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역관(譯官) 이민식(李敏埴)이 소장한 그림들 - 조선의 부르주아, 예술의 전면에 등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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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12회 작성일 16-02-06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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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4년 여름, 와룡암(臥龍菴)



1744년 여름 김광국(金光國, 1727~1797)은 서화수장(書畵收藏: 글씨와 그림을 수집함)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김광수(金光遂, 1696~1770)의 집 와룡암(臥龍菴)을 방문한다. 향을 피우고 차를 달여 마시며 서화(書畵)에 대해 논하던 중 갑자기 먹구름이 끼고 소나기가 퍼부었다. 그 순간 화가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이 낭창거리며 집으로 들어왔다. 예정에 없던 일이다. 비에 흠뻑 젖은 그의 모습이 두 사람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비가 그치자 순간 정원 가득 피어오르는 경관이 완연한 미불(米芾, 1051~1107, 중국 북송의 화가이자 서예가)의 수묵화 한 폭이다. 한동안 무릎을 안고 그 광경을 주시하던 심사정은 갑자기 크게 소리 지르며 종이를 찾더니 순식간에 정원의 풍광이 담긴 그림 한 장을 완성하였다. 필법에 윤기가 흐르고 화면은 촉촉하니 아름다웠다. 김광국과 김광수는 그림을 돌려 보며 연신 감탄을 내뱉는다. 이윽고 작고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하여 세 사람이 함께 즐겁게 놀다 헤어졌다.

이날 심사정이 김광수의 집에서 그린 그림이 ‘와룡암의 작은 모임’, 곧 ‘와룡암소집도(臥龍庵小集圖)’로 알려진 작은 그림이다. 방금이라도 물기가 떨어질 것 같은 화면은 비 온 뒤의 운치 있는 정경을 잘 살려냈다. 낮은 담 너머로 굵은 소나무가 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뜨락이 보인다. 그 뒤편의 안개 속에 서 있는 집 한 채가 와룡암이다. 와룡암이라는 이름은 굵은 둥치를 자랑하는 소나무에서 왔다. 나무 그늘 아래 앉은 일행 중 탕건을 쓴 인물은 주인 김광수이며, 그 앞에 모자를 쓴 두 사람이 심사정과 김광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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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정, 〈와룡암소집도(臥龍庵小集圖)〉
1764년, 종이에 수묵담채, 28.7×42.0cm, 간송미술관 소장.



“비가 온 후 와룡암에서 흥이 일어나 심주(沈周, 1427~1509, 조선 문인들이 선호한 명나라의 문인화가)를 모방하여 그리다(雨後在臥龍菴乘興仿石田).” 화면 한편에 자리 잡은 이 글귀는 심사정이 직접 쓴 것이다. 심사정은 영조대의 대표적인 문인화가로, 그는 본래 사대부가에서 태어난 어엿한 양반이었다. 그러나 어려서 집안이 몰락한 후 진경산수의 대가 정선(鄭敾, 1676~1759)에게 그림을 배워 직업화가의 길을 걸었다. 생전에 그를 만났던 문사들은 그가 세상살이에 당최 흥미가 없고, 그림에만 몰두하는 외골수에 폐쇄적인 삶을 살았다고 전한다.

가벼운 터치로 비 갠 뒤의 풍경을 빠르게 그려낸 〈와룡암소집도〉에는 자연의 변화에 화흥을 주체 못하고 곧바로 그림으로 그려내는 심사정의 예술가적 기질이 잘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심사정, 김광수, 김광국 세 사람이 그림을 사이에 놓고 격의 없이 어울리는 모습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



김광수와 김광국



와룡암의 모임에 참석한 김광수와 김광국은 각기 그 세대를 대표하는 서화 수장가들이다. 어려서부터 옛것을 좋아하는 성품을 지녀 자신의 이름도 ‘상고당(尙古堂)’이라 지었다는 와룡암 주인 김광수는 후에 박지원(朴趾源, 1737~1805)에게 “감상지학(鑑賞之學)의 개창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상고당은 부친이 예조판서를 지낸 명문가 출신이지만 자신은 관직에 나가지 않고 서화 감평과 수집에 몰두하는 일생을 보냈다. 김광수는 어느 누구보다도 작품에 대한 감상안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스스로 ‘모아둔 것이 갑을(甲乙) 이하로 내려가지 않았다’고 자부할 정도로 정선(精選)된 작품만을 소장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작품 중에 김광수의 소장 이력을 확인할 수 있는 그림이 있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의 대표작 〈현이도(賢已圖)〉가 그 하나다. 〈현이도〉의 화면에 적은 조영석의 글은 다음과 같다.




