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조선의 쇠고기 환약 - 근세 일본의 만병통치약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47회 작성일 16-02-06 15:52

본문















14547415561963.jpg




금지된 욕망, 쇠고기




쇠고기는 근세 일본에서 ‘금단의 열매’였다. 종교적인 이유에서 1587년에 쇠고기 식용이 금지된 이후, 메이지유신 1년 전인 1867년에 도살장 개설과 쇠고기 판매가 허가되기까지 근세 일본에서는 쇠고기를 먹는 것이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거의 3백 년 동안 쇠고기를 먹지 못하다가 다시 이를 먹게 된 일본인들의 기쁨은 가나가키 로분(仮名垣魯文, 1829∼1894)의 소설 [아구라나베(安愚楽鍋)]에 잘 드러나 있다. 근대화된 서양 열강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쇠고기와 우유를 섭취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유행처럼 개점한 전골 가게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쇠고기 전골을 즐기는 서민들의 모습을 해학적으로 그린 소설이다. 그 중 한 구절을 살펴보자.




A: 소는 정말 맛있군요.


B: 이 고기가 퍼지면 모두 멧돼지나 사슴 고기 따위는 더 이상 못 먹게 될 겁니다. 이런 청결한 것을 왜 이제까지 먹지 않은 걸까요?


A: 서양에서는 1620∼30년대부터 오로지 쇠고기만 먹게 되었지만, 그 전에는 소나 양은 그 나라의 왕이나 ‘전권(全權)’이라고 해서 고위직에 오른 사람이 아니면 평민 입에는 들어오지도 않았지요. 우리나라도 차츰 문명개화로 밝은 세상이 된 덕분에 우리까지도 쇠고기를 먹게 된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위의 대화를 통해,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인들에게 “청결한” 쇠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일본도 서양처럼 문명개화(文明開化)되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중세 말기에 쇠고기를 먹는 즐거움을 빼앗겼던 일본인들이 서구화와 함께 비로소 그 즐거움을 되찾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퍼져 있는 이야기다.



악의 탈을 쓴 쇠고기, 환약의 형태로 ‘복용’하다




그런데 에도시대 문헌을 살펴보면, 당시 사람들도 쇠고기를 먹기는 먹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방식은 달랐다. [아구라나베]에서 볼 수 있듯이 생쇠고기를 전골로 조리해서 먹는 방식이 아니라, 약이라는 명목으로 쇠고기를 조미해 육포로 말려서는 환약으로 만들어 우육환(牛肉丸, 쇠고기 환약), 반본환(返本丸, 원기를 회복시켜주는 환약), 간우환(干牛丸, 말린 쇠고기 환약)과 같은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복용’했다. 그리고 상층 계급에서는 이 기묘한 약 내지는 음식을 비교적 자유로이 섭생한 듯하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의 저명한 의학사 연구자 소다 하지메(宗田一)를 비롯한 학계의 연구를 통해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한편, 조선시대에 일본으로 파견한 의사 함득일(咸得一)이 쇠고기 환약 제조법을 알려주었다는 전승이 1811년 당시 일본에 존재했고, 이 전승이 김선신(金善臣)이라는 사람에 의해 조선에까지 알려졌다는 사실을 서한석 박사가 밝혔다.



14547415563428



우육환을 담았던 약 봉투(개인 소장). 중세 말 쇠고기를 먹는 즐거움을 빼앗겼던 일본인들은 육식을 하는 게 아니라 약을 먹는다는 명목 하에 쇠고기 환약을 복용하였다.


그렇다면 이들 쇠고기 환약은 언제, 어디에서 먼저 먹기 시작한 걸까? 그 근원은 중국 명나라의 본초학자(本草學者) 이시진(李時珍)이 편찬한 [본초강목(本草綱目)] 권50에 보이는 <반본환(返本丸)>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18세기 일본의 백과사전인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図会)] 권37 <축류(畜類)>항목 가운데 소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쇠고기의 효능에 대해 “기를 더해주고 비위(脾胃)를 기르며 허리와 다리 힘을 보해준다”고 기술해 눈길을 끈다. 비록 쇠고기 환약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쇠고기를 단순한 먹거리로 본 것이 아니라 그 효험에 대해 언급했기 때문이다. 이후 에도시대 후기에서 메이지시대 초기에 걸쳐 쇠고기 환약을 다양한 방식으로 선전할 때 공통적으로 강조한 것이 바로 [화한삼재도회]에서 쇠고기의 효능을 강조한 대목이다. [화한삼재도회]는 근세 일본의 지식인과 독서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18, 19세기에 일본에서 쇠고기 환약이 인기를 끈 데에는 [화한삼재도회]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아무튼, 이들 쇠고기 환약은 당시 일본인들에게 큰 인기를 끈 것으로 보인다. 공식적으로는 쇠고기를 먹는 것이 금기시되어 있었지만, 근세 일본인들, 특히 서민들은 [화한삼재도회]라는 저명한 책을 통해 그 효과가 널리 알려진 쇠고기를 먹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육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약을 먹는다는 명목으로 쇠고기 환약을 ‘복용’하며 죄의식을 덜었을 것이다.



