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단원(檀園)의 풍경을 찾아서 - 문인들의 흥취가 배어있는 박달나무 동산을 찾아라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26회 작성일 16-02-06 15:49

본문















14547413956582.png


미적인 울림과 동행하며 그림 한 장으로 옛 풍경을 재생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무 아래 앉아 있는 서너 선비의 시선을 따라가면 시원한 숲과 노을로 물든 바다, 그리고 한 척의 돛배가 한가로이 지나는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이 장면은 몽롱한 꿈인가, 아니면 실재했던 어느 날의 멋진 경관인가?



나는 지난 1년 동안 이 그림에 이끌려 지워져버릴 듯했던 시간과 풍경을 수십 차례 여행했다. 1753년 무렵, 안산(安山) 고을의 명소였던 단원(檀園)과 섬사(剡社)를 찾아 이 책 저 책을 헤집고 쏘다녔던 것이다. 하지만 매립과 도시 개발이 파묻고 숨긴 이 땅은 여전한 미스터리를 품은 채 비밀스러운 동산으로 남아 있다.



박달나무 동산, 단원(檀園)을 향하여







14547413968290



이철환, [섬사편],<아회도>



단원(檀園), 이곳은 분명히 박달나무가 우거진 언덕이다. 글자대로라면 박달나무 동산을 뜻하는 보통명사이다. 하지만 단원은 1750년경 서해 언덕에 펼쳐진 안산(安山)의 옛 숲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도 안산에 가면 금방 단원을 만날 수 있다. 우선 행정 구역의 명칭으로서 단원구(檀園區)를 접할 수 있다. 안산시의 서쪽에 위치한 어엿한 구(區)이지만, 이제는 박달나무 숲을 대신하여 아파트 건물이 숲을 이룬 지역이다. 하지만 이 단원은 실재했던 장소와 어긋난다는 점에서 환상이 포장한 겉면처럼 보인다. 실상 단원은 다른 곳에 있으며 오늘날의 우리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다.

단원이라고 하니 어떤 이는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를 연상할 것이다. 김홍도가 안산 출신이라는 증거는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의 [단원기(檀園記)]에서 유래한다. 표암은 이를 갈 무렵인 일고여덟 살의 김홍도를 만나 그림 그리는 법을 지도했다고 했는데, 그는 이 시기에 안산에 머물고 있었다. 더욱이 김홍도가 ‘이 갈 무렵’인 1753년 7월에만 해도 표암은 안산의 단원에서 잊을 수 없는 아회(雅會: 글을 짓기 위해 모인 아담한 모임)를 즐기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성장기의 김홍도가 안산의 단원을 흠모하여 자기 호로 삼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김홍도가 ‘단원’이라는 호를 사용한 것은 대략 1781년 무렵부터 확인된다. 그가 그린 <단원도(檀園圖)>의 발문을 보면, ‘1781년 봄에 우리 집인 단원에서 강희언(姜希彦) 및 정란(鄭瀾)과 함께 셋이 모여 진솔회(眞率會)라는 아회를 가졌다”고 한 것이 그 물증이다. 그러나 이 그림 속의 단원은 추정컨대 안산이 아닌 서울을 배경으로 삼는다. 김홍도의 단원이 안산의 단원이라고 확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안산이 단원 김홍도와의 인연을 댈 수 있는 이유가 더 있기는 하다. 김홍도의 초기 작품에 자주 등장한 ‘서호(西湖)’라는 이름이나 혹은 그의 다른 호이기도 했던 ‘단구(丹丘)’라는 이름도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무렵의 안산 지명에서 포착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이 젊은 날 안산의 첨성리(瞻星里)에서 쓴 <석민부(釋憫賦: 고민을 푸는 노래)>에는 성포(聲浦) 서쪽의 앞바다를 서호(西湖)로 지칭하며 바다로 나아가고 싶은 꿈을 표현하였다. 또한 이 글에서 다루려는 이재덕(李載德, 1711~1768)이라는 인물의 거처에 대해 “단구가 그 오른 편에 있었다”고 한 기록도 보인다(이현환의 <의추재기(依楸齋記)>).

