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그림 속 미각(味覺) - 맛의 감각으로 옛 그림 감상을 시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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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98회 작성일 16-02-06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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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선비들이 남겨놓은 그림 감상 시문을 읽다 보면 그들의 혀끝에 감돌았던 감각, 즉 ‘미각(味覺)’의 감상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림 속 물상의 ‘맛’을 기억하여 표현하거나 더듬어 상상하다가, 끝내 그림 속 그 물상을 꺼내 먹고 싶어 견딜 수 없노라고 진지하게 또는 장난스럽게 고백하는 시문들이다. 이러한 감상의 대상이 되었던 그림들을 일러 ‘미각으로 감상된 그림’이라 불러보겠다.



‘미각으로 감상된 그림’에는 먹을 수 있는 물상, ‘식물(食物)’이 그려져 있다. 예컨대 넝쿨손 넙적한 잎 아래 조랑조랑 매달린 포도송이들, 혹은 여찌, 귤, 홍시, 밤 등의 과일, 뒤뜰에 익어가는 수박 덩굴, 밭에서 열매 맺은 오이자루, 가지, 참외, 잎 벌어진 상추, 배추, 솟아나온 죽순, 어적어적 기어가는 게, 헤엄치는 쏘가리, 물결 속의 전복, 새우, 조개, 골동품에 장식된 석류와 불수감(佛手柑), 십장생과 어울린 반도복숭아 등 종류가 다양하다.



미각적 감상의 대상이 되었던 그림 속 식물들은 사실상 그 시절에 진귀하여 쉽게 먹지 못하는 것이거나 문화, 역사적 에피소드가 담긴 유별한 식품들이다. 말하자면 일반적 시문에서 먹거리로 곧잘 일컬어지는 밥과 반찬, 각종 떡, 식혜, 호박 등 일상의 모든 먹거리가 그림의 주제로 등장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미각으로 감상된 그림’들이 앞에 놓이면 우리는 그것들을 바라본 그 시절의 미각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개 아름답고 풍성한 자연의 일면으로 감상하게 되고 혹은 현학적 해설로 학습된 길상적(吉祥的) 상징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에, 이 글에서는 옛 선비들이 제공해준 미각의 내용과 의미를 따라 읽으며 맛의 감각으로 옛 그림 감상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미각의 감상은 자연물의 순수한 미각에 가까이 다가가겠지만 결코 그에 머물지 않는다. 그보다는 역사,문화와 은밀한 욕망이 조미(調味: 맛이 알맞게 맞추어 짐)된 별미의 감상을 맛보는 데 그 진가가 있다. 위에서 예로 든 식물 그림들 중 세 가지를 골라보았다. 뭍에서 나는 ‘포도’, 물에서 나는 ‘게’, 그리고 이 세상 어디에서도 나지 않는 ‘반도’이다.




진귀한 맛, 포도와 포도주



우선 포도 그림 두 폭을 소개한다. 조선 전기의 화원이 그린 듯 정교한 청포도 그림 한 폭(아래 왼쪽)과 16세기에 포도 그림으로 유명했던 황집중(黃執中, 1533~?)의 적포도 그림 한 폭이다(오른쪽). 이 그림 속에 담겨 있던 포도의 옛 맛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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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미상,〈포도〉(부분)
101x 47cm, 조선 15~16세기, 미국 클리블랜드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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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집중, 〈포도〉
조선 16세기, 모시에 수묵, 35x30cm, 간송미술관 소장.<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병상에 누운 태조(太祖)의 마음에는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포도’였다. “짐의 병이 오래가는구나. 수정포도(水晶葡萄) 좀 먹으면 나으련만…….” 수정포도란 청포도를 말한다. 이틀 후 한 신하가 청포도를 구해 바쳤고, 태조는 한두 알을 드시고 병상에서 일어났다. 1398년 음력 9월 1일과 3일에 기록된 실록의 내용이다. 훗날 세종대왕도 병상에서 포도만 찾으셨다. 콜라도 오렌지주스도 없던 시절이니 상큼한 포도과즙의 간절함으로 그럴 만도 하였을 것 같다.

콕 씹으면 툭 터져서 입안에 감도는 청포도의 맛! 고려의 이색(李穡, 1328~1396)은 이를 ‘산첨미’(酸甛味: 시고 단 맛)라 하였다. 새콤달콤함이다.




