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정신분석학을 확장시킨 아들러와 융 - 프로이트를 배반한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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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60회 작성일 16-02-06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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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와 그의 초기 제자들. 앞줄에 프로이트, 스탠리 홀, 칼 융, 뒷줄에 칼 아브라함, 어니스트 존스, 산도르 페렌치



오스트리아 빈의 유대인 정신과 개원의 중 한 명이었던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년)는 1895년 『히스테리 연구(Studies of Hysteria)』를 발표하고 1900년 『꿈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Dreams)』을 세상에 내놓은 이후 일약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프로이트는 매주 수요일 저녁에 정신분석 사례를 토론하거나, 문학작품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하는 모임인 ‘수요회’를 결성했다. 정신과 의사뿐 아니라 루 살로메(Lou Andreas Salomé, 1861~1937년) 등의 문화예술인들까지 참여하면서 수요회는 점점 더 활성화되었다.

어느덧 정신분석은 유럽 전역으로 조금씩 퍼져나가며 중요한 학문이자 치료법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정신분석학의 지지자가 되거나 제자가 되었다. 칼 아브라함(Karl Abraham, 1877~1925년),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1870~1937년), 산도르 페렌치(Sándor Ferenczi, 1873~1933년), 오토 랑크(Otto Rank, 1884~1939년), 알프레드 어니스트 존스(Alfred Ernest Jones, 1879~1958년) 같은 이들이 핵심 멤버였다. 하지만 빈을 중심으로 하는 프로이트의 모임은 유럽 전역을 아우르지 못했고, 대부분의 멤버들이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유럽의 소수민족인 유대인었다. 이것이 정신분석학 발전의 한계로 작용할 것을 절감한 프로이트는 적극적으로 외연을 넓히고자 했다.




정신분석학의 지지자에서 프로이트의 후계자가 된 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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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정신과 의사 카를 구스타프 융. 프로이트의 공식적인 후계자로 낙점되기도 했다.



이때 스위스 정신과 의사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년)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프로이트보다 스무 살 정도 어리고 스위스 출신에, 목사의 아들이며, 무엇보다도 유대인이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 가장 유명한 정신과 의사 중 한 명인 오이겐 블로일러(Eugen Bleuler, 1857~1939년)가 운영하는 ‘부르크휠츨리’라는 명문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융은 1906년 프로이트의 자유연상이론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단어연상검사를 개발하기까지 했다. 예를 들어 ‘구름’이라는 단어를 듣고 떠오르는 단어를 말하는데, 이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한다. 이때 만일 ‘하늘’이라고 답한다면 자극이 된 ‘구름’을 듣고 대답하기까지의 시간차를 정교하게 측정한다. 너무 빠르거나 늦게 대답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 단어와 무의식적 콤플렉스가 연관이 있다는 것이 융의 생각이었다. 정신분석이 비과학적이고 지나치게 성(性)에 집착한다고 비판받았던 프로이트에게 융의 단어연상검사는 가뭄에 단비와 같았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제자 아브라함에게 “융의 지지가 훨씬 귀중하네. 오로지 그가 나타났기 때문에 정신분석이 유대인의 민족적 관심사가 될 위험에서 벗어났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융과 적극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했고 융도 프로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동등한 자격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처럼 교수님과 우정을 나눌 수 있게 해주실 것”을 요청하는 등 프로이트의 제자가 되어 더욱 친근하고 특별한 관계가 되는 것을 기꺼이 여겼다. 프로이트는 1911년 국제정신분석학회를 처음 발족하면서 초대 회장으로 융을 선출할 것을 다른 제자들에게 지시했다. 즉, 공식적으로 융을 자신의 후계자로 낙점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프로이트의 생각대로 되는 듯했다. 사람들은 정신분석을 신기해하면서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특히 문화예술계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빈 출신 유대인의 비기(秘技)로 인식되던 정신분석이 유럽 전체에서 받아들여졌고, 미국에서 프로이트는 명예박사학위를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정신의학에서 정신분석의 비중이 더욱 커지면서 제자들 사이에 균열이 생겼고, 스승의 이론에 의구심을 가지며 자기만의 깃발을 세우고 싶다는 야심을 갖게 되는 이들이 나왔다. 그 첫 번째 인물이 아들러였다.




