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불멸의 초상, 어진 - 화염 속으로 사라져 잊혀진 왕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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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87회 작성일 16-02-06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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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실에서 가장 소중히 여긴 그림은 무엇일까? 아마도 왕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이 아닐까 싶다. 어진만큼 군신(君臣)이 함께 논의하며 공력을 들인 그림이 또 있을까? 경험 많은 최고 수준의 화가에게 그림을 맡겼고, 왕과 신하들은 그 과정을 지켜보며 완성의 순간까지 긴장을 놓지 못했다. 역대 임금의 실존적 모습을 담은 어진. 단연 조선 왕조의 주요 표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어진은 우리에게 그만큼 깊은 존재감을 주지 못했다. 현존하는 어진이 불과 몇 점에 지나지 않고, 그나마도 잘 알려지지 못한 탓이다. 우리 문화사에 빛나는 초상예술의 결정체라 할 그 많은 어진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약 60여 년 전 화재의 현장을 담은 한 장의 사진에 함축된다. 문화재의 망실(亡失: 잃어버려 없어짐)은 그 가치만큼이나 역사의 기억을 송두리째 앗아간다. 저 사진 속의 화재가 있던 날이 그랬다.(그림 1) 너무 오랫동안 잊혀온 참담한 어진의 실상, 이 한 장의 사진은 어진의 마지막 역사와 남겨진 흔적들을 다시금 되돌아봐야 하는 이유를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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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어진의 보관처가 있던 부산 용두산 화재 장면(1954년 12월 10일).



1954년의 부산 화재와 어진의 소실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 지내던 건물을 진전(眞殿)이라 한다. 조선 왕조의 진전은 숙종 대부터 본격적인 정비와 관리가 이루어져 어진의 역사를 새롭게 써나갔다.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과 영희전(永禧殿) 등에 진전이 증축되고 어진이 걸렸다. 이처럼 어진의 전통은 조선 왕조의 마지막까지 진전을 통해 유지되고 거듭났다. 그러나 1908년 7월, 일제 통감부는 진전의 통합 관리를 명분으로 여러 처소에 있던 어진을 창덕궁의 선원전(璿源殿)으로 옮기게 했다. 그 뒤 일제 강점기인 1921년에는 창덕궁에 신선원전(新璿源殿)을 지어 구선원전 등에 있던 나머지 어진을 모두 옮겨와 총 11임금의 어진이 이곳에 봉안되었다.(그림 2) 이는 왕실의 의례문화를 축소하고 약화시키기 위한 정책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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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창덕궁 신선원전의 내부(2008년).


1950년의 한국전쟁 초기, 각 궁궐에 있던 유물은 포화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이에 창덕궁 내의 구황실재산관리총국은 신선원전의 어진을 비롯한 상당수의 왕실 유물을 비밀리에 부산으로 옮겼다. 그 과정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국립박물관과 덕수궁미술관의 유물이 1950년 11월경 부산으로 옮겨진 것을 보면, 창덕궁의 왕실 유물도 이 무렵에 이송된 것으로 추측된다. 신선원전을 떠난 어진은 부산시 동광동 소재 부산국악원(釜山國樂院) 내 벽돌식 창고 건물에 임시로 보관되었다. ‘창고’라고 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전쟁의 와중이긴 하지만, 굳이 창고밖에 없었을까? 어쨌든 다행스럽게도 휴전을 맺을 때까지 대부분의 유물은 온전했다. 그러나 휴전 이후 어진을 비롯한 유물을 서울로 옮기기 위한 계획을 세우던 무렵 예측지 못한 불행이 그 행로를 막았다.

