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안약산과 우이로오우리 - 사람의 눈을 그린 두 그림 사이의 관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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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81회 작성일 16-02-06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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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 또는 우연



시대나 지역이 매우 다른 다수의 사물이나 현상에서 서로 같거나 비슷한 요소를 발견하면 먼저 그 우연성에 놀라고, 나아가 그들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지 않을까 의심이 든다. 이런 의심은 파묻힌 과거를 캐내는 실마리가 될 수도 있고, 시간만 허비하는 호기에 그칠 수도 있다.

나는 2012년 5월, 성균관대학교에서 열린 한국18세기학회의 발표회에서 일본 문헌 전문가가 준비한 자료화면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가부키(歌舞伎)의 한 장면을 그린 우키요에(浮世繪: 일본 에도시대에 서민생활을 주로 그린 풍속화) 한 폭이었다. 설명을 들으니 가부키 십팔번(十八番)의 하나인 [우이로오우리(外郞賣)]로, 약장수 ‘우이로오’가 약상자를 지고 약을 팔러 다니는 모습이란다. 놀라움은 그의 옷을 장식한 작고 동그란 문양 때문이었는데, 그림의 크기를 좀 더 키워 자세히 살펴보니 그 문양은 사람의 눈을 하나씩 그린 것이었다. 약장수와 눈알, 이 둘은 말할 것도 없이 중국 남송(南宋) 시절의 유명한 그림 한 폭을 떠오르게 한다. 원래 이 그림에는 제목이 없지만, 후인들이 당시에 상연했던 연극의 제목을 따서 ‘안약산(眼藥酸)’이라고 붙였다. 눈 문양이 그려진 두 그림 [우이로오우리]와 [안약산]에는 어떤 끈이 있을까, 아니면 단순한 우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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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우이로오우리(外郎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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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안약산(眼藥酸)
남송(南宋), 비단에 채색, 23.8×24.5cm, 북경 고궁박물원 소장.




외랑가(外郞家)의 전통



가부키 [우이로오우리]는 일본 가나가와 현(神奈川縣) 오다와라(小田原)의 진외랑가(陳外郞家)를 제재로 만든 일인극이다. 진외랑가는 대대로 비전 묘약 투정향(透頂香)을 제조ㆍ판매하는 가문이다. 주식회사 우이로오의 홈페이지 안내문에 따르면, 가부키 [우이로오우리]는 1718년에 에도(江戶)의 제2대 이치카와 단주로(市川團十郞)가 창작, 상연하였다고 한다. 그가 무대에 오를 수 없을 정도로 기침이 심할 때 이 투정향을 먹고 싹 나았다. 그는 오다와라로 달려가서 외랑가의 허락을 얻어 이 작품을 만들었다.

[우이로오우리]를 그린 우키요에에는 준수한 청년이 커다란 약상자를 지고 오른손에는 부채, 왼손에는 작은 약합(藥盒)을 치켜들고 서 있다. 투정향 행상에 나선 외랑의 모습이다. 그러나 원래 외랑가에서는 행상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연극일 뿐이다. [우이로오우리]를 그린 우키요에는 여러 폭이 있으며, 그림마다 인물과 자세는 같지만 외랑이 입은 옷의 문양은 여러 가지 변화를 보인다. 눈 문양은 제8대 이치가와 단주로의 분장을 그린 그림에서만 보인다. 이 그림은 1832년의 상연 장면이다.

일본 진외랑가의 시조 진연우(陳延祐, 1323~1396)는 원래 중국인이다. 원명(元明) 교체기인 1369년에 일본으로 망명하여 치쿠젠하카타(筑前博多)에 정착하였다. 그는 원나라에서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을 지냈으며 의술에도 밝았다. 일본에서 의술과 인품으로 명망을 얻었으며, 일본 사람들은 그의 벼슬을 따서 진외랑(陳外郞)이라고 불렀다. 그의 일본 망명은 당시 중국의 정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원말 홍건군(紅巾軍)의 영수 가운데 대한(大漢)을 세워 제위에 오른 진우량(陳友諒, 1320~1363)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호북(湖北) 면양(沔陽) 사람으로서 서수휘(徐壽輝) 등이 이끄는 천완(天完) 정권의 홍건군(紅巾軍)에 가담하여 1359년에 스스로 한왕(漢王)이 되었고, 다음 해에 서수휘를 죽이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1363년 파양호(鄱陽湖)에서 주원장(朱元璋)과 싸우다가 전사하자 부하들이 그의 차자 진리(陳理)를 무창(武昌)에서 즉위시켰다. 이듬해 주원장이 무창에 이르자 진리는 항복하였고, 대한은 망하였다.

