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순종황제 즉위식 광경 -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의 즉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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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99회 작성일 16-02-06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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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보았던 책이나 영화가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라는 영화가 그중 하나이다.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 宣統帝, 1906~1967)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작품이다. 세 살 꼬마 푸이가 황제에 등극할 때 바닥에 엎드려 ‘만세’를 외치던 이들의 함성이며, 넓고 화려한 자금성을 뛰어다니던 푸이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20여 년을 훌쩍 넘긴 이 영화가 뇌리에 스칠 때마다 막연하게 피어나는 의구심. 우리나라의 마지막 황제는 누구였으며, 그 즉위식은 어떠했을까?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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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복을 착용한 순종황제
출처: [대한제국 - 잊혀진 100년 전의 황제국] (국립고궁박물관, 2010), 262쪽


우리나라의 마지막 황제는 순종(純宗, 1874~1926)이다. 그는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귀하디귀한 황실의 자손이었다. 태어난 바로 다음 해에 왕위 계승자를 의미하는 세자가 되었고, 아버지 고종이 대한제국(大韓帝國)을 탄생시키며 황제로 등극할 때 황태자로 거듭났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황제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세자 → 황태자 → 황제. 얼핏 보기엔 그저 비단길, 꽃길만 밟고 살았던 인물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표면에 치장된 거창한 신분 뒤에 드리워진 그늘은 깊고 어두웠다. 순종은 평생 가슴 아프고 힘든 일을 너무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근대 전환기에 펼쳐진 구중궁궐의 갖가지 변혁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한순간도 마음 편한 날 없었다.

가장 큰 상처는 일본 자객에게 어머니 명성황후를 허무하게 잃어버린 사건이다. 사랑과 자혜로움이 가득 담긴 어머니의 눈빛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신마저 불태워져 마지막 모습을 볼 수도 없었다. 그 슬픔을 씻기에는 3년이란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심상삼년(心喪三年)을 세 차례나 거듭하며 9년이란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측은한 그의 곁을 묵묵히 함께하던 황태자비마저 불현듯 세상을 떠나버린다. 러일전쟁 발발로 인해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진 황태자비의 장례식을 지켜보며, 그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픔과 찢어지는 고통을 한 번 더 감내해야 했다. 자식도 남기지 않은 채 황태자비는 조용히 그의 곁을 떠났다. 그것은 굴곡 많던 구한말, 궁중에서 태어난 순종의 운명이었다.



거짓 황위 계승식을 꾸미다



순종의 황제 즉위는 그의 고단한 인생 여정에 놓인 또 하나의 큰 짐이었다. 왜 황제 즉위가 기쁜 일이 아니고 짐이 되었다는 말인가? 순종의 황위 계승이 영광스럽지 못했던 이유는 고종황제에게 아름답게 물려받은 황제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들 순종이 아버지 고종의 황권을 탐했다는 의미인가? 아니다. 제3자가 끼여 있다. 그 존재는 바로 일본 제국주의이다.

갑작스러운 고종황제의 퇴진은 결코 고종 스스로 택한 길이 아니었다. 헤이그 밀사 사건(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의 특사를 출석하게 하여 일제의 한반도 침략 실상을 세계에 알리려 한 일)이 일제에게 알려지면서 고종황제는 벼랑 끝에 내몰린다. 일제가 고종황제의 퇴진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고종황제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자신이 밀사를 파견하지 않았다며 일제에게 강하게 항변하였다. 거듭되는 일제의 위협과 압박을 끝까지 버티고 또 버텼다.

결국 일제는 고종황제를 밀어낼 정치적 음모를 단행하기로 결정한다. 고종황제를 덕수궁 늙은이로 가둬놓을 생각이었다. 일제는 고종황제 대리인과 순종황제 대리인을 등장시켜 ‘거짓 황위 계승식’을 꾸몄다. 마치 아무 문제 없이 고종황제가 순종황제에게 황권을 넘겨준 것처럼 연극을 한 것이다. 1907년 7월 20일 덕수궁 중화전(中和殿)에서 행한 이 엉터리 의식은 이러하다.

一 고종황제와 순종황제 모두 불참

一 고종황제 대리인과 순종황제 대리인이 등장

一 고종황제 대리인이 양위 조칙을 읽음

一 양위 조칙을 순종황제 대리인이 받음

일제는 자신들이 만든 시나리오를 현실화하였다. 그리고 그 현실을 사실로 인식시키기 위해 자신들이 꾸민 ‘엉터리 황위 계승식’을 ‘양위식’으로 둔갑시켜 일본의 주요 신문에 대서특필하였다. 고종황제가 자발적인 의지로 순종황제에게 평화롭게 정권을 넘겨주었다고 선전하였고, 그것을 ‘진실’로 못 박으려 했다.

