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환자의 인권을 개선한 필립 피넬 - 쇠사슬에 묶인 정신질환자를 해방시키다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558회 작성일 16-02-06 14:55

본문















14547381303323.png






14547381312666






18세기까지도 광인을 치료하는 방법은 없었다. 바보배에 실어 보내서 공동체와 영원히 격리시키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치료소라는 이름하에 광인을 강제로 수용해서 사람들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트리는 것이었다. 적은 인원으로 수용된 사람들을 관리하고 다시 사회에 내보낸다는 기약도 없이 수용소를 유지하려다 보니 인권유린이 비일비재했다. 사실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희박한 시기였고 광인을 정상인과 같은 인간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마녀사냥으로 화형에 처해지는 것이 겨우 한두 세기 전의 일이었으니, 악마에 홀린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또한 수용소에 갇힌 환자들은 심한 정신분열증, 간질, 정신지체 등으로 정상적인 판단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동물을 다루듯이 묶어두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이런 비인간적인 행위를 그 누구도 비판하지 않았다.




차별과 평등에 대해 고민한 의사, 필립 피넬







14547381319572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 필립 피넬(Philippe Pinel). 정신질환자에 대한 차별 철폐를 주장하고 실천했다. <ⓒ Anna Mérimée>



이런 상황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정신질환자도 인간이며, 인격적으로 처우해야 한다”라는 지금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주장을 펼치고 실천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 필립 피넬(Philippe Pinel, 1745~1826년)이다. 가난한 의사의 일곱 아이 중 장남으로 태어난 필립 피넬은 툴루즈에서 수학을 공부한 후 몽펠리에에서 4년간 의학을 공부했다. 파리로 이주한 피넬은 처음에는 의사 일을 하지 못한 채 저술과 번역에만 몰두했는데, 당시 프랑스 정부가 지방 의대에서 공부한 의사의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차별과 평등에 대한 그의 깊은 고민과 성찰은 여기서 시작됐는지 모른다.

이런 부당한 처우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정신질환에 대한 공부를 계속했는데, 그의 친구 중 한 명이 조울병을 앓다가 자살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친구의 상황을 잘 알고 있던 피넬은 친구의 죽음이 수용소 병원의 무심하고 비인격적인 관행 때문이라 생각하고 중증 정신질환자들의 상태에 대해서 자세히 연구하고 관찰하기 시작했다.

당시 지식인들에게 유행하던 계몽주의적 세계관은 근대적 사고, 즉 이성의 힘으로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적 기대에 한몫했다. 한편으로 전보다 효과적인 치료 방법이 발견되면서 의학적으로도 새로운 낙관주의가 생겼고, 오직 환자를 수용하기만 하던 정신의학계도 그 영향이 흘러들어온 시기였다.





14547381327238





20세기 초반의 비세트르(Bicetre) 모습 <ⓒ Eugène Atget>



고진감래였는지 피넬에게도 기회가 왔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 피넬은 혁명파에 동조했고 그의 동료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다. 당시 프랑스 파리에는 거대한 종합병원이라 불리는 수용시설이 2곳이 있었다. 1656년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가 행정개편을 통해 병자, 범죄자, 노숙인, 광인을 치료 혹은 보호·격리하기 위해 만든 공공시설이었다. 남자를 위한 시설이 비세트르(Bicetre), 여자를 위한 시설이 살페트리에르(Salpetriere)였다. 처음에는 환자들이 일시적으로 휴식을 취하기 위한 호스피스 공간이었으나 점차 중증의 정신질환자들로 채워졌고, 이들을 관리하기 위해 불결한 공간에 쇠사슬로 묶어 두는 일이 다반사였다.