원나라에서 벼슬하였던 진연우는 가문의 원수인 주원장 치하에서는 살 수 없다고 하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진연우는 본래 의술에 밝았으며, 자손들이 중국의 진씨들과 교왕하며 투정향(透頂香) 제조법을 가져왔다. 그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의 초청으로 경도(京都)에 갔으며, 이때 숭복사(崇福寺)의 무방화상(無方和尙)에게서 머리를 깎고 호를 태산종경(台山宗敬)이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그를 진종경(陳宗敬)이라고도 부른다.

진연우의 아들 대년종기(大年宗奇)는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초청을 받아들여 경도(京都)로 이주하였다. 대년의 아들 월해상우(月海常祐), 손자 진조전(陳祖田)도 인품이 훌륭하고 명의였다. 쇼군 족리의정(足利義政, 1436~1490)은 진조전을 매우 흠모하여 그의 장자 정치(定治)를 족리씨의 조적(祖籍)인 우야원씨(宇野源氏)에 편입시켰고, 이름을 우노 사다하루(宇野定治)라고 하였다. 우노 사다하루는 북조조운(北條早雲, 1432~1521)의 가신이 되어 와다하라로 이주하였고, 그로부터 와다하라의 외랑가가 시작되었다. 와다하라의 외랑가에서는 대대로 투정향을 제조 판매하고 있으며, 지금은 주식회사 우이로오로 발전하였다. 투정향은 외랑약(外郞藥)이라고도 한다.


만병통치약, 투정향



‘투정향’은 ‘정수리까지 꿰뚫는 진한 향기’라는 뜻이다. 송(宋)나라 주돈유(朱敦儒, 1081~1159)는 술을 놓고 〈자고천(鷓古天)〉 사(詞)를 지어 “선인이 옥 술잔 받쳐 들고 가득 부어 굳이 권하니 사양하지 마시라. 정수리까지 꿰뚫는 서룡의 향기도 비할 바 아니며, 감로가 마음을 적시니 맛 더욱 기이하다(有個仙人捧玉巵, 滿斟堅勸不須辭. 瑞龍透頂香難比, 甘露澆心味更奇)”고 읊었다. ‘서룡’은 ‘서룡뇌(瑞龍腦)’, 즉 용뇌향(龍腦香)이다. 신선이 잔에 가득 따라주는 술은 용뇌향보다 더 향기롭고 마음을 적시니 맛이 더욱 기이하다. 투정향은 식약(食藥)의 이름으로도 쓰였다.

원말명초에 한혁(韓奕)이 지은 [역아유의(易牙遺意)]에는 투정향 제조법이 나와 있다. “해아차 아차 각 4전, 백두구 사향 각 1전 5분, 단향 1전, 편뇌 1전 4분, 감초고로 알약을 만든다(孩兒茶芽茶各四錢, 白荳䓻射香各一錢五分, 檀香一錢, 片腦一錢四分, 甘草膏子)”고 하였다. 명나라 고렴(高濂, 1600년 전후 생존)의 [준생팔전(遵生八牋)ㆍ음찬복식전(飮饌服食牋)]에는 ‘투정향환(透頂香丸)’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처방이 실려 있다.

공정현(龔廷賢, 1522~1619)이 지은 [노부금방(魯府禁方)]에 구취(口臭)를 치료하는 약 투정향의 제조법이 실려 있다. 편뇌(片腦) 1전, 사향(麝香) 5분, 붕사(硼砂) 3전, 박하(薄荷) 2전을 가루로 만들고 감초로 고아서 오동 열매 크기로 알약을 만든 뒤, 주사(朱砂)로 옷을 입혀서 한 알씩 입에 넣고 녹여 먹는다.

