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치명적 유혹의 맛, 복어국 - 봄철 잠시 맛볼 수 있었던 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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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40회 작성일 16-02-06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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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지역과 시기를 가리지 않고 즐겨 먹는 복어국이지만 18세기에 서울에서 복어국은 봄철에 잠깐 먹는 제철 음식을 대표하는 별미였다. 복어(鰒魚)의 한자 ‘복(鰒)’은 본래는 ‘전복(全鰒)’이지 복어가 아니다. 그 당시, 복어는 복어 또는 복생선(鰒生鮮)으로 불렸으나 전복과 혼동되기도 하여 그보다는 하돈(河豚)이란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다. 고대의 낙랑군(樂浪郡)에서 난다는 패(14547413784159.jpg)란 물고기도 실제로는 복어를 가리킨다고 하고, 고려시대 문헌에도 복어를 먹었다는 사실이 나오므로 먹을거리로서 복어는 역사가 아주 오래다.



복어는 한강에서 잡은 것이 맛있다



회귀성 어종인 복어가 가장 많이 잡히고 맛이 좋은 지역이 바로 한강 하류 지역이다. 물론 임진강 하류도 명산지에 포함된다. 18세기 중엽 서울 마포에서 어부들이 물고기를 잡는 활기찬 풍경을 묘사한 작품으로 유득공(柳得恭, 1749~1807)이 쓴 <마포에서 물고기를 잡다(三湖打魚)>란 장편시가 있는데 거기에는 복어를 잡는 대목이 등장한다. “하돈은 분을 이기지 못해/ 그 배가 제강(帝江)처럼 불룩하네./ 차례대로 뜸(짚, 띠, 부들 따위의 풀로 엮어서 만든 거적) 위에 매달아서/ 잠시나마 구경거리로 삼네”라고 하여 복어 잡는 풍경을 익살스럽게 묘사하였다. 허균(許筠)의 요리 품평서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도 “하돈은 한강에서 나는 것이 맛이 좋은데 독이 있어 사람이 많이 죽는다. 영동 지방에서 나는 것은 맛이 조금 떨어지나 독은 없다”라고 한 것을 보면 16세기에도 복어 요리의 명소는 한강을 낀 서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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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득공이 화가 난 복어의 모습이라고 말한 제강(帝江). 제강은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 몸만 있고 머리가 없는 신화 속 동물이다. 불룩한 몸뚱어리와 펼쳐진 날개 모양이 가시 돋친 복어와 비슷하다. 그림은 명(明) 호문환(胡文煥) [격치총서(格致叢書)]본 <산해경도(山海經圖)>에 실려 있다.



복어 요리가 맛있으려면 무엇보다 복어 자체의 품질이 좋아야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봄날 한철, 맛 좋은 복어를 잡으러 나서곤 했다. 18세기 문헌 곳곳에서는 봄이 찾아왔음을 알리는 신호로 한강에 복어가 올라오는 풍경을 들었다. 그중에서도 노량진에서 잡히는 복어가 가장 먼저 시장에 등장했다. [경도잡지(京都雜誌)]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복사꽃이 채 지기 전에는 복어국을 먹는다. 그 독이 겁나는 사람들은 복어 대용으로 도미를 쪄 먹는다”라고 하였다. 19세기의 백과사전 [송남잡지(松南雜識)]에서는 “세상에서는 복어를 복생선이라 부른다. 지금 한강에서는 3월 4월이면 떼를 지어 올라오는데 이를 복진상(鰒進上)이라 부른다”라고 하여 복어를 즐겨 먹는 철을 분명하게 밝혀놓았다. 복진상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복어가 떼를 지어 우르르 한강으로 몰려오는 현상을 마치 임금님에게 먹을거리를 바치는 것처럼 느낀 듯하다.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 같은 책에서는 복사꽃이 진 뒤에는 복어의 독이 강해져 먹을 수 없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 사람들이 복어국을 늘 복사꽃과 함께 거론하는 이유가 이 때문인데, 복어는 이렇게 ‘봄’이란 특정한 계절에 먹는 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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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행호관어>, 이병연 제화(題畵), 간송미술관 소장. 1741년에 지금의 행주대교 일대 한강에서 복어와 웅어를 잡는 수많은 고깃배의 모습을 묘사했다.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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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시대 화단의 독보적인 화가였던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의 그림에 한강에서 복어 잡는 풍경이 묘사된 이유도 늦봄 한강의 정취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그 풍경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린 <행호관어(杏湖觀漁)>는 현재의 행주대교 주변 한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풍경을 그린 것인데, 어부들이 그물질하여 잡는 물고기는 다름 아닌 복어와 웅어였다. 정선의 그림에 친구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이 시를 써서 붙였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늦봄에는 복어국                                 春晩河豚羹

