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소년전홍(少年剪紅)>의 괴석과 백일홍 - 벌열가 후원의 조경을 담은 신윤복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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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47회 작성일 16-02-06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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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의 <소년전홍(少年剪紅)>



신윤복(申潤福, 1758~?)의 그림 중에 <소년전홍(少年剪紅)>이라는 작품이 있다. 장죽을 문 청년이 젊은 여인의 손목을 잡고 있고, 그 배경에 큰 괴석(怪石) 하나와 백일홍(百日紅) 세 그루가 서 있다. 그리고 우측 상단에 다음과 같은 화제(畵題: 그림에 써넣은 시를 비롯한 각종 글)가 적혀 있다.




빼곡한 잎엔 농염하게 푸른빛 쌓였는데             密葉濃堆綠

수북한 가지엔 잘게 붉은 꽃을 오려 붙였네.        繁枝碎剪紅



이 화제는 백일홍을 두고 쓴 것이다. 북송의 시인 위야(魏野)는 장미를 읊은 시에서 “자잘하게 붉은 깁 오려서 푸른 떨기에 끼워놓았으니, 풍류가 아마도 신선들의 궁궐에나 있을 듯하네(碎剪紅綃間綠叢, 風流疑在列仙宮)”라 하였다. 신윤복이 이 시를 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푸른 잎 속에 붉게 타오르는 장미가 신윤복의 화제에서 백일홍으로 바뀐 듯하다는 인상이 든다.

최완수 선생이 이 화제에서 이 그림의 제목을 <소년전홍>이라 한 듯하다. 그리고 “소년이 붉은 꽃을 꺾다”라 풀이하였다. 남녀의 풍정과 잘 맞아떨어진다. 강명관 선생은 한걸음 더 나아가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 나오다]에서 괴석을 보고 남성의 성기를 떠올렸고 붉은 꽃은 식물의 성기로 풀이하였다. 정민 선생은 이 그림을 보고 젊은 여인이 엉덩이를 뒤로 뺀 자태가 괴석과 무척 닮았다고 하면서 오히려 괴석이 여성의 상징이 아닌가 하였다. 오른편 낮은 담장 위의 흙무더기는 남성의 상징으로 괴석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말하였다. 멋지다. 남녀의 춘정도 야하고 꽃과 바위도 덩달아 에로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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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 <소년전홍(少年剪紅)>
제작연도 미상, 지본담채, 24.2 x 31.5 cm, 간송미술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여름을 가장 화려하게 장식하는 꽃 중의 하나가 백일홍이다. 나무가 아닌 초본의 백일홍과 구분하기 위하여 목백일홍(木百日紅)이라고도 하고, 이것이 변하여 배롱나무라 부른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이러한 말을 쓰지 않고 자미화(紫薇花)라 한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강진의 다산초당(茶山草堂)에 기거할 때 그곳에 피는 꽃을 두루 시로 노래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백일홍이었다.




책에서 간지럼나무라 한 것 자미화인데                        膚癢於經是紫薇

한 가지에 꽃이 피면 다른 가지에 꽃이 진다네.              一枝榮暢一枝衰

홀로 피어 세상에 드문 꽃이라서가 아니라                    不是孤芳絶世稀

그저 정원이 비었기에 채우려고 한 것일 뿐.                  直緣承乏編園籍



                                                                         - 정약용, <다산의 꽃(茶山花史)>, [茶山詩文集] 권5.



정약용은 이름을 바르게 하는 것이 학문의 시초라 여겼기에 백일홍이라 하지 않고 늘 자미화라 불러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간지럼을 많이 타는 나무라 하였다. 백일홍은 파양화(怕痒花) 혹은 파양수(怕癢樹)라고도 한다. [산림경제(山林經濟)]에 따르면 자미화는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는 꽃으로, 나뭇가지 사이를 손가락으로 긁으면 가지와 잎이 다 움직인다고 하였다. 혹 손목을 잡힌 여인의 부끄러움을 백일홍의 간지럼으로 은근히 그린 것인가? 정민 선생은 특히 아래쪽 백일홍의 배배 꼬인 모습에서 여인의 부끄러움을 연상하였다고 하니 그럴듯하다.