14547381335230





프랑스 살페트리에르(Salpetriere)의 전경 <ⓒ Vaughan>



피넬은 드디어 1793년 파리의 비세트르 병원에서 의사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곳은 병원이라기보다 수용소였다. 범죄자, 매독 환자, 정신질환자들이 섞여서 수용되어 있었는데 그는 특히나 중증 정신질환자에게 관심을 가졌다. 일단 꼼꼼히 관찰하고 환자의 증상과 행동을 면밀하게 기록했다. 환자들과 직접 면담하면서 그들의 상태에 대해서 평가했다. 계몽주의적 세계관의 영향과 프랑스 혁명의 기운을 얻은 피넬은 마침내 사슬에 묶인 정신질환자들을 풀어주었고, 사회적으로 큰 명성을 얻었다.





14547381344243





프랑스 화가 아르망 고띠에 (Armand Gautier)가 그린 19세기 중반 살페트리에르(Salpetriere)의 모습 <ⓒ Armand Gautier>



1795년 살피트리에르 병원의 원장이 된 후 그곳에 수용되어 있던 7천 명이나 되는 여성 환자들의 실상을 접하고 역시 큰 충격을 받았다. 관료화된 직원과 의료진은 그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여 환자들에게 쇠사슬을 채워 움직이지 못하게 해놓았다. 피넬은 이런 모습을 견딜 수 없었다. 그 자신이 오랫동안 지방의대 출신이라는 합리적이지 않은 이유로 차별을 받아왔으며, 왕정을 무너뜨린 체제 전복을 지지하는 진영에서 활동해 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위험할 수 있다는 다른 의료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환자들 묶고 있는 쇠사슬을 풀어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이 큰 반발을 가져온 것은 당연했다. 특히 병동에서 환자들을 직접 돌봐야 하는 간호진의 저항은 대단했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으로 가능했던 환자의 인권 보장과 도덕적 치료







14547381354371





프랑스혁명은 정치적 변화 뿐 아니라, 환자의 인권 보장과 도덕적 치료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출처: wikipedia>



사실 피넬 혼자서 모든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피넬 이전에도 여러 명의 정신과 의사들이 광인의 쇠사슬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1801년 피넬이 “환자에게도 인격과 인권이 있고, 이것을 보장해야 한다”면서 수용소 감금은 치료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나름의 방식으로 정신질환을 분류하는 책을 출판하는 등 학계에 공식적 기록을 남긴 덕분에 이름이 알려질 수 있었다. 그는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하는 광인들이라도 그들의 정신세계와 그들만의 언어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치료자들은 충분히 치료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약물치료나 생물학적 치료가 아닌 특별한 ‘정신적 치료’를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언급한 첫 번째 경우다. 피넬은 이를 ‘도덕적 치료(le traitment morale: 프랑스어 문맥으로 보면 정신 치료)’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 덕분에 그는 근대 정신의학의 효시로 불리게 된다. 그가 수용소의 치료적 기능, 심리치료의 가능성에 대해서 언급한 첫 번째 사람은 아니었지만 책으로 기록을 남겼고, 더 나아가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피넬은 비록 환자들과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그들과 우리는 같은 인간이므로 윤리적 태도를 유지하라고 주장했고 이는 ‘도덕적 치료 방식’의 효시가 되었다. 전 유럽의 정신과 의사들에게 그의 이런 태도는 깊은 감명을 주었고, 아마도 지금의 정신치료의 효시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지금은 이런 인도주의적이고 도덕적 치료방침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혁명적이고 획기적인 조치였다. 프랑스 혁명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수십 년은 지나야 일어났을지 모른다.

이와 같이 인본주의와 인권중심주의를 바탕으로 한 정신의학계 내부의 변화는 1960년대 이후 탈원화(脫院化, deinstitutionalize)의 흐름과 함께 다시 한 번 커진다. 약물치료로 획기적인 치료 효과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환자들은 오랜 기간 입원하면서 그나마 갖고 있던 사회적 기능을 잃고 있었다. 또한 병동 내의 치료진-환자 관계가 지배와 복종의 관계로 파악될 만한 부분들이 많아서 환자들이 적절하게 치료를 받을 권리를 충분히 주장하고 향유하기 어렵다는 지적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의사의 최우선 과제는 환자를 지역사회에 복귀시키는 것







