 시기에 각인된 ‘전 과목 올백의 맹목적 추구’는 그런 사람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게 되고, 모든 과목에서 우수해야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만들었다. <출처: gettyimages>


실수하지 않고 잘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은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에게 더 크게 작용한다. 일상적인 일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작동하는 작업기억(working memory)을 잘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과 이와 연관된 생각들로 채워버리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뇌가 작동할 수 있는 영역이 줄어든다. 똑똑한 사람들이 더 많이 긴장하고, 평소 잘 알거나 익숙하던 일에서 실수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실수를 했을 때 이를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압박감을 갖게 되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된다. 동기부여의 측면에서만 보면 올바른 태도지만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다 보면 하루하루가 괴로운 스트레스의 연속이 될 수 밖에 없다.


생활전반으로 확대되는 공부 태도



이런 공부태도는 일상생활을 할 때도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 성실해야 한다는 압박으로 서서히 확대된다. 더욱 큰 문제는 일부 ‘모범생’들의 생활습관이 다른 아이들에게도 은연중에 퍼져나가게 되었다는 것. 대부분의 십대들이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생활하는 것에 강박적으로 매달리게 되었지만 거기에서 성취감을 얻기는커녕 ‘탈진증후군(burn out syndrome)'이 와버릴 수 있다. 태엽도 한 방향으로만 계속 감으면 금방 망가져버리듯이 십대들 사이에서도 한 방향으로만 감다가 달리다가 완전히 탈진해버리는 경우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배리 슈워츠는 ‘선택의 패러독스에서 이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을 최상주의자(maximizer)라고 부른다. 이들은 만족주의자와 달리 어떤 상황에서든 '최선의 결과'를 얻지 못하면 행복하지 않다. 이 용어는 원래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너무 심사숙고 하느라 지쳐버린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이었지만 모든 면에서 완벽해지기 위해 노력을 한다는 점에서 본다면 이 또한 최상주의자적 태도라 할 수 있다.

내가 최상주의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아래 설문지를 체크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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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주의자 판단을 위한 설문지. 65이상: 최상주의자, 40이하: 만족주의자 <출처: 배리 슈워츠 ‘선택의 패러독스’>


허덕이고 힘들어하면서도 완벽주의적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지금 멈추면 영원히 뒤쳐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평소 자신이 익숙하게 여기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관성도 물론 한몫을 한다. 그런데 사실 이때 불안을 일으키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이다. 두려움을 돌보면 인생을 방해하는 중요한 요소를 하나를 줄일 수 있는데도 말이다.


나는 ‘슈드비 컴플렉스’인가?



완벽을 추구하는데 있어 어느 정도의 강박은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철저한 면이 없으면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완벽만을 추구한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미래를 위해 일방적으로 늘 현재를 희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가 카렌 호나이는 이를 ‘슈드비 컴플렉스(should be complex)’라고 불렀다.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원칙만 추구하는 삶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허전해하고, 빈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할 일이 많다면서도 마음만 허둥대는 사람들은 멈추는 것, 빈 공간이 있는 것은 바로 지체이자 퇴보라고 여긴다. 그래서 무엇을 달성하더라도 만족하지 못한다. 작은 성취를 기뻐하지 못하고 늘 자신을 닦달하고 더 높은 봉우리를 바라보며 채찍질을 한다. 만족하는 것에 대해서도 불필요한 죄책감을 느끼고 불안해한다.


감긴 태엽을 느슨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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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고 지친다 싶을 때에는 쉬어야 한다. 쉬는 것에, 즐거운 것, 좋아하는 것을 누리는 것에 죄책감을 느껴서는 안 된다. <출처: gettyimages>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강박증,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금과옥조가 우리 십대들의 머리와 마음을 고갈시키고 있다. 이를 해결하겠다고 십대들은 너도나도 에너지 음료를 마신다. 타들어 가는 장작에 기름을 붓는 격이다. 실제 최근 3년간 국내 에너지음료 시장은 2012년 1000억원이 넘는 규모로까지 커졌다. 상당수의 에너지 음료 한 캔에는 60㎎ 안팎의 카페인이 들어있다. 잠깐은 반짝할지 모르지만 기름을 부은 장작은 더 맹렬하게 타 들어가 곧 재만 남게 된다. 이래서는 안 된다. 더 이상 부서지고 망가지기 전에 맹목적으로 최선을 다하던 삶의 방식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

힘들고 지친다 싶을 때에는 쉬어야 한다. 쉬는 것에, 즐거운 것, 좋아하는 것을 누리는 것에 죄책감을 느껴서는 안 된다. 가족여행을 하면서 참고서를 들고 가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보고 싶은 TV프로그램을 보면서 밤늦게까지 낄낄거릴 줄도 알아야 한다. 주말에 학원에 가야 한다면, 반나절 정도는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시간을 내야 한다. 보고 싶은 영화를 보러 가는 것도 좋고, 친구들과 운동을 하는 것도 좋다. 평일 하루 저녁 정도는 공부에서 해방되는 날로 정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억지로라도 그래야 한다. 노는 방법을 잃어버린 십대가 너무 많다. 한쪽은 너무 놀아서 문제, 다른 한쪽은 놀 줄 몰라서 문제다.

나를 찾아오는 십대들에게 이런 처방을 내리면 “무슨 말씀이세요? 절대 안 돼요”라고 반응을 하기 일쑤다. 그렇게 시간낭비를 했다간 뒤쳐질까봐 불안해 지니 말이다. 그렇지만 이런 고통을 받고 있다면 자신의 내면이 고갈되었음을 인정하고 일단 멈추는 것이 그 어떤 약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한 방향으로만 감아대던 태엽을 느슨하게 만들기 위한 적극적 노력이 필요하다. 일부러라도 삶에 빈틈을 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부러지지 않고 완주할 수 있다. 공부를 할 때, 양보다 중요한 것은 질이다. 효율성의 측면에서 보아도 충분히 쉬어가면서 자기 페이스를 조절해나가는 것이 오랜 시간 앉아만 있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

물론 이런 상황이 모든 십대들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공부 잘하고, 착실하게 잘 지내는 ‘범생이’인 착한 아이들도 사실은 숨을 헐떡이며 겨우겨우 버텨가고 있다는 것을 부모들이 모두 알았으면 한다.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조차 더 큰 성공을 위해 허덕일 정도로 지금 우리사회의 현실은 비정상적이다.

내 마음이, 내 아이가 힘들고 지쳐 있다면 더 이상 계속 노력하라고, 조금만 참으라고, 나태해져서는 안되다고 채찍질 하지 말자. 대신 일단 멈추고 숨을 골라야 한다. 이것은 팔자 좋은 위로도, 한갓 게으름도 아니다. 자칫하다간 널찍한 대로 한복판에서 영영 시동이 걸리지 않는 자동차 신세가 되어버릴 수 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언제나 진리만은 아닌 이유다. 많은 십대들의 마음의 연료통에 지금, 빨간 경고등이 켜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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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현 |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병원 신경정신과에서 전공의와 전임의 과정을 마쳤다. 용인정신병원 정신의학연구소에서 근무했고, 캐나다 토론토 정신분석연구소에서 연수한 바 있다. 현재 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진료를 하며, 읽고 쓰고 가르치며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엄마의 빈틈이 아이를 키운다], [심야 치유 식당], [청소년을 위한 정신의학 에세이], [예능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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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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