백일홍은 껍질이 매끄럽다. 사유신(謝維新)의 [고금합벽사류비요(古今合璧事類備要)]에 따르면 백일홍의 별칭이 후자탈(猴刺脫)이라 하였다. 나무 껍질이 매끈하여 원숭이도 미끄러진다는 뜻이다. 여인이 잡힌 손을 빼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소년의 유혹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 아닐까? 원숭이가 미끄러워 나무에서 떨어지듯 천하의 난봉꾼도 꽃을 꺾지 못한다는 뜻일까? 아니면 백일홍은 껍질이 없는 것처럼 보이니 옷을 벗은 나무라 할 수 있다. 혹 청년의 머릿속에 여인의 나신을 상상한 것일까?

정약용 시의 두 번째 구절 “한 가지에 꽃이 피면 다른 가지에 꽃이 진다네”도 주목할 만하다. 백일홍은 여름철 백 일 동안 꽃이 계속 피고 지고를 거듭한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그렇다면 청년은 이 꽃이 지고 나면 저 꽃이 피어나는 백일홍처럼 그 춘심이 끝이 없다는 뜻일까?

백일홍과 관련한 정보를 보노라면 이러한 생각이 든다. 물론 웃자고 한 말이다. 신윤복이 백일홍의 이러한 의미를 천착(穿鑿: 원인이나 내용을 따지고 파고들어 연구함)했을 리가 없다. 신윤복은 당대 부잣집 뒤뜰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뿐이리라. 이 글은 바로 그 부잣집 뒤뜰을 장식하는 괴석과 백일홍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중국에서 가져온 태호석



괴석은 조선시대에 꽃과 함께 정원을 꾸미는 데 빠지지 않는 요소였다. 강희안(姜希顔, 1418~1465)의 화훼와 분재에 대한 기록인 [양화소록(養花小錄)]에는 노송(老松), 만년송(萬年松), 오반죽(烏斑竹), 국화, 매화, 난혜(蘭蕙), 서향화(瑞香花), 연꽃, 석류꽃, 치자꽃, 사계화(四季花), 동백, 백일홍, 왜철쭉, 귤나무, 석창포(石菖蒲) 등 16종의 식물 외에 마지막에 괴석을 덧붙였다. 조선 중기의 문인 허균(許筠, 1569~1618)은 이정(李楨)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이 꿈꾸는 집을 그림으로 그려달라 하면서 “산을 등지고 물가에 임한 집을 그리게. 잡꽃과 긴 대나무 천여 그루를 심고 한가운데에는 남쪽으로 향한 마루를 틀 것이며, 그 앞마당을 넓게 하시게. 패랭이꽃과 새삼을 심고 괴석과 오래된 화분을 배열하시게”라 한 바 있다. 이것이 조선시대 정원의 풍경이요, 그 풍경의 한 부분이 바로 괴석이다.