성중(成仲)이 유령(兪14547415132397.png, 말을 잘 그렸던 청나라 화가)의 팔준도와 □□□□ 두 축을 가지고 와 나에게 〈현이도〉를 그려달라고 요구하였다. 왕희지가 거위와 글씨를 바꾼 고사를 이용하여 마침내 즐거워하며 (이 그림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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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석, <현이도(賢已圖)>
제작연도 미상, 비단에 채색, 31.5×43.3cm, 간송미술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작품 보러가기



조영석은 성중의 부탁으로 〈현이도〉를 그리게 되었다. 성중은 김광수의 자(字)이다. 나무 사이에 멍석을 깔고 장기를 즐기는 한 무리의 양반이 보이며 그 곁에는 쌍륙과 바둑을 차려놓고 기다리는 인물도 있다. 놀이에 집중한 인물들의 표정과 자세는 여유롭고 익살스럽다.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일상의 한 장면을 독특한 감성으로 포착한 조영석 특유의 화법이 잘 살아 있다. 〈현이도〉는 소폭에 지나지 않지만 조선 풍속화의 선구자였던 조영석의 실력이 십분 발휘되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그림이다. 화기(畵記)에 드러난 것처럼, 이 그림에는 조영석의 재능뿐 아니라 그림을 요청한 김광수의 기호와 안목도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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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정, 〈방심석전산수도(仿沈石田山水圖)〉
1758년, 종이에 담채, 129.4×61.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작품 보러가기



김광수가 심사정과 그의 그림을 어떻게 평가하였는지 목격할 수 있는 그림이 있다. 김광수의 글이 적혀 있는 심사정의 〈방심석전산수도(仿沈石田山水圖)〉라는 그림이다. 깊은 산속에 자리한 서재에서 한 선비가 글을 읽고 있다. 독서하는 문인의 산거생활을 그린 이 그림의 주제와 형식은 조선시대 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이다. 높은 산과 나무로 빈틈없이 채워진 화면에도 불구하고 간략한 필치와 담백한 색채는 초옥 주위의 고요함을 두드러지게 만든다. 거침없는 필치로 표현한 한가로우면서 다소 쓸쓸한 정서에서 심사정의 개성이 나타난다. “심석전(심주)의 그림 그리는 법을 따라 무인년(1758) 중추 서강 정영년을 위해 즉흥적으로 그리다(倣沈石田法, 戊寅中秋, 爲西岡鄭永年漫筆).” 그림 상단에 적힌 세 개의 글 중 화가가 직접 쓴 중앙의 화기에 의하면, 〈방심석전산수도〉는 1758년 정영년이라는 인물을 위해 그렸다.

화가의 글 오른편에 적힌 화평은 이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황대치(황공망)의 그림은 심개남(심주)에게 전해졌다. 붓 끝에 허실의 절묘한 뜻이 있다. 만산과 초부가 모두 텅 빈 듯하다. 동국의 현재가 (황공망과 심주를) 계승하여 셋이 성대하구나(黃大癡傳沈啓南, 筆端虛實竗相意. 滿山草柎, 皆空幻, 東國玄齋繼盛三)!” 황공망(黃公望, 1269~1354)은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를 그린 중국 원대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이다. 중국 문인화(文人畵)의 정수라 할 수 있는 황공망의 그림은 명대 들어 심주 등의 후대 화가들에 의해 높은 추앙을 받으며 계승되었다. 이 화평은 심사정 또한 황공망과 심주 같은 중국 문인화의 대가와 나란히 설 만한 화가로 추켜세우고 있다. 또 하나의 화평은 다음과 같다.

