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궁궐의 개, 사도세자의 개 - 궁궐에서는 어떤 개를 길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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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85회 작성일 16-02-06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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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개 그림>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사도세자
(思悼世子, 1735~1762)가 그렸다는 말이 전하는 〈개 그림〉이 한 점 있다. 이 전언이 사실이라면 이 그림은 그림 그리기를 즐겼다는 사도세자의 그림으로 현전하는 유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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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傳) 사도세자,〈개 그림〉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그림 가운데 큰 개가 있고, 작은 개 두 마리가 큰 개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첫인상은 강아지가 어미에게 달려오는 것처럼 보이는데, 작은 개 두 마리가 각기 다른 품종처럼 보여서, 과연 모자(母子) 관계인지는 의심스럽다. 더욱이 작은 개는 기쁜 듯 반가운 듯 달려오는데 큰 개는 무심한 표정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사도세자는 어려서부터 부왕 영조(英祖, 재위: 1725~1776)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물론 태어날 때는 관심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여덟아홉 살 무렵부터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기 시작했다. 식탐이 강해서 몸은 점점 불어났고, 책만 보면 어지럽다고 했다. 영조는 만날 때마다 세자를 조롱하고 꾸짖었다. 세자는 열다섯 살부터 국정의 일부를 대리했는데, 이 대리청정 이후 부왕에게 더욱 무시를 당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를 무서워하며 꺼렸고, 아버지 앞에서 늘 긴장하고 움츠러들었다(정병설, [권력과 인간 - 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 왕실], 문학동네, 2012 참조).

사도세자는 학자보다는 예술가 기질이 강했고, 침잠해서 연구하기보다 표현하기를 즐겼다. 경전을 읽는 것보다 시를 짓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방에 갇혀 지내기보다 말을 타고 밖으로 나가 유람하기를 즐겼다. 이런 인물이 궁궐에 갇혀서 따분한 제왕학 수업이나 받는 것은 맞지 않았다. 영조는 어릴 때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힘겹게 왕위에 오른 사람이어서, 늘 과거의 자기와 세자를 비교했다. “나는 늦게 왕으로 정해지는 바람에 제대로 제왕학 공부를 할 수 없었는데,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해 지금의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그런데 너는 좋은 환경에 태어나서 어찌 이리 게으르냐”는 식으로 꾸짖었다.

큰 개를 향해 반갑게 달려가는 작은 개와 무덤덤한 큰 개는 사도세자와 영조의 관계를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에게 다가가고 싶은 사도세자와, 부자 관계가 아니라 군신 관계로만 대하며 늘 엄격했던 영조를 그린 듯하다. 사도세자는 열 살 어린 나이에 이미 아버지 영조를 다른 신하와 마찬가지로 엎드려 옹송그려 뵈어야 했다. 한편 이 그림은 어쩌면 사도세자와 그 자식들의 관계를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한중록]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죽기 얼마 전에 자기 처지를 비관하며 “부모도 모르는 것이 자식을 어찌 알리. 물러가라” 하면서 자식들을 내치기도 했다.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하면서 자식들과도 덤덤해진 자기 신세를 표현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세자 주변의 개 그림



‘사도세자의 〈개 그림〉’에 나오는 큰 개를 잘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다. 균형 잡힌 몸매와 쭉 뻗은 다리, 몸을 덮은 복슬복슬한 털, 얼굴과 몸통의 얼룩, 긴 주둥이, 긴 꼬리. 한눈에도 토종이 아니라 수입종 사냥개처럼 보인다. 개를 잘 아는 사람의 말에 따르면, 사냥개로 유명한 라이카종 계통이거나 보로조이종의 선조로 보인다고 한다. 당시 조선에 어떤 개들이 돌아다녔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진돗개, 삽살개, 발발이 등 흔히 알려진 토종의 소형견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런데 국립고궁박물관에는 또 하나의 〈개 그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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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그림〉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점박이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은 것이 다른 점이라고 하겠지만, 당당히 선 날렵한 모습과 긴 주둥이, 작고 처진 귀 등으로 볼 때, 앞 〈개 그림〉의 개와 동일종 또는 유사종으로 보인다. 두 그림은 화풍도 비슷하다. 둘 다 시원하게 외곽선을 그리고 속을 채운 방식이다. 특히 발 모양은 더욱 유사해서 동일 화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앞의 〈개 그림〉을 사도세자가 그렸다면, 이 〈개 그림〉도 사도세자가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사도세자가 〈개 그림〉을 그렸을 무렵, 그 주위에서도 비슷한 개 그림이 여럿 그려졌다는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김두량
(金斗樑, 1696~1763)과
변상벽
(卞相璧, 생몰년 미상)의 그림이다.