괴석은 작은 것은 화분에 올려놓고 완상하였다. 조선 중기 최립(崔岦, 1539~1612)의 <은대십이영(銀臺二十詠)>을 보면, 승정원에 노송, 만년향(萬年香), 사계화, 오죽, 홍련(紅蓮), 백련(白蓮), 해류(海榴), 서향화, 동정귤(洞庭橘), 석창포 등과 함께 괴석 등도 화분에 올려놓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괴석 중에서 큰 것은 정원, 주로 연못 곁이나 연못 안에 만든 섬에 두었다. 17세기 후반 청의 화가 우지정(禹之鼎)이 그린 <서재도(西齋圖)>나, 이와 유사한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의<지상편도(池上篇圖)>를 보면 물가에 큰 괴석이 그려져 있는데<소년전홍>에 그려진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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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정(禹之鼎), <서재도(西齋圖)>
중국 청대, 상해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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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 <지상편도(池上篇圖)>
1748년, 지본담채, 20.3 x 237 cm, 개인 소장<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우지정의 그림에 보이는 괴석은 태호석 (太湖石)이다. 태호석은 원래 소주(蘇州)의 동정호(洞庭湖)에서 나는 것을 가리켰지만, 태호(太湖) 자체가 넓은 강이나 호수를 가리키므로 다른 지역에서 나는 기괴한 석회암 바위도 모두 태호석이라 불렀다. 중국 괴석을 대표하는 태호석은 주로 호수나 바다에서 나지만, 조선의 괴석은 개성 남쪽의 경천사(敬天寺) 인근에서 나는 침향석(沈香石)이 특히 유명하다. 그 밖에 산지의 이름을 딴 신계석(新溪石), 안산석(安山石) 등도 이름을 날렸는데, 이들은 모두 조그마하여 화분에 올려놓았다. [양화소록]에 따르면 침향석은 바위의 색이 푸르고 험준한 봉우리와 끊어진 낭떠러지 형상을 한 것이 많으며, 돌의 결이 저절로 구멍을 만들고 구멍 안에 가는 모래가 붙어 있어 이 때문에 물을 봉우리 꼭대기까지 빨아올릴 수 있으며, 소나무 형상을 한 이끼가 생기는 명품이라 하였다. 그러나 정로(鼎爐: 세 발 달린 솥 모양의 화로) 가운데 둔다고 한 것을 보면 침향석은 화분에 두는 작은 규모였다. <소년전홍>에 보이는 커다란 괴석이 구멍이 숭숭 나 있지만 크기로 보아 조선의 침향석은 아니었을 것이다.

침향석과 함께 조선시대에 사랑을 받은 괴석이 수포석(水泡石)인데 <소년전홍>의 괴석과 그 외양은 비슷하다. 수포석은 우리말로 속돌이라 하며 부석(浮石)이라고도 하는데 화산석의 일종인 용암을 가리킨다. 17세기의 문인 이회보(李回寶, 1594~1669)의 <소포석기(水泡石記)>에 따르면, 수포석은 주로 바닷가에 나는데 그 형상이 삐죽삐죽 산봉우리처럼 생기고 그 재질이 매우 가벼우며 구멍이 많이 나 있어 물이 잘 통한다고 한다. 19세기 전반에 주로 활동한 신위(申緯, 1769~1845)의 <추원의 노래(秋園雜詠)>를 보면 “집집마다 수포석이 산처럼 큰 화분에 높다란데, 쌍쌍이 짝을 지어 화초 난간에 마주하게 하였네. 예전 나도 또한 즐겨서 풍속을 따라 하였기에, 한가하게 비를 맞게 던져두어 이끼가 얼룩졌다네(家家泡石峙盆山, 作對成雙花草欄. 曩我亦曾隨俗好, 閒拋閑擲雨苔斑)”라 하였고, 또 그 주석에 “민간에서 수포석을 채취하여 인공을 가하여 꼭대기에는 높다란 세 봉우리를 만들고 중간에는 푸른 잣나무가 자라게 하여 물을 담은 화분에 담가 빽빽하게 배열해두면 자못 기괴하여 우아하게 감상할 만하다”라 하였다. 수포석은 그 외양이 제법 <소년전홍>의 괴석과 닮았지만, 주로 화분에 담아놓아 완상하였고, 또 그 색깔이 검다는 점에서 <소년전홍>의 괴석은 아니라 하겠다.