누가 만 개 알갱이에 새콤달콤한 맛을 숨겨두었지?              誰藏萬斛酸甛味

옥색 맑은 진액이 이와 혀 사이로 번지는구나!                    齒舌中間瓊液淸



조선 초기의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포도가〉로 노래했다.




수박보다 달콤하고 우유보다 매끄러워.                            甛於西瓜潤於酥

한 알만 입에 넣어도 고질병이 싹 가시네!                         一顆入口沈痾蘇



포도맛이 고려와 조선의 왕과 문사들에게 특별 애호를 받은 데는 역사, 문화적 이유가 있다. 한(漢)나라 때 서역에서 중국으로 들어왔으니 애당초 귀한 물건이었고, 한나라 대문장가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당뇨병을 앓을 때 포도를 먹고 갈증을 해소했다는 에피소드가 또한 유명했다. 말하자면 포도란 수입산 고급 과실이자 해갈과 치병의 효과가 있는 열매로 그 특성이 전해지고 있었다. 조선 중기에 왕들이 신하에게 포도를 맛보게 했다는 기록이나 신하들이 시를 써 올리며 포도를 칭송한 것을 보면, 포도는 그 당시 꽤 귀한 과일이었다.

아래 두 편의 시는 16세기 조선의 문사들이 포도 그림을 보고 읊은 제화시(題畵詩: 그림에 기초하여 지은 시)이다. 하나는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의 시로, 그는 장원급제하였고 우의정에 올랐으며 임진왜란 때는 노쇠한 나이로 의병을 모았다. 또 하나는 황섬(黃暹, 1544~1616)의 시로, 그는 스물에 성균관 유생이 되었고 훗날 정치를 잘한 군수로 이름이 났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군 물자수송에 공을 세웠다. 말하자면 아래의 시를 쓴 선비들이 먹고 노는 것이나 좋아한 소인배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이들이 읊고 있는 것은 마유(馬乳)라고도 일컬어졌던 자포도, 즉 오늘날의 적포도이다




넝쿨가지 얼기설기한데                                                   枝蔓相縈繞

동글동글 흑황색알 주렁주렁.                                           團團綴黑黃

마주하니 향취와 맛 간절해서                                            對之思嗅味

어금니가 벌써 상큼해졌네.                                              牙齒覺生涼





화공이 그려낸 포도넝쿨,                                                   畫工幻出葡萄蔓

주렁주렁 포도알이 진짜 같구나                                          馬乳離離巧奪眞

병든 객은 소갈증을 참지 못할 게야.                                    病客不堪司馬渴

눈 치켜 벽을 보니 입에서 침이 흐르네.                                擡眸壁上口流津



포도를 맛보며 와인의 맛을 몰랐으랴! 중국 한나라의 교활한 맹타(孟他)가 포도주 한 말을 못된 환관에게 몰래 주어 자사(刺史) 벼슬을 얻었다고 한다. 이 고전적 포도주 뇌물비리 사건은 조선의 시문에서 자주 접할 수 있다. 대개 벼슬보다 포도주가 더 좋으니 마시고 보리라는 풍류의 내용들이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포도주를 마셨는지 여기에서 논할 수는 없지만, 고려 왕실에서 와인을 마신 것은 분명하다. 원나라 황제가 고려의 왕에게 포도주를 선물한 일이 고려 역사에 거듭 기록되기 때문이다. 또한 포도주는 조선시대 연회에도 자주 올랐다. 그들이 마신 포도주는 대개 저 강물처럼, 청둥오리 목처럼 푸른 ‘녹(綠)’ 빛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청포도주를 즐겨 마신 것이다. 색이 붉은 적포도주의 묘사도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가 녹빛 포도주였다. 포도주의 맛, 그 맛은 신선이 마시는 달콤한 이슬 ‘감로주(甘露酒)’를 연상하게 한다고 그들은 표현하였다.

포도주의 감미로움에 대한 경험이 증가했기 때문일까? 임란 이후로는 포도 그림만 펼쳐놓으면 포도주맛을 그리워하는 경우가 부쩍 많아진다. 이춘영(李春英, 1563~1606)이 황집중의 포도 그림을 보고는 “종이 가득 포도주로다!”라고 한 이래, 훗날 최승우(崔昇羽, 1770~1841)가 포도 그림에 쓴 시를 보면 포도주의 맛과 그 효능만을 읊고 있다. 그 내용은 누룩보다 달달한 맛, 조금만 먹어도 취하고 깨기 쉬우며, 번민을 없애주고 갈증도 덜어주는 효능에 대한 것이다.