김두량은 영조 때의 궁중 화원으로, 사도세자와 가까이 지낸 화평옹주의 방을 위해 〈사계산수도〉 등의 그림을 그렸다(정병설, 〈사도세자와 화원 김덕성〉, [문헌과 해석] 48, 2009 참조). 그런 김두량이 1743년 개 그림을 한 점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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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량, <짖는 개>
개인소장. 1995. 8. 11 [동아일보] 21면 기사 참조.



이 그림의 개는 사도세자의 개와 흡사하다. 그림 상단에 적힌 화제는 영조의 친필로 알려져 있으나, 〈사계산수도〉의 제사(題辭)가 화평옹주의 남편인 부마 박명원의 것으로 확인된 이상, 이것도 영조의 것인지 재검증이 필요하다. 이 그림은 해외로 흘러갔다가 1995년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처음 한국에서 공개될 때 개 품종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연합뉴스〉 1995. 7. 14. 및 〈동아일보〉 1995. 8. 11.). 이 그림을 해설한 것으로 보이는 소장자의 기록에 ‘尨(방, 삽살개)’을 그렸다는 말이 있어서, 이 개를 우리 전통의 삽살개라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지만, 그렇게 볼 수 없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았다. 먼저 소장기의 ‘尨’이 이 그림의 개를 가리킨 것인지가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당시 ‘尨’을 전통 삽살개에만 사용했는지도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아직 〈짖는 개〉의 품종을 삽살개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김두량은 이 밖에도 두 점의 개 그림을 더 남겼다. 하나는 흔히 〈긁는 개〉 또는 〈흑구도〉라고 불리는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긁는 개〉의 개와 비슷한 개가 새끼들을 데리고 있는 그림이다(개인 소장; 유복렬, [한국회화대관], 문교원, 1969 수록). 〈짖는 개〉는 ‘사도세자의 개’와, 〈긁는 개〉는 그 다음 〈개 그림〉의 개와 품종이 유사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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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량, <긁는 개> 제작연도미상, 종이에 담채, 23X26.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변상벽은 1761년 초 몰래 평양을 방문한 사도세자에게 초상을 그려준 화원으로 알려져 있다. 변상벽이 평안도 관찰사가 된 정휘량을 따라 평양에 가 머물 때의 일이다. 정극순의 [연뇌유고]에 실린 〈변씨화기(卞氏畵記)〉를 보면, 변상벽은 1746년 무렵 이미 서울에서 고양이 그림으로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그런 그가 ‘사도세자 〈개 그림〉’의 개와 유사한 개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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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벽,<개 그림>
18세기, 종이에 담채, 25X20cm, 조선미술박물관(평양) 소장.



