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승정원일기 - 세계 최대 기록유산의 새로운 발견과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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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81회 작성일 16-02-06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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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는 가장 직접적이고 내밀한 기록의 하나다. 일기의 그런 직접성과 내밀함은 그 작성자가 원칙적으로 자신만을 독자로 상정하고 쓴다는 목적과 형식의 독특함에서 연유한다. 자신의 일기를 누군가 읽었을 때 민망함이나 짜증, 분노 같은 감정이 밀려오는 것은 일기의 바로 그런 일차적인 특징이 침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일기 중에는, 적극적이지는 않더라도, 공개를 예상하거나 목표로 쓴 것도 적지 않다. 그런 일기는 대체로 그 작성자의 현실적 위상이나 명망과 관련되어 있다. 조선시대 이이의 [경연일기(經筵日記)]나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의 [행복한 책읽기](1992)처럼 지금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기들이 거기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니, 세상의 거의 모든 일처럼, 일기의 성격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오는 요소는 그 작성의 주체다. 그 작성자가 사적 개인이 아닌 공적 기관으로 바뀔 때 일기의 성격은 가장 본질적으로 변화한다. 그때 일기는 ‘업무일지’, 나아가 ‘연대기’의 하나가 된다.

여기서 살펴볼 [승정원일기](국보 제303호)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역사 기록의 하나다. 그 풍부한 내용과 정확한 서술은 2001년 9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됨으로써 그 가치를 확고히 인정받았다.



작성자와 작성 방법




[승정원일기](이하 [일기])는 말 그대로 승정원(承政院)에서 작성한 업무일지다. 잘 알듯이 승정원은 조선시대 국왕의 비서실로 승지 6명(정3품 당상관), 주서 2명(注書. 정7품), 서리 28명으로 구성된 관서였다.

종신의 임기와 왕통에 따른 계승이라는 기본적 특성에서 드러나듯이, 전근대 왕정에서 국왕의 권력은 근대 공화국(또는 그 밖의 정치체제)의 국가수반보다 훨씬 컸다. 조선시대의 국왕은 일반적인 주요 국무는 물론 소송이나 풍습에 관련된 판정처럼, 지금으로 보면 매우 특수한 분야까지 처결했다. 그러므로 국왕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면서 그리로 들고 나오는 모든 문서를 관장한 승정원의 일기가 당시의 가장 포괄적이고 핵심적인 국정 기록이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승정원의 중심은 도승지부터 동부승지에 이르는 6명의 승지였지만, [일기]의 작성은 2명의 주서가 담당했다. 조선시대에 공식적인 사관은 예문관의 봉교(奉敎. 정7품. 2명)ㆍ대교(待敎. 정8품. 2명)ㆍ검열(檢閱. 정9품. 4명)이었는데(이 8명을 ‘한림〔翰林〕’이라고 불렀다), 주서는 그들과 동일한 지위와 기능을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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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303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승정원일기]의 일부. 하루 동안 국왕이 신하들과 국정을 논의한 내용을 모두 받아 적고 상소를 정리해 보통 한 달 단위로 묶어 책으로 만들었다.


두 주서는 매일 상ㆍ하번으로 나눠 국왕이 신하들과 국정을 논의하고 처결하는 모든 자리에 입시(入侍: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뵘)해 그 내용을 기록했다. 어떤 기계의 도움도 받을 수 없던 그때, 대화를 기록하는 방법은 그저 붓으로 최대한 빠르게 쓰는 것이었다. 지금도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통역하는 일은 쉽지 않은데, 음성으로 발설된 한국어를 전혀 다른 표현 수단인 한자로 그 자리에서 바꿔 적는 작업의 어려움은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주서와 한림은 국왕과 신하의 대화를 일단 될 수 있는 대로 모두 받아 적어 속기록에 해당하는 초책(草冊)을 만들었고, 그날그날 기억을 더듬거나 다른 사관의 기록과 대조해 그 내용을 보충했다. 상소처럼 서면으로 된 문서는 서리가 베꼈다. 이 두 자료를 합쳐 하루치의 일기를 완성했고, 그것을 보통 한 달(또는 반 달)씩 묶어 책으로 만들었다. 그 표지에는 그 일기가 해당하는 연월일을 적어 승정원에 보관했다.



구성과 내용




매일의 [일기]는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제일 첫머리에는, 여느 일기들처럼, 날짜와 날씨를 적었다.

② 그 다음에는 그날 근무한 승지와 주서의 이름을 기록했는데, 이것을 ‘좌목(座目)’이라고 한다.

③ 세 번째 부분에는 가장 중요한 존재인 국왕의 소재(예컨대 “주상이 창덕궁에 계셨다〔上在昌德宮〕”)와 상참(常參)ㆍ경연(經筵)의 참석 상황, 그리고 국왕을 비롯한 왕비ㆍ대비ㆍ세자 등의 안부가 나온다. 여기까지는 거의 동일하게 반복되는 정형적 부분이다.

