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영조의 식성과 고추장 사랑 - 입맛을 돋우는 매콤달콤한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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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83회 작성일 16-02-06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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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 조선 사람들은 어떤 음식을 먹었으며, 어떤 음식을 좋아했을까? 조선의 음식 문화를 살피는 데 있어서 임금의 밥상은 다른 어떤 요소보다 중요하다. 임금은 권력의 정점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음식 문화에서도 맨 꼭대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선택할 수 있는 음식의 폭이 가장 넓었고, 누구보다 앞서 새로운 음식을 접했다. 그러므로 임금이 무엇을 먹었는지 무엇을 좋아했는지는 조선 음식 문화의 변동을 파악하는 데 관건이 된다. 다행스럽게도 임금의 식사는 비교적 세세히 관찰되고 기록되었다. 왕조 국가인 조선에서, 임금의 건강은 무엇보다 중요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영조의 식성



조선 후기 문화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8세기 조선에는 모두 네 명의 임금이 있었다.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경종(景宗, 재위: 1720~1724),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다. 이 가운데 영조는 18세기의 한가운데를 절반 이상 통치한 임금이다. 무려 53년을 집권했다. 영조를 통해 한 인간의 청년, 장년, 노년의 식사를 모두 살필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임금의 말 한마디, 움직임 하나까지 세세히 기록한 [승정원일기]를 중심 자료로 삼아, 영조의 식생활을 살펴보고, 아울러 조선 음식 문화 변화의 일단을 엿보기로 한다.

[승정원일기]는 먼저 영조의 식성에 대해 평소 먹는 음식의 양이 적다고 기록하고 있다. 영조는 기본적으로 소식(小食)을 했다. 또 면은 즐기지 않았고 때때로 타락죽(駝酪粥)을 먹었다([승정원일기], 1733. 10. 19). ‘타락’은 우유를 뜻하는 말이다. 타락죽은 우유를 섞어 쑨 죽으로, 영조는 물론 숙종 등 역대 조선 임금이 가장 즐긴 음식이다. 소화가 잘되면서도 단백질과 지방 등을 골고루 섭취할 수 있는 보양식이었다. 이런 식성을 볼 때 영조는 소화 기능이 원활하지 않았던 듯하며 음식을 즐기지도 않았던 듯하다.

밥을 잘 못 먹는 사람은 떡과 같은 간식으로 식사를 대신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영조처럼 소화 기능이 별로 좋지 않았던 듯한 영조의 모후(母后) 인원왕후(仁元王后, 1687~1757)는 절편과 병자(餠炙) 등 군것질을 즐겼다. 병자는 두부 등을 넣어 끓인 포탕(泡湯)의 다른 이름이라는 기록도 있고, 떡볶이와 비슷하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영조는 이런 군것질마저도 좋아하지 않았다. 영조는 어릴 때는 떡을 조금 먹었지만 마흔이 넘어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승정원일기], 1734. 5. 24). 조선시대에는 남자들이 군것질을 하는 것을 채신머리없는 일로 보았다. 남몰래 떡집을 드나들다가 사돈에게 들켜 망신당한 남자 이야기 등이 그런 의식을 보여준다. 반면 군것질을 즐긴 여성 이야기가 많은데, 식구들 몰래 가루를 내어 떡을 해먹다 들킨 아내 이야기 등이 그렇다(정병설, [조선의 음담패설], 예옥, 2010). 이처럼 군것질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인식 차이가 큰 상황에서 임금이 떡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의식 때문이었는지 정말 식성 때문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영조는 떡이라면 그저 담증(痰證)을 내리는 데 좋다고 하여 떡국이나 먹는 정도였다([승정원일기], 1746. 6. 24).

영조의 약한 소화력은 그가 꺼린 음식으로도 짐작이 된다. 영조는 차고 설익은 음식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젊고 건강한 사람은 찬 음식, 설익은 음식을 가리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노인 등 기운이 약한 사람에게 이런 음식은 부담스럽다. 영조는 냉면을 잘 먹지 못했다. 그도 젊을 때는 냉면을 먹었다고 했는데, 중년 이후 꺼려졌던 모양이다. 사도세자가 열세 살 때 한여름에 냉면(調氷水麪)과 청도(靑桃)를 먹었다가 탈이 난 일이 있었다. 이 일에 대해 영조는 이런 것들은 모두 아주 해로운 것(皆甚害之物)이라고 말했다([승정원일기], 1747. 5. 22).