쇠고기 환약의 원조 경쟁




근세 일본에서 쇠고기 환약은 여러 가게에서 여러 이름으로 판매되었다. 그 양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 에도(江戸, 지금의 도쿄)에서 1824년에 출간된 상점 안내서 [에도 가이모노 히토리 안나이(江戸買物獨案内)]라는 책이다. 이 책은 당시 에도에서 팔리던 물건과 이를 판매하는 가게들을 수록한 일종의 쇼핑 안내서다.

여기서 약(藥) 항목을 보면, 쇠고기 환약을 파는 가게가 세 곳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앞에 실려 있는 것은, “에도 본가(江戸本家)”를 내건 다나카 기치에몬(田中吉右衛門)이 료고쿠(両国) 요코야마초(横山町) 산초메(三丁目)에서 판매하던 “조선 명법 우육환(朝鮮名法牛肉丸)”, 즉 조선의 비법으로 만든 쇠고기 환약이다. 이 책에 실려 있는 가게 이름과 주소, 가게 간판 등은 다나카가 제작해 시중에 유포한 전단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전단에서 다나카 기치에몬은 자신이 쓰시마의 나카무라 기도(中村輝道)가 제작한 약을 팔고 있으며, 쇠고기 환약은 비위를 길러준다는 데에서 시작해 남녀노소의 거의 모든 병에 효과를 보인다고 선전한다. 쇠고기 환약이 일종의 만병통치약인 셈이다. 그리고 말미에서는 자기 가게 옆 동네인 료고쿠 요코야마초 니초메(二丁目)를 비롯해서 경향 각지에 유사품을 파는 곳이 있으니 주의하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있다. 그래서 가게 간판까지 그려넣은 것이리라.



14547415565313



다나카 기치에몬의 “조선 명법 우육환” 전단(부분, 개인소장). 전단에는 가게 간판을 상세히 그려넣어 다른 가게와 혼동하지 않도록 안내했으며, 우육환의 효험도 기술했다.


그런데 [에도 가이모노 히토리 안나이]에는, 다나카 기치에몬이 유사품을 파는 가게라고 언급한 바로 그 니초메의 가게가 나란히 실려 있다. “명방우육환(名方牛肉丸)”이라는 약을 파는 오미야 고베이(近江屋小兵衛)다. 오미야 고베이는 우육환뿐 아니라 염색약, 향(香) 등 갖가지 물건을 취급했다. 조선 우육환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다나카 기치에몬과는 영업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앞서 두 가게가 있는 곳과는 다른 동네인 혼마치(本町) 산초메(三丁目)에서 영업하던 오미야 효스케(近江屋兵助)는 조선우육반본환(朝鮮牛肉返本丸)을 비롯해 “평생 이가 빠지지 않는 묘약(一生歯のぬけぬ妙薬)” 등 각종 약품을 팔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앞서 언급한 쇠고기 환약을 팔았던 오미야 고베이와 오미야 효스케의 고향으로 짐작되는 오미(近江, 지금의 시가(滋賀) 현)에서는 지금도 달달한 일본 된장에 절인 쇠고기 육포가 반본환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와규(和牛)라 불리는 일본 소의 명산지 가운데 하나가 오미라는 사실도 이러한 일련의 상황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미 지역에 있던 히코네번(彦根藩)을 다스리던 이이(井伊) 가문은 자기 지역의 특산품인 이 반본환을 정기적으로 도쿠가와 쇼군을 비롯한 막부의 유력자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당시 쇠고기 환약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오사카에서는 ‘쓰시마 하마야시키문 앞 영업소(対馬浜屋敷門口弘所)’라는 가게가 조선 간우환(干牛丸, ひぎゅうがん)이라는 쇠고기 환약과 연고를 팔았다. 이 가게도 전단에서, 자신들이 쓰시마에 기반한 원조라고 주장하고 있다. 너도나도 자신이 원조임을 내세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쇠고기 환약의 진짜 원조는 누구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어느 가게가 먼저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다나카 기치에몬과 쓰시마 하마야시키문 앞 영업소 광고 전단을 비교해보면, 전체적으로 다나카 기치에몬의 광고 문구 분량이 좀 더 많다. 그리고 “비위를 다스리기 때문에 담을 억제하고 하복부를 따뜻하게 하여 치질, 탈장, 임질, 소갈을 다스린다”라는 구절은 다나카 기치에몬의 전단에만 실려 있다. 두 전단이 모종의 선후 관계에 놓여 있음은 확실하지만, 전단에 사용된 언어의 특성이나 그 밖의 서지학적 고찰을 해봐도 어느 쪽 팸플릿이 시기적으로 앞서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아무튼, 확실한 사실은 에도와 오사카 등 일본 각지에서 쇠고기 환약의 원조 경쟁이 있었고, 쇠고기의 맛은 이렇듯 은밀하지만 강렬하게 일본인을 유혹했다는 것이다.