대한제국의 입장에서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고종황제는 황위를 넘겨줄 의향이 전혀 없었다. 일제가 황위를 강탈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을 어떻게 평화로운 정권 이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일제에 의해 졸속으로 행해진 엉터리 행사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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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황위 계승식을 기념한 사진엽서. 왼쪽에 순종황제와 태극기를, 오른쪽에 고종황제와 일장기를 배치하여 고종황제가 무력해졌음과 동시에 순조로운 권력 이양인 것처럼 묘사하였다.
제작연도 미상, 사진, 부산시립박물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일제는 정치적 만행이었던 ‘엉터리 황위 계승식’을 기념한 사진엽서도 발행하였다. 사진엽서의 왼쪽 동그라미에는 순종황제, 오른쪽 동그라미에는 고종황제를 등장시켰다. 그리고 그 뒤로는 국기를 배치하였다. 순종황제 쪽에는 대한제국의 국기인 태극기가, 고종황제 쪽에는 일본의 국기인 일장기가 선명하다. 일제는 고종황제 뒤에 일장기를 배치하여 이미 고종황제가 무력(無力)해졌음을 교묘하게 묘사하였다. 대한제국을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시키는 과정이 착실하게 이행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시각적 폭로’였다.

게다가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벚꽃도 흩날리고 있다. 붉은색이 엽서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다. 태양의 빛깔. 일본(日本)이라는 나라 이름에 이미 태양, 해가 들어 있지 않은가. 붉은색은 일본 그 자체다. 따사로운 햇빛을 온몸으로 느끼며 흩날리는 벚꽃 향기를 맡는 가운데 펄럭이는 일장기를 보는 환희. 일제가 고종황제를 황위에서 밀쳐내는 자작극을 단행한 후 맛본 그들만의 희열을 사진엽서에 고스란히 담아 놓은 것이다. 이는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제로 찬탈했던 실상이자 그 증거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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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8월 4일자로 발간된 이탈리아 잡지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La Tribuna Illustrata)]의 표지에 실린 일러스트. 순종황제의 대관식 장면을 묘사한 일러스트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다.
출처: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태학사, 2005), 201쪽


한편 대한제국에 새로운 황제가 등장했다는 이야기는 이탈리아 로마까지 전해졌다. 1907년 8월 4일자로 발간된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La Tribuna Illustrata)]지에 한 장의 일러스트가 게재된 것이다. 그 하단에는 ‘L'INCORONAZIONE DI I-TSACK, NUOVO IMPERATORE DI COREA’라고 쓰여 있다. ‘코리아의 신(新)황제, 이척의 대관식’이란 뜻이다. 이척(李拓)은 순종황제의 이름이다. 순종황제가 새로운 황제로 등극했음을 알리는 보도이다. 그 예식의 진위 여부는 외신(外信)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또 하나의 뉴스거리에 불과했다. 외국인들의 눈에는 그저 새로운 황제의 대관식(coronazione, coronation)으로 비춰졌을 따름이다.

그런데 이 일러스트는 왠지 모르게 부자연스럽다. 황위에 앉아 있는 인물, 그가 착용한 복색, 생뚱맞게 참석한 궁중 무희들……. 혹시 일제가 조작한 홍보용 일러스트가 아닐까? 일제는 자신들이 성공리에 끝낸 이 사건을 전 세계에 공표하고 싶었을 게다. 공표는 고종황제의 복귀를 철저하게 봉쇄하기에도 매우 유용한 방법이니까. 그리하여 광고용으로 거짓 황위 계승식 장면을 재구성한 일러스트를 제작한 후 외신들에게 배포하였고, 외신들은 그것을 자국으로 발송해 특보로 보도하기에 이른다. 일제가 배포한 홍보용 일러스트 중 하나가 바로 이탈리아 로마로 전해져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에 게재된 것이 아닐까?