어쨌든 김홍도의 출생지가 정확히 안산의 어느 곳이었는지,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없다. 다만 이 희대의 화가가 썼던 이름들이 안산의 지명들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 예삿일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박달나무가 우거진 동산(단원)에 올라서면 왼편으로 서해로 나아가는 포구[성포(聲浦), 원당포(元堂浦), 초지포(草芝浦), 서호]가 펼쳐지고, 남북 10리의 가까운 거리에서 표암과 성호가 공존하던 그 공간에 섬사(剡社)와 단구가 포함되어 있으니, 김홍도의 유년에 대한 궁금증이 더 많은 환상을 불러일으키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의 단원이 김홍도와의 끈으로 묶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단원은 또 다른 매력을 품고 있는 곳이다. 내가 이 글에서 방문하고자 하는 단원도 실은 김홍도를 향해 가는 길이 아니다. 지워져버린 단원과 그 인근의 서해 풍경이 하 그립기도 하고 당시 문인들의 흥취가 손목을 당기는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단원아집(檀園雅集)]과 [섬사편(剡社篇)]이라는 두 자료가 단원의 시원스러운 숲과 비밀스러운 인연으로 나를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다.



단원의 풍류와 풍류주인 이재덕(李載德)



정갈한 활엽수요 고급 목재인 박달나무는 더위를 식히는 시원한 숲을 이루기도 한다. 때는 1753년 음력 7월, 장맛비가 살짝 그치자 안산의 명인들이 십 무(畝)나 우거진 단원의 숲에 모였을 때도 그랬다. 이재덕(李載德), 강세황(姜世晃), 이현환(李玄煥), 권매(權勱), 이용징(李龍徵), 이광환(李匡煥), 이창환(李昌煥), 이경환(李景煥), 이재억(李載億), 이재의(李載誼) 등이 모인 그날, 숲은 시원스럽고 매미는 즐겁게 노래했으며, 사람들은 [단원아집(檀園雅集)]이라는 우아한 시첩을 만들었다.





14547413981512



[단원아집(檀園雅集)]의 표지(왼쪽)와 이재덕의 시(오른쪽).



모임은 이재덕의 집 근처인 성고(聲皐: ‘聲浦의 언덕’이라는 뜻)에서 이루어졌는데, 이 언덕에 바로 단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성고 모임의 주동자인 이재덕은 여주이씨(驪州李氏)로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손자뻘 되는 사람이다. 그의 7대조인 이상신(李尙信)은 성호 선생의 5대조인 이상의(李尙毅)의 친동생이다. 1753년 당시, 이익은 성고의 아랫마을인 성촌(聲村, 星村, 瞻星里)에서 한창 강학을 베풀고 있었다. 또한 성촌의 동남쪽에 이상신의 묘소가 있었으니 이재덕으로서는 학문을 배우고 선산을 지킬 수 있는 자리에 집을 마련한 셈이었다.

이재덕은 본래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벼슬길에 뜻을 접은 그는 홀연 1750년 무렵에 안산 성촌(聲村)의 조귀리(早歸里)로 이주하였다가 얼마 뒤에 성고로 이사했다. 1762~1763년경에는 부모님의 선영을 섬산(蟾山, 剡山)으로 옮기고 3년 뒤쯤 의추재(依楸齋)라는 넉넉한 재실을 짓고 살았다. 2년 어린 이현환이 언제나 그와 함께하였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재덕이 마음도 넉넉하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데다 사람들과 사귀기를 매우 좋아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안산에 이주한 뒤부터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10리쯤 북쪽에 사는 표암 강세황과 5리쯤 북쪽의 해암(海巖) 유경종(柳慶種, 1714~1784)은 물론이요, 일대에 동족촌을 형성하고 살던 종인(宗人: 촌수가 먼 일가)들을 초대하여 틈나는 대로 시회를 주관하였던 것이다.