1954년 12월 10일 새벽, 어진이 보관된 용두산 일대의 동광동 피난민 판자촌에 화재가 발생했다.(그림 4) 때마침 불어닥친 강풍으로 인해 불길은 판자촌을 전소시키고, 순식간에 어진이 있던 창고로 번졌다. 엄청난 화재의 위세에 어진을 포함한 왕실 유물은 속수무책으로 불탈 수밖에 없었다. 당시 부산일보(1954. 12. 10.)의 보도에 따르면, 이 화재로 어진을 포함한 약 3,400여 점의 궁중 유물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날 거기에 있던 3천여 점이 넘는 유물은 목록조차 정리되지 못한 채로 화염 속에 묻혔다. 안전지대로 믿었던 부산의 보관처는 끝내 유물의 안전을 지키지 못했다. 불길 속에서 건져낸 어진은 불과 7점 정도였다. 조선 왕조의 어진은 그렇게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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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화재로 소실된 어진과 관련한 1955년 1월 6일자 경향신문 기사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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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화재 직전의 동광동 용두산 일대의 판자촌. 어진이 보관된 부산국악원이 이 근처에 있었다.



어진의 소실(燒失)과 관련하여 가장 궁금한 것은 당시의 화재 현장에 몇 점의 어진이 남아 있었나 하는 점이다. 이를 알려주는 당시의 조사 기록이나 보고서는 전하지 않는다. 아마도 구황실재산관리총국에 관련 기록이 있었겠지만, 1960년 7월에 의문의 화재로 인해 서류 일체가 불타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어진의 가치를 가늠하고 역사의 교훈을 위해서는 사라진 어진의 현황만큼은 파악되어야 한다. 1955년 1월 6일자 경향신문(그림 3)에는 구황실재산관리총국과 치안국에서 화재로 소실된 어진이 “12대 임금 어진영(御眞影)”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조선 왕조 27대 임금 가운데 12대 임금의 어진만이 구한말까지 남아 있었고, 이 어진들이 부산으로 옮겨져 보관 창고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1935년 신선원전 어진의 수리 과정을 기록한 [선원전 영정 수개 등록(璿源殿影幀修改謄錄)]에도 12개 감실에 있던 12대 임금의 어진이 모두 46점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등록에 수록된 ‘어영정 수보공정 명세서(御影幀修補工程明細書)’에 적힌 12대 어진의 명칭과 수량을 정리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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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원전 어진 봉안 현황(1935년)


한 임금의 어진이 적게는 1점, 많게는 9점이나 되었다. 여러 봉안처의 어진을 모아놓았기에 동일한 복식을 한 사례가 많다. 익선관(翼善冠)본이 가장 많고, 면복(冕服), 원유관(遠遊冠), 군복 등을 착용한 어진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어진 수리가 있던 1935년과 이듬해에 걸친 약 10개월간 세조와 원종(元宗) 어진의 이모(移模: 원본의 초상을 똑같이 베껴 그린 그림)가 있었다. 따라서 1936년에는 이 2점을 포함하여 모두 48점의 어진이 신선원전에 최종 봉안되었던 것이다. 1950년에 부산으로 옮겨진 어진은 바로 이 48점이 확실시되고, 부산의 현지에서도 흩어지지 않고 일괄 보관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왕조 27대의 임금 모두가 어진을 남기지는 않았다.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선조 대 이전의 어진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태조 어진과 세조 어진은 봉안처가 궁궐 밖이었기에 이모본(移模本)과 원본으로 전해질 수 있었다. 1936년 선원전에 최종 봉안되었던 어진 가운데 태조, 세조, 원종의 어진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숙종 대 이후 임금의 어진에 해당한다.


화염 속에서 구해낸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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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태조 어진〉
1900년 이모(移模), 비단에 채색,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1954년 12월 10일의 부산 화재 현장에서 구해낸 6점의 어진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태조 어진〉(1900년 이모(移模)), 〈영조 어진〉(1900년 이모), 〈철종 어진〉(1861년), 〈순조 어진〉(1900년 이모), 〈익종 어진〉(1900년 이모) 등이며, 최근 공신도상(功臣圖像) 형식의 〈원종 어진〉(1936년 이모)이 오른쪽 부분이 손상된 채로 전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임금의 얼굴인 용안(龍顔)이 보존된 것은 〈영조 어진〉과 〈철종 어진〉 2점뿐이다. 나머지 어진은 용안이 훼손되고 전체의 절반 이상이 없어진 상태이다. 불탄 어진을 살펴보면, 족자로 말려 있던 상태로 불이 붙었고, 화면의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불길이 번지는 도중에 건져내었음을 알게 된다. 다행히 어진의 오른쪽 상단에 표제(標題)가 붙어 있어 초상의 주인공을 식별할 수 있다. 만약 어진의 오른쪽부터 불길이 미쳤다면 표제가 타버려 어느 왕의 어진인지 알 수가 없다. 현존하는 〈태조 어진〉, 〈영조 어진〉과 〈철종 어진〉의 특징을 통해 당시 화재로 사라진 어진의 일면이나마 미루어 짐작해보자.