중국의 옛날 의서(醫書)에 실린 투정향의 효능도 눈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 단 투정향과 이름이 비슷한 ‘투정산(透頂散)’이라는 안약이 있다.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원나라 때의 의서를 1600년에 양희락(楊希洛) 등이 정리하여 간행한 [명목지보(明目至寶)]에 투정산의 제법과 효능이 실려 있다. 능소화(淩霄花), 요양화(鬧羊花), 영영향(苓苓香) 각 1전을 가루로 만들어 소량을 코로 흡입하면 적안(赤眼)과 예장(翳障)을 물리칠 수 있다. 적안이란 결막염 등으로 흰자위가 붉게 충혈되는 증상이고, 예장은 백내장과 같은 증상인 듯하다. 그러나 투정향과 투정산 사이에는 명칭의 유사성 외에는 달리 공통점을 찾기가 어렵다.

가부키 [우이로오우리]에서 우이로오, 즉 외랑은 혼자 약상자를 지고 눈알을 붙인 옷을 입고 등장하여 왼손에 약합을 치켜들고 투정향의 효능을 광고한다.



먼저 이 약을 이렇게 한 알을 혀 위에 올려서 배 안으로 넣으면 이야, 도저히 말로는 할 수 없이 위, 심, 폐, 간이 튼튼해지고 훈풍이 목구멍에서 나와 입 안에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아 물고기, 새, 버섯, 면류를 먹고 상극을 일으키거나 그 밖의 만병에 귀신처럼 효과가 빠르답니다.

투정향은 만병통치약이다. 은단처럼 상쾌한 박하향이 배와 목과 입안을 시원하게 만든다. 이어서 배에 들어간 약의 효과가 입으로 올라오는 상황을 묘사한다.



이 약의 가장 기묘한 점은 혀가 도는 것이 구멍에 궤어 도는 엽전도 당하지 못하고 도망갈 정도입니다요. 훌쩍 혀가 돌아서 나오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지요. 저런저런 정말로 저런 돌아서 나오네, 돌아서 오네.

이 약의 가장 큰 효과는 입이 상쾌해져 혀를 자유자재로 놀릴 수 있음을 말한다. 그 효과로 혀의 주요 기능의 하나, 즉 발성을 설명한다. 음운학의 기초를 설파하는 것이다.



아행 와행 야행 소리는 후음, 사행 다행 라행 나행 소리는 설음, 가행은 아음, 사행은 치음, ……

어느새 약장수는 일본어 오십음도의 기본 원리를 주워섬기며 음운학자로 변신하였다. 어쨌거나 투정향의 약효는 눈병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 그렇다면 안약산과 우이로오의 눈알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단순히 시대와 바다를 뛰어넘은 우연일까.


안약산(眼藥酸)



남송 주밀(周密, 1232~1298)이 지은 [무림구사(武林舊事)]에는 송나라 때 유행한 연극의 목록 〈관본잡극단수(官本雜劇段數)〉가 실려 있고, 여기에 [급만산(急慢酸)]과 [안약산], [식약산(食藥酸)]이라는 명목이 들어 있다. ‘산(酸)’은 가난한 선비를 말하는데, 이들 작품은 가난한 선비가 주인공이다. 극본은 남아 있지 않지만, [안약산]에는 안약을 파는 가난한 선비가 등장함에 틀림없다. 안약과 선비라! 그렇다. 신산한 삶을 못 이긴 선비가 책을 내던지고 안약을 파는 약장수 또는 안과 전문 의원으로 나선 것이다.