첫여름에는 웅어회                              夏初葦魚膾

복사꽃잎 떠내려올 때                          桃花作漲來

행주 앞강에는 그물 치기 바쁘다           網逸杏湖外





복어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이렇게 복어국이 이야깃거리로 크게 사람들의 관심을 끈 시기는 아무래도 18세기다. 송나라의 문호 소동파(蘇東坡, 1036~1101)가 목숨과 맞바꿔도 좋을 진미라고 너스레를 떨었던 물고기가 복어다. 고려 이래 문사들도 때때로 복어를 먹고 그 맛에 반해 시를 썼다. 하지만 비록 그 역사는 길었으되 복어가 서울의 으뜸가는 봄철 풍미(風味)로 등장해 폭발적인 인기를 끈 것은 18세기부터다. 봄철 미각을 사로잡는 풍미 뒤에는 잘못하면 목숨까지도 앗아가는 위험이 도사린다는 담론이 대세였다. 실제로 목숨을 잃은 사람도 제법 있었다. 영의정을 지낸 최석정(崔錫鼎, 1646~1715)조차도 복어를 먹고 거의 죽을 뻔한 일이 있을 정도였다. 그 사실은 1709년 사관(史官)이 기록한 실록에 등장한다.

치명적인 맛은 스릴이 있다. 역시 영의정을 지낸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은 서울에서 친구인 박남수(朴南壽)와 함께 복어국을 안주로 놓고 술을 마신 일이 있었는데, 누군가 복사꽃이 이미 졌으므로 복어를 먹어서는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그러자 박남수는 일부러 한 사발을 몽땅 비우고는 “에잇! 선비가 절개를 지켜 죽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복어를 먹고 죽는 게 녹록하게 사는 것보다 낫지 않겠나?”라고 소리쳤다. 술김에 호기를 부려 내뱉은 호언장담이지만 복어를 먹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그러나 위험은 미식가의 미각을 한층 돋우는 것일 뿐, 복어국을 즐기는 미식가의 수는 갈수록 늘었다. 중독을 해결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로 개발되었다. 널리 읽힌 생활백과사전인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하돈을 먹고 중독된 자는 반드시 죽게 되는데 서둘러 갈대뿌리를 짓찧어 즙을 내서 마시게 하거나, 인분즙(人糞汁)이나 향유(香油: 참기름)를 많이 먹여서 토하게 하면 즉시 낫는다”라는 해독법이 제시되어 있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하돈 맛을 어찌 지나치랴



결국 복어국을 먹어야 하느냐 먹지 말아야 하느냐를 놓고 사람들은 자연스레 둘로 나뉘었다. 위험하다고 해도 먹자는 쪽과 그런 위험한 음식을 굳이 먹어야 하느냐는 쪽이었다. 먼저 먹자는 쪽이다. 정조, 순조 연간의 저명한 시인 신위(申緯, 1769~1845)는 자주 복어를 먹고서 시를 썼다. 언젠가는 복어를 먹지 못한 채 봄을 보내자 “복사꽃 피고 진 뒤 빈 가지만 마주 하다니. 서글퍼라! 하돈 맛도 모르고 지났구나”란 시를 짓기도 했다. 1820년 4월에 쓴 시다. 또 남산 아래 경치 좋은 쌍회정(雙檜亭)에서는 당대의 명사들이 복어 요리를 앞에 놓고 꽃을 감상하는 상화회(賞花會)를 열고 다음의 시를 지었다.