신식이 투입된 새로운 즉위식



순종황제 즉위식은 1907년 8월 27일 덕수궁 돈덕전(惇德殿)에서 거행되었다. 일제의 자작극이었던 가짜 황위 계승식으로부터 40여 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순종황제 즉위식장에는 국내외 관원, 각국 영사(領事) 등 3백여 명이 참석하였다. 참석자들에게는 서구식 복장(대례복(大禮服) 또는 프록 코트) 착용과 단발을 권하였다. 값비싼 서구식 대례복을 장만하지 못해 사직을 청하는 관리가 속출하는 사태가 발생할 정도로 강압적이었다. 참석이 확정된 이들에게는 초청장과 안내 책자인 [대황제폐하 즉위예식의주(大皇帝陛下卽位禮式儀註)]를 배포했다. 책자에는 즉위식 순서, 자리 배치, 즉위식장 안내도가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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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의 황제 즉위식장(돈덕전) 안내도, [대황제폐하 즉위예식의주]
출처: [大皇帝陛下卽位禮式儀註]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도서번호 911.0093 D132


즉위식장 안내도를 상세히 살펴보면 돈덕전은 어실(御室), 휴게실 두 곳, 식당(食堂), 어탑(御榻)이라는 공간으로 구획되어 있다. 그리고 건물 주위에 악실(樂室)과 분수기(噴水器)가 있다. 어실은 순종황제를 위한 공간이고, 휴게실은 즉위식 참석자들을 배려한 것이며, 어탑이라는 곳이 즉위식장인 것으로 보인다. 악실은 음악을 연주할 악인(樂人)들을 위한 공간일 게다.

즉위식에 참관하기 위해 돈덕전에 도착한 여러 참석자는 휴게실에서 대기하다가 즉위식장으로 나아가 정해진 위치에 섰다. 어실에서 복색을 점검한 순종황제가 전통적인 궁중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면복(冕服: 조선 시대 임금이 제례(祭禮) 때 착용한 관복)을 착용한 채 즉위식장으로 입장하였다. 참석자들이 허리 굽혀 인사했다. 이완용이 축하문 낭독을 마치자 참석자들은 다시 허리 굽혀 인사했다. 순종황제는 잠시 퇴장하였다. 육군 대장복으로 갈아입은 순종황제가 재등장하였다. 일본에서 파견된 장곡천(長谷川) 대장(大將)과 영사(領事) 대표 뱅카르(方葛, Léon Vincart, 벨기에)가 축하글을 낭독하였다. 이어 군악대(軍樂隊)의 반주에 맞춰 애국가(愛國歌)가 울려 퍼졌다. 참석자들은 ‘순종황제 만세’를 세 번 외친 후 순종황제에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순종황제가 퇴장했다. 참석자들도 퇴장했다.

一 참석자 기립

一 면복을 착용한 황제 입장

一 황제에게 허리 굽혀 인사

一 이완용의 축하문 낭독

一 황제에게 허리 굽혀 인사

一 황제 퇴장

一 육군 대장복을 착용한 황제 입장

一 장곡천 대장과 뱅카르의 축하글 낭독

一 군악대의 애국가 연주

一 만세 삼창

一 황제에게 허리 굽혀 인사

一 황제 퇴장

一 참석자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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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을 입은 순종황제


이는 일찍이 궁중 의례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이다. 전통복식을 착용한 채 무릎 꿇고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며 예를 표하던 방식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인 궁중 의식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현대적인 예식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전체적인 구성이 요즘 행사장 의식 순서와 유사하다.

특히 외형상 주목되는 사항은 황제가 면복에서 육군 대장복으로 갈아입었다는 점, 군악대에 의해 애국가가 연주되었다는 점, 참석자들이 황제에게 바닥에 엎드려 절하지 않고 요즘처럼 허리만 굽혀 인사했다는 점이다. 육군 대장복은 황제가 착용했던 군복(軍服)의 일종으로 서구식 복장이다. 군악대는 1901년에 궁중에 신설된 서양식 악대였다. 애국가는 군악대 음악 교사로 부임한 프란츠 폰 에케르트(Franz von Eckert, 1852~1916)가 서양음악 어법으로 작곡한 악곡이었다. 허리만 굽히는 인사법은 서구식 예법이다. 이렇게 즉위식에 등장하는 서구식 복장, 서양식 악대와 음악, 서구식 인사법은 ‘신식(新式)’으로 압축된다. 전통적인 궁중 의례가 대한제국 시기에도 지속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새로운 요소를 즉위식에 대거 투입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왜 고종황제 즉위 의례처럼 전통적인 방식으로 진행하지 않은 걸까? 궁중예식의 패러다임이 전환되었다고 단언할 정도로 전체 틀이 180도로 바뀐 까닭은 무엇인가? 하필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당한 후 순종이 황제로 등극하는 껄끄러운 시점에 왜 이런 변화가 생긴 것일까?