추사 김정희(金正喜)로부터 세상에 드문 세한송백(歲寒松柏: 추운 겨울에도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이라고 높이 칭송받았던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은 포도주 몇 병과 포도 그림을 맞바꾸자고 제안하는 시를 남겼다. “포도주 백 잔을 올리겠사오니, 포도 그림 한 폭만 그려주세요!(勸君葡萄酒百盃, 乞君葡萄寫一幅).” 20세기에 이르도록 포도 그림을 보고 포도주를 연상하는 감상 시문이 끊이지 않았다.



풍류의 멋, 게살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게(蟹)’를 그린 그림은 새로 지어 술거품이 떠오르는 동동주 향기와 함께 입속에 사르르 녹는 게살 맛진 술상의 풍미를 생각나게 했다. “오른손에 술잔을 왼손에 게 다리를 붙들고, 술못 속에서 퍼마시면서 일생을 다 보내도 좋도다(右手持酒卮 左手持蟹螯 拍浮酒池中 便足了一生)”라고 외치며 강호를 누리고 싶다고 외쳤던 중국의 진(晉)나라 시인 필탁(畢卓)의 이야기가 이러한 게맛의 근거가 되었다.

필탁의 이야기는 세상 욕심을 무시하고 강호의 풍류를 즐기고자 한 호탕하고 소박한 풍류로 통했다. 그리하여 게는 강호에서의 소박한 별미 혹은 전원의 별미(田家別味)로 그 의미가 소통되었다. 중국 사신의 눈에 비친 고려의 이모저모를 묘사한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보면 고려에서는 해산물이 매우 흔하여 천한 백성들도 쉽게 먹더라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후의 문헌을 살펴보면 아무래도 조선의 백성들은 공물로 바치는 해산물이 많았던 탓이었는지 그리 쉽게 먹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귀한 반찬거리였던 게를 일컬어, 마치 소박한 전원의 풍류인 양 문인들이 읊었던 것이라 판단된다.

오늘날 동서양을 무론하고 바닷게 요리는 고급에 속하며 꽃게 철이 되면 군침을 흘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조선시대에는 더욱 귀한 음식 중 하나였을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술과 게를 한 세트로 묶어 선물로 주고받은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상류사회의 고급 선물로 오간 것이라 보인다. 다만 그들은 호탕하고 소박한 강호풍류의 인격을 칭송하는 시문을 함께 주고받으며 그 선물의 의미를 포장하였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퇴계 선생 이황(李滉, 1501~1570)이 〈게 그림(蟹圖)〉 여러 폭을 펼쳐놓고 게의 종류를 따져 고민하다가 그림 속 맛을 감상하였다. 그에게 떠오른 게맛, 그리고 그 맛을 표현하는 시어의 선택 속에 필탁의 고사가 그도 모르게 얽혀들어 있다.




눈같이 하얀 살을 손으로 발라내니                                     雪肌隨手劈

풍미가 혀와 잇몸을 상쾌하게 해주네.                                 風味爽舌齶

옹이 주둥이에 새로 빚은 술 쏟아붓자                                 甕頭潑新醅

술거품 뜨고 향기로워 마시고 또 마시지.                             浮蟻香拍拍



이황의 입속에 고였던 게살과 새 술의 어울림, 이는 강호은둔의 상상적 풍류로 문인들끼리 소통된 문화적 코드의 미각이었다.

이렇듯 그림 속 엉금엉금 기어가는 게들을 보자마자 술안주로 떠올리고 그 조합의 맛을 상상하는 미각의 감상 전통은 근대기까지 지속되었다. 20세기 초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이 선배 화가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의 그림 위에 게 열 마리가 그려져 있는 것을 헤아린 후 그림 위 여백에 글을 적어 올렸다. 게 한 마리 그리실 때 술 한 잔을 드셨을 것이니 술 열 잔에 이르러서 그림이 완성되었고 사람이 크게 취했으리라는 내용이었다. 게를 그려 안주로 삼아 술상을 벌이다 보니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이러한 상상의 제발문은 게 안주의 술상 풍류에 대한 긍정적 수용 속에서 가능한 그림 감상이었다.