 




아래 반폭을 펼치니 문득 마음도 게으르고 손도 용렬하여 억지로 그린 뜻이 있음을 알겠다. 한가한 정취도 부족하니 혹시 (화흥이 일지 않았을 때) 억지로 붓을 잡은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현재에게 이것에 대해 물어봐야겠다(下展半幅, 忽覺有心懶手慵, 强作底意思. 倘於乏閒情, 役□趣時把筆否! 吾當質之玄齋).


이는 억지로 그린 용렬한 그림이며 이런 그림을 그린 까닭은 현재(심사정의 호)가 그리고 싶지 않을 때 억지로 그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동일한 그림에 대해 한 화평에서는 중국의 대가에 못지않은 그림으로 평가하는 바와 달리, 다른 화평에서는 마지못해 그린 용렬한 그림 정도로 여긴 점이 흥미롭다. 한 작품에 대해 이렇듯 서로 다른 평가가 내려진 까닭은 두 글이 각기 다른 사람에 의해 쓰였기 때문이다. 첫 번째 화평의 주인공은 바로 김광수이며 두 번째 화평은 그의 동생 김광진(金光進)이 쓴 것이다. 두 화평에서 심사정의 그림에 공감하며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은 김광수였음을 알 수 있다. 〈와룡암소집도〉 역시 김광수의 집에서 벌어진 예기치 않은 만남을 계기로 제작되었다. 세상에 담을 쌓았던 심사정이 거침없이 와룡암을 드나들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김광수가 화가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서화 애호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와룡암소집도〉는 화가에게 그와 그림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들의 관계가 창작의 동력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와룡암소집도〉가 그려진 이날의 조촐한 이야기를 기록한 사람은 참석자 중 나이가 가장 어린 김광국이다. 김광수를 찾아온 소년은 훗날 조선 제일의 서화 수장가가 되었다. 그는 대대로 내의를 지낸 중인집안 출신 의관(醫官)으로, 1747년 의과(醫科)에 합격하여 내의원에 들어갔다. 그곳의 우두머리인 수의(首醫)를 지낸 김광국은 중국을 드나들며 우황 무역에 관여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그는 이런 재화를 기반으로 동서고금의 명화를 모았으며, 나라 안팎에서 수집한 방대한 작품을 엮어 ‘석농화원(石農畵苑)’이라는 화첩으로 만들었다. 와룡암 소집 당시 열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그가 한 세대 앞서 서화 감상과 수장으로 이름 높았던 김광수와 감상우(鑑賞友)로서 교제하였던 것이다.

김광국이 〈와룡암소집도〉에 대한 기록을 남긴 각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이 그림을 가져왔지만 어느 순간 분실하였던 모양이다. 모임이 있었던 해로부터 47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이 그림과 다시 마주치게 된다. 그 사정은 그림에 첨부된 제발(題跋)에 적혀 있다.




신해년 가을 우연히 이민식의 집을 지나다 소장한 그림을 (보았다). 〈와룡암소집도〉가 거기에 있었다. 이 그림을 만지며 추억에 잠겼다. …… 두 사람의 무덤가에 심은 나무는 이미 아름드리가 되었고 나 또한 백발노인이 되었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니 감회가 너무 깊다. 용눌에게 (이 그림을) 얻어 나의 ‘화원’에 돌려놓았다. 매일 한 번씩 …… 한참을 슬퍼하였다(辛亥秋, 偶過李敏埴用訥□□所藏畵卷, 所謂臥龍庵小集圖在焉. 摩挲追憶, 顧□陳昔, 而二人者之墓木已拱, 余亦老白首矣. 俯仰今昔, 感懷殊深, 乃丐於用訥, 而復置我畵苑中. 每一□□□, 爲之愴懷移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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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건, <와룡암소집도 발>
종이, 41.6×27.4cm, 간송미술관 소장.

김광수가 지은 이 글은 별도의 종이에 적혀 있다. 글씨는 그의 아들 김종건이 썼다.