〈태조 어진〉은 용안을 포함한 화면의 왼편 3분의 2 정도가 화재로 훼손되었다.(그림 5) 1900년 윤8월 경운궁 선원전의 화재로 잃어버린 7임금의 어진을 복원하고자 그해 12월에 다시 그린 이모본이다. 어진의 오른쪽 상단에 “光武四年(광무 4년) 庚子(경자, 1900) 移模(이모)”라 적혀 있다. 영흥 준원전(濬源殿)에 있던 1837년(헌종 3)의 이모본 태조 어진이 모사의 대본이었다. 그런데 태조 어진의 홍색 곤룡포가 생소하다. 잘 알려진 전주의 경기전(慶基殿)본은 청색이지 않은가? 1837년 준원전의 태조 어진을 이모할 때, 헌종(憲宗)이 곤룡포의 색상을 홍색으로 바꾸어 그리도록 했다. 그것이 헌종 자신이 입고 있는 색상처럼 현실에 맞다는 이유였다. 훼손된 〈태조 어진〉의 홍색 곤룡포는 준원전본을 대본으로 그린 결과이다.

〈영조 어진〉도 1900년 경운궁의 화재로 망실된 자리에 걸고자 이모한 본이다.(그림 6) 어진의 왼편에 불길이 약간 스쳐간 자국이 있고, 오른편은 불을 끄는 와중에 물이 스며들어 표제의 붉은색이 화면에 묻어나 있다. 화재 당시의 급박했던 순간을 떠올려 주는 흔적들이다. 이모본의 대본이 된 것은 1744년(영조 20)에 그려 육상궁(毓祥宮)에 봉안했던 영조의 51세 반신상이다. 영조는 특별히 이 반신상 어진을 매우 흡족히 여겼다. 신하들에게 꺼내 보이며 근래의 기쁜 일 중의 하나가 이 화상이 자신을 닮은 것이라 했다.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에 봉안할 그림이라 그랬을까? 그런데 영조는 자신이 50세를 넘어서까지 살게 되리라 확신하지 못했다. 이 육상궁 봉안본을 생의 마지막 초상이라 여긴 듯하다. 신하들에게 이 어진을 보일 때면 마치 자신을 대하듯 자신의 저술과 업적을 기억해주기를 당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조는 이후 30년을 더 살며, 10년마다 한 차례씩 어진을 그리는 전통과 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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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조석진ㆍ채용신 등, 〈영조 어진〉 부분.
1900년 이모, 비단에 채색, 110.5×61.8㎝,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보물 제9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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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1 드라마 <이산>의 영조.
<출처: 연합뉴스>



〈영조 어진〉은 사극에 등장하는 영조의 가장 표준적인 이미지로 다뤄진다.(그림 6-1) 복식의 고증은 물론 냉철한 표정과 완고한 성격 등 내면의 분위기까지 이 〈영조 어진〉에서 실존적 근거를 찾는다. 어떻게 보면, 〈영조 어진〉은 아주 세련된 화법의 초상화라 할 수는 없다. 음영법을 적용한 세밀한 묘사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이는 주관화사(主管畫師)를 맡은 채용신(蔡龍臣)과 조석진(趙錫晉)이 원화를 충실히 이모했음을 말해준다. 그 때문인지 〈영조 어진〉에는 시선을 사로잡는 사실적 완성도보다 오히려 영조의 성정과 내면세계가 잔잔히 드러난 듯하다. 영조가 이 그림의 원본인 육상궁 봉안본[1744년 도사(圖寫)]을 흡족히 여기고 호평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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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7 이한철ㆍ조중묵 등, 〈철종 어진〉.1861년, 비단에 채색, 202.2×107.2㎝,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보물 제1492호.





| 그림 7-1 <철종 어진> 부분.