조선의 정원을 장식한 괴석은 그리 크지 않았던 듯하다. 18세기의 학자 정동유(鄭東愈, 1744~1808)는 1785년 함경도에 간 어떤 사람이 괴석을 하나 보내주었는데, 그의 <괴석기(怪石記)>에 따르면 깊은 산과 계곡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길이가 1척 7촌, 둘레는 3척이라 하였으므로 높이가 50cm 남짓하고 둘레는 1m 정도였다. 조선에서 나는 괴석은 주로 삼신산(三神山)의 모양으로 가공한 조그마한 것이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비하여 <소년전홍>의 괴석은 매우 커서 최소한 2m는 훨씬 넘어 보인다. 이 정도 크기가 되려면 18세기 이래 중국에서 수입한 태호석이라야 된다. 구멍이 숭숭 나 있는 기괴한 모양 자체가 중국에서 흔히 보이는 태호석과 흡사하기도 하다.

17세기 김창업(金昌業, 1658~1721) 이래 연행록(燕行錄)에 태호석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만, 조선 문인의 정원에 태호석이 놓인 것은 18세기 후반 무렵인 듯하다. 정조(正祖)는 세손 시절 태호석을 좋아하여 평소 열심히 구하던 끝에 1774년 이를 구하여 약관(藥罐), 향구(香甌), 문왕정(文王鼎), 선덕로(宣德爐) 등의 골동품과 함께 진열해두고 즐겼고 이러한 사연을 <태호석기(太湖石記)>에 담았다. 이 무렵부터 조선의 정원에 태호석이 등장한 듯하다. 비슷한 시기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경영한 진고개의 집 사의당(四宜堂)에도 중국에서 구입한 태호석이 여럿 있었다. 높이가 거의 4에서 5척이 되었다 하니 <소년전홍>의 괴석 정도의 크기는 된다. 19세기 이유원(李裕元, 1814~1888)도 자신의 집 사시향관(四時香舘)에 태호석이 셋 있어 <태호석가(太湖石歌)>를 지어 자랑하였는데 그만큼 태호석이 매우 희귀하였기 때문이다. 희귀하였기에 가짜 태호석을 만드는 일도 있었다.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따르면 박규수(朴珪壽)의 아우 박선수(朴瑄壽, 1821~1899)가 손재주가 있어 흙을 뭉쳐 태호석을 만들고 청감수(靑紺水)를 부어 채색을 하였는데, 고대의 청동기도 함께 위조하였다 하니, 그가 만든 태호석이 진짜와 다름없이 정교하였을 것이다. 이 정도로 태호석이 귀한 존재였으니 <소년전홍>의 배경이 되는 집은 벌열가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소년전홍>의 괴석에 붙은 이끼도 당시 정원의 실상을 반영한 것이다. 괴석에는 이끼나 창포, 암채(巖菜, 石菜)를 얹어 더욱 운치를 돋웠다. [양화소록]에 따르면 건초를 섞은 진흙과 말의 분뇨를 배합하여 바위에 바르고 축축하게 해주면 저절로 이끼가 생겨난다고 한다. <소년전홍>의 괴석에도 여러 곳에 이끼가 보인다. <소년전홍>의 괴석 아래 가는 풀도 예사롭게 볼 것이 아니다. 이 풀은 석창포(石菖蒲)일 가능성이 높다. 괴석과 석창포는 늘 함께 다니기 때문이다. [산림경제]에는 이국미(李國美)의 글을 인용하여 사발이나 돌그릇에 괴석을 앉히고 바위 봉우리 사이에 석창포를 심으면 운치가 있다고 하고, 또 연못을 파고 괴석을 쌓아 석가산(石假山)을 만든 다음 아래쪽 바위에는 석창포를 심고 위에는 소나무나 대나무, 매화, 난초 등을 심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앞서 본 우지정의 그림을 통해서도<소년전홍>의 괴석 아래 있는 풀이 석창포임을 짐작할 수 있다. 우지정의 그림에는 괴석 뒤쪽의 화분에 자라는 부추처럼 생긴 풀이 보이고, 같은 풀이 괴석 아래에도 보인다. 화분에 자라는 것은 석창포가 분명하므로 괴석 아래의 풀 역시 석창포일 것이고,<소년전홍>의 괴석과 풀이 우지정의 <서재도>의 그것과 흡사하므로<소년전홍>의 괴석 아래 풀은 석창포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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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창포. 개기(改琦), [화훼책(花卉冊)]
1827년, 요령성 박물관 소장




