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퇴계 이황의 삶이 담긴 나무들 - 나무 그늘에서 사유의 힘을 키우다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371회 작성일 16-02-06 15:49

본문















14547413735239.png


어린 시절의 환경은 어른이 되어 살아가는 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자연에 묻혀 어린 시절을 보낸 선비들에게서 자연주의 철학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는 건 그래서 특별한 일이 아니다.

물론 왁자한 저잣거리를 피해 고요한 곳에서 글 공부를 하는 게 효과적인 건 예나 지금이나 당연한 이치다. 비교적 자연과 가까이 지내던 옛 시절에는 더 그랬겠다. 조용한 산사에 들어 수도승처럼 용맹정진(勇猛精進)한 선비가 있는가 하면, 산 속에 오두막을 짓고 공부에 전념한 선비들도 있다. 퇴계 이황(李滉, 1501~1570)도 그랬다. 그를 조선의 대학자로 키운 대자연은 경북 봉화의 청량산이었다.





이미지 목록



14547413736510



어린 시절 퇴계 이황이 글공부하던 청량산 청량정사 대문 앞에 서 있는 느티나무 고사목.





14547413738306



부러지고 썩어 둥치만 남아 찬란했던 시절을 아련히 그리워하는 청량정사 고사목.





어린 시절에 글공부하던 청량정사 앞 느티나무



봉화의 청량산은 ‘단정하면서도 엄숙하고, 밝으면서도 깨끗한’ 산이다. 영남의 작은 금강이라 불리는 명산이다. 누구보다 청량산을 아낀 이황은 아예 스스로를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 했으며, ‘청량산가(淸凉山歌)’라는 노래를 남기기도 했다.

이황이 처음 청량산에 찾아 든 것은 열세 살 때였다. 당시 안동부사를 지내던 그의 숙부를 따라 글공부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황의 숙부는 청량산 중턱에 청량정사라는 이름의 작은 집을 짓고, 조카 이황이 그곳에 머물며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곳에 머물며 학문의 기초를 닦은 이황은 나중에 다시 청량정사를 찾아 후학을 양성했을 뿐 아니라,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저술할 때에도 머물렀다고 한다. 바로 그 청량정사 앞에는 한 그루의 느티나무 고사목(枯死木– 말라 죽은 나무)이 있다. 이미 생명의 흔적이 사라진 지 오래 된 고사목이다.

살아있을 때에 넓게 가지를 펼쳤을 나무 윗 부분은 잘려나가고, 줄기만 남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 생김생김이 매우 듬직한 고사목이다. 줄기 둘레는 어른 셋 정도가 둘러서야 겨우 끌어안을 수 있을 정도로 굵고, 높이도 8m는 넘는다. 이 정도면 살아있을 때의 크기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죽은 나무의 나이를 정확히 가늠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현재의 모습만으로도 이 나무는 이황이 이곳에서 글공부하던 5백 년 전에도 무척 큰 나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린 이황은 글 공부에 매진하는 틈틈이 이 느티나무 그늘에 들어서서 사색에 잠겼을 것이다. 아름다운 청량산, 풍요로운 느티나무 그늘에서 그렇게 어린 이황의 사유는 차츰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해갔다.



후학들에게 모범을 보인 자연사랑 실천



이황은 존경받는 대학자로 일가를 이룬 뒤에 손수 나무를 심기도 했다. 아쉬운 건 그가 심은 나무 가운데 지금까지 살아있는 나무를 찾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나마 볼품 없이 죽은 나무 가운데에 그의 손길이 담긴 나무를 찾을 수 있는 건 다행이지 싶다.

이황이 손수 심은 나무가 고사목의 형태로 남아있는 곳은 바로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소수서원은 470년 전인 서기 1542년(조선 중종 37)에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이 ‘백운동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이 소수서원 입구의 솔숲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솔숲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당대 최고의 유학자인 퇴계 이황도 이곳 소수서원을 자주 찾아와 후학을 가르쳤다. 특히 이황은 ‘죽계수(竹溪水)’라고 부르는 서원 앞 개울 건너편 오솔길을 산책하는 걸 무척 즐겼다. 그가 특별히 좋아하던 자리인 이곳을 이황은 손수 ‘취한대(翠寒臺)’라고 이름 붙이고 주위에 스물한 그루의 소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 많은 나무들이 지금은 모두 죽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 가운데 두 그루는 고사목으로 남아 있다.





이미지 목록



14547413739663



소수서원 취한대 개울 옆에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소나무 고사목은 퇴계 이황이 손수 심은 나무라고 한다.