1861년(철종 12)에 그린 군복본 〈철종 어진〉은 왼편 3분의 1 정도가 불타 없어진 상태다.(그림 7) 입술 부위에도 불길이 튀어 상처를 냈지만, 전체 용안을 파악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판중추부사 이유원(李裕元)은 이 군복본 어진을 마주할 때면, 마치 대궐의 난간에서 임금의 말씀을 듣는 듯하다고 했다. 보는 사람을 압도할 만큼 실존감이 잘 살아난 초상이라는 말이다. 당시 주관화사인 이한철(李漢喆)이 용안을 그렸고, 7명의 이름난 화원들이 복식과 배경을 맡았기에 묘사가 극히 정교하고 치밀하다. 다만 눈동자를 유난히 크고 동그랗게 그린 부분이 좀 인상적이다.(그림 7-1) 물론 실제 모습대로 그렸겠지만, 불길에 당황한 듯한 표정을 연상하게 하여 놀라움을 준다.

〈영조 어진〉이 영조 특유의 분위기와 외모를 잘 살린 초상이라면, 〈철종 어진〉은 용안과 복식 등의 사실적 묘사에 치중했다. 이는 어진을 포함한 초상화의 기본 요건인 ‘정신’과 ‘형상’의 두 요소가 어떻게 결합하며, 또 강조되었는가를 예시해주고 있다.


사진 속에 걸린 세조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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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세조 어진 모사 장면(19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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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1 좌측 사진 속의 세조 어진.



1936년 조선왕조에서는 세조(世祖, 1417~1468) 어진과 원종(元宗, 1580~1619, 인조의 아버지) 어진을 각 한 점씩 이모하였다. 당시의 이모 장면을 촬영한 흑백사진 한 장이 전한다.(그림 8) 사진 속의 화필을 잡은 이는 조선 왕조의 마지막 어진화사로 알려진 김은호(金殷鎬, 1892~1979) 화백이다. 사진에는 아무 기록이 없지만, 그가 마무리에 열중하는 초상은 세조 어진이다. 1872년(고종 9) 1월, 고종이 선원전의 세조 어진을 둘러보며 “옛날의 신발은 흰 가죽으로 만들었는가?”라고 묻는 대목이 나온다. 사진 속의 임시 봉안 시설인 가당가(假唐家) 안에 걸린 어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자.(그림 8-1) 희미한 상태지만, 흥미롭게도 어진은 흰색 가죽신인 백피혜(白皮鞋)를 신었다. 앞서 고종이 질문을 던진 어진이 바로 이 사진 속의 세조 어진이다.

그렇다면 사진 속에 걸린 구본(舊本) 세조 어진에는 어떤 사연이 감추어져 있을까? 1735년(영조 11) 7월, 영조는 신하들과 의논하여 영희전에 세조 어진을 모사하여 봉안하기로 했다. 놀랍게도 모사의 원본은 세조가 살았을 때 그린, 3백 년이 넘은 어진이었다. 형상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나빴던 것이 모사를 하게 된 이유였다. 임진왜란 이전의 어진은 모두 망실되었다고 했는데, 세조 어진의 원본은 어떻게 전해졌을까? 수난으로 얼룩진 전세(傳世: 대대로 전해짐)의 사연을 알아보자.

1468년(세조 14) 세조가 승하하자 예종(睿宗, 1450~1469)은 광릉(光陵)을 조성하고 능침사찰로 봉선사(奉先寺)를 중창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생존 시에 그린 세조 어진 한 점을 봉안하였다. 이 세조 어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몇 차례나 사라질 위기를 넘겼다. 1593년(선조 26) 3월, 봉선사에 왜적이 주둔하자 승려 삼행(三行)과 광릉참봉이 봉선사로 잠입하여 세조 어진을 받들어 나왔고, 이를 의주의 행재소로 옮겼다고 한다. 전란이 끝난 뒤 다시 서울의 남별전에 봉안되었다. 또한 병자호란 때는 강화도의 영숭전(永崇殿)으로 세조 어진을 모셨지만, 1637년(인조 15) 2월 강도(江都)가 함락될 때 어진을 분실하는 사고를 당했다. 그러나 이내 성 밖에서 극적으로 찾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세조 어진은 심각한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중수(重修: 건축물을 손질하여 고침)를 마친 남별전에 다시 봉안되었다. 이후 새로 이모한 기록은 보이지 않고, 약간의 보수만 한 채로 남아 있었다.