이 밖에 이런 외국종 사냥개로 보이는 개를 그린 것으로 신윤복(간송미술관 소장, 일명 ‘나월불폐(蘿月不吠)’)과 이희영(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의 것이 있으며, 또 이보다 약 한 세기 반 앞선 것으로 이경윤(간송미술관 소장, 일명 ‘화하소구(花下搔狗)’)의 것이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이경윤의 것은 출현 시기나 작가 특성을 감안할 때 다소 돌출적이다. 이경윤의 시대에는 이런 개가 그려진 다른 예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이경윤 역시 이런 영모도(翎毛圖), 곧 동물 그림을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경윤 앞 시대에 개 그림을 그린 이암의 경우에도 작고 귀여운 개는 그렸어도 크고 날렵한 사냥개와 같은 품종은 그리지 않았다. 종전에 이 그림을 이경윤의 것으로 본 이유는 그림 한가운데 적힌 ‘낙파(駱坡)’라는 호 때문이다. 낙파는 서울 동쪽 낙산을 가리킬 것인데, 이 지명을 호로 사용한 사람은 적지 않다. 그 가운데 이 작품과 연관될 만한 사람으로 ‘낙서(駱西)’라는 호를 쓴
윤덕희
(尹德熙, 1685~1766)를 떠올릴 수 있다. 윤덕희는 영모도로 유명한 윤두서의 아들이다. 윤덕희의 그림에다 후인들이 그가 살던 곳의 이름을 떠올리며 ‘낙파’라고 적었던 것 아닌가 조심스럽게 의심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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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 <나월불폐(蘿月不吠)>
간송미술관 소장.<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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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윤,<화하소구(花下搔狗)>
간송미술관 소장.<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이렇게 보면 사냥개로 보이는 개를 그린 작품은 대부분 18세기 중반 궁궐 주변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사도세자 주변에서 사냥개가 그려진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도세자가 그림 그리기를 즐겼음은 그의 문집인 [능허관만고]에서도 여러 군데 확인된다. 복숭아나무와 버드나무 그림을 그려서 어떤 사람에게 주기도 했고, 정조가 태어날 때는 꿈에서 본 용을 그려 정조가 태어난 경춘전에 붙여두기도 했다. 또 죽기 직전에는 김덕성 등의 화원에게 명령해서 <중국소설회모본>이라는 화첩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런 사도세자의 행적을 볼 때, 자신이 직접 애견을 그리기도 했고 주위의 화원들에게 그리게도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궁궐의 개



궁궐에서 개를 키웠을까? 사도세자가 개를 길렀다는 기록은 하나도 찾아지지 않지만, 궁궐 내에 개가 있었음은 [승정원일기] 등의 자료에서 확인된다. 궁궐에서는 내의원에서 백구(白狗)와 흑구를 키웠다([승정원일기] 1748. 11. 11. 및 1750. 10. 13.). 백구의 젖[乳]은 안질에 좋고 똥은 낙상하여 어혈(瘀血)한 것을 푸는 데 잘 듣는다고 한다. 또 흑구의 똥은 사분산(四糞散, 나중에는 ‘萬金散’으로 불렸다)이라는 약의 재료로 사용되었다. 백구는 늘상 키웠지만 흑구는 필요에 따라 수시로 길렀다. 속담에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말이 있는데, 개똥도 잘 준비해두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내의원, 곧 약방에서 개를 키웠던 것이다. 영조도 내의원에서 기르는 백구를 보았다고 했고, 개 짖는 소리 때문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어제자성옹집경당문견폐호사(御製自醒翁集慶堂聞犬吠呼寫)>).

궁궐에서 약용이 아니라 애완 등의 목적으로 개를 길렀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선조의 아들이자 광해군의 이복형인 임해군이 개, 닭, 앵무새, 오리 등을 키우는 것을 즐겼다고 하지만([야승(野乘)]), 궁궐 안에서 키운 것인지 궁 밖에서 키운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숙종이 애완용 고양이를 길렀다는 사실이 이하곤의 글(〈서궁묘사(書宮猫事)〉)이나 홍세태의 시(〈김손가(金孫歌)〉) 등 여러 곳에서 확인되어 관심을 끈다. 숙종은 고양이를 매우 좋아해서 김손(金孫)이라고 이름을 붙인 고양이를 십수 년 키웠는데, 숙종이 죽자 김손이 음식을 끊고 따라 죽었다고 한다. 원래 숙종은 궁궐 후원에서 굶어 죽게 된 고양이를 발견해 키웠는데 그것이 김손의 어미라고 한다. 김손의 어미는 김덕(金德)이라고 불렸는데, 숙종은 죽게 된 김덕을 살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김덕이 죽자 장례를 치르게 하고 손수 고양이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글까지 지었다(〈매사묘(埋死猫)〉). 임금이 고양이를 키운 것으로 보아 세자가 애완견을 기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일 것이다.