정신분석학의 초기 멤버이자 2인자, 아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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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계 유대인 정신분석학자 알프레드 아들러. 빈 정신분석학회 초대회장을 맡았다. <출처: totallyhistory.com>



아들러는 1870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헝가리계 유대인이었다. 빈 대학을 졸업해 의사가 되었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모임의 초기 멤버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했기에 은연중에 빈에서는 2인자로 인정받았다. 1902년에 매주 수요일 저녁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에 관심있는 지인들과 함께 토론을 하는 모임으로 시작한 수요회가 1908년 정식으로 빈 정신분석학회로 발족하면서 초대 회장을 맡았다. 프로이트도 아들러를 아껴서 1906년 아들러가 처음으로 발표한 ‘신경증의 심리학적 근거’에 대한 논문이 자신의 이론과 차이가 있음에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프로이트와 아들러 모두 정신질환의 원인은 유전과 환경이 공동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정신분석에 대한 생각은 유사했다. 그러나 아들러는 ‘기관열등성(Minderwertigkeit)’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생물학적 기반이 열등한 경우 신경증이 더 잘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프로이트가 어릴 때의 외상경험이나 정신성발달을 중요시했다면 아들러는 사회주의적 성향을 바탕으로 사회나 환경의 영향을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어린 시절의 정신성발달이 인격형성의 핵심이라는 프로이트의 견해에 반대하는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던 아들러는 열등성(inferiority)을 더욱 파고들었다. 사람은 타고난 기질적 불완전성을 갖고 있는데, 여기서 발생한 열등감을 극복하고 보상하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이고, 이 과정에 실패하면 신경증 증상이 생긴다는 독자적인 이론을 만들었다.

이런 와중에 1911년 국제정신분석학회가 창립되면서 융이 회장으로 선임된 것은 정치적으로 아들러를 자극하는 일이었다. 프로이트가 아들러를 중심으로 한 빈 그룹을 배제하고, 스위스 출신의 비(非)유대인 융을 선출한 것은 아들러의 입장에서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격이었다. 게다가 프로이트는 융을 종신 회장으로 임명하려 했다. 결국 빈 그룹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임기를 2년으로 제한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대신 프로이트는 아들러를 다시 빈 정신분석학회의 회장으로 밀었지만, 국제 학회가 아닌 지역 학회를 맡으라는 것은 정신분석학의 초기 멤버로서 그 역할과 공로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아들러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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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왼쪽)는 귀족적인 자세로 환자와 거리를 두었던데에 반해, 아들러(오른쪽)는 옷차림에 관심갖지않고 보다 민주적이며 환자의 상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프로이트의 전기를 쓴 피터 게이(Peter Gay)에 의하면 프로이트는 깔끔하고 귀족적인 사람으로 환자와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이에 반해 아들러는 옷차림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사회적 활동에 적극적이고 민주적이며 환자의 상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성향 차이가 환자를 보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이런 아들러의 태도를 못마땅해한 것 같다.

프로이트는 아들러가 정신분석의 중요한 요인인 리비도를 평가절하하고 심리적인 측면보다 생물학적 기관열등성에만 천착한다고 생각해 갈등을 빚었지만, 빈 그룹의 일부는 아들러의 이론이 정신분석을 넓히는 보완적 역할을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아들러가 1911년 「신경증의 핵심 문제인 남성적 저항」을 발표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프로이트는 “아들러는 자신과 다르며 추상적이고 익숙한 개념을 새로운 이름으로 얘기할 뿐”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무의식과 성욕을 무시하고 심리학을 생물학과 생리학에 종속시키려 한다고 공격했다. 마침내 1911년 2월 말 아들러는 빈 정신분석학회 회장과 ≪정신분석 중앙 신문(Zentralblattfür psychoanalyse)≫의 편집인을 그만두었으며, 마지막으로 학회 사퇴서까지 냈다. 같은 해 가을, 아들러를 지지하는 여섯 명이 학회에서 축출되면서 아들러와 프로이트는 공식적으로 결별했다.




강한 성취동기는 열등감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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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러의 초기저서 <The Practice and Theory of Individual Psychology>. ‘개인심리학’이라는 영역을 창시했다.