‘쇠고기’ 하면 조선




중근세 일본에서는 약은 대륙에서 건너온 것이 용하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앞에서 소개한 [에도 가이모노 히토리 안나이]에 실려 있는 대부분의 약도 중국이나 한국에서 건너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들 약 대부분이 중국 기원을 주장하는 가운데, 인삼과 우황청심원(우황청심‘환’이 아니라) 그리고 쇠고기 환약은 특별히 조선 기원을 주장한다.

쇠고기 환약이 전해진 경로는 다양하게 추정해볼 수 있다. 쇠고기 환약은 일본에서 일찍이 [본초강목]등에 실린 제법을 통해 제조되기도 했고, 앞서 소개했듯이 조선의 의사로부터 환약 제조법을 배웠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본격적으로 ‘조선 하면 쇠고기 환약’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고 선전한 곳이 바로 쓰시마인 것 같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1796년에 부산 왜관의 일본인 관리였던 야마자키 나오나가(山崎尚長)가 필사본을 집필하고 1854년에 일본의 주요 도시에서 동시 출간된 임진왜란 문헌 [조선정토시말기(朝鮮征討始末記)]를 보자.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의 두 왕자와 궁녀들을 잡았는데 한 궁녀가 목에 쇠고기 육포(牛の脯)를 걸고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는 이야기에 이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단다.




(조선인들은) 조선의 쇠고기가 천하에 으뜸이라고 말한다. 화관(和館, 왜관의 일본측 표현)의 하인들이 이를 교역하여 도시에서 판다. 환약으로 만들어 복용한다. 비장과 신장에 잘 듣고 허한 기운을 보해주는 좋은 약이라는 것은 널리 세상에 알려진 바다. 요즘 쓰시마번의 에도 저택 근처에 있는 무라 씨(村氏)가 만드는 환약이 가장 효과가 좋다.

[조선정토시말기]는 무라 구라지로(村倉治郎)라는 쓰시마 사람이 소장한 판목(対州村氏蔵板)을 이용해 교토ㆍ오사카ㆍ에도의 주요 출판사들이 동시 출간한 책이다. 그리고 위의 인용문에 보이는, 쇠고기 환약을 파는 에도의 무라 씨는 이 책의 판목을 소장한 무라 구라지로와 동일 인물이거나 적어도 그 일족인 듯하다. 그렇다면 책에서 조선 쇠고기 환약을 간접광고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임진왜란 때의 쇠고기 육포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조선 쇠고기 환약 이야기를 꺼내고 간접광고까지 하는 걸 보면, 당시 쓰시마 사람들은 조선 쇠고기 환약을 잘 알고 있었고 자랑스러워했던 것 같다. 쓰시마 사람들은, 통신사 사신들이 쇠고기를 좋아하니 준비할 것을 주문하는 [통신사 통과 경로 비망록. - 부록: 조선인이 좋아하는 음식 필사(信使通筋覚書朝鮮人好物附之写)]와 같은 문서를 각 번에 발송하기도 했다.