14547413741043



오래 전에 죽은 이황의 소나무 줄기에 남은 송진 채취 흔적.



하얗게 말라죽은 이황의 고사목은 서원 경내로 들어서는 대문 앞의 경렴정(景濂亭)에서 훤히 바라다 보인다. 이황이 쓴 ‘白雲洞’과 주세붕이 쓴 ‘敬’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남아있어 ‘경자바위’라고 부르는 큰 바위 바로 옆이다. 여러 그루의 침엽수들이 늘어선 가운데에 허옇게 말라죽은 두 그루의 나무가 바로 이황의 소나무 고사목이다.

두 그루의 고사목은 한창 때 사방으로 넓게 펼쳤을 가지를 모두 떨구고 곧은 줄기 하나만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올라있다. 죽은 나무여서 특별히 보호하는 것도 아니고, 나무 앞에 이황의 흔적을 가리키는 아무런 표시도 없다. 다만 소수서원의 유적 안내서에만 이황 선생의 행적이 기록돼 있고, 몇몇 해설사들만이 이 나무의 유래를 공들여 소개할 뿐이다. 나무 줄기에 선명하게 남은 송진 채취 자국만 흉측하게 드러나 있다. 이미 생명을 마친 나무이지만, 이황 선생이 남긴 자취라는 게 고맙게 여겨질 뿐이다.



14547413742615



도산서원에는 이황 선생인 유난히 좋아했던 매화나무가 곳곳에서 잘 자라고 있다.




관기의 선물로 받고 애지중지 키운 매화



느티나무 그늘에서 사유의 힘을 키우고, 그 힘으로 큰 스승이 되어 몸소 나무를 심고 가꾸었던 이황은 죽는 순간까지 나무와 함께 했다. 그는 죽음에 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 땅에 ‘저 나무에 물 주거라’는 말을 남겼다. 그가 마지막 순간에 물을 주라 했던 나무는 예로부터 선비들이 유난히 좋아했던 매화다.

이황의 삶을 마지막까지 지켜 준 매화는 바로 안동 도산서원의 ‘도산매(陶山梅)’, 혹은 ‘퇴계매(退溪梅)’라 불리는 매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황이 아끼던 매화는 이미 오래 전에 생을 마쳤다. 지금 도산서원 곳곳에서 ‘도산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나무는 이황의 남다른 매화 사랑을 잇기 위해 후학들이 새로 심은 나무들이다.

도산서원의 매화에는 남다른 유래가 전한다. 이황은 충북 단양군수를 지내던 때부터 부임지를 옮길 때마다 한 그루의 매화를 갖고 다녔다. 그 매화를 처음 만나게 된 건 단양에서 군수를 지내던 마흔 여덟 살 때였다. 당시 단양에는 미모의 관기(官妓), 두향(杜香)이 있었다. 그녀는 이황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여러 선물을 올렸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급기야 두향은 이황 선생이 거절하지 못할 선물로 한 그루의 매화를 보냈다. 예상대로 선생은 매화를 거절하지 않고 잘 받아서 키웠다고 한다. 그게 바로 이황 선생이 그토록 애지중지 갖고 다니다가 죽는 순간 바라보았던 매화다.





이미지 목록



14547413743927



매화를 좋아했던 이황 선생은 죽는 순간 제자들에게 매화나무에 물을 주라는 말을 남겼다.





14547413745372



이 땅에 가장 먼저 봄소식을 전하는 매화는 예로부터 선비들이 좋아했던 대표적인 나무다.



이황은 굳이 나무에 대한 기록을 따로 남기지는 않았어도 누구보다 나무를 사랑하고 아꼈던 대표적 인물임에 틀림없다. 어린 시절부터 깊은 산 느티나무 그늘에서 사유의 힘을 키웠던 경험은 그처럼 그의 일생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자연보다는 전자기기를 더 가까이 하는 우리 아이들의 손을 잡고 가까운 숲을 찾아가야 할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싶다.






14547413746316

글ㆍ사진
고규홍 | 나무 칼럼니스트
재단법인 천리포수목원 감사인 고규홍은 문화적 의미를 지닌 이 땅의 큰 나무를 찾아 사진과 글로 세상에 알려 왔으며, 홈페이지 솔숲닷컴(http://www.solsup.com/)을 통해 14년째 ‘나무 편지’를 발행한다. 현재 인하대와 한림대 겸임교수로 디지털 콘텐츠 관련 강의를 한다.

저자의 책 보러가기
|
인물정보 더보기


자료제공

유한킴벌리 우리숲진 블로그




발행2012.04.0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