이후 아들러는 지지자들과 ‘개인심리학(individual psychology)’이라는 자기만의 영역을 만들었다. 개인심리학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뿌리를 두지만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무의식 결정론을 넘어서 인간 심리에는 ‘현재’와 ‘의식적 힘’의 영향도 중요하고, 사회적 환경도 많은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경험과 타고난 기질만이 그 사람의 정신세계 전체를 결정하지 않고, 개인의 행동에 따라 충분히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맥락 안에서 목표지향적으로 행동하는데, 지금 경험하고 있는 매 순간마다 주관적인 선택을 해나가기 때문에, 의식적 자기결정과 자유의지를 중요하게 여겼다.

아들러는 신체 질환으로 장애가 생긴 사람들을 관찰하며 이 이론을 심화했다. 어떤 사람은 장애를 극복해 내며, 도리어 자신의 장애를 큰 성취동기로 삼는데, 어떤 사람은 장애에 좌절하여 삶을 망가뜨리거나 발전 없이 그대로 머물기만 한 것을 본 것이다. 그런 행동의 추동력으로 ‘열등감 콤플렉스(inferiority complex)’를 지적했다.

아이들을 관찰해 보면, 어린 시절에 아이는 항상 자기보다 큰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있으니 자연스럽게 ‘자기가 못났다고 여기는 열등감’이 마음속에 뿌리 내린다. 아들러는 이 열등감이 삶의 족쇄가 되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뭔가를 시도하고 극복하고 성취할 수 있게 하는 동기를 부여한다고 여겼다. 나폴레옹의 강한 권력욕은 키가 작다는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무의식적 추구로 해석했다. 성취와 성공의 경험을 통해 사람은 열등감을 완화하고 자연스럽게 자신감이 커진다. 반대의 경우에는 열등감만 커지고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된다. 그 차이는 결국 개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방법, 즉 자존감의 차이에 의한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한 개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총체적으로 접근해야 하며, 개인이 사회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측면에서 개인심리학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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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러에 의하면, 나폴레옹의 강한 권력욕은 키가 작다는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무의식적 추구이다.



한편 아들러는 열등감 콤플렉스의 반대편에 우월감 콤플렉스(superior complex)도 있다고 했다. 이는 목표 달성과 성취만 끝없이 추구하는 것으로, 성취가 자존감으로 이어지지 않기에 외부의 인정만 더 추구하는 악순환에 빠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아들러는 아이들의 정신건강 및 복지정책등 관심이 많았다. 빈을 중심으로 아동 진료소를 22곳을 개원했는데, 이 병원들은 아들러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1932년 강제 폐쇄되었다. 아들러는 1927년경 미국으로 건너가 롱아일랜드 의과대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활발한 대중 강연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널리 알리다 1937년 사망했다. 그는 프로이트의 관점 너머로 정신분석의 세계를 확장시킨 첫 번째 정신분석가였고, 그의 후학들은 그가 다른 제자들에 비해 나이가 많았고, 프로이트로부터 정신분석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등을 들면서 프로이트의 제자가 아니라 동료였을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넘어 분석심리학을 창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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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국제정신분석학회 사진. 가운데에 프로이트와 융이 있다.



융을 국제정신분석학회의 회장으로 세우고 아들러와도 결별한 프로이트는 이제 융이 정신분석학계를 이끌어주기를 바랐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1909년 프로이트는 미국 클라크 대학의 초청으로 갔던 미국여행에 융을 동반하여 두 사람의 친분을 드러냈다. 미국으로 가는 배에서 프로이트는 자신의 꿈을 제자들과 공유하며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융은 최선을 다해 그 꿈을 해석했다. 그러나 거부감을 느낀 프로이트는 자신을 분석하지 말라고 요청했고, 이에 융은 프로이트가 꿈의 분석을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각했다. 나중에 융은 이때부터 프로이트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존경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융은 프로이트를 “옛날의 헤라클레스와 같고,” “인간 영웅이자 더 높은 신”으로 여겼으며, 의견이 불일치되는 것은 자신이 프로이트의 이론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차 융도 정신분석 이론에서 자신만의 생각을 넓혀가면서, 프로이트의 생각들과 부딪치는 부분들이 생겼다. 스위스와 빈에서 각각 활동하던 융과 프로이트는 주로 서신으로 친교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1912년 스위스 크로이츨링겐 정신병원 원장이었던 루트비히 빈스방거(Ludwig Binswanger, 1881~1966년)의 병문안을 했던 프로이트가 불과 60킬로미터 거리의 취리히 대학에 있던 융을 방문하지 않았던 일이 있었다. 이에 기분이 상한 융은 프로이트가 자신을 등한시할뿐더러 자신의 독립적 활동에 부정적이라고 받아들이면서 프로이트를 비난하는 일이 잦아졌다. 두 사람의 공고한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마침내 프로이트는 페렌치에게 융이 신경증인 것 같다고 하면서 “정신분석에서 유대인과 비유대인을 융합하려는 것은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자인하기에 이르렀다.