14547381361571





영국 모즐리 병원. 낮에 환자들이 병원에 와서 치료를 하고, 밤에는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제도인 낮병원(day hospital)을 1950년대에 만들었다. <출처: communitycare>



그런 비판에 대해 일부 정신과 의사는 ‘치료 공동체’라는 것을 생각해 냈다. 처음에는 참전군인들을 대상으로 외상적 스트레스를 치유해 사회에 복귀시키기 위한 방법이었고 의사, 간호사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아침에는 버스를 타고 일터로 이동하여 일하고 저녁에는 침상이 놓인 오두막으로 돌아와 공동체 생활을 하는 시스템이었다. 치료 공동체는 환자에게 권한을 주고, 정상적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끌며, 병을 일으킨 나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지역사회로 복귀해서 적응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이는 당시 신경증의 가장 훌륭한 치료로 인정받던 정신분석 치료와 수용소에 장기 입원하는 치료, 어느 쪽도 적합하지 않는 환자들을 위해 기획되었다. 점차 이 아이디어는 오랫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으며 사회적 기능을 잃은 중증 정신질환자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도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진화했다. 1951년경부터 영국 브리스톨, 1953년 모즐리 병원 등에 ‘낮병원(day hospital)’이 만들어졌다. 심한 질환으로 입원했던 환자들이 퇴원 후에 집에 머무르지만 아직 사회나 학교로 복귀하지 못할 때 낮 시간에 등교하듯이 병원으로 와서 치료적 활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프로그램이 여러 곳에 개설되어 있다.





14547381369352





환자는 인간이자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지역사회정신의학의 기본 사상이다. <출처: gettyimages>



이런 방식이 퍼지면서 동시에 ‘사회정신의학-지역사회정신의학’이라는 영역이 점차 정신의학의 한 분야로 자리를 잡아갔다. 지역사회정신의학은 치료는 환자가 처해 있는 전반적 사회환경과 모든 사회적 관계를 포함한 것이고, 환자는 인간이자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지역사회정신의학의 기본 사상이었다. 이 운동은 이후 환자들을 지역사회공동체로 최대한 복귀시키고 그 안에서 치료하고 그들의 적응을 돕는 것이 최선이라는 새로운 개념과 비전을 만들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부분 반영이 되어, 1997년 정신보건법이 처음 만들어졌다. 모든 정신질환자는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지니며, 최적의 치료를 받을 권리를 갖고, 부당한 차별대우를 받지 않으며, 가능한 자유로운 환경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기본 이념하에 입원과 퇴원, 치료에 대한 상세한 규정이 만들어져 시행 중이다.




인권과 자유를 억압받는 식민지 민중의 심리를 분석한 프란츠 파농







14547381376149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 프란츠 파농(Frantz Fanon) <출처: UChicago Wikis>



약 200년 후 프랑스에서 또 한 명의 정신과 의사가 다시 한 번 보이지 않는 억압의 사슬을 끊었다. 정신과 환자들의 인권을 넘어서서 세상의 변화를 꾀한 경우다. 바로 프란츠 파농(Frantz Fanon, 1925~1961년)으로 프랑스 출신의 정신과 의사이자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해방에 많은 기여를 한 사상가이자 지도자이기도 했다.

파농은 북아프리카 원주민 출신으로 카리브 해의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섬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흑인 노예의 후손이었고 어머니는 혼혈 사생아였다. 마르티니크 섬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닌 후 섬을 탈출해서 2차 세계대전 중에 드골의 자유프랑스군에 합류해서 독일과의 전투에 참여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리옹 의과대학에서 공부했고 정신과를 전공으로 선택했다. 정신과 의사가 된 후 자신의 어릴 때 경험을 바탕으로 식민주의의 억압에 대해 깊이 분석하고 통찰적으로 연구하여 식민주의를 거부하고 독립을 지지하는 사상적 토대를 만들었다.