보리밥에 조기 반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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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잉군 초상(延礽君 肖像). 영조가 왕이 되기 이전 연잉군 시절의 초상으로, 21세(1714년)에 그린 것이다.
보물 제1491호.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영조가 즐긴 맛은 담백함이다. 생선으로는 조기를 좋아했다. 조기는 한자로 석어(石魚)라고 하는데, 어떤 신하가 석어를 우리말로는 조기(助氣)라고 한다고 했다. 신하는 영조가 조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임금 뜻에 맞추기 위해, 조기가 기운을 돕는 데 좋다고 말한 것이다. 영조는 민어보다 조기가 좋다고 했다. 기름기가 많은 민어보다 담백한 맛의 조기를 좋아했던 것이다. 영조는 조기는 강화도에서 난 것이 좋으니 그것을 인원왕후께 올리라고 명령했다. 자기보다 더 담백한 것을 좋아한 모후를 배려한 것이다.

영조는 또한 보리밥〔麥水刺〕을 좋아했다([승정원일기], 1730. 5. 17). 보리밥은 주로 여름철에 먹는데, 물에 말아 먹는 일이 많았다. 민간에서처럼 영조도 보리밥을 물에 말아 먹었다. 아마 간간한 조기를 반찬으로 삼았을 것이다. 입맛이 없는데도 억지로 밥술을 드는 환자의 식사 모습을 보는 듯하다.

[승정원일기]가 보여주는 영조의 식성은 세간에 알려진 그의 성격과 통한다. 영조의 성격은 그의 초상에도 잘 드러나 있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려진 그의 초상을 보면, 비쩍 마른 몸에다 매부리코로,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인상이다. 이십대 초 ‘불안한 왕자’의 처지가 극명히 드러나 있다.

영조는 태어났을 때 왕자에 불과했다.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왕자였다. 이복형인 경종이 이미 세자로 정해져 있었기에 그저 일개 왕자로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조선과 같은 절대 왕권이 지배하는 국가에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자의 운명은 극히 불안했다. 정조의 이복형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자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역모 혐의를 받아 사형을 당했다. 이런 운명을 잘 아는 젊은 영조가 마음이 편할 리 없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과 긴장이 젊은 시절을 지배했다. 혜경궁(惠慶宮, 1735~1815)도 시아버지 영조가 즉위 전과 즉위 초의 여러 가지 정치적 위기로 인해 신경증이 생겼다고 했다. 젊어서 죽을 고비를 넘나드는 경험을 한 것이 영조의 성격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정병설, [권력과 인간], 문학동네, 2012). 젊어서 이렇게 마음고생을 했으니 왕위에 올라 자리가 안정된 다음에도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산해진미가 많아도 소화를 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영조의 고추장 사랑



영조처럼 식욕이 떨어진 사람은 입맛을 돋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영조는 간간한 조기와 시원한 김치를 좋아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떨어진 입맛을 살리지 못했다. 뭔가 더 강렬한 자극이 필요했다. 나이가 들어 입맛이 떨어질수록 자극은 더 간절했다. 칠십대 중반을 넘어선 노인 영조가 어느 날 오래간만에 잘 먹었다. 영조가 말했다. “송이, 생전복, 새끼 꿩, 고추장은 네 가지 별미라, 이것들 덕분에 잘 먹었다. 이로써 보면 아직 내 입맛이 완전히 늙지는 않았나보다.”([승정원일기], 1768. 7. 28) 여기서 열거한 식재료 중에 눈길을 끄는 것이 고추장이다. 고추장은 단순히 매운 맛만 있지 않다. 매우면서도 달콤하다. 두 맛이 어우러져 감칠맛을 낸다. 입맛을 잃은 사람에게 더없이 좋은 벗이다. 영조는 고추장에 매료되었다.

