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히틀러의 비밀 - 히틀러의 여자, 재산, 가족, 심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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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59회 작성일 16-02-06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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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히틀러와 결혼 후 동반 자살한 히틀러의 여자, 에바 브라운. 독일 국민들에게 에바 브라운의 존재는 비밀이었다.


권력과 매력으로 많은 독일 여자들의 마음을 현혹한 히틀러는 특히 어린 여자와 금발의 미녀에게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들을 철저히 숨겼습니다. 그는 검소한 지도자로 포장되었지만, 나치가 만들어낸 노동계급의 영웅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히틀러는 탈세를 일삼으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자신의 혈통을 철저히 은폐한 히틀러의 직계 가족 대부분은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습니다. 히틀러 인생에서 부각되지 않았던 놀랍고 충격적인 사실들을 예리한 시각에서 밝혀봅니다. 히틀러의 심복, 나치 친위대장인 힘러(Heinrich Himmler, 히믈러)는 전설과 오컬트에 관심을 가진 기괴한 인물이었습니다.



히틀러의 여자들



히틀러가 독신인 것은 괴벨스의 선전 전략에 매우 중요했습니다. 에바 브라운의 홈 비디오 속에 등장하는 히틀러는 선전에 이용된 외로운 지도자의 모습과는 많이 다릅니다. 신중하게 계산된 이미지의 일부였습니다. 그는 독일과 결혼한 사람이고 그의 영혼 속에는 오로지 독일뿐이어야 했습니다.

에바 브라운의 영상은 '베르그호프'에서만 볼 수 있었습니다. 베르히테스가덴 위쪽,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히틀러의 별장이었습니다. 대중들에게 그녀는 없는 존재였습니다. 두 사람이 결혼한 다음 날, 베를린의 벙커에서 동반 자살한 뒤에야 에바 브라운은 유명해졌습니다. 히틀러의 매력에 빠진 뒤 자살을 기도했던 많은 젊은 여성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16세의 마리아 라이터는 히틀러에게 버림받은 뒤 자살하려다 형부의 손에 구출됐습니다. 히틀러의 조카였던 겔리 라우발은 겨우 23세에 히틀러의 집에서 자살했습니다. 영국의 귀족이었던 유니티 미트포드도 히틀러에게 빠져 있다가 25세에 총으로 자살했습니다.

히틀러는 말했습니다. ‘젊은 여자를 길들이는 것보다 좋은 건 없다’‘여자란 다루기 쉬운 존재다’

여성들이 히틀러에게 열광하는 영상들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일부는 괴벨스의 선전 전략의 일부였지만 일기나 편지 등의 기록을 살펴봐도 특히 젊은 여성들이 히틀러에게 많이 빠지곤 했습니다. 어리고 순진한 여성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위니프리드 바그너처럼 성숙하고 지위가 높은 여성도 히틀러의 매력과 권력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부유한 사업가이자 이혼녀였던 마그다 괴벨스도 히틀러에게 빠졌지만 히틀러 대신 그의 선전 장관인 괴벨스의 아내로서 만족해야 했습니다.

히틀러의 치명적인 매력에 빠진 여성들은 그 외에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고향인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히틀러는 여성들 앞에 서면 어쩔 줄 모르는 젊은이였습니다. 그 당시 히틀러를 알던 이들 중에 오거스트 쿠비섹이란 사람은 히틀러가 여자들 사이에 있으면 무척 어색해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 당시엔 여자친구가 없었어요 여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그때 스테파니를 알게 됩니다. 고위 관리의 딸인 그녀에게 히틀러는 접근조차 못 했습니다. 히틀러가 꿈꾸던 여성상이었습니다. 금발에 키가 크고 쉽게 가질 수 없는 여자였습니다. 히틀러는 그녀를 위해 시를 썼고 연애 편지도 썼지만 서명은 하지 않았습니다. 스테파니를 좋아하는 남자들은 많았지만 히틀러는 그녀가 거리를 걸어갈 때 멀리서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끝까지 숨겼고 나중에 스테파니는 익명의 편지 한 장을 받게 됩니다.