1830년 무렵 그려진 창덕궁과 창경궁의 조감도인 〈동궐도〉(동아대학교 박물관 및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를 보면, 궁궐 여기저기에 고양잇과의 짐승이 보인다. 창덕궁 영모당 동북쪽 담장 밖과 창경궁 신독재 담장 안, 그리고 창경궁 양화당 북편 축대 위와 춘당대 옆 영화당 월대 위 등이다. 마지막 것을 제외하면 모두 사방이 담장으로 둘러쳐진 곳 안에 갇혀 있다. 모두 매우 큰 짐승으로 보이는데, 특히 맨 앞의 영모당의 것이 가장 크고 마지막 영화당 것이 제일 작다. 이 네 짐승이 모두 실제 동물인지 아니면 석수(石獸), 곧 돌조각 짐승인지 확실하지 않다. 〈동궐도〉에는 위치나 형태로 보아 석수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창덕궁 금천 돌다리 아랫부분과 후원 청의정 맞은편에 있는 짐승이 그렇다. 하지만 앞의 넷을 모두 석수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 가운데 축대나 월대 위에 있는 뒤의 둘은 석수일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영모당과 신독재 부근의 두 짐승은 석수로 보기 어렵다. 특히 너럭바위 위에 앉아 있는 영모당의 짐승은 더더욱 석수라고 하기 어렵다. 영모당의 것이나 신독재의 것이나 모두 형상이 자세하지는 않지만 몸집이 큰 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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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밖의 짐승,<동궐도>
제 11~12첩 부분, 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



〈동궐도〉에는 또 여기저기에 개집처럼 보이는 작은 집이 있다. 주합루 앞 연못 오른쪽에 있고, 자경전 북편에는 네 채가 있다. 연경당 남쪽 희우정 앞에 두 채가 있고, 연경당 북쪽 담장 밖에도 네 채가 있다. 창덕궁 서쪽 소유재 북서쪽에도 하나 있는데, 이것은 고려대학교 소장 〈동궐도〉에는 보이지 않고 동아대학교 소장본에만 보인다. 물론 이것들이 모두 개집은 아닐 것이다. 더욱이 큰 개가 들어가기는 너무 작아 보이는 집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일부는 개집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연암의 〈취답운종교기(醉踏雲從橋記)〉를 보면 연암과 그 벗들이 한여름 밤 종로에서 ‘호백(胡伯)’이라고 부르는 중국에서 수입한 대형견, 즉 ‘오(獒)’를 만난 일이 나온다. 연암은 글 끝에, 이 개들은 “매년 사신들을 따라 우리나라에 들어오지만 대부분 굶어 죽으며 항상 혼자 다니면서 다른 개와 어울리지 못한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매년 사신들을 통해 수입되었던 중국 개에 대해서는 홍대용의 〈연기(燕記)〉 등에 자세히 나와 있다. 홍대용은 중국 개를 소개하면서 러시아관에 있는 가장 큰 개는 호랑이처럼 사람을 문다고 했고, 몽고산 개는 사납고 다루기가 어려워 쇠줄로 묶어두는데 생김은 보통 개와 같지만 체구가 크다고 했다. 우리나라 사람이 ‘호백(狐伯)’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별종이라고 했다. 또 심양 근처의 백탑보(白塔堡)에서 온 개는 사냥을 잘하는데 그 값이 은(銀) 십수 냥이나 한다고 했다. 또 발발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는데 체구가 고양이만 하다고 했다.

중국을 통해 수입했을 법한 개의 구체적인 형상은 낭세녕(郎世寧)의 <십견도(十犬圖)>를 통해서 볼 수 있다. 낭세녕은 이탈리아 사람으로 본명은
카스틸리오네
(Giuseppe Castiglione, 1688∼1766)이다. 1715년 예수회 선교사로 중국에 와서 50년간 청나라 조정의 궁정 화원으로 일했다. 조선 화가들의 서양화법 수용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그가 그린 <십견도>는 당시 청나라 황실의 명견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열 마리의 개 중에는 앞의 여러 개 그림의 개와 유사한 품종도 없지 않다.

〈동궐도〉에 그려진 대형의 고양잇과 짐승은 ‘호백’으로 불린 대형 수입견으로 짐작된다. 이 개들은 연암의 말처럼 사신들을 따라 조선으로 들어왔을 것이며, 왕가나 권세가에서 길러졌을 것이다. 사도세자 주변에서 그려진 개는 이런 개가 아닌가 한다.