〈안약산〉 화폭에는 좌우로 두 인물이 마주 보고 서 있다. 왼쪽에는 끝이 뭉툭한 높은 고깔을 쓰고 넓은 소매에 발을 덮는 도포를 입은 약장수 또는 의원이 오른팔을 뻗어 검지를 세우고 오른쪽의 인물에게 무슨 말을 하는 듯하다. 이 인물은 온몸에 눈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화폭에 보이는 눈은 모두 25개이며, 그 가운데 하나는 허리에서 무릎까지 늘어뜨린 사각형 가방에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 이 가방은 오른팔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끈으로 어깨에 멘 듯하다. 오른쪽 인물은 머리를 건으로 싸매고 왼손으로 몽둥이를 들고 가방을 왼쪽 어깨에 멨다. 오른손은 검지로 오른쪽 눈을 가리킨다. 도포 자락을 말아 올려 허리에 감아 묶어 바지가 드러나고, 뒤춤에는 찢어진 단선(團扇)을 꽂았다. 부채에는 ‘諢’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으며, 뒤에는 태평고(太平鼓)가 놓여 있다.

이 두 인물은 송나라 잡극의 두 배역 부말(副末)과 부정(副淨)이다. 왼쪽이 부정, 오른쪽이 부말이다. 남송의 잡극 상연 장면을 그린 또 다른 그림은 구도가 꼭 같으며 인물의 복식만 다를 뿐이다. 오른쪽 인물의 허리춤에 꽂힌 부채에는 “末色(말색)”이라고 써 놓았다. 아마 이 부채의 뒷면에는 “諢(원)” 자가 있을 것이다. 이는 부말이 주역으로서 상대역 부정을 놀리는 우스개를 연출함을 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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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잡극타화고도(雜劇打花鼓圖)>
남송(南宋), 비단에 채색, 24×24.3cm, 북경 고궁박물원 소장.


옷에 눈을 달고 나오는 약장수나 의원을 그린 그림이 또 한 점 있다. 이번에는 배우가 아니라 실제 인물이다. 산서성(山西省) 우옥현(右玉縣)의 보녕사(寶寧寺)에는 139폭짜리 대형 수륙화(水陸畵)가 있었다. [칙사진변수륙신탱(勅賜鎭邊水陸神幀)]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 탱화는 원래 명나라 궁중에서 보관하다가 보녕사에 옮겨졌고, 지금은 산서성 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용감했던 명나라 영종(英宗, 1427~1464)은 1449년 몽고 와라부(瓦剌部)의 침공에 맞서 직접 출정하였다가 북경에서 썩 멀지 않은 토목보(土木堡)에서 사로잡히고 말았다. 1년 후에 풀려나 북경으로 돌아와서는 연금되었다가 1457년 다시 제위에 올랐다. 우옥현은 당시 몽고군의 침입 경로여서 백성과 군인이 많이 죽었으며, 또한 영종이 포로로 잡혀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이곳에 보녕사를 짓고 북경의 왕궁에 보관된 탱화를 내려보냈다. 이 때문에 수륙화에 ‘칙사진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탱화는 원래 명대의 작품이라고 알려졌으나 원대에 그려졌음이 근래에 밝혀졌다. 그림을 그린 비단이 원나라 때의 직조품이며, 그림 속 인물들은 주로 원나라의 복식을 입고 있다. 원나라 대도(大都)의 몽고족 황궁에 소장된 이 그림을 명나라가 그대로 접수하여 보관하다가 1460년[영종 천순(天順) 4]에 보녕사를 완공하고 이 탱화를 내려보내 해마다 4월 초파일에 대규모 수륙재(水陸齋)를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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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보녕사수륙탱(寶寧寺水陸撑)> 제57 ‘왕고구류백가제사예술중(往古九流百家諸士藝術衆)’
119×62.5cm. 산서성 박물관 편, [寶寧寺明代水陸畵](북경: 문물출판사, 1988, 1995), 19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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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보녕사수륙탱> 부분.