편지의 내용은 자기는 비엔나 예술 학교에 입학할 예정이고 린츠에 돌아와서 스테파니와 결혼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히틀러는 비엔나 예술 학교에 입학하지 않았고 스테파니는 다른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역사는 비극적인 운명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히틀러의 재력



1933년 1월 말 히틀러는 독일의 총리가 되었지만 여전히 일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노동자들도 여기 포함돼 있었습니다. 나치의 선전 조직은 히틀러의 이미지를 겸손하고 성실한 지도자로 포장했습니다. 괴벨스가 이끄는 나치 당의 선전 조직은 굉장히 유능했습니다. 평범하고 서민적인 히틀러의 이미지를 만들어냈습니다. 히틀러가 베를린의 지멘스 사 공장에서 했던 연설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저도 한때 여러분과 똑같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배움과 굶주림을 통해서 성실하게 꾸준히 여기까지 올라왔습니다. 제 내면에는 항상 그때의 제가 남아 있습니다.”

대중들은 쉽게 현혹됐습니다. 1933년, 이 검소한 지도자의 소득은 공장 노동자들의 평균 소득보다 40배 이상 높았습니다. 히틀러의 성격에 금욕적인 면이 있었고 정치적 목표를 향해 열정적으로 매달리긴 했지만 그가 수도승 같은 생활을 하면서 독일 국민을 위해 밤낮으로 일했다는 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히틀러의 조세 기록에 따르면 그의 1년 수입은 독재를 위해 정권을 잡은 첫 해에만 120만 마르크에 달했습니다. 수입의 대부분은 '나의 투쟁'의 판매를 통해 나왔습니다. 1933년에만 150만 부가 팔렸습니다. 책 한 권의 가격은 12마르크로 비싼 편에 내용도 과장되고 저급한 수준이었지만 판매엔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1933년에 히틀러가 총리가 된 후에 독일에서만 수백만 부가 팔렸고 16개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으로도 수백만 부가 팔렸습니다. 히틀러는 직업 란에 작가라고 쓰곤 했는데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큰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1934년, 한 성실한 세무 공무원이 이 수입을 추적해 히틀러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합니다. 히틀러는 수입을 일부밖에 신고하지 않았고 세무서 기록에 따르면 40만 마르크 이상을 내야 했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총통은 이에 불만을 품었고 재무부 장관에게 조정을 지시했습니다. 포글이란 이름의 그 공무원에게 다시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뮌헨 세무서장은 이렇게 공표했습니다. '총통의 납세 의무와 관련된 내용이 담긴 지금까지의 모든 서류는 무효화한다' '앞으로 총통은 세금이 면제된다' 히틀러는 납세를 면제받았습니다. 날카로운 눈으로 히틀러를 조세범으로 지목했던 포글이 그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히틀러의 가족



'순수 민족'의 신화를 기반으로 세워진 히틀러의 나치 집단 안에서는 집안의 배경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총통의 추종자들은 자신이 순수한 독일인 혈통이란 것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순수한 혈통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외면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했지만 정작 총통의 집안은 수수께끼였습니다.

하지만 밝혀진 바에 의하면 히틀러의 선조들은 우월한 나치 지배자 민족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히틀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내가 어디서 왔고 어느 집안 출신인지 알 길이 없다' 히틀러는 가족에 대해 숨길 것이 많았습니다. 히틀러의 이복형 알로이스는 중혼자였고 여동생 파울라는 대량 살인자와 약혼했습니다. 그의 조카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육촌 자매는 그의 심복에게 살해됐으며 조카 한 명은 치열했던 동부 전선에서 전사했고 또 다른 조카는 히틀러에게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나치의 기준으로 보면 히틀러 집안의 뿌리는 꽤 의심스러웠습니다. 독재자는 자신의 혈통을 철저히 은폐했고 오늘날까지도 히틀러의 근친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정보가 많지 않지만 역사학자들은 흥미로운 사실들을 하나씩 연결하고 있습니다. 독재자는 순수한 혈통과 우월한 집안 배경에 집착했으나 정작 자신은 의심스럽고 문제가 있는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히틀러의 가족사를 들여다보면 밝히기가 힘든 일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습니다. 히틀러의 유일한 해결책은 그 모든 것을 덮어 버리고 대중들에게 숨기는 것이었을 겁니다. 총통은 가족사의 비밀을 대중들에게는 숨겼을지 몰라도 나치 비밀 경찰의 무서운 촉수를 피해 가지는 못했습니다.