1952년 『검은 피부 하얀 가면(Peau Noire, Masques Blancs)』이라는 책을 내서 식민지 치하 흑인의 심리적 의미에 대해서 분석하는 책을 내기도 했다. 이후 그는 알제리로 건너가서 블리다 주앙빌 정신병원에서 근무했다. 그러던 중 알제리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대변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알제리 독립 직전에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소련으로 건너가 치료를 받았으나 당시의 의학기술로는 뚜렷한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투병하면서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Les damnes de la terre)』이라는 책을 집필하여 출간했는데, 계급·인종·문화와 관련한 부분에서 세칭 ‘제3세계’의 독립적 역할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방법에 대한 통찰력이 있는 선구자적 글을 남겼다. 그의 사상은 나중에 미국 흑인 인권운동가 맬컴 엑스(Malcom X, 1925~1965년)나 쿠바 혁명가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1967년) 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이미지 목록



1
14547381382288




2
14547381387041



『검은 피부 하얀 가면(Peau Noire, Masques Blacs)』 영문 책표지. 식민지 치하 흑인의 심리적 의미를 분석한 프란츠 파농의 저서이다.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Les damnes de la terre)』 영문 책표지.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방법에 대해 프란츠 파농이 저술한 책이다.




백혈병을 앓고 있는 와중에도 강연 활동을 지속하던 파농은 미국의 주선으로 메릴랜드의 한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지만, 1961년 12월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알제리의 독립이 1962년 7월이었으니 겨우 일 년여 차이로 사망하고 만 것이다.





14547381394725




정신과 환자의 열악한 처우에 대한 인식변화는 200년 전 피넬이 환자들의 몸에서 쇠사슬을 끊어낼때부터 시작되었다. <출처: gettyimages>



이와 같이 정신의학의 역사는 정신과 환자의 열악한 대우와 사회로부터의 격리 등에서 솟아난 의사로서의 연민과 공감에 기반하여 발전해 왔다. 환자를 치료한다는 것이 질병의 증상만 없애거나 무조건적으로 사회 격리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지역공동체로 복귀하는 것이 최종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를 위해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없애는 것, 환자들의 조속한 사회적 복귀를 위한 정책적 노력 또한 정신과 의사가 언제나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200년 전 피넬이 환자들의 몸에서 쇠사슬을 끊어낼 때부터 시작돼 지금도 매우 중요한 역할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관련정보









14547381415322

하지현 |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병원 신경정신과에서 전공의와 전임의 과정을 마쳤다. 용인정신병원 정신의학연구소에서 근무했고, 캐나다 토론토 정신분석연구소에서 연수한 바 있다. 현재 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진료를 하며, 읽고 쓰고 가르치며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엄마의 빈틈이 아이를 키운다], [심야 치유 식당], [청소년을 위한 정신의학 에세이], [예능력] 등이 있다.

저자의 책 보러가기
|
인물정보 더보기



14547381417559

출간도서
정신의학의 탄생 2016.01.15
『정신의학의 탄생』은 200년 정신의학의 역사적 사실과 과학적 진실을 쉽게 풀어낸 책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갈등한 환자들의 고투가 인류를 보다 나은 삶으로 이끌고자 한 치료자들의 분투와 맞닿은 의학의 교차점을 다루고 있는 이 책에는, 머리에 쇠막대기가 꽂히는 사고를 겪은 피해자 게이지 덕분에 전두엽의 기능을 알 수 있었던 사건, 15년 동안 환자들의 뇌 조직 슬라이드를 정리해 치매의 존재를 밝힌 알츠하이머, 어린 앨버트 실험으로 양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왓슨, 프로이트에게 반기를 든 제자 아들러와 융의 연구로 확장된 정신분석학, 남성을 인위적으로 여성으로 키우고자 했던 급진적인 시도 등 역동적으로 발전해 온 정신의학의 흥미로운 이면을 그려낸다.

책정보 보러가기


발행2015.04.0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