사도세자의 애견



사도세자가 한창 그림에 관심을 가졌던 무렵, 그 주위에서는 사도세자가 그렸다는 개와 유사종의 개를 그린 그림이 나왔다. 사도세자가 개를 키웠다는 기록도, 사도세자 주변에서 그려진 개에 대한 추가 정보도 전혀 찾을 수 없지만,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지역에서 특정한 사람들이 특정한 품종의 개를 집중적으로 그렸다는 사실이 관심을 끈다. 여러 사람이 유사한 개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그 개가 특별한 개가 아닐까 추측하게 한다. 그것이 사도세자의 애견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사도세자는 아버지로 인해 몹시 힘든 청소년기를 보냈다. 아버지 눈에 벗어난 괴로운 세자였을 뿐만 아니라 아무도 자신을 진정으로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사람이기도 했다. 해마다 사신이 청나라를 다녀오면 멋진 개 여러 마리가 따라왔다. 사도세자는 수입종 사냥개의 날렵한 몸과 사랑스러운 얼굴, 그리고 자기 마음을 헤아려 반기는 태도에 반했다. 사도세자는 마침내 어떤 개를 몹시 사랑하게 되었다.

그림을 좋아한 세자는 유명 화원들을 불러 자기 애견을 그리게 했다. 세자는 자기감정을 넣어 새끼들과 놀고 있는 애견을 그리기도 했다. 그런데 강박증이 점점 커진 세자는 마침내 ‘의대증(衣帶症)’에 걸리고 말았다. '의대(衣帶)'는 옷을 뜻하는 말로, 의대증은 옷 입기를 어려워하는 일종의 강박증이다. 세자는 옷을 갈아입을 때 왠지 새 옷이 잘 맞지 않은 듯해서 자꾸 옷을 벗어던지는 증상을 보였다. 사도세자는 나중에 옷 시중을 든 하인들을 탓하며 죽이기까지 했다. 세자가 죽인 사람만 백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세자는 또 영조에게 “화가 나면 닭이나 짐승을 죽여야 화가 내린다”고 말했다. 사람을 죽이지 않을 때는 짐승이라도 죽였던 것이다.

어느 날 세자의 광증이 폭발했다. 칼을 좋아한 세자는 날카로운 칼을 여러 자루 가지고 있었다. 1760년 어느 하루 세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칼로 애견을 죽이고 말았다. 애견을 죽인 다음 한참 후에야 정신이 돌아왔다. 울부짖으며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사도세자가 그렸다는 〈개 그림〉을 보면서 나는 이런 상상에 이르렀다. 〈개 그림〉의 개는 사도세자의 애견이고, 그것을 화원들에게 그리게 했으며, 나중에 그 개는 사도세자의 칼에 맞아 죽었다는 상상이다. 밝혀진 것도 없고 정확히 알 수 있는 것도 없지만, ‘사도세자 〈개 그림〉’의 개는 보면 볼수록 사도세자의 애견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왠지 그렇게 믿고 싶다.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태학사와 손을 잡고<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를 연재한다. 그림에 숨은 비밀과 사연을 프리즘으로 삼아 한국학의 출렁이는 바다로 여행을 떠나려는 것이다. 문학, 미술, 음악, 철학, 역사, 문화가 망라되는 항해에 깊고 진한 교감이 깃든 풍성한 바다가 펼쳐지길 해신(海神)에게 기도한다. 연재는 매주 1회 돛을 달고 항구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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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도서 출간
네이버캐스트에 연재되었던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시리즈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우리 시대 인문학자 32인이 옛 그림을 호명해 되살려낸 한국학 읽기의 색다른 즐거움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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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설 |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글소설을 중심으로 주로 조선시대의 주변부 문화를 탐구해왔다. 지은 책으로 기생의 삶과 문학을 다룬 [나는 기생이다―소수록 읽기], 그림과 소설의 관계를 연구한 [구운몽도―그림으로 읽는 구운몽] 및 [조선의 음담패설―기이재상담 읽기]와 [권력과 인간―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 왕실]이 있으며, [한중록](문학동네, 2010)을 번역하고 해설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한문과 한글의 위상과 성격에 대한 일고(一考)>, <조선후기 한글 · 출판 성행의 매체사적 의미>, <무정의 근대성과 정육(情育)> 외 다수 논문이 있다. 한국문화의 성격과 위상을 밝히는 연구를 필생의 과업이라 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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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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