김광국은 우연히 들른 이민식의 집에서 뜻하지 않게 〈와룡암소집도〉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때는 1791년이다. 18세 홍안의 소년은 어느덧 65세의 백발노인이 되었다. 김광수도, 심사정도 고인이 된 지 오래다. 추억 어린 그림을 다시 만나니 감회가 없을 수 없다. 김광수와 심사정을 떠올리며 진한 회한에 잠긴 김광국은 이민식에게 부탁하여 그림을 돌려받았다. 그리고 ‘석농화원’이라고 이름 붙인 그의 애장품첩에 수록하고 매일 어루만지며 회상에 잠기곤 하였던 것이다.

김광국은 자신의 수중으로 돌아온 그림에 그간의 사정을 적은 글을 첨부하였다. 이 그림은 다시는 분실되지 않고 그의 자손들을 통해 근대까지 전해졌다. 심사정의 화흥(畵興), 김광수의 서화 취미, 김광국의 감회 등 동시대를 살았던 화가와 수장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와룡암소집도〉는 그들의 사연과 함께 근대의 대표적인 수장가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의 소장품이 되었다.



김홍도가 사랑한 용눌 이민식



위의 김광국의 글에서 한 이름이 눈에 띈다. 바로 〈와룡암소집도〉를 김광국에게 양도한 ‘이민식(1755~?)’이다. 김광국의 글은 손상이 심하여 이름 부분을 정확하게 읽기 어렵다. 단지 ‘李’, ‘敏’, ‘用’ 이 세 글자만을 정확히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남은 부분으로 어렵지 않게 용눌(用訥)이라는 자를 사용한 이민식임을 추정할 수 있다.

‘이용눌’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그가 조선시대 회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우 특별한 두 작품의 수취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두 작품은 모두 김홍도(金弘道, 1745~?)의 그림이다. 용눌이 김홍도에게 받은 첫 번째 작품은 부채에 그린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이다. ‘서원아집’이란 중국 북송대 왕선(王詵)이라는 귀족의 정원에서 소식(蘇軾, 1037~1101), 미불(米芾), 이공린(李公麟) 등 전설의 문인들이 모였던 모임을 일컫는다. 시대를 내려오면서 서원아집은 아취 있는 문인 모임의 대명사가 되었고, 이 모임을 그림으로 재현한 서원아집도 또한 세간에 널리 유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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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1778년, 종이에 담채, 26.8×81.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작품 보러가기



조선에서도 〈서원아집도〉는 크게 유행하였는데, 그 유행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김홍도와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다. 부채에 그린 〈서원아집도〉 중앙에 부채꼴로 쓰인 글이 있다. 이 글은 미불(米芾)이 기록한 〈서원아집도 기(記)〉이다. 글을 쓴 이는 김홍도의 스승이자 당대의 문인서화가 강세황이다. 강세황은 부채에 기문을 적으며 행의 장단을 교차시켜 보기 좋게 연출하였다. 김홍도 또한 바위에 글을 쓰는 미불 곁에 자신의 관지(款識)를 재치 있게 적었다. “무술년 여름 비 오는 중에 용눌에게 그려주다(戊戌夏雨中寫贈用訥).”

무술년은 1778년이다. 만년에 관직에 나간 강세황이 문과정시(文科庭試)에 수석 합격하여 한성부 우윤에 제수되었던 해이다. 강세황이 관직에 나간 이후 두 사람은 사포서(司圃署)에 함께 근무하며 각별한 관계가 되었다. 이후 강세황은 김홍도의 그림에 많은 화평(畵評)과 제발(題跋: 감상록)을 적었지만 〈서원아집도〉를 그린 1778년 무렵은 유난히 많은 합작을 남긴 시기였다. 이듬해 김홍도는 용눌을 위하여 다시 작품을 제작하였다. 바로 김홍도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신선도팔폭병풍(神仙圖八幅屛風)]이다. 이 그림 역시 각 폭마다 강세황의 찬문(讚文)이 곁들여 있다. 그 마지막에는 김홍도가 직접 이용눌에게 쓴 헌사가 있다.