1768년에 이재덕은 의추재가 있는 섬계(蟾溪, 剡溪)에서 세상을 떠났다. ‘지상우(地上友)’라 자신을 표현한 강세황은 “단원의 시 모임에서는 한 질의 시축을 이루었고, 관악산 여행에서는 그림을 그렸었지요(檀園詩社吟成秩 冠岳山行畵作圖).”라고 이재덕을 추억했다. 특별히 단원 모임을 성사(盛事)로 꼽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더불어 이경환은 “매년 꽃 피고 달뜨는 좋은 때면 마을의 종족을 초대하고 노소가 모여 수창(酬唱)을 흠뻑 즐겼다”고 했고, 이영환(李英煥)도 “세시복랍(歲時伏臘: 세시절기, 삼복, 그리고 섣달의 납일)에 종인들을 불러 모아 시회를 여니 사람들은 이를 일러 섬사풍류(剡社風流)라 하였고 공을 풍류주인(風流主人)으로 지목하였다”고 기렸다.

말하자면 그는 표암과 더불어 안산 문화계에 바람을 일으킨 주역 중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주 훗날 그의 현손(玄孫)인 이명구(李命九)는 이 15년 수창의 역사를 모아 [성고수창록(聲皐酬唱錄)]으로 정리해두었다.



단원(檀園)이 있었던 곳



그렇다면 단원은 실제로 어디에 있었을까? 옛 지형을 보존한 1950년대의 지도를 참조해본다.





14547413996505



1950년대의 안산 지도 확대본.



먼저 화면의 오른쪽 중단에 점성리(1 占星里, 일명 瞻星里)와 성포리(3 聲浦里)가 눈에 띤다. 이중 점성리는 당시에 성호 이익이 강학하던 곳이거니와, 추정컨대 등고선이 빼곡한 성포리 북쪽 언덕에 바로 성고의 단원(2)이 위치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성고와 단원이 성두리(城頭里) 오른편 기슭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성두리(8)는 聲頭로도 표시되며 성관포(聲串浦)와도 겹친다]. 그 위로 북쪽 5리쯤에 유경종이 거주한 부곡리(4 釜谷里)가 있고, 지도 바깥의 그 위쪽으로 옛 안산의 읍치(邑治) 안쪽에 강세황이 머물렀다. 또한 이경환·이영환 형제가 살던 송호(5松湖)로부터 성포리, 점성리 일대에는 여주이씨 동족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이 중 성고에 위치한 단원은 서쪽으로 원당포(6 元堂浦)와 초지리(7 草芝里)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풍광이 수려한 곳이었다. 이현환이 <의추재 기문(依楸齋記)>에서 “눈앞에는 하포(蝦浦)를, 등 뒤에는 수리산(修理山)을 두었고, 집 오른편에는 단구(丹丘)가, 왼편에 도산(陶山)이 바라보인다”고 했는데, 나는 여기서 말한 단구(丹丘)가 바로 단원(檀園)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이현환의 눈을 빌리면 단원 일대의 당시 풍경을 더 확장할 수 있다(<蟾皐新舍上樑文>). 연성(蓮城: 안산 읍치)의 남쪽에 놓인 이곳은 아래쪽으로 속계(蔌溪)라는 시내가 흘렀다고 하며, 곁에는 우산(牛山)과 섬산(蟾山, 剡山)이 위치했다고 한다. 또한 오른쪽으로는 가산(可山: 가사미산으로 추정)의 풍경을 끌어당기고 동쪽으로는 지항(智巷: 현재의 계항동으로 추정)의 임목(林木)과 잇닿은 채, 구랑동(九郞洞: 구룡동으로 추정)의 월색(月色)과 팔곡촌(八谷村)의 연광(烟光)을 조망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필시 고왔을 그곳이 그러나 지금은 가뭇없다. 성포동과 고잔동 사이의 바닷길이 매립되어 중앙역과 고잔역의 전철이 지나고, 호수동이라는 멋진 이름을 잡아두었지만 이제 그곳에는 온갖 건축물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기 때문이다.