백일 붉은 꽃, 백일홍



<소년전홍>에 붉게 타오르는 꽃이 만개한 백일홍 세 그루가 그려져 있다. 백일홍에 대해서 [양화소록]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이 꽃은 중국에는 관공서 안에 많이 심었으므로 예전 문인들이 모두 그에 대한 작품을 지었다. 우리나라의 관공서에서 이 꽃을 본 적이 없고 그저 작약 몇 그루만 있을 뿐이지만 오직 영남의 근해 지역의 군과 촌락에는 이 꽃을 많이 심는다. 다만 바람과 기후가 중국보다 꽤 늦어서 5~6월에야 비로소 피고 7~8월이 되어야 멈춘다. 비단같이 아름답고 노을처럼 곱게 뜰을 훤히 비추고 사람의 눈을 현란하게 한다. 풍격이 가장 유려하므로 도성 안 고관대작의 저택에도 많이들 정원에 심는데 높이가 한 길 남짓 되는 것도 있다. 근래 경상도 북쪽 지역이 바람과 기후가 매우 사나워서 거의 다 얼어 죽었는데, 다행히 호사가들에 힘입어 겨우 죽음을 면하게 된 것이 열에 한둘이니 매우 애석하다.

강희안은 백일홍이 음력 5~6월에 피어 7~8월까지 간다고 하고 그 꽃이 비단이나 노을처럼 곱다고 하였으며, 고관대작의 저택에 주로 심는다고 하였다. 지금은 백일홍이 서울에도 흔하지만 예전에는 영남이나 호남 등 남쪽 지방에서 주로 자랐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옛글에 나오는 백일홍은 대부분 영호남을 배경으로 한 것이 많다. 영호남이 아닌 서울 지역에서는 날씨가 차서 백일홍을 키우는 것이 쉽지 않았고 특히 겨울을 나는 것이 문제였다. 갑작스러운 추위로 서울 인근의 백일홍이 모두 죽게 된 일을 강희안이 증언하고 있기도 하다.

신윤복 당시 서울에서 백일홍은 매우 귀한 존재였다. 이옥(李鈺, 1760~1815)은 [백운필(白雲筆)](<담화(談花)>)에서 백일홍은 치자, 동백, 영산홍, 종려나무, 왜철쭉, 유자 등과 함께 남쪽 지방 사람들이 직접 등짐을 지고 오거나 배로 운송하여 벌열가에 대어주는 것이므로 시장에서 구할 수 없다고 하였다. 태호석이 귀하다고 하였거니와 그에 못지않게 귀한 것이 바로 이 백일홍이었다. 그러니 <소년전홍>의 배경이 되는 집이 어느 정도 부유하였는지, 젊은 여인의 손을 잡은 청년의 신분이 어떠한지 절로 짐작이 간다.

그런데 정약용은 백일홍을 자미화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우리나라의 백일홍과 중국의 자미화가 동일한 꽃인지 의심이 든다.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의 집 비해당(匪懈堂)의 정원에는 48종의 아름다운 꽃나무가 있었다. 안평대군 본인은 물론 김수온(金守溫, 1410~1481), 신숙주(申叔舟, 1417~1475), 성삼문(成三問, 1418~1456) 등 당시의 이름난 문인들이 두루 시를 지었는데 이를 <비해당사십팔영(匪懈堂四十八詠)>이라 한다. 성종 때에도 왕명으로 성현(成俔), 채수(蔡壽), 유호인(兪好仁), 홍귀달(洪貴達), 김일손(金馹孫) 등이 시를 지어 바쳤다. 그런데 모든 <비해당사십필영>에는 흐드러지게 핀 자미화라는 뜻의 <난만자미(爛熳紫薇)>와 <백일홍(百日紅)>이 독립된 작품으로 각기 존재한다. 아무 의심 없이 사람들이 다투어 시를 지었지만, 학자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은 <사십팔영발(四十八詠跋)>을 지어 자미화와 백일홍, 산다(山茶)와 동백이 같은 꽃을 가리키는데 따로 시를 지은 것이 잘못이라고 하였다.