앵두와 죽순은 며칠이나 세상에 머물까                    幾何櫻筍又持世

늦은 봄철이라 아직도 하돈이 쥐락펴락하네              春晩河豚尙主盟

한 수저를 아차 하면 정말 허망하게 죽건만               一筯小差眞浪死

천금 같은 목숨을 쉽게 걸다니 정말 바보다               千金輕擲太癡生

개울가에 살구와 진달래는 붉게 어울려 피고             杏鵑澗戶交紅萼

산속 집에 수레와 말은 정겹게 모여드네                   車馬山門簇嫰睛

야외의 빼어난 정취를 탐하지 않았다면                    不有諸公貪野逸

어느 누가 한가로운 나들이를 했으랴                       阿誰消得此閒行


남산의 이름난 정원에서 봄꽃을 감상하는 모임을 열고 복어 요리를 내놓았다. 봄철의 식탁을 쥐락펴락하는 제왕 자리를 차지한 복어의 위상을 보여준다. 요리는 분명 회나 무침이 아니라 국이었을 것이다. 여기서도 복어국은 꽃을 감상하는 모임의 일환이다. 계절의 정취를 즐기는 복어 먹는 모임, 곧 하어약(河魚約)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잘못하면 허망하게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상기된다.

위험하기는 하나 복어국을 탐하는 사람들의 수는 늘어만 갔다. 복어를 잡아 요리를 해놓고 친구를 불러 함께 술을 마시며 꽃을 구경하는 모임은 음력 3월 4월의 진풍경이었다. 복어국과 잘 어울리는 술로 소국주(小麯酒)를 꼽은 사람도 있다. 잡은 복어는 친구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어찌 생명을 망각하고 감히 입에 대랴



반면에 목숨을 담보로 복어를 먹는 것을 아주 싫어한 쪽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인물로 북학파 학자인 이덕무(李德懋, 1741~1793)와 유득공을 손꼽을 수 있는데 이덕무는 아예 온 집안이 복어를 먹지 않도록 하는 가법을 만들었다. 그는 당시 서울 사람들이 봄만 되면 앞다퉈 복어국에 휩쓸리는 현상을 개탄하며 스스로 복어를 먹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형제와 자손들, 그리고 남들에게까지 단단하게 경계하였다. 그의 식습관을 소개한 [청장관연보(靑莊館年譜)]에는 “단것을 즐겨 꿀을 한 되까지 먹었으나 흡연을 가장 싫어하고 하돈을 먹지 않았다. 하돈을 먹는 사람을 항상 경계하여 ‘어찌 배를 채우려고 생명을 망각하는가’라고 하였다”라는 일화를 적어놓았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기본예절을 기록한 [사소절(士小節)]에 금해야 할 음식으로 복어 조항을 따로 만들기도 하였다. 그의 생각은 아주 단호해서 독이 있는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는 낙상할 우려가 있는 북한산 백운대도 올라가서는 안 되고, 독이 있는 복어국도 먹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사고가 예상되는 행동을 금기시한 것인데 평생 조심성 있게 행동한 그다운 태도다.

그의 손자로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를 저술한 저명한 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은 복어의 생태를 분석한 [하돈변증설(河豚辨證說)]을 지었다. 그 글에서 독을 제거하는 방법을 자세하게 제시한 다음 “나와 같은 자는 선조께서 남기신 경계가 있으니 어찌 감히 입에 대랴?”라고 하였다. 선조의 유훈이 있어서 먹지는 못하지만 해독법이 있으므로 굳이 먹지 않을 필요는 없겠다는 어투다. 19세기에 이르면 이전 시기에 비해 더 잘 듣는 해독법이 나왔나보다.