이 탱화의 제57폭 〈왕고구류백가제사예술중(往古九流百家諸士藝術衆)〉에 옷에 눈을 붙인 인물이 있다. 이 화폭에 등장하는 인물은 사농공상, 배우, 악사, 의원, 점쟁이 등이다. 옷에 눈을 단 사람은 오른쪽 눈이 먼 애꾸인 듯하며, 역시 안과 의원임에 틀림없다. 이 의원의 옷에는 눈 다섯 개가 달려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허리에서 늘어뜨린 가방에 다른 눈보다 약간 크게 그렸다. 가느다란 끈이 오른쪽 어깨에서 대각으로 내려와 팔짱 안으로 사라진다. 아마 약물을 넣은 가방일 것이다. 이는 남송의 그림에 보이는 가방과 같다. 송원시대에 안약을 파는 약장수나 안과 의원은 이런 복장을 입었던 듯하다. 잡극도에서는 의원임을 강조하기 위해 눈을 수십 개나 달았을 것이다. 등과 배에 주렁주렁 매단 눈들은 안약을 넣은 약갑(藥匣)일지도 모른다.


여전한 의문의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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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우타가와 구니사다(歌川國貞) 초대(初代), <외랑(外郞)>
1852년, 36.3×24.2cm, [프라하국립미술박물관 일본미술품도록](교토: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1994), 58면.


안약을 팔러 나선 가난한 선비와 우이로오, 그리고 [안약산]과 [우이로오우리]. 이 둘 사이에는 어떤 끈이 있을까, 아니면 단순한 우연일까. 우키요에 〈우이로오우리〉에는 외랑, 즉 우이로오의 복장에 눈이 아닌 엽전이나 다른 문양을 넣은 작품도 있다. 눈을 그린 옷은 제8대 이치가와 단주로만 입고 있다. 외랑약은 투정향(透頂香)이다. 현재의 도친코(透頂香)는 거의 만병통치약이다. 생김새는 은단(銀丹)과 흡사하며 복통, 설사, 식중독, 두통, 현기증, 호흡곤란, 인후통, 가래, 기침, 멀미, 일사병, 치통, 피로회복, 강장 등에 효능이 있다고 한다. 이런 효능이 눈병이나 시력에 간접적인 효과가 있을지는 몰라도 직접 눈을 치유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렇다면 우이로오는 왜 눈을 주렁주렁 달고서 투정향을 팔러 다닐까.

일본으로 망명한 중국인은 비전의 약을 만들어 팔아 그곳에서 튼튼히 뿌리를 내리고 ‘외랑가’라는 명칭을 얻었다. 이 약의 효능에 감격한 가부키 배우 제2대 이치가와 단주로는 외랑가를 방문하였다. 이때 외랑가에 전해 오던 중국 송원시대 안과 의원의 복장이 그의 눈에 띄었을까. 어느 외랑이 수백 년 보관한 조상의 복장을 자랑 삼아 보여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가부키 [우이로오우리]의 눈 문양 복식은 그때 바로 만들어서 분장하지 않고 100여 년이 지나 6세(世) 후손이 입고 등장하는가. 아니면 제2대 이치가와 단주로도 눈 문양 복식을 입었지만 그 장면을 그린 우키요에는 원래 없었던지, 또는 모두 타버렸는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쨌거나 배우들의 옷에 붙은 눈알은 중국과 일본의 고전극 사이에 있었음직한 관계를 밝히는 끈임에는 틀림없다. 아직은 의문 가득한 눈만 껌벅일 수밖에 없지만.


뒷이야기



동아시아에서 14세기 중후반은 격동의 시대였다. 중국에서는 몽고족이 북방 초원으로 돌아가고, 한족(漢族)은 명(明)나라를 세웠으며, 조선에서는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새 세상을 열었다. 이런 격동의 주역은 홍건군이었다. 1351년 한산동(韓山童)과 유복통(劉福通) 등이 기의하자 전국 각지에서 반군이 봉기하였고, 일부 반군의 영수들은 각자 칭제건원하여 중국에는 이전의 오대십국(五代十國) 같은 분열의 시대가 나타날 듯하였다.