1912년 겨울부터 융은 프로이트의 리비도 이론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정립해서 강연하기 시작했고, 성욕으로만 신경증을 해석하는 것에 불편해하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대중의 긍정적인 반응에 자신감을 얻은 융은 “지금 나의 입장은 개인적 거부감 같은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키는 문제입니다”라고 프로이트에게 편지를 보냈다. 일종의 독립 선언이었다. 하지만 아들러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국제정신분석학회의 회장인 융과 반목하는 것이 보기 좋지 않은 일이기에, 사람들의 중재로 뮌헨에서 오랜 시간 대화한 후, 융이 사과하는 것으로 봉합되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프로이트가 기절한 사건이 있었다. 3년 전에도 한 번 있었던 일로 두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난 흔치 않은 일이었다. 프로이트는 융의 죽음소망이 드러난 것이면서 동시에 내면의 심리적 갈등이 주요한 원인이라고 해석했지만, 융은 프로이트가 자신을 다소 두려워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여겼다.

조금씩 대담해지기 시작한 융은 프로이트에게 이런 편지를 쓰기에 이르렀다.



“교수님이 의심한다면 그것은 교수님의 문제입니다. 제자들을 마치 환자처럼 대하는 교수님의 기법은 큰 실수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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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의 저서 <인간과 상징>. 그는 조상이나 종족저체의 경험과 사고의 바탕이 되는 무의식인 "집단 무의식"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일종의 위기감을 느꼈다. 국제정신분석학회의 회장은 융이었으니 자칫하면 창시자인 프로이트 본인이 퇴출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3년 5월 프로이트는 페렌치, 아브라함 등 초창기 추종자들에게 융을 사임시키자는 제안서를 극비리에 돌렸다. 반면에 융은 강연에서 프로이트의 이론과 자신이 어떻게 다른지를 강조했으며, 1913년 7월부터는 ‘분석심리학’이라는 명칭을 따로 쓰기 시작했다.

융은 프로이트와 달리 비교(秘敎)적 영향을 받았고, 원형(archetype), 집단무의식, 종교적 경험에 대한 공감, 콤플렉스, 신화와 연금술의 중요성 등을 이론에 포함시켰다. 정신분석학을 합리적·과학적 학문으로 세우고자 했던 프로이트로서는 이러한 신비주의적 속성을 정신분석의 한 갈래로 인정할 수 없었다. 결국 1914년 4월 융은 국제정신분석학회의 회장직을 사임했고 공식적으로 프로이트와 결별했다. 이후 융은 취리히 의대를 사임하고 은둔생활에 들어갔고, 자신만의 이론을 심화시켰다. 1922년부터 취리히 인근 볼링겐 마을에 33년간이나 집을 증개축했는데, 마치 융의 사상적 발전과 학문적 노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융은 스위스에서 분석심리학을 가르치고 학회를 만들어 후학을 키우다가 1961년 사망했다.




이론적 갈등과 반목이 정신분석학의 외연을 넓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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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가 1925년에 쓴 자서전 <나의 이력서>.



2인자였던 아들러, 공식적 후계자였던 융과 몇 년 남짓한 시기에 결별한 프로이트에게 이 사건은 일종의 꼬리표가 되어, 그에게 대들거나 자기만의 이론을 만드는 사람을 모두 내침으로써 그의 친구는 모두 적이 된다는 세간의 비판을 받았다. 이를 잘 알고 있던 프로이트는 1925년에 쓴 짧은 자서전 『나의 이력서』에서 결별한 동료이자 제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입장을 밝히며 적극적으로 해명하기도 했다.