[단원아집(檀園雅集)]의 현장







14547414012405



다섯 색깔의 비점이 찍힌 [단원아집(檀園雅集)]의 내지



2003년, 예술의 전당이 주최한 ‘표암 강세황’전에서 [단원아집]이 드디어 자태를 드러내었다. ‘아집(雅集: 우아한 모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정성스러움을 간직한 이 시첩은 다섯 색깔의 비점(批點: 시문을 비평하여 잘된 곳에 찍는 둥근 점)이 찍힌 예사롭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표암 연구자인 정은진 교수가 이 작품집을 학술지에 소개하며 가슴이 뛰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시첩은 멋이 있다. 참여자의 친필들도 멋스럽고, 녹색·청색·노란색·연지색·자주색·붉은색이 찍힌 품평의 흔적도 눈길을 곱게 끈다. ‘공산무인 수류화개(空山無人 水流花開, 텅 빈 산에 사람은 없고 물 흐르고 꽃은 피어 있네)’, ‘생애일편청산(生涯一片靑山, 한평생의 삶이 한줄기 푸른 산에 달려 있네)’, ‘단운함우입고촌(斷雲含雨入孤邨, 조각구름은 비를 머금고 외딴 마을로 들어간다)’이라고 한 글귀를 글자별로 나누어 시를 지은 풍류도 멋스럽다. 그런데 나는 그 중에서도 이날 단원에서의 흥취와 숨겨진 사연에 더 관심이 깊다.

이창환(李昌煥)이 “성고의 고상한 모임, 흰 구름 흘러가는 가을(聲皐高會白雲秋)”이라 묘사한 그날에, 이경환이 읊은 대로 “가을날 서쪽 동산에서의 모임, 박달나무 숲이 십 무나 늘어서 있고(秋日西園會 檀陰十畝斜)”, “저 멀리 소래 포구와 초지도가 보이는(剩占蘇湖勝 平臨草嶼遐)” 풍경을 배경 삼아 단원의 모임이 시작되었다. ‘空山無人 水流花開’에서 ‘인(人)’ 자를 고른 강세황의 현장묘사는 이러하다.


이런 좋은 모임이 어디 있으랴, 동족이 아니라면 옛 벗들일세.

술동이는 가득 채울 필요 없으니, 웃고 즐기는 말들이 모두 진솔하네.

하얀 밥에 개장국 차려두고, 소주를 다시 몇 순배 돌리네.

저녁 되어 다시 자리를 옮겨, 드넓은 저 바다를 내려다보네.

지는 햇살은 창파에 반사되고, 만 이랑 바닷물은 은을 녹인 듯.

때마침 오랜 장마 그친 터라, 높은 나무에서 매미가 울어대네.

야트막한 산이 먼 포구를 감쌌는데, 산뜻하고 깨끗하여 티끌이 전혀 없네.

연이은 종이에다 각각 운을 뽑아, 시 읊는 소리가 다투어 이어지네.

어찌할꼬! 학서자(이현환)께선, 취해서 비틀비틀 갓이 땅에 떨어지니.

無如此會佳 非族卽故人 盃樽不必盛 談笑無非眞 白飯狗肉羹 燒酒復數巡

晩來更移席 俯臨大海濱 返照射滄波 萬頃如鎔銀 是時積雨霽 高樹鳴蜩新

淺山違遙浦 瑩淨無纖塵 聯牋各拈韻 吟咏爭紛繽 如何鶴西子 醉倒墯冠巾



장마가 물러나자 벗들이 단원에 모였다. 주인(이재덕)은 풍성하게 음식을 마련하고 정갈하게 지필묵을 갖추어 일행을 맞았다. 취흥이 햇살 따라 석양빛의 홍조를 닮아갈 무렵 학서자(鶴西子) 이현환은 ‘수(水)’ 자를 얻어 5언 40구의 긴 호흡으로 흉금을 활짝 열었다.