김일손은 자미화와 백일홍을 같은 꽃으로 보았고 대부분의 문헌에도 그렇게 되어 있지만 몇몇 글에서 그렇지 않다. 꽃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던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은 <화산기(花山記)>에서 안동에 있던 친척 김흥세(金興世)의 집을 소개하면서 담장 아래 석류꽃과 자미화가 있고 정원에는 백일홍이 있었는데 나중에 와서 보니 자미화와 백일홍만 남아 있다고 하였고, 조경(趙絅, 1586~1669)도 <나그네로 못가에 머물고 있는데 백일홍과 자미화가 있는데 봄부터 가을까지 연이어 끊임없이 피기에 이 시를 짓는다(客居池上, 有百日紅紫薇花, 自春至秋迭開不已, 有是詠)>에서 “백일홍이 자미화를 마주하여, 봄여름 할 것 없고 가을에도 꽃이 피네(百日紅對紫薇花, 無春無夏復秋葩)”라 하였다. 이를 보면 자미화와 백일홍을 다른 꽃으로 인식한 것은 분명하다.

자미화와 백일홍은 같은 꽃인지, 다른 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품종과 중국에서 들어온 품종이 달랐을 가능성도 있다. 중국의 자미화는 여러 색깔의 꽃이 피는데 붉은 꽃이 피는 백일홍과 다른 품종이 있었다고도 보아야 할 듯하다. 청대의 화가 운수평(惲壽平)의 <화훼도책(花卉圖冊)>의 자미화는 홍색, 자색, 황색 세 종이나 된다. 중국의 그림에 그려진 자미화는 대개 보랏빛이 강하지만 우리나라 백일홍은 늘 선홍빛으로 붉고, <소년전홍>에서도 이 점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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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미화. 운수평(惲壽平), <화훼도책(花卉圖冊)>
중국 청대, 타이베이(臺北) 고궁박물원 소장


<소년전홍>에 그려져 있는 백일홍은 요즘 우리가 보는 것과 다름없다. <소년전홍>의 백일홍과 괴석은 당시 벌열가 후원의 조경을 그대로 그린 것이다. 벌열가가 아니면 태호석과 백일홍을 소유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소년전홍>에서 태호석과 백일홍은 성적인 표상이 아니라 부귀의 표상이라 할 만하다.

신윤복은 백일홍을 부귀의 상징으로 그렸다. 그러나 화원이 아닌 선비는 백일홍의 의미를 다르게 본다. 조선시대 문인들에게 백일홍은 금방 피었다 지는 보통의 꽃과 달리 여름 내내 피기 때문에 사랑받았다. 꽃을 사랑하여 꽃을 두고 뛰어난 수필을 많이 남긴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은 자신의 정원 순원(淳園)에서 재배한 꽃나무에 대한 기록 <순원화훼잡설(淳園花卉雜說)>에서 백일홍을 사랑하는 뜻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절도(節)라 하는 것은 이어져서 끝이 없는 도이다. 사람의 음성이 절도가 없이 급한 소리로 크게 외치려고만 한다면 반드시 목이 멜 것이요, 걸음걸이가 절도가 없이 기운을 다하여 빨리 달리기만 하면 반드시 땀을 흘리고 헐떡거리면서 자빠질 것이다. 연못에 절도가 없으면 반드시 넘치게 되고, 창고의 재산이 절도가 없으면 반드시 말라버릴 것이다. 절도가 없는데도 끝이 없는 것은 천하에 있을 수 없는 이치이다. 꽃 중에서 꽃잎이 큰 것은 쉽게 지니 이는 꽃잎이 절도가 없기 때문인데, 연꽃과 여뀌, 모란, 작약 등이 이러하다. 또 꽃이 필 때 모두 한꺼번에 피는 것은 필 때 절도가 없는 것이므로, 이 때문에 그 수명이 열흘이나 한 달을 가지 못한다.