정신분석이란 학문이자 임상적 치료방법은 당시로서는 무척 획기적이었고, 이론이 채 정립되지 않은 신천지와 같았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이 유럽의 한 도시 빈, 혹은 유대인들만의 협소한 학문이 아니라 주류 학문으로 발전하기를 바랐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론적 차원에서 프로이트와 대립하는 사람도 있었고, 정치적으로 갈등하는 사람도 있었다. 인간의 정신세계의 심연을 다루는 정신분석조차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창시자와 생각이 다르면 배척당하고, 초기의 멤버들은 자기 공로를 인정받기를 바라고, 후계자 자리를 놓고 정치를 하며, 한편으로 조직의 1인자는 위기감을 느끼는 것은 다른 분야들과 마찬가지 모습이었다. 결국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난 후에야 프로이트가 생각했던 일관된 개념의 정신분석이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프로이트도 그를 배반한, 아니 그와 초기에 결별한 제자들과의 경험 덕분에 이후에는 정신분석에 있어서도 이론적으로 훨씬 유연해졌고 자신과 다른 이론을 가진 이들을 전보다는 수용할 수 있었다. 또한 아들러와 융은 비록 개인적으로는 프로이트와 좋지 않게 결별했지만, 각기 정신분석의 자양분을 받아 아들러는 ‘개인심리학’, 융은 ‘분석심리학’으로 자신만의 독자적 이론을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다. 이는 이후에 수많은 후학들이 정신분석을 프로이트의 이론만 수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고, 시대변화와 환자의 요구에 맞춰 확대해 나가고, 수정·발전시킬 수 있는 첫 단추를 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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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빅터프랑클(ⓒ Prof. Dr. Franz Vesely), 아론벡(출처: The Beck Institute), 매슬로. 아들러의 이론은 이러한 인지심리학자에게 영향을 미쳤다.




아들러의 이론은 이후에 빅터 프랑클, 아론 벡, 애브러험 매슬로우과 같은 정신분석가나 인지심리학자 뿐 아니라 루돌프 드레이커스나 스티븐 코비와 같은 자기계발 전문가들의 이론에 큰 영향을 줬다. 그가 제시한 ‘대인관계에서 미움받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여라’, ‘완벽주의적 태도를 버려라’, ‘프로이트의 원인론에서 벗어나 미래지향적 목적론에 중점을 둔 것’, ‘과거에 집착하기보다 현재와 미래를 중요하게 여긴 점’은 특히 최근 한국에서 뒤늦게 큰 각광을 받고 있다.

또한 융의 이론은 종교적 철학적 측면에서 해석의 측면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고, 민담과 전설의 연구등에서 상당한 영향을 주었으며, 치료적 측면에서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비해서 꿈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집단무의식, 콤플렉스의 존재와 같은 독특한 면에서 현대 정신분석의 한 흐름으로 위치를 단단히 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프로이트의 잠재적 후계자였던 아들러와 융과의 결별은 개인적으로는 비극적 사건이었을지 모르지만, 20세기 초반 한 사람의 천재가 만들어낸 정신분석 이론이 보편적이고 응용 가능한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매김하는 데에는 도리어 긍정적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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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현 |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병원 신경정신과에서 전공의와 전임의 과정을 마쳤다. 용인정신병원 정신의학연구소에서 근무했고, 캐나다 토론토 정신분석연구소에서 연수한 바 있다. 현재 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진료를 하며, 읽고 쓰고 가르치며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엄마의 빈틈이 아이를 키운다], [심야 치유 식당], [청소년을 위한 정신의학 에세이], [예능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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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도서
정신의학의 탄생 2016.01.15
『정신의학의 탄생』은 200년 정신의학의 역사적 사실과 과학적 진실을 쉽게 풀어낸 책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갈등한 환자들의 고투가 인류를 보다 나은 삶으로 이끌고자 한 치료자들의 분투와 맞닿은 의학의 교차점을 다루고 있는 이 책에는, 머리에 쇠막대기가 꽂히는 사고를 겪은 피해자 게이지 덕분에 전두엽의 기능을 알 수 있었던 사건, 15년 동안 환자들의 뇌 조직 슬라이드를 정리해 치매의 존재를 밝힌 알츠하이머, 어린 앨버트 실험으로 양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왓슨, 프로이트에게 반기를 든 제자 아들러와 융의 연구로 확장된 정신분석학, 남성을 인위적으로 여성으로 키우고자 했던 급진적인 시도 등 역동적으로 발전해 온 정신의학의 흥미로운 이면을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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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5.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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