영조는 1749년 7월 24일 처음 고추장을 언급했다. “옛날에 임금에게 수라를 올릴 때, 반드시 짜고 매운 것을 올리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지금 나도 천초(川椒) 같은 매운 것과 고추장(苦椒醬)을 좋아하게 되었다. 식성이 점점 어릴 때와 달라지니 이것도 소화 기능이 약해져서 그런가?” 영조는 숙종과 경종의 밥상에도 짜고 매운 양념이 오른 것을 보았다. 아버지와 형님의 밥상을 떠올리며 자기도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고추장을 거론했다. 이후 영조는 고추장 사랑에 빠졌고, 고추장 없이는 밥을 못 먹는 지경이 되었다. 내의원에서 연일 고추장을 올렸다. 원래 임금의 음식은 사옹원
(司饔院: 임금의 식사를 관장하던 조선 시대의 관청)에서 맡지만 고추장은 내의원에서 올렸다. 내의원은 사옹원 못지않게 임금의 식사를 중시하는 기관이니 고추장을 맡을 만하다. 때로는 임금의 수라를 사옹원 대신 내의원이 맡기도 했다. 그런데 영조는 궁중에서 만든 것보다 궁 밖에서 만든 고추장을 더 좋아했다.

영조는 조종부(趙宗溥) 집에서 담근 고추장을 좋아했다. 영조는 사헌부 지평 조종부가 탕평파 영의정인 이천보의 비리를 거침없이 비판하자, 그를 괘씸히 여겼다. 비리 때문에 비판했다고 보지 않고 당파심(黨派心)을 가지고 상대편을 공격했다고 여긴 것이다. 신하들이 당파를 내세워 자신이 세운 탕평책을 부정하는 것을 그 무엇보다 미워한 영조였다. 그러나 조종부는 미워도 그 집 고추장만은 도저히 미워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가 죽고 5년이 지난 후에도 그가 화제(話題)에 오르자 고추장을 떠올렸다([승정원일기], 1751. 윤5. 18, 1754. 11. 20, 1761. 8. 2).

스무 해 가까이 이어진 영조의 고추장 사랑은 노인이 되어 약해지는 입맛에 마침내 무너지고 말았다. 내의원 도제조 김치인이 근래에 올리는 고추장이 어떠냐고 물으니, 영조는 이것도 이제는 물렸다고 대답했다([승정원일기], 1769. 6. 17). 고추장이 더 이상 영조의 입맛을 돋우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즈음에는 전에 그토록 칭찬하던 건공탕(建功湯)에 대해서도 잔뜩 불평을 늘어놓던 참이었다. 건공탕은 원래 이중탕(理中湯)이라는 이름의 탕약이었는데, 건강을 유지하는 데 공이 크다고 해서 영조가 새로 이 이름을 내렸다. 이런 건공탕마저도 더이상 듣지 않는 상황이었다(김종서, <건공탕에 반영된 영조의 노년 건강과 심사>, [장서각] 20, 2008). 백약이 무효였다. 고추장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달리 선택할 것이 없었다. 그 옛날 맛있는 고추장을 찾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었다. 고추장이 물린다고 말한 이듬해에 영조는 내의원에서 만든 고추장이 사부가(士夫家)에서 만든 것만 못하다고 했다. 조종부 집의 옛 솜씨가 그리웠던 듯하다. 참고로 밝히면 조종부의 본관은 순창이다. 흔히 말하는 ‘순창 고추장’의 연원이 조종부 집과 연관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다른 글을 통해 밝히고자 한다.