영조는 세조 어진의 이모를 앞두고 “300년을 봉안해온 영정이 하루아침에 훼손되고 나면 바라보고 정리(情理: 인정과 도리)를 펼 곳이 없게 된다”고 했다. 두 차례의 전란으로 심하게 망가진 세조 어진을 처음 이모한 것은 1735년(영조 11)이다. 이때 이모한 세조 어진이 바로 사진 속 가당가(假唐家) 안에 걸린 초상이다. 이 어진은 조선 초기 어진의 원본 형식을 담고 있어 희미한 사진 상태만으로도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영조는 유난히 〈세조 어진〉에 관심이 많았다. 1735년 9월 10일, 영조가 완성된 이모본 세조 어진을 살펴본 기록은 매우 흥미롭다. 우선 영조의 관심은 용안에 집중되었고, 몇 가지 보완할 점을 화사 이치(14547416019667.jpg)에게 지시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용안의 눈동자와 눈썹의 끝이 희미하니 먹을 더 올릴 것, 오른쪽 볼에 닳은 듯한 자국을 없앨 것, 용안에 흰색기가 많으니 홍색조를 더 채색할 것, 볼 아래에 채색이 약하니 가채할 것 등을 명하였다. 안경을 쓴 이치가 시력에 자신없어하자 수종화사 장득만(張得萬)이 붓을 잡아 성공적으로 수정을 마쳤다. 영조는 대단히 기뻐하며 다행스러운 일이라 했다. 완성된 어진에 이처럼 보정을 가하는 예는 매우 드물다. 위험이 따르는 일이지만, 영조는 세심한 자신의 판단을 양보하지 않았다.

사진을 통해 본 세조 어진은 정면의 모습을 취한 점, 앉은 의자가 교의자(交椅子)인 점, 소매가 좁은 축수형(縮袖形)의 곤룡포, 바닥의 채전(彩氈) 문양, 어진 좌우에 걸쳐진 유소(流蘇)가 길게 드리워진 점 등이 주요 특징이다. 15세기 어진의 특색을 어렴풋하게나마 만나볼 수 있는 유일한 형상이다. 세조 어진과 원종 어진은 한 점만이 전하는 유일본이어서 이모본의 제작이 왕가의 시급한 과제였다. 모사를 무사히 마친 화사 김은호에게 사례금 1,500엔, 상여금 100엔, 조수 장봉운에게는 수당 200엔, 상여금 20엔이 지급되었다.


사진으로 남은 순종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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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순종 어진 모사 장면(19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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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0 김은호, 〈순종 어진〉
1928년 이모, 비단에 채색.



순종 어진과 관련된 사진은 2점이 전한다. 하나는 1928년 김은호가 순종(純宗, 1874~1926)의 어진을 모사하는 장면이고,(그림 9) 다른 하나는 완성된 순종 어진의 사진이다.(그림 10) [순종실록 부록] 1928년 7월 6일 조에는 어진을 선원전에 봉안한 기록이 있다. 또한 순종 어진의 모사 과정을 기록한 <어진 모사 급 봉안 일기(御眞摹寫及奉安日記)>(1928)가 남아 있어 더 자세한 사실을 고증해낼 수 있다.