1944년 1월 히틀러의 보좌관 마르틴 보르만은 SS 친위대장 하인리 힘러로부터 충격적인 문서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총통의 친척들에 관한 기밀 정보였습니다. 힘러는 오스트리아 그라츠에 히틀러의 친척들이 있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밝히고자 했고 게슈타포는 총통의 친척 몇 명을 찾아 그들을 '멍청한 정신병자들이다'라고 묘사했습니다. 그것은 충격적인 주장이었습니다. 게슈타포가 자신의 뒷조사를 했다는 사실을 총통이 알고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 조사로 SS 친위대 요원들은 그라츠에 있는 파이트 가족을 찾아냈습니다. 그들은 온갖 사진과 서류, 그리고 히틀러 부친의 사적인 편지까지 압수했습니다. 조사 결과는 정치적 폭탄과도 같았습니다. 파이트 가족은 아돌프 히틀러의 직계 친족으로 밝혀졌고 또한 이 집안에는 정신 질환 내력도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육촌인 알로이지아 파이트도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습니다. 조사 결과 파이트 집안의 형제자매들도 정신 질환의 징후를 보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가족에게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선조들 중에도 정신 질환 징후를 보인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히틀러 가족에게 유전적으로 정신 질환 기질이 있었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됐습니다.

















히틀러의 심복



나치 친위대장 힘러는 전 세계의 마녀 재판에 관한 방대한 역사적 기록들을 은밀하게 모아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독일에 남아 있는 문서들뿐 아니라 아메리카, 러시아, 인도의 기록들까지 수집했습니다. 나치 보안대의 특별 마녀 연구는 극도로 비밀리에 진행됐습니다. 연구자들은 고문서를 가지고 연구를 진행했으며 순전히 과학적인 명목이었습니다. 힘러는 실질적인 목적을 갖고 다른 역사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과거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힘러의 세계관이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몇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아리아인의 신화였습니다. 인류학자, 역사학자 지리학자 등을 동원해서 아리아인의 우월함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힘러의 연구는 순수하게 학문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치 친위대장 힘러는 오컬트 쪽에도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의 친위대(SS)의 검은색 제복에는 전통적인 계급장과 함께 수수께끼 같은 상징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SS의 군모에 사용된 유명한 해골 문양은 사실 오래된 독일군의 상징으로 19세기 초, 프로이센군이 처음 사용했고 '토텐코프' 라고 불렸습니다. 원래 독일의 한 귀족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지만 나치 덕에 불길한 인상을 풍기게 되었습니다.

일종의 광신 집단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힘러의 의도는 SS 내부의 응집력을 강화하고 엘리트 조직처럼 보이게 하여 다른 나치 조직과 차별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독특한 제복뿐만 아니라 SS대원들을 위한 종교적인 의식까지 특별히 고안되었습니다. 하지에 치르는 의식은 '성스러운 불' 과 엄숙한 연설이 특징이었습니다. 동지 의식은 크리스마스 며칠 전에 치러졌습니다. 하지 의식은 전형적인 나치의 미신 숭배였습니다.

제복 칼라에 새겨져 있던 SS라는 문자도 룬 문자로 디자인한 것입니다. '검은 태양' 이라고 불렸던 비슷한 북유럽 스타일의 문양이 베벨스부르크 성의 바닥에도 새겨져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주교들이 살았던 베벨스부르크는 아리아인이 지배자 민족이라는 새로운 신앙을 위한 성전이 됐습니다.

마녀, 신비주의, 룬 문자 등은 단순한 미신으로 치부될 수도 있겠지만 하인리 힘러의 미신은 중대한 목적에 이용되었습니다. 젊은 독일 병사들이 죽을 때까지 SS에 충성하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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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는 말한다. 히틀러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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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마음을 현혹시킨 히틀러는 특히 어린 여자와 금발의 미녀에게 매력을 느꼈다. 그리고 검소한 지도자로 포장하여 국민들을 속인 히틀러는 나치가 만들어낸 노동계급의 영웅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탈세를 일삼으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자신의 혈통을 철저히 은혜한 히틀러의 직계 가족 대부분은 정신 질환을 앓거나 자살하였다. 히틀러 인생에서 전혀 부각되지 않앗던 놀랍고 충격적인 사실들을 예리한 시각에서 밝혀본다.


발행2012.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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