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충남 예산 용궁리 추사 고택의 백송 - 추사 김정희 선생이 심은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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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59회 작성일 16-02-06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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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선비들은 나무를 많이 심었다. 굳이 그들의 자연주의 철학을 들먹이지 않아도 농경문화권의 민족에게 나무를 심는 일은 일상다반사였다. 지위 높은 선비는 물론이고, 농사 짓는 민초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선조들이 나무를 심은 뜻에는 민족이 살아온 살림살이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게 마련이다. 평범한 백성들이 심은 나무에는 백성의 살림살이가, 학자들이 심은 나무에는 그들의 철학이, 종교인이 심은 나무에는 종교적 신앙이, 정치가들이 심은 나무에는 정치의 역사가 담겨 있다. 또 오래 전 국가간의 외교를 담당했던 선비들이 심은 나무에는 어렴풋이나마 외교의 역사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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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선생이 중국의 연경에서 돌아올 때에 가져와 심은 예산 용궁리의 백송(白松)




중국이 고향인 하얀 줄기의 소나무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선생도 나무를 심었다. 그가 살아온 내력은 물론이고, 중국과의 학문적 교류 사정을 그대로 담은 한 그루의 나무가 여전히 살아있다. 충남 예산의 추사 고택에 살아있는 천연기념물 제106호 예산 용궁리 백송이 그 나무다.

이름에서 보듯이 백송(白松)은 소나무의 한 종류인데, 줄기 표면에 하얀 빛이 도는 특별한 나무다. 물론 우리에게 특별한 나무이지, 그의 고향인 중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다. 자람이 비교적 까탈스러운 백송은 고향인 중국 외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데다, 옮겨심기도 잘 안 되는 특징을 가졌다. 우리나라에서 특별한 나무라 할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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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른 예산 용궁리 백송의 줄기 부분. 하얀 얼룩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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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송 줄기의흰 색과 밝은 회색이 어우러져 이뤄낸 무늬가 상서롭다.



백송의 줄기는 하얀 색을 바탕으로 밝은 회색의 얼룩 무늬가 아름다운 나무다. 신비로워 보이는 무늬다. 백송의 다른 이름들도 모두 이 하얀 줄기와 얼룩무늬에 기대어 지어졌다. 중국에서는 흰 색 줄기의 특징에 기대어 백피송(白皮松)이라는 이름으로, 또 회색 무늬가 호랑이 가죽을 닮았다고 해서 호피송(虎皮松)이라고 부른다. 영어권에서도 이 무늬를 특징적으로 보아서 Lace-bark pine이라고 한다. 영어권에서는 스트로브잣나무를 White Pine이라고 부르기도 해서, 백송과 자주 헷갈린다.

줄기의 빛깔을 제외하면 백송은 여느 소나무와 크게 다를 게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잎이 나는 방식이다. 두 개의 잎이 모여 나는 소나무와 달리, 백송은 세 개의 잎이 한데 모여 돋아난다. 그밖에 대부분의 생육 특징은 우리 소나무와 매우 비슷하다.

예산 용궁리에서 추사 김정희 선생의 옛 일을 담고 서 있는 나무가 바로 이 특별한 나무, 백송이다.



낯선 타국에서 향수를 달래게 한 나무



예산 용궁리에서 태어난 김정희 선생은 어린 시절을 서울에서 보냈다. 지금의 서울 종로 적선동 정부종합청사 부근이다. 당시 이곳에는 영조 임금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가 혼사를 치른 뒤 살던 집이 있었다. 화순옹주는 김정희의 증조부인 김한신(金漢藎, 1720~1758)과 결혼을 했고, 김한신은 임금으로부터 월성위라는 직위를 얻었다. 그리고 그들이 살던 집은 월성위궁(月城尉宮)이라고 불렸다. 어린 시절부터 천재성을 드러내던 김정희 선생이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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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선생은 중국에서 가져온 백송을 고조부인 김흥경의 묘 앞에 심었다. 한창 때에는 세 개의 굵은 줄기로 자라다가 바람을 맞고 두 줄기는 부러져 다소 빈약해 보이는 예산 용궁리 백송.