15세기의 문인화가였던 강희안(姜希顔, 1418~1465)이 새우와 게를 실감나게 그렸으며, 17세기 김인관(金仁寬, ?~?)이 물고기와 게를 특별히 잘 그려 유명하였다. 강희안의 게 그림은 전하는 것이 없고, 김인관의 그림은 여러 점이 전하고 있다. 김인관이 그린 게와 생선 곁에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감상을 늘어놓았다. 강세황은 게를 밥반찬으로 삼아 입맛을 다셨다(아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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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관, [화훼초충권]의 게 부분
전체 화권 17 ×1150cm, 종이에 수묵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초하룻날 반찬 없어 입맛 싱겁던 참에                              上日食素口淡

농어랑 게 따위를 보게 될 줄이야!                                   見巨口者六鰲者

나도 몰래 식지가 절로 움찔대고                                     不覺食指自動

먹고 싶어 군침이 줄줄 흐르네.                                       饞涎橫流



조선시대 선비들은 반찬 조촐한 소박한 밥(素飯)으로 끼니를 삼고 물밥(水飯)으로 간식을 삼곤 하였다. 그림을 펼치자 멋진 술안주가 등장하니, 강세황은 부족한 밥반찬을 채워줄 것을 상상해보았다. 그 표현이 궁상맞을 지경이다. 군침이 가득 나와 흘러내릴 정도라 하고 있으니.

강세황이 감상한 김인관의 게 그림을 보면, 두 마리의 게가 마주 서서 한 가닥 갈대를 붙들고 어정거린다. 길상의 의미로 보려고 한다면 이것은 이갑전려(二甲傳臚: 두 번의 시험에 모두 합격함)라 풀이되어 거듭 장원급제하고 벼슬에 오르는 뜻으로 해석되는 대표적 이미지이다.

그러나 강세황이 그림 위에 적어 넣은 글은 오로지 맛과 군침뿐이다. 풍류의 게살맛에 대한 감각적 표현이 자신의 인격을 표현하기에 적절하였는지, 먹고 싶다는 실감나는 표현이 그림을 잘 그렸다고 칭송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는지, 아니면 실로 먹고 싶은 감상으로 이 그림이 소통되었고 길상의 의미로는 그 당시 소통되지 않았는지, 우리가 정확하게 진단하기는 어렵다. 조선시대 시문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들이 가장 좋아한 맛있는 게는 음력 8월 벼 익어갈 무렵 살지고 알 밴 암컷 게, 즉 배꼽 둥그런 단제해(團臍蟹)였다는 사실이다. 그림 속 게들이 붙든 갈대에 갈대꽃이 벌어졌다. 이렇게 갈대 익을 무렵이니 여기 붙은 게 두 마리는 가장 살지고 맛있을 때이다.



신선의 묘약, 반도



복숭아 중에서 ‘반도(蟠桃)’ 혹은 ‘선도(仙桃)’라 불리는 것은 3천 년에 한 번 바다 속 신선산에 열린다는 특종의 복숭아이다. 그 꽃이 한 번 피는 데 천 년이요 거기서 열매가 맺는 데 천 년이고 이슬, 서리 거듭 맞으며 익는 데 천 년이 걸린다고 옛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그림 속 반도를 가만히 보면 작게 그려진 것도 서양의 메론 크기만큼 큼직하다. 사람이 반도 하나를 먹으면 천 년을 산다고 알려져 있다. 대단한 효력이다. 동방삭(東方朔)이 반도를 세 개 훔쳐 먹었다는 전설, 한(漢)나라 황제에게 선물되었다는 전설이 떠돌면서, 반도는 축수(祝壽)의 메타포가 되었다. 신하들은 충성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왕에게 시를 올리며 덧붙였다. “반도를 안주 삼아 밝으신 임금께 술 한 잔을 올리며 천년 수(壽)를 누리시기 바라옵니다!” 반도의 이미지는 중국 황제의 가마에 그려졌고 널리 미술문화 속에 유행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회화 작품이나 공예품 여기저기 실로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예컨대 반도의 주인이신 선녀 서왕모(西王母) 그림에, 그녀의 요지(瑤池)에서 열렸다는 잔치 그림에, 반도를 훔쳐 먹고 3천 수를 누렸다는 동방삭 그림에는 물론이요, 십장생도(十長生圖)에도 반도가 함께 그려졌고, 귀한 물건을 진열해놓은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 속 복숭아나, 사실적 초상화 앞에 차려진 양 그려진 복숭아도 반도처럼 탐스럽게 그려져 있다. 공예품에 반도가 독립적으로 조형(造形)된 예도 매우 많다.