모든 의문을 한꺼번에 해결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 행사의 주인공에게 초점을 맞춰보면 핵심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는 직감이 발동한다. 주인공은 바로 순종황제다. 즉위식에서 드러나는 순종황제의 특징은 면복을 착용했다가 군복으로 갈아입은 점이다. 왜 전통식 복장에서 서구식 옷으로 바꿔 입었을까? 고종이 황제로 등극할 때에도 등장하지 않았던 서양식 군복이 왜 순종황제 즉위식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 당시 순종황제의 뒤에서 즉위 행사 준비를 시시콜콜 조정한 이는 일제였다. 그렇다면 ‘서구식 군복 등장’을 주도한 일제는 어떤 생각을 품고 이를 단행했을까? 과연 일제는 즉위식에서 복장 변화를 통해 순종황제를 어떤 존재로 재탄생시키려 했던 것일까?



거대한 덫에 걸리다



가짜 황위 계승식을 기념하여 발행한 사진엽서를 다시 살펴보자. 그중에서 고종황제를 상세히 보자. 그의 뒤에 일장기가 휘날리고 있다. 아, 그렇구나! 일제는 이미 고종황제를 그들의 권역에 들어온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종황제의 뒤를 이은 순종황제의 위상은 재고의 여지도 없는 것이다. 순종황제를 독립국으로서 위상을 지닌 대한제국의 두 번째 황제가 아니라,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온 예비 식민국의 대표 정도로 설정한 것이다. 일제가 생각하는 순종황제는 대한제국의 황제가 아니었다. 일제의 권역에 발을 들여놓은 허수아비 황제였다. 이러한 일제의 계략을 ‘황제 즉위식’이라는 공식적인 절차에서 눈에 띄게 드러냈으니, 즉위식에서 두드러지게 작동한 ‘신식’은 바로 일제의 야욕을 보조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던 측면이 있다.

순종황제 즉위식에서 사용된 ‘신식’이라는 코드는 구식, 즉 전통과 대비되는 측면이 있다. 신식의 부각은 상대적으로 전통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여, 전통과의 끈을 약화시키는 하나의 방편으로 전락할 수 있다. 순종황제 즉위식에서 ‘전통’은 대한제국의 다른 얼굴이었으며, ‘신식’은 일본 제국주의의 다른 얼굴이었다. ‘신식’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는 근대화와 연계되어 대한제국에 순풍을 달아줬던 아이템이었지만, 순종황제 즉위식에서는 역풍으로 기능하였다. 순종황제가 전통복식인 면복을 벗고 서구식 복식인 군복을 착용한 채 재등장한 행위는 대한제국과 결별한 채 일제의 휘하로 들어가는 계산된 장치였다. ‘신식’은 일본 제국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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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병합 기념사진. 순종황제(왼쪽)와 메이지(明治) 왕(오른쪽)
제작연도 미상, 사진, 부산시립박물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작품 보러가기


일제는 순종의 황제 즉위를 ‘한국의 유신(韓國の維新)’이라고 규정지었다. 유신이란 용어는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에 등장하는 ‘유신’과 긴밀성을 지닌다. 이전 시기와 차별되는 새로운 정치, 그것이 유신이다. 일제가 순종황제 즉위를 유신이라고 명명한 까닭은 고종황제와 순종황제의 노선이 다름을 알리기 위한 전략이었다. 고종황제와의 연결고리를 철저히 차단시켜 대한제국의 생명력을 끊으려는 작전 실행의 신호탄이었다. 그렇다면 일제가 순종황제 즉위와 한국의 유신을 통해 구상했던 새로운 국가는 어떤 형태였을까? 그것은 바로 일제의 식민국가 건설이었다. 순종황제 즉위식은 일제의 식민국으로 전락하는 통로와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결코 영예로운 황제 즉위식이 아니었다. 면복을 벗은 후 군복을 착용한 채 즉위식장에 들어서는 순간, 순종황제의 온몸을 옥죄고 짓누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순종황제의 마음은 불안하고 침울해졌으며 암담했다. 강제 퇴위된 아버지를 대신한 황제 자리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불쾌한 수렁처럼 느껴졌다.

순종황제 즉위식은 원구단(圜丘壇: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곳)에서 철저하게 전통방식으로 황제 등극의를 행했던 고종황제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동아시아에서는 황제가 천자(天子)이기 때문에 하늘을 상징하는 공간인 원구단에 나아가 제사를 올려야만 정식 황제로 공인받는다고 여겼다. 하늘 제사는 황제의 권위와 입지를 굳히는 수단으로 사용될 정도로 핵심적인 행사였다. 공식적인 황제 인증이 원구단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통념이 유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황제는 끝내 원구단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제대로 황제 공증을 받지 못한 채 즉위하였다. 순종은 그림자 같은 허수아비 황제였을 뿐이다.