이 군 용눌이 그림을 사랑하는 정도가 골수에 미쳐 있다. 내가 용눌을 사랑하는 것이 용눌이 그림을 사랑하는 것과 같아 이 그림을 그려준다. 정밀함이 극단에 이르면 뜻은 그림 밖에 있게 된다. 세상에 자운(子雲)이 있다면 자운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기해년(1779) 음력 시월 사능(李君用訥愛畵入髓. 我愛用訥, 如用訥之愛畵, 寫此持贈. 精到之意, 自在筆外. 世如有子雲, 可以知子雲. 己亥 陽月 士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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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신선도팔폭병풍] 중 〈선동취적(仙童吹笛)〉
1779년, 비단에 채색, 130.7×57.6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 우측 상단의 제발(題跋)에서 용눌에 대한 김홍도의 애정을 읽을 수 있다.<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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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도 역시 선면 〈서원아집도〉와 마찬가지로 용눌, 즉 이민식에게 주기 위해 제작되었다. 단원이 이민식에게 두 번씩 그림을 그려주었다고 해도 이것이 화가와 주문자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이 일에 주목하는 이유는 〈서원아집도〉와 〈신선도〉의 화격 때문이다. 〈서원아집도〉는 김홍도의 대표작으로 꼽힐 정도로 그림의 격조가 매우 높다. <신선도>의 경우 작품의 손상이 심하고 후대의 보필이 상당부분 첨가되어 세심한 연구를 필요로 하지만 본래 빼어난 화격을 지닌 작품임에 틀림없다. 두 그림 모두 김홍도가 왕공사대부(王公士大夫)를 위해 제작한 그림을 능가한다. 심지어 각 폭마다 강세황의 글씨까지 곁들여져 당대 서화의 백미를 보여주고 있다.

김홍도의 두 그림을 받은 이민식은 한어 역관으로 알려져 있다. [잡과방목(雜科榜目)]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1754년생으로 20세에 증광시 역과에 합격하였다. 벼슬은 주부(主簿)를 지냈다. 중인 집안의 족보를 모은 [성원록(姓源錄)]에서 용눌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이민식은 해주인으로, 대대로 역관에 종사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 이인승(李寅昇) 또한 역관으로 통훈대부 절충장군이라는 정삼품의 당상관 품계를 받았다. 해주 이씨 집안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집안의 혼인관계를 살펴보자. 이민식의 처는 변광우(卞光宇)의 딸이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변광우는 왜어(倭語) 역관을 다수 배출하였던 밀양 변씨 집안 출신으로, 그 또한 상통사(上通事, 정삼품 이하 역관인 통사 가운데 상급의 통사)를 지냈다.이인승의 장인 정동우(鄭東羽)는 내의(內醫)로서 의과(醫科)에서 전문화되었던 온양 정씨 출신이다. 이민식의 집안은 기술직 중인가와 통혼을 통해 상당한 세를 형성했던 중인 전문가 집안으로 추정된다.