그는 지난번 원당사(元堂寺) 모임을 돌아본 뒤에 강세황을 초청하게 된 배경, “박달나무 아래에다 자리를 하나 펴고, 넘실대는 바다 물결을 굽어보는(檀下鋪一席 俯臨滄海水)” 정경, 그리고 “인생이란 날리는 먼지 같은 것이니(人生若颷塵) 마시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냐(不飮復何俟)”며 얼큰한 취흥을 거침없이 쏟아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강세황에게 “귀찮다 말고 그대여, 그림 한 폭 그려주오(煩君畵一幅)”라고 간청했으나 강세황이 실제로 그림을 그린 것 같지는 않다.



하룻밤의 비, 그리고 우연한 출발



하필이면 이날 밤에 다시 비가 내렸다. 그전에 ‘고림양선명(高林凉蟬鳴, 숲에서 매미가 시원스레 운다)’으로 운을 나누어 시를 짓던 시각에 일행은 이미 이재덕의 집으로 돌아와 있었던 듯하다. “부축 받아 취해 돌아오는 길, 숲의 새들은 여기저기서 울어대었으며”(이재덕), “시 지으라는 호령이 점점 엄해지자, 어떤 벗은 읊다 못해 도망가기까지 하였다”(강세황).

하나 둘 자리를 뜨고 마침내 이재덕, 강세황, 이현환, 이창환, 이광환만이 자리에 남았다. 그런데 또 이창환과 이광환이 앞마을 성촌(성호 이익의 마을)에 얼른 다녀오겠다며 나막신을 신고 나서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하필 비가 내린 것이다. 이재덕과 강세황은 밤새도록 기다렸다. 그러나 그 비 탓에 둘은 돌아오지 못했다. [단원아집]의 마지막 4수는 이러한 사연을 알지 못하면 쉬 해석되지 않는다.

[단원아집]의 마지막 비밀을 풀게 하는 것은 [성고수창록]이다. 이날의 시편을 재수록한 이 책에는 흥미롭게도 <관음 이창환과 동애 이광환이 잠깐 성촌에 갔다가 비에 막혀 돌아오지 못했다. 부쳐 보내고 화답을 구한다(觀音東厓乍往星村關雨未還寄呈求和)>라는 작품이 실려 있다. 앞뒤를 헤아려보면, 둘이 떠나고 밤새도록 돌아오지 않자 이재덕과 강세황이 애타게 기다라고 있노라는 시를 편지로 보냈던 것 같다. 표암의 경우, “성대한 시축에 연달아 짓자는 계책이 어긋난 것 아니냐(巨軸聯題計已空)”, “어제의 난질(亂帙)을 펼쳐두고 있거늘, 기약만 남겨놓고 오지는 않는 것이냐”며 일행의 복귀를 종용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마음은 박달나무 가로 가서 모임에 있는 듯하나, 몸은 해당화 아래 있어 텅 빈 골짝에 있는 듯하다(神往檀邊疑在會 形留棠下似逃空)”라는 이창환의 화답시였다.

특히 이광환은 <잠시 성촌에 들렀다가 비를 만나 유숙하며 성고에서 함께 놀던 것을 그리워하다(暫往星村値雨留宿懷聲皐同遊)>라는 화답시를 따로 남겨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읊었다.

갔다가 석양에 곧 돌아올 줄 알았는데, 뉘라 알았으랴 비에 되레 막힐 줄.

몸은 낙엽마냥 성촌(星村)에 붙들렸고, 꿈은 구름 따라 학산(鶴山)을 넘어가네.

책상 위엔 빼어난 시들이 쌓였을 테니, 술 따르며 어찌하면 반가운 얼굴을 뵈올까?

시름겨워 홀로 관음노인(李昌煥)만 짝했건만, 숲에선 벗 부르느라 새들이 지저귀네.