마지막 황제의 뒤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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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의 장례행렬(1926). 순종은 1926년 4월 25일, 53세의 나이로 비운의 생을 마감한다. 그의 장례식을 계기로 6ㆍ10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순종황제는 불과 4년 만에 허수아비 황제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하면서 순종은 일본 황실에 종속되었고 이왕(李王)으로 격하되었기 때문이다. 순종은 창덕궁에 기거하며 옥돌(玉突: 당구)을 취미 삼아 힘든 순간순간을 털어버리려 했다. 때로는 진열된 세계 각국의 시계를 바라보며 이 시간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시름에 젖기도 했다. 그가 아끼던 옥돌과 시계만이 변치 않는 벗으로 그의 곁에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 고종이 돌아가셨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믿을 수 없었다. 순종이 아버지 고종을 잃은 날은 1919년 1월 21일이었다. 한창 추운 겨울이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얼어붙었다. 가슴 한가운데에는 구멍이 뚫렸다. 그 구멍으로 경성의 쌩쌩한 칼바람만 드나들었다. 고종의 서거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 퍼졌다. 독살설이었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민중들의 분노가 창덕궁 담을 넘어 순종에게까지 도달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채 안 된 1926년 4월 25일, 순종은 53세로 비운의 생을 마감한다.

일본에는 현재까지 황제가 존재한다. 일본에는 마지막 황제가 없다. 일본의 황실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나 중국과 우리나라에는 마지막 황제가 있다. 우리나라의 황실은 일제에 의해 단절되었다. 우리나라의 마지막 황제는 순종황제이며, 그의 즉위식은 철저하게 일제의 계산과 주도로 이행되었다. 순종황제 즉위식은 일제의 식민지로 가속화되는 출발 지점에 놓여 있었다. 한국의 궁궐이라는 무대에 올린 일제의 작품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작품의 클라이맥스에서 연주된 음악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國歌)가 아닌가. 1902년 고종황제의 명을 받아 프란츠 폰 에케르트가 작곡한 바로 그 노래, 분명 <대한제국 애국가>였다.

그 가사는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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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과 마지막 부분의 노랫말이 반복되고 있다. 그 뜻은 이러하다.




“하늘에 계신 상제(上帝)여, 우리 대한제국의 황제를 도와주시옵소서!”


대한제국의 황제를 도와달라는 간절함이 깃든 애국가가 아이러니하게도 일제의 식민국으로 전락하는 길목이었던 순종황제 즉위식에서 유유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애국가를 연주하도록 계획적으로 방관한 일제의 속마음은 이러했다. “봐라! 하늘은 결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를 돕지 않는다. 순순히 일제의 식민국이 되어라. 하늘은 대한제국을 버렸다!”

<대한제국 애국가>는 한일병합 이후 금지곡이 되었다. 그러나 독립군들에 의해 약간 개사되어 일제강점기에도 지속적으로 불렸다. 독립군들은 <대한제국 애국가>에 독립의 염원을 담아 목이 터지도록 부르고 또 불렀다. 그리고 1945년, 드디어 광복이 찾아왔다. 과연 하늘은 대한제국을 도왔는가, 돕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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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태학사와 손을 잡고<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를 연재한다. 그림에 숨은 비밀과 사연을 프리즘으로 삼아 한국학의 출렁이는 바다로 여행을 떠나려는 것이다. 문학, 미술, 음악, 철학, 역사, 문화가 망라되는 항해에 깊고 진한 교감이 깃든 풍성한 바다가 펼쳐지길 해신(海神)에게 기도한다. 연재는 매주 1회 돛을 달고 항구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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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도서 출간
네이버캐스트에 연재되었던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시리즈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우리 시대 인문학자 32인이 옛 그림을 호명해 되살려낸 한국학 읽기의 색다른 즐거움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이정희 | 서울대학교 박물관 객원연구원
양악 작곡을 공부하다가 전통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어, 석/박사 과정에서 한국 음악사를 전공하였다. 조선 후기로부터 한국 근대 전환기를 거치며 궁중의 행사와 음악 문화가 변모되는 과정을 살피는 데 집중하고 있다. [조선 후기 종묘악현 연구], [고종대 원구제례악 재고], [숭의묘 건립과 숭의묘 제례악], [제1차 수신사 김기수가 경험한 근대 일본의 외교 의례와 연회], [대한제국의 근대식 연회-세계인과 함께 파티를 열다], [대한제국기 순종황제 즉위 행사와 음악] 등의 글을 썼다.


발행2012.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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