이민식의 가계에는 역관 외에도 도화서 화원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인물들이 있다. 부친 이인승의 출계(出系)한 동생 이인희(李寅曦)는 김홍도의 제자로 알려진 김득신(金得臣)의 사위였다. 이와 더불어 더욱 주목되는 인물은 이인승과 삼종간(三從間, 팔촌)인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이인문(李寅文, 1745~1821)이다. 그는 도화서에서 김홍도와 함께 활동한 동갑내기 화원이었다. 두 사람은 도화서 내에서도 각별히 돈독한 사이로 함께 제작한 작품이 다수 남아 있을 정도다. 이민식과 김홍도를 이어주는 이러한 인적 관계는 그가 김홍도로부터 그림을 받는 충분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민식의 집안이 한어 역관에 종사하였다는 사실은 그의 경제적 능력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18세기는 중국 및 일본을 비교적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역관들이 무역을 주도하며 거대한 상업 자본을 축적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민식의 집안이 대대로 역관에 종사한 집안이라면 이 집안 또한 무역에 관여하며 부를 일구었을 가능성이 높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는 이런 추정을 뒷받침하는 흥미로운 문서가 있다. 이민식의 부친 이인승이 관련된 인삼의 공납과 관련된 ‘공인문기(貢人文記)’이다. 공인문기란 대동법 시행 이후 각 관청에 필요한 공물을 납부하는 권리를 매매하는 문서이다. 대동법 시행 이후 공인권(貢人權)은 부유한 역관이나 의원들에게 좋은 자본 투자처로서 활용되었다. 공인 권리의 중요성은 대리인을 내세우는 매매 관습을 따르지 않고, 거래 당사자들이 직접 문서를 작성한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이 공인문기는 1757년 호서와 영남의 인삼 2근 5냥 6전(미가(米價): 100섬 4두)을 혜민서에 납품하는 권리를 은자 415냥에 이인승에게 양도하였다는 내용이다. 공인권의 가격인 400냥은 당시 서울에서 기와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큰 액수이다. 이인승이 재력 면에서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를 이어 역관으로 종사한 이민식 또한 부친에 필적하는 부를 소유하였다면, 값이 ‘300냥’을 호가했다는 김홍도의 그림을 받기에 부족하지 않은 경제적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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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문기, 1757년, 규장각 한국학연구원(奎121764).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428~429면)



이민식이 소장했던 그림으로 확인되는 작품은 〈와룡암소집도〉를 비롯한 단 세 점뿐이다. 따라서 그를 ‘수장가’ 혹은 ‘후원자’로서 규정하기에는 미흡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이민식이 소장한 그림의 화격(畵格)이다. 이 그림들의 높은 수준은 그림을 좋아하는 정도가 골수에 미쳤다고 묘사한 김홍도의 글이 가리키는 곳을 환기시킨다. 이는 이민식이 단순한 호사가가 아니라 그림을 보는 안목이 비범한 인물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김홍도와 강세황이 이민식을 위하여 거듭 자신들이 가진 최고의 예술적 능력을 발휘하였던 까닭은 그가 예술과 예술가를 깊이 이해한 서화 애호가였기 때문이다.

김광국과 이민식의 존재는 18세기 들어 역관과 의원을 중심으로 하는 기술직 중인 계층이 예술의 주요 수요층으로서 한 축을 이루었던 사회적 상황을 대변한다. 조선 전반기 서화 감상과 수장은 품위 있는 여가활동으로 그 주인공은 항상 왕공사대부였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중인계층 수장가들이 점차 서화 감상의 전면에 등장한다. 동시에 미술은 그 질과 내용에서 전례 없는 풍성함을 이루었다. 변화의 한편에는 경제적 능력만큼이나 서화에 대한 높은 안목을 지닌 새로운 서화 애호가들이 있었다. 이민식이 소장했던 그림들은 세월과 함께 희미해진 이들의 존재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다.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태학사와 손을 잡고<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를 연재한다. 그림에 숨은 비밀과 사연을 프리즘으로 삼아 한국학의 출렁이는 바다로 여행을 떠나려는 것이다. 문학, 미술, 음악, 철학, 역사, 문화가 망라되는 항해에 깊고 진한 교감이 깃든 풍성한 바다가 펼쳐지길 해신(海神)에게 기도한다. 연재는 매주 1회 돛을 달고 항구를 떠난다.

 14547415215259.jpg    http://www.thaehaksa.com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도서 출간
네이버캐스트에 연재되었던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시리즈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우리 시대 인문학자 32인이 옛 그림을 호명해 되살려낸 한국학 읽기의 색다른 즐거움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이경화
한국 미술사 전공. 현재 대만대 예술사연구소 방문학생으로 명청대 중국미술과 사회문화사를 공부하고 있다. 그림에 깃든 옛사람들이 살아간 이야기를 좋아한다. <초상에 담지 못한 사대부의 삶: 이명기와 김홍도의 ‘서직수초상(徐直修肖像)’>, <정선(鄭敾)의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 1711년 금강산 여행과 진경산수화의 형성> 등의 글을 썼다.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의 예술세계에 대한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발행2012.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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