自擬吾行夕便還 誰知一雨却相關 身同落葉淹星社 夢逐歸雲度鶴山

案上想應堆傑句 樽中那得對歡顔 牢愁獨伴觀音老 喚友林間鳥語14547414018409.jpg

석양에 돌아오마던 약속도 부질없이 둘은 비에 묶인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학산(鶴山) 너머 성고에서 밤새 기다릴 줄 알기에 미처 끝맺지 못하고 돌아온 시축(詩軸)과 흥을 다 풀지 못한 술자리가 정녕 안타까웠을 것이다. 더욱이 숲에선 새들이 친구를 모으는 듯 재잘거리며 사람의 심회를 돋우니 그날의 비가 얼마나 얄미웠을까? 기다리는 사람도 못 가는 사람도 발을 동동거렸을 그 밤에 비는 자꾸 내리고, [단원아집]의 마지막도 그날 밤의 비처럼 뿌옇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삶이란 우연을 품은 기묘한 것이 아니겠는가? 신기하게도 [단원아집]의 맨 마지막 작품은 전날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고, 또 한편으로는 이재덕의 기나긴 수창록에 딱 두 번 모습을 나타내는 인물의 시로 마무리되어 있다. 충청도 예산에서 살며 아버지 이광휴(李廣休)를 모시고 이따금 안산을 방문했던 사람, 이철환(李嚞煥, 1722~1779)이 바로 그였다.



[섬사편(剡社篇)]의 아회도와 단원(檀園)의 상상



비에 막혀 단원 모임이 애석하게 흐르던 그날 밤에 이철환은 마침 성호 이익의 성촌에 와 있었다. 그리고 안절부절못하는 이광환과 이창환에게서 안타까운 사정을 듣고 난 다음 난데없이 두 사람과 더불어 화운(和韻: 남이 지은 시의 운자를 써서 답시를 지음)에 참여했던 것이다.

이철환이 읊은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나도 이제 서른, 산골(예산)에 사는 사람. 농사일이 인생의 사업이나 하늘에 비친 달(벗)을 사모하는 사람. 그대들과 떨어져 수심은 끝없으나 나를 벗삼아 살아가는 그런 사람. 하지만 세상을 버린 후로 외려 버림받은 처지라, 모임을 함께하며 시 모으는 모습이 부럽다오(棄世由來還見棄 羨他同社拾詩封).”

이 부러움이 단순한 동경에 그쳤다면 단원의 또 한 면이 지워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선망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이철환이 붓을 준비하고 종이를 준비한 사실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는 단원 근처 섬산(剡山, 蟾山)과 섬계(剡溪, 蟾溪)에 마을을 형성했던 섬사(剡社)를 그리워하여, 이곳을 포함하여 몇 년 동안(1753?~1757) 읊은 시들을 모아 [섬사편]이라는 색다른 시화첩(詩畵帖)을 꾸며가기 때문이다.