하늘나라에서 3천 년 만에 열리는 과실이오,                                  天上三千季結子

인간세상에서 한 번 먹으면 오래 살 수 있다오.                              人間一食可長生



조선 후기에 윤봉구(尹鳳九, 1681~1767)가 서왕모의 반도가 그려진 그림을 보고 쓴 시의 한 구절이다. 그는 이 그림을 94세 된 벗에게 축수용으로 선물하였다. 반도가 그려져 있으니 그것 한번 먹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누가 아니해보겠는가. 신선세계 그림을 펼치면 가장 탐나는 것이 이 반도가 아니었겠는가.

그런데 3천 년에 한 번 신선산의 특정구역에만 열린다는 이 물건을 이 세상 어느 누가 먹어볼 것이며, 어느 누가 그 ‘맛’을 알겠는가? 성호 선생 이익(李瀷, 1681~1763)이 그 맛을 궁구하고자 ‘벽도에 취했노라(醉碧桃)’라는 옛 시구들을 모아 재해석을 시도했다. 그가 내린 결론이다. 반도를 삼켜 그 “선미(仙味)가 입에 들면 짙은 향기가 뼛속으로 스며들어 바로 취하게 된다는 뜻이로다. 어찌 술에 취하는 것만을 일러 취한다고 하겠는고?” 하나만 먹으면 천 년 삶을 보장한다는 이 묘약의 맛, 어질어질하게 하는 아찔한 맛에 대한 그럴듯한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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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작자 미상, [십장생도 십곡병] 중 제7, 8, 9, 10폭
[오른쪽] 왼쪽 그림의 부분. 홍협이 있는 반도복숭아.

전체 병풍 210×552.3cm, 조선 18세기 후반, 비단에 채색,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약도 제때 먹어야 효험이 좋은 법이다. 반도의 표면에 붉은 점들이 꽃처럼 나타날 때가 효험이 최고로 강한 최적기라 한다. 이를 ‘홍협(紅頰: 빨간 볼)’이라 불렀다. 19세기의 〈십장생도〉를 보면 학의 몸통보다 더 커다란 반도가 그림 속에 주렁주렁 익어 홍협점이 열매마다 찍혀 있다(왼쪽 그림). 시인 신위(申緯, 1769~1845)가 부채 위에 그려진 반도와 석류, 그리고 불수감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시를 읊었다. “벽도에 홍협이니 천년의 축수로다(碧桃紅頰千年壽).” 그림을 보고 시를 읊던 신위의 입속에는 잘 익은 반도의 선미(仙味)가 달콤, 짜릿하게 감돌았으리라.

죽음이 두려워 이 세상에 좀 더 머물고픈 사람들의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것 같다. 다만 선미(仙味)에 취하여 신선이 되도록 하는 반도의 이미지는 예전에 상상한 먹거리, 그림 속 환상의 미감(味感)이었다. 그리하여 반도를 보여주는 그림들이야말로 특별히 간절하게 ‘미각으로 감상된 그림’ 중 하나에 들게 된다.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태학사와 손을 잡고<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를 연재한다. 그림에 숨은 비밀과 사연을 프리즘으로 삼아 한국학의 출렁이는 바다로 여행을 떠나려는 것이다. 문학, 미술, 음악, 철학, 역사, 문화가 망라되는 항해에 깊고 진한 교감이 깃든 풍성한 바다가 펼쳐지길 해신(海神)에게 기도한다. 연재는 매주 1회 돛을 달고 항구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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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도서 출간
네이버캐스트에 연재되었던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시리즈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우리 시대 인문학자 32인이 옛 그림을 호명해 되살려낸 한국학 읽기의 색다른 즐거움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고연희 | 덕성여자대학교 강사
한국학문학 및 동양미술사학을 전공했다. 조선시대의 회화 문화와 문학적 배경의 상관성에 관심을 가지고 조선시대 회화를 오늘날 유의미하게 해석하고 감상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조서로 [그림 문학에 취하다], [조선시대 산수화- 아름다운 필묵의 정신사], [꽃과 새, 선비의 마음], [조선후기 산수기행예술 연구] 등이 있고, 그 외 조선시대 회화 및 시문학과 관련된 논문을 여러 편 발표하였다.


발행2012.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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