고추장과 맛의 변화



영조의 고추장 사랑은 18세기 중반 조선 입맛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고추장은 이 무렵 처음 조선 사람의 밥상에 등장했다. 고추장은 18세기 후반에 등장했다는 것이 통설이지만(이성우, [한국식품문화사], 교문사, 1984), 위에서 살핀 것처럼 [승정원일기]를 통해 그 등장 시기를 1749년 이전까지 소급할 수 있다. 물론 임진왜란 이전의 15세기 문헌인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등에 이미 고추장의 다른 이름인 ‘초장(椒醬)’이 나온다면서 고추장의 연원을 훨씬 앞 시기로 소급한 견해도 있지만(권대영 외, [고추이야기], 효일, 2011), 이 의견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문헌 비판 등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여럿 남아 있다. 무엇보다 그 ‘초장’이 과연 지금의 고추장과 유사한 것인지부터 따져보아야 한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고추의 직접적인 한자 표기라 할 수 있는 ‘고초(苦椒)’, ‘고초(古椒)’, ‘고초(枯椒)’ 역시 1749년 이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호초(胡椒), 번초(番椒), 남초(南椒), 당초(唐椒) 등 고추와 유사한 식물의 이름은 이전에도 다수 나오지만, ‘고추’는 단 한 번도 보이지 않는다. 또 이들 고추와 유사한 식물들은 술에 넣어 먹기도 하고, 차로 만들어 먹기도 했으며([승정원일기], 1700. 9. 6), 심지어 알약처럼 환(胡椒丸)으로 만들기도 했지만([승정원일기], 1760. 5. 18), 고추장과 비슷한 장으로 만들어 먹었다는 정보는 찾을 수 없다. 후대에 고추장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 ‘초장’이 15세기에도 고추장이었는지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없는 것이다. 15세기에 초장이 정말 있었다면, 그것은 현재의 고추장 같은 것이라기보다 간장에다 고추과 식물을 넣은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는지 유의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고추장은 18세기 중반만 해도 그리 널리 퍼지지 않았던 듯하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는 [혜빈궁일기]라는 책이 있다. 1760년대 중반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머문 궁궐 집의 공식 기록이다. 여기에는 김치와 메주 등 궁궐 내에서 필요한 음식을 준비한 내용이 보이는데, 고추나 고추장에 대한 것은 일절 보이지 않는다. 궁궐에서 고추장의 본격적인 등장을 보여주는 예는 1795년에야 나타난다. 이 해 혜경궁은 환갑을 맞아 아들 정조를 좇아 수원 화성으로 행차했는데, 이 행차의 과정을 기록한 의궤, 곧 [원행을묘정리의궤]에 고추장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비로소 고추장은 왕실의 정식 메뉴가 되었다.

고추장은 궁궐 밖에서도 서서히 퍼져나갔다. 전라도 고창의 선비로 서울에 와서 벼슬을 산 황윤석의 일기를 보면, 1767년 어느 날에 ‘초장 한 그릇’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또 1796년 연암 박지원은 안의 현감으로 있으면서 자신이 손수 담근 ‘초장 한 단지’를 아들에게 보냈다([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 박희병 옮김, 돌베개, 2005). 황윤석과 박지원의 기록에 보인 ‘초장’은 고추장으로 짐작되는데, 이들을 통해 고추장이 경향(京鄕) 각지로 퍼져나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연암이 고추장을 보낸 안의는 [규합총서]에서 명물 고추장의 산지로 꼽은 경상도 함양에 부속된 지역이다. 연암은 고추장 명산지에서 자신이 직접 담근 고추장을 아들에게 보냈던 것이다. 18세기 중엽 이후 조선은 고추장의 매운 맛과 감칠맛에 중독되어갔다.


[18세기의 맛] 출간 기념 강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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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의 맛'은 한국18세기학회의 기획으로서, 문학동네와 함께 합니다. 1454741443266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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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설 |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글소설을 중심으로 주로 조선시대의 주변부 문화를 탐구해왔다. 지은 책으로 기생의 삶과 문학을 다룬 [나는 기생이다―소수록 읽기], 그림과 소설의 관계를 연구한 [구운몽도―그림으로 읽는 구운몽] 및 [조선의 음담패설―기이재상담 읽기]와 [권력과 인간―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 왕실]이 있으며, [한중록](문학동네, 2010)을 번역하고 해설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한문과 한글의 위상과 성격에 대한 일고(一考)>, <조선후기 한글 · 출판 성행의 매체사적 의미>, <무정의 근대성과 정육(情育)> 외 다수 논문이 있다. 한국문화의 성격과 위상을 밝히는 연구를 필생의 과업이라 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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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8세기의 맛: 취향의 탄생과 혀끝의 인문학 2014.02.28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의 18세기를 다채롭고 참신한 시각으로 연구하는 한국18세기의 학회의 첫 프로젝트 결과물, <18세기의 맛>이 책으로 나왔다. 18세기의 '맛'을 중심으로 세계사의 흥미로운 단면을 맛깔나게 서술했다. 23명 인문학자의 시각으로 18세기의 동서양을 뒤흔든 맛과 그 맛에 얽힌 흥미로운 현상을 살펴보는 일에 동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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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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