이재덕의 만년 거처이기도 했던 섬산과 섬계가 단원의 인근임에는 틀림이 없다. 무엇보다 이철환에게 이곳은 성호 이익을 비롯해서 그리운 혈족과 벗들이 한데 모여 사는 부러운 곳으로 인식되었다. 그렇기에 '두꺼비 모양으로 생겼을 산(蟾山)'이 그에게는 중국 섬계(剡溪)를 연상시키는 곳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눈이 내린 밤에 왕휘지(王徽之)는 친구인 대규(戴逵)가 갑자기 보고 싶어 섬계의 집 앞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왔다는 그 유명한 고사를 몰랐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해일지 다음 해일지는 분명치 않으나 앞의 이광환, 이창환, 이현환 등과 더불어 어느 멋진 바닷가로 소풍을 다녀온다. 그때의 풍경을 재현한 것이 바로 이 글의 화두인 저 그림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그림은 ‘여기가 단원’이라는 표시를 분명히 보여주지 않는다. ‘길보(吉甫: 이철환의 자)’라는 도장이 분명한 이 그림을, 그래서 나는 지난 1년 동안 수십 번은 더 보았던 것이다. 보면 볼수록 몽롱한 이 그림에서 단원의 풍경을 엿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서는 여전히 모호하다. 이철환 자신은 “천 이랑의 노을진 바다, 만 이랑의 푸른 물결. 푸를 때는 푸른색이 사람을 녹이고, 붉을 때는 광채가 반짝반짝 하네. 저 절경이 환상 같다 한들 안 될 게 뭔가, 숲이며 집들이 내 책 속에 들어왔으니(千頃紅, 万頃碧. 碧時碧殺人, 紅處光赫赫. 絶景何妨幻中看, 和林和屋入我冊)”라고 하였을 뿐, 그곳이 정확히 어디인지를 밝혀두지 않았다. “큰 소나무 아래에서 옛적에 놀던 곳, 푸른 바다 노을진 물결 그 경치가 그윽하다(長松之下昔同游 碧海紅田景色幽: 이광환)”고 해도, 혹은 “예전의 놀던 곳이 원래 그림 같았으니, 그 풍경이 그윽한 그림 속에 들어오든 말든(前游元是畵中游 景物非關入畵幽: 이창환), 애타는 내 호기심을 실증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림 속의 배경은 정녕 어디란 말인가? 단원인가, 아닌가? 배를 타고 남양(南陽)의 어느 산자락에 다녀왔다고 본들 안 될 것은 없다. 하지만 정황을 재어보면 안산의 바닷가였으리라. 부친을 배행(陪行: 윗사람을 모시고 따라감)하던 이철환이 아버지를 떼놓고 따로 소풍 갔으리라 보긴 어렵다. 섬사 옆 송호(松湖)에 살던 이광환ㆍ이창환 형제와 그 인근에 거처하던 이현환이 풍류주인격인 이재덕만을 쏙 빼놓고 뱃놀이를 따로 즐겼을 확률도 적다. 단원이라 비정하고 싶지만 또한 이 그림 속의 풍경은 바다와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 그럴 경우 남는 추정은 이곳이 성포 주변의 바닷가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아회도>의 해변 부분을 확대한 그림을 보면, 한 사람은 바다를 또 한 사람은 숲을 바라보고 있으며, 나머지 두 사람은 서로 정담을 나누고 있다. 다시 화폭 전체의 나무들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네 사람 주위로 소나무가 두 그루, 저 멀리 비탈에 댓 그루, 그리고 나머지 열댓 그루는 잎이 정갈한 활엽수다. 마음이 빨려드는 탓인지 나는 이 나무가 마치 박달나무처럼 보인다.





14547414033290



<아회도>의 해변 확대 부분



그러고 보면 단원은 아마 이 나무들로 숲을 이뤄 무성한 곳이었으리라. 어쩌면 이 그림의 오른쪽 산 너머에 있었을 단원은 자신을 이젠 잊어달라 내게 청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슴푸레 되돌아서는 연인의 뒷모습을 잊을 수 없는 것처럼, 나는 단원의 가느다란 옷자락을 붙잡고 1750년대의 안산 바닷가로 또다시 이끌려 들어간다.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태학사와 손을 잡고<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를 연재한다. 그림에 숨은 비밀과 사연을 프리즘으로 삼아 한국학의 출렁이는 바다로 여행을 떠나려는 것이다. 문학, 미술, 음악, 철학, 역사, 문화가 망라되는 항해에 깊고 진한 교감이 깃든 풍성한 바다가 펼쳐지길 해신(海神)에게 기도한다. 연재는 매주 1회 돛을 달고 항구를 떠난다.

 14547414033922.jpg    http://www.thaehaksa.com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도서 출간
네이버캐스트에 연재되었던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시리즈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우리 시대 인문학자 32인이 옛 그림을 호명해 되살려낸 한국학 읽기의 색다른 즐거움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김동준 |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한국 한시의 저력과 매력을 탐구하는 데 주력해왔으며, 고전의 가치를 대중과 공유하는 일에 관심이 깊다. <18세기 한국 한시의 실험적 성격에 대한 연구>,<한국 기물명(器物銘 )의 역사와 성격에 관한 소고>,<소론계 학자들의 자국어문 연구활동과 양상> 등의 글을 썼다. 중세의 어문학을 통해 다원의 공존 가능성을 증명하려 힘을 모으고 있다.


발행2012.09.2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