1360년, 진우량은 호북(湖北)에서 천완(天完) 정권을 탈취하여 대한(大漢)을 세우고, 1362년에 명옥진(明玉珍, 1331~1366)은 중경(重慶)에서 대하(大夏)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이 두 왕조는 모두 주원장에게 패하여 그들의 가족과 신료들은 포로가 되었다. 주원장은 이들의 처리에 고심하다가 인덕(仁德)을 베푸는 성인이라는 명망을 얻고자 고려로 보냈다. 홍무(洪武) 5년 1372년 음력 1월 17일에 주원장은 이들을 고려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명태조고황제실록(明太祖高皇帝實録)] 권71 정월 을축일(乙丑日) 기사에 다음 구절이 있다.



귀덕후 진리와 귀의후 명승은 일상이 울울불락하여 원망하는 말을 자못 하였다. 주상이 듣고서 말했다. “이들은 어린아이들이라 말에 조금 잘못이 있어도 따질 것은 없다. 다만 소인배들이 부추겨 끝을 장담할 수 없으니 원방에서 살게 하면 틈이 생기지 않아서 끝까지 보전할 수 있으리로다.” 이에 고려로 이주시켜 원나라 때의 추밀사 연안답리를 보내 호송하게 하였다. 고려 국왕에게 무늬 비단 48필을 주어 그들을 잘 보살피게 하였다 (歸德侯陳理歸義侯明昇居常鬱鬱不樂, 頗出怨言. 上聞之曰, 此童儒輩, 言語小過, 不足問, 但恐爲小人鼓惑, 不能保始終, 宜處之遠方, 則釁隙無自生, 可始終保全矣. 于是徙之高麗, 遣元樞密使延安答里護送而徃. 仍賜高麗國王紗羅文綺四十八疋俾善待之).

그로부터 넉 달 후인 공민왕(恭愍王) 21년 5월 17일 계해(癸亥)에 진우량의 아들 진리(陳理), 명옥진의 아들 명승(明昇)과 그 식솔을 포함하여 총 27인이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 고려 왕경에 도착하였다. 주원장은 두 전 황제의 가솔을 보내며 “군인으로도 삼지 말고, 백성으로도 삼지 말고 그들 스스로 한가하게 살게 하라(不做軍, 不做民, 閑住他自過活)”고 당부하였다. 이후 진리는 아들 없이 죽었고, 명승은 후손이 번성하였다. 본관이 연안(延安), 서촉(西蜀), 해주(海州), 성도(成都)로 나뉘었으며, 지금 중국의 명씨와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진씨의 일족은 일본에서 외랑가로 명망을 이루었고, 명씨의 일족은 한국에서 번성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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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태학사와 손을 잡고<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를 연재한다. 그림에 숨은 비밀과 사연을 프리즘으로 삼아 한국학의 출렁이는 바다로 여행을 떠나려는 것이다. 문학, 미술, 음악, 철학, 역사, 문화가 망라되는 항해에 깊고 진한 교감이 깃든 풍성한 바다가 펼쳐지길 해신(海神)에게 기도한다. 연재는 매주 1회 돛을 달고 항구를 떠난다.   14547415535026.jpg  http://www.thaehaks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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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도서 출간
네이버캐스트에 연재되었던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시리즈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우리 시대 인문학자 32인이 옛 그림을 호명해 되살려낸 한국학 읽기의 색다른 즐거움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이창숙 | 서울대학교 중문과 교수
중국고전희곡 전공. 원잡극(元雜劇)부터 경극(京劇)에 이르는 중국고전희곡의 역사와 작가, 작품을 이해하고 설명하며, 중국희곡 작품을 한국어로 옮기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고려ㆍ조선시대에 이루어진 중국과의 문화 교류에도 관심이 있어 주로 연행록을 대상으로 그 실상을 파악하고 있다. [중국공연예술], [두보진주동곡시기시 역해], [두보성도시기시 역해] 등을 공동 저술하였고, 옮긴 책으로 [중국고대음악사]와 [중국고대음악사고](전 2권), [영원한 대자연인 이백](공역), [북상기](공역), [중국고전문학정선 시가1](공역), [중국고전문학정선 시경 초사](공역) 등이 있으며, 이 밖에 다수의 중국희곡 관련 논문이 있다.


발행2012.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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