오직 자미화(백일홍)는 꽃잎이 매우 작아서 그 꽃잎은 열 배로 하더라도 연꽃이나 여뀌, 모란, 작약의 꽃잎 하나를 당해낼 수 없고 이 때문에 꽃잎이 생기는 것이 매우 많다. 꽃이 필 때에도 힘을 쓰는 것을 똑같게 한 적이 없는 것이다. 오늘 하나의 꽃이 피고 내일 하나의 꽃이 피며, 먼저 핀 꽃이 지려 할 때 그 뒤의 꽃이 이어서 피어난다. 많고 많은 꽃잎을 가지고 하루하루의 공을 나누었으니 어찌 쉽게 다함이 있겠는가? 아마도 절도의 의미를 터득함이 있는 듯하다. 이로써 백 일 동안이나 붉은빛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요, 이 때문에 세상에서 백일홍이라 부르는 것이다. 내가 예전에 꽃이 처음 피는 것을 기록해두고 날마다 이를 실험하였더니 백 일이 넘어서도 끊어지지 않아 다시 열흘 남짓 더 지속되었다.


백일홍은 꽃 자체가 오래 피는 것이 아니라 한 송이 한 송이가 시간적 격차를 두고 백 일 동안 붉게 핀다. 이를 두고 신경준은 세상 만물이 무궁할 수 있는 것은 절(節)이 있기 때문이라 하여 격물(格物)의 결론을 내었다. 이 글의 핵심어는 바로 ‘절’이다. 절은 멈출 때와 나아갈 때를 아는 것이다. 꽃이 피는 것도 절도가 있어야 하니, 절도를 알아 하나씩 천천히 피면 오래간다. 백일홍이 백 일 이상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은 절도를 아는 꽃이기 때문이다. 신경준은 백일홍으로 사람의 일을 넌지시 말하였다. 지나친 욕심보다 하나씩 일을 해나갈 때 마침내 더욱 큰 진전을 볼 수 있다는 뜻을 말한 것이다. 똑같은 백일홍을 두고도 사람의 생각이 어찌 이리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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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태학사와 손을 잡고<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를 연재한다. 그림에 숨은 비밀과 사연을 프리즘으로 삼아 한국학의 출렁이는 바다로 여행을 떠나려는 것이다. 문학, 미술, 음악, 철학, 역사, 문화가 망라되는 항해에 깊고 진한 교감이 깃든 풍성한 바다가 펼쳐지길 해신(海神)에게 기도한다. 연재는 매주 1회 돛을 달고 항구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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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도서 출간
네이버캐스트에 연재되었던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시리즈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우리 시대 인문학자 32인이 옛 그림을 호명해 되살려낸 한국학 읽기의 색다른 즐거움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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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묵 |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선비의 운치 있는 삶을 사랑하여 우리 옛 시와 글을 읽고 그 아름다움을 분석하여 세상에 알리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옛사람들이 산수를 찾는 즐거움을 적은 글이나 그들의 지혜가 담긴 글을 번역하여 알리는 일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한시 마중―생활의 시학, 계절의 미학][부부][우리 한시를 읽다][조선의 문화공간 1~4]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글로 세상을 호령하다], [양화소록―선비, 꽃과 나무를 벗하다][사의당지 - 우리 집을 말한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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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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