순종은 재위 기간(1907~1910)에 1점의 어진도 남기지 못했다. 순종이 29세(1902) 때인 황태자 시절에 그린 초상은 많지만, 이를 어진으로 대체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1928년의 순종 어진은 무엇에 근거하여 그린 것일까? 1909년(36세)에 군복을 입고 촬영한 순종의 사진이 남아 있어 이를 모사의 범본(範本: 본보기)으로 삼았다. 정확히 말하면, 사진에서 순종의 얼굴만을 취하였고, 나머지 부분은 황룡포와 익선관을 착용한 모습으로 바꾸어 그렸다. 군복을 입은 모습으로 신선원전에 봉안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순종 어진〉은 순종이 승하한 이후에 모사한 것이지만, 사진을 통해 얼굴 모습을 정확하게 재현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순종 어진〉은 신선원전에 봉안되었으나, 1954년의 화재 현장을 끝내 피해 나오지 못했다. 흑백사진 한 장으로 남은 마지막 황제의 초상이다.


글을 맺으며




화재만큼 우리 문화재를 허망하게 만든 악재는 없을 것이다. 가까이는 수년 전 숭례문의 실화를 통해 경험했듯이 화마는 돌이킬 수 없는 참담함만을 남긴다. 특히 어진은 역대 임금의 실존적 모습을 담은 초상화이기에 그것의 망실은 더욱 큰 아쉬움으로 각인된다.

12대 임금의 어진 48점 가운데, 어진이 아닌 〈연잉군 초상〉 한 점을 더한 7점이 1954년 12월 부산 화재의 현장에서 구해졌고, 나머지 41점의 어진은 한 줌의 재로 사라졌다. 1935년에 작성된 ‘어영정 수보공정 명세서’를 토대로 파악한 어진 48점의 제작 시기를 각 왕대별로 추적해보면, 각 어진이 그려진 도사와 이모의 시점이 어느 정도 파악된다. 48점 가운데 제작 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어진은 1713년(숙종 39)에 그린 숙종의 소본(小本) 익선관본이다. 가장 마지막으로 그린 것은 1928년에 그린 순종 어진이고, 이모본으로는 1936년에 그린 세조와 원종 어진이 있다. 화재 이전에 남아 있던 48점의 어진이 지닌 역사와 내력을 추적해 보는 것이 남은 과제이다.

한국전쟁으로 신선원전을 떠난 어진은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올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 왕조의 어진이 멸실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지금 경기전의 〈태조 어진〉과 화재 현장에서 구한 〈영조 어진〉, 〈철종 어진〉 등이 남아 있고, 어진의 도사(圖寫)와 이모(移模)의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의궤(儀軌), 어진 화사에 대한 사료, 또한 그들이 남긴 수준 높은 사대부 초상들이 전한다. 이러한 수많은 관련 기록은 왕과 신하, 그리고 화사들 간에 이루어진 그 치밀하고도 생생한 어진 도화의 현장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해준다. 이처럼 어진의 공백을 메워주는 방대한 기록 유산과 높은 예술적 성취를 이룬 초상화의 전통은 조선 왕조의 어진을 여전히 잊힐 수 없는 ‘불멸의 초상’으로 남아 있게 한다.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태학사와 손을 잡고<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를 연재한다. 그림에 숨은 비밀과 사연을 프리즘으로 삼아 한국학의 출렁이는 바다로 여행을 떠나려는 것이다. 문학, 미술, 음악, 철학, 역사, 문화가 망라되는 항해에 깊고 진한 교감이 깃든 풍성한 바다가 펼쳐지길 해신(海神)에게 기도한다. 연재는 매주 1회 돛을 달고 항구를 떠난다.   14547416041608.png  http://www.thaehaksa.com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도서 출간
네이버캐스트에 연재되었던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시리즈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우리 시대 인문학자 32인이 옛 그림을 호명해 되살려낸 한국학 읽기의 색다른 즐거움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윤진영 |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조선 왕실과 관련된 미술문화를 꾸준히 탐구하고 있다. 최근에는 기록을 목적으로 그려진 다양한 자료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화가의 시각과 회화 양식 등 시각문화와 관련된 현상을 인문적 담론으로 조망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공저로 [조선왕실의 미술문화](2006), [조선시대 책의 문화사](2009), [권력과 은둔](2010), [한강의 섬](2010), [왕과 국가의 회화](2011), [조선 왕실의 그림](2012) 등과 여러 편의 논문이 있다.


발행2012.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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