아무튼 이덕무는 위험성이 있는 물고기는 먹을 필요가 전혀 없다는 신념을 실천에 옮겼다. 젊은 시절 이덕무는 마포에 살았으므로 봄만 되면 한강변에서 솥을 걸어놓고 복어국을 끓이는 풍경과 아이들이 복어 뱃가죽을 묶어 공을 차는 것을 보았다. 그런 풍물을 싫어하여 그는 <하돈탄(河豚歎)>이란 장편의 시를 지었다.



하돈에 미혹된 자들은                                        惑於河豚者

맛이 유별나다고 떠벌린다                                  自言美味尤

비린내가 솥에 가득하므로                                  腥肥汚鼎鼐

후춧가루 타고 또 기름을 치네                             和屑更調油

고기로는 쇠고기도 저리 가라 하고                      不知水陸味

생선으로는 방어도 비할 데 없다네                      復有魴與牛

남들은 보기만 하면 좋아하나                             人皆見而喜

나만은 볼 때마다 걱정이 앞서네                         我獨見而憂

아! 세상 사람들아                                              吁嗟乎世人

목구멍에 윤낸다고 기뻐하지 마라                       勿喜潤脾喉

으스스 소름 끼쳐 이보다 큰 화가 없고                 凜然禍莫大

벌벌 떨려 해 끼칠까 걱정되네                             慄然害獨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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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어의 위험성 때문에 본인뿐 아니라 온 집안이 복어를 먹지 않도록 하는 가법을 만든 이덕무가 지은 장편시 <하돈탄(河豚歎)>.



독이 있음에도 복어국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반대하는 이들의 태도가 선명한 대조를 보인다. 그의 눈에는 복어의 독이 묘한 미각을 자극하는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 그런 점이 있다. 아무 말이 없으면 먹는 사람만 먹을 보신탕을 호들갑스럽게 혐오식품으로 금지하자 가격도 올라가고 일부러 먹는 사람이 나타나는 격이다.

이러한 글들은 18세기 서울의 명문가 사대부들이 치명적인 음식을 두고 느낀 식욕과 두려움을 잘 보여준다. 말하자면 복어는 ‘욕망’과 ‘공포’라는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자극하는 유혹이었던 셈이다. 많은 사람들이 봄만 되면 복어국의 풍미를 즐겼으나, 또 많은 사람들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먹기를 거부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요리법도 개발되어 양반가 요리를 잘 보여주는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복어국 요리법과 해독법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그럼에도 복어국을 먹고 목숨을 잃는 사람들은 19세기를 거쳐 20세기 초에도 심심찮게 나타났다.


[18세기의 맛] 출간 기념 강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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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의 맛'은 한국18세기학회의 기획으로서, 문학동네와 함께 합니다. 1454741382568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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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회 |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조선 후기 한문학의 감성과 사유를 대중적인 필치로 풀어내 역사 속 우리 선조들의 삶과 지향을 우리 시대의 보편적 언어로 바꿔 생생하게 보여준다. 저서로는 [벽광나치오], [선비답게 산다는 것], [18세기 한국 한시사 연구], [정조의 비밀편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추재기이], [한서열전], [북학의], [궁핍한 날의 벗]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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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8세기의 맛: 취향의 탄생과 혀끝의 인문학 2014.02.28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의 18세기를 다채롭고 참신한 시각으로 연구하는 한국18세기의 학회의 첫 프로젝트 결과물, <18세기의 맛>이 책으로 나왔다. 18세기의 '맛'을 중심으로 세계사의 흥미로운 단면을 맛깔나게 서술했다. 23명 인문학자의 시각으로 18세기의 동서양을 뒤흔든 맛과 그 맛에 얽힌 흥미로운 현상을 살펴보는 일에 동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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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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