쇠고기 환약의 인기는 시대를 넘어




독립된 우육환 광고와 상점 안내서의 사례를 앞에서 소개했지만, 에도시대와 메이지시대의 소설 권말에도 조선 우육환의 광고가 보인다. 에도시대에는 소설 집필만으로는 먹고살기 어려웠기 때문에, 소설가들은 겸업으로 각종 약품이나 담배, 향수 등을 판매하면서 자기 책에 그 광고를 싣곤 했다. 그런데 소메자키 노부후사(染崎延房, 1818∼1886)라는 소설가가 19세기 중반에 집필한 통속소설의 권말에는 조선 우육환 광고가 보인다. 광고 말미에 “쓰시마 저택 소메자키 씨 제조(対州屋敷染崎氏製)”라고 적혀 있어서 앞서 소개한 여러 제조인들과는 겹치지 않고, 광고 문안 또한 앞의 것들과 다르다. 아마도 저자 또는 출판사가 부업으로 약을 만들어 판 것 같다.



14547415567328



소메자키 노부후사의 통속소설 [아쓰게쇼 만넨시마다(厚化粧万年嶋田)]의 앞, 뒤 표지와 권말의 조선 우육환 광고(개인 소장). 광고는 오른쪽 페이지의 왼쪽 상단에 자리한 가로로 긴 사각형 부분에 실려 있다.


한편, 에도시대의 목판을 활용해서 메이지 초기에 인쇄된 군담류에서도 조선 우육환 광고가 발견된다. [이시카와 고에몬 일대기(石川五右衛門一代記)]나 우타가와 요시토라(歌川芳虎)가 그림을 그리고 쓰지오카야 분스케(辻岡屋文助)가 출판한 [명가 백합전(名歌百合戦)] 등의 권말에는 조선우육환 광고가 실려 있다. 이 광고 문구에서 흥미로운 점은, 목판이 많이 문드러져 있어서 약효에 관한 설명 내용을 거의 알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당시 사람들은 우육환이라는 이름만 보고 약이라기보다 쇠고기를 샀던 것이기에 효능서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14547415569124



[명가 백합전]의 앞뒤 표지와 권말의 조선 우육환 광고(개인 소장). 인쇄 상태가 나빠서 글자를 읽기가 힘들다.


쓰지오카야 분스케의 조선 우육환 광고 문구는 크게 보아 다나카 기치에몬의 전단 문구와 같다. 더욱이 쓰시오카야 분스케는 다나카 기치에몬과 마찬가지로 요코야마초 산초메에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정황에서 판단하면, 쓰지오카야 분스케는 다나카 기치에몬의 후예거나 최소한 조선 쇠고기 환약을 판매할 권리를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에도시대에 조선 쇠고기 환약의 원조로 자칭하던 가게의 흐름은 근대 초기까지 면면히 이어졌다. 그와 함께, 은밀한 즐거움으로서 인기를 끌던 조선 쇠고기 환약의 기억 역시,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격변기에도 살아남아 근대 초기까지 이어졌다. 이런 의미에서, 가나가키 로분이 [아구라나베]를 통해 진정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육식의 금기가 풀렸다는 기쁨이라기보다는, 지금껏 쩨쩨하고 감질나게 환약으로만 먹어온 쇠고기를 이제는 문명개화된 세상에서 다양하게 요리해서 당당히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이었으리라.

 

'18세기의 맛'은 한국18세기학회의 기획으로서, 문학동네와 함께 합니다.  14547415569756.jpg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14547415570385.jpg





14547415571368

김시덕 | 서울대학교 연구원
고문헌과 고문서 연구를 통해 전근대 일본의 대외전쟁 담론을 추적하고 있다. 2010년 일본에서 간행한 [이국정벌전기의 세계―한반도ㆍ류큐열도ㆍ에조치](가사마쇼인)로 제4회 일본 고전문학학술상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하였다. 2011년에 일본에서 간행한 2인 공저 [히데요시의 대외 전쟁](가사마쇼인)은 제2777회 일본 도서관협회 추천도서로 선정되었다. 단행본 [그들이 본 임진왜란―근세 일본의 베스트셀러와 전쟁의 기억], [한 경계인의 고독과 중얼거림]을 비롯한 10여 종의 단행본, 공저, 번역서와 40여 편의 논문을 출간하였다.

저자의 책 보러가기
|
인물정보 더보기



14547415572013

출처
18세기의 맛: 취향의 탄생과 혀끝의 인문학 2014.02.28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의 18세기를 다채롭고 참신한 시각으로 연구하는 한국18세기의 학회의 첫 프로젝트 결과물, <18세기의 맛>이 책으로 나왔다. 18세기의 '맛'을 중심으로 세계사의 흥미로운 단면을 맛깔나게 서술했다. 23명 인문학자의 시각으로 18세기의 동서양을 뒤흔든 맛과 그 맛에 얽힌 흥미로운 현상을 살펴보는 일에 동참해보자.

책정보 보러가기


발행2012.12.0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