월성위궁에는 영조가 그의 딸 부부에게 선물로 내린 나무가 있었다. 영조는 화순옹주가 살 집을 짓게 하고, 집이 다 지어지자, 자신이 아끼던 나무 한 그루를 옮겨 심었다. 그 나무가 바로 백송이다. 영조의 백송은 긴 세월을 잘 살아오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난 1990년 7월에 태풍을 맞아 한 순간에 쓰러져 지금은 다시 볼 수 없는 나무가 됐다.

월성위궁에서 살던 소년 김정희의 눈에 이 특별한 소나무의 인상은 무척 강렬했을 것이다. 줄기 껍질만 빼면 우리 산과 들에 지천으로 살아있는 소나무와 똑같은 나무다. 그래서 상서로운 흰 빛을 가진 백송을 더 아꼈을 게다. 추사 선생이 어린 시절을 추억할 때에 떠오르는 대표적 상징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건 청년이 되어 중국의 연경 땅에 갔을 때에 드러났다. 우리나라에는 볼 수 없는 특별한 나무가 중국의 연경에서는 줄지어 서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낯선 타국에서 어린 시절을 회상할 수 있는 나무를 볼 수 있는 걸 청년 김정희는 무척 좋아했다. 조국, 고향, 그리고 그리운 가족을 향한 향수를 달래는 데에 백송만큼 알맞춤한 건 없었을 것이다.

유학 시절 백송을 즐겨 찾았던 청년 김정희는 스스로 백송을 구해 심어 키우고 싶었다.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백송의 씨앗을 가지고 왔다. 고이 싸들고 온 씨앗을 그는 고향 집 뒷동산, 그의 고조부 김흥경의 묘지 앞에 심었다. 짬 날 때마다 돌아보며 애지중지 키운 것은 물론이다. 지금의 예산 용궁리 백송이 바로 그 나무다.



나무 줄기 안에 새겨진 사람살이의 내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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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리 백송의 밑동 부분에는 예전에 부러진 두 줄기의 흔적이 남아있다.


청년 김정희의 나이 스물 다섯, 서기 1810년 전후의 일이다. 그러니까 이 백송은 올해로 2백 살을 갓 넘긴 셈이다. 나무가 서 있는 김흥경의 묘지는 추사 고택에서 북서쪽으로 난 조붓한 도로를 따라 약 6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고 나무는 바로 그 묘지 앞에 있다.

한눈에도 예사롭지 않은 나무임을 충분히 알 수 있는 이 나무는 생각보다 가냘프다. 정성스런 보호로 건강 상태까지 그리 나쁜 건 아니지만, 규모는 여느 천연기념물 급의 나무에 비해 작은 편이다. 원래 이 백송은 땅에서 50센티미터 쯤 위로 올라간 부분에서 줄기가 셋으로 갈라져 자랐다. 그러나 그 중 가장 큰 줄기와 서쪽으로 뻗은 또 하나의 줄기가 오래 전에 부러졌다. 지금은 처음의 세 줄기 가운데 하나만 남아있어 조금은 빈약해 보인다.

말 없이 200년을 살아온 나무에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선비가 살아온 내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셈이다. 중국 밖에서 자라기 힘든 나무가 왜 이곳에서 자랐으며, 또 굳이 이 나무를 이 자리에 심고 애지중지 키운 이유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건 나무 안에서 우리의 역사를 찾아보는 일이 된다.

이제 한창 때 아름답던 자태는 잃었지만, 여전히 신비의 흰 껍질을 하고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소중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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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고규홍 | 나무 칼럼니스트
재단법인 천리포수목원 감사인 고규홍은 문화적 의미를 지닌 이 땅의 큰 나무를 찾아 사진과 글로 세상에 알려 왔으며, 홈페이지 솔숲닷컴(http://www.solsup.com/)을 통해 14년째 ‘나무 편지’를 발행한다. 현재 인하대와 한림대 겸임교수로 디지털 콘텐츠 관련 강의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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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제공

유한킴벌리 우리숲진 블로그




발행2012.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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