④ 끝으로, 일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그날의 국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매우 다양한데, 각 관서에서 국왕에게 올린 문서와 거기에 대한 국왕의 처결, 인사행정, 여러 상소와 장계, 국왕의 거둥(擧動: 임금의 나들이)과 행사 등 국왕이 관련된 거의 모든 업무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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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 5년 9월 3일의 기사로 [승정원일기]의 구성을 보여준다. 매일의 [일기]는 이런 형식으로 기록되었다.


[일기]는 대부분 국왕이 거처한 도성의 궁궐에서 작성되었지만, 국왕이 다른 곳으로 거둥할 경우는 현지와 도성에서 각각 씌어졌다. 예컨대 현종은 재위 10년(1669) 3월 15일부터 4월 18일까지 눈병과 피부병을 치료하려고 온양온천으로 행차했는데, 그때 [일기]는 도성과 온양에서 작성되어 나중에 합본되었다. 그 기간 동안 [일기]의 첫머리는 “주상이 온양행궁에 계셨다(上在溫陽行宮)”이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방대한 분량




[일기]의 여러 특징과 가치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측면은 그 방대함일 것이다. [일기]는 조선 초기부터 작성되었지만, 광해군 이전 부분은 임진왜란과 이괄(李适)의 난(인조 2년, 1624)ㆍ병자호란 등으로 소실되었고, 지금은 인조 1년(1623) 3월부터 순종 융희 4년(1910) 8월까지 288년 치만 남아 있다. 그 분량은 3,245책으로 약 2억 3천만 자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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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남아있는 [일기]의 맨 첫 부분인 인조 1년 3월 12일의 기사다. 2억 3천만 자(字)에 이르는 방대한 [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 수치의 방대함은 다른 기록들과 비교하면 금방 느껴진다. 같은 시대의 또 다른 대표적 연대기인 [조선왕조실록]은 888책, 약 5천만 자인데, 비교하면 [일기]는 실록의 약 4.6배가 된다. 더구나 이 수치는 현재 절반 밖에 남아 있지 않은 분량으로 환산한 것이니 실제로는 9배가 넘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正史)를 모은 25사(3,386책, 약 4천만 자)와 견줘도 [일기]는 5.8배가 많다. 요컨대 [일기]는, 첫머리에서 말한 대로, 세계 최대의 역사 기록 중 하나인 것이다.



풍부한 내용




[일기]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 사실은 이런 방대한 분량에 담긴 내용이 매우 풍부하다는 측면이다. 역시 수치로 먼저 접근해 보면, 예컨대 조선 후기의 중요한 현상인 ‘격쟁(擊錚: 징을 쳐서 민원을 호소하는 행위)’은 [정조실록]에 52건이 나오지만 같은 왕대의 [일기]에는 무려 27배가 많은 1,404건이 검색된다.

당시의 주요 인물에 관련된 정보도 비슷하다. 송시열은 [일기]에 3,359건, 실록에 2,713건이 나오며 송준길은 각각 1,571건과 1,404건씩 기재되어 있다. 이런 차이는 [일기]의 분량이 늘어나는 영조ㆍ정조 때로 가면 더욱 커진다. 그때의 핵심적 대신인 심환지(沈煥之. [일기] 2954건, 실록 403건)와 채제공(蔡濟恭. [일기] 6526건, 실록 902건)에 관련된 정보에서 [일기]는 실록을 압도한다.

[일기]의 풍부한 정보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실은 ‘만인소(萬人疏)’와 관련된 기사일 것이다. 말 그대로 ‘만인소’는 1만 명이 연명으로 상소한 문건이다. [일기] 정조 16년 윤4월 27일에는 경상도 유생인 유학(幼學) 이우(李瑀)ㆍ이여간(李汝榦) 등 1만 여 명이 대간을 역임한 유성한(柳星漢, 1750~1794)의 상소에 사도세자를 비판한 내용이 있으니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같은 날 [정조실록]에서는 그 사건과 관련해 “경상도 유생 이우 등 1만 57명이 상소했다(慶尙道幼學李14547416122180.png等一萬五十七人上疏)”고 전제한 뒤 상소의 본문만을 실었다. 그러나 [일기]에서는 놀랍게도 그 1만 57명의 이름을 모두 기록한 것이다. 90여 장에 걸쳐 그 수많은 이름을 빼곡히 열거한 그 자료는 철저한 기록 정신의 한 극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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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16년 윤4월 27일의 [일기]에 실린 ‘만인소’의 첫 부분으로 이런 인명이 94장에 걸쳐 나열되고 있다. [일기]의 단일 기사로는 가장 긴 사례다.


풍부한 서술은 내용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영조 46년(1770) 11월 14일의 실록에는 “전국의 누락된 세곡을 4만 석까지 탕감하라”는 전교만 간단히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같은 날짜의 [일기]에는 그 이면의 내용이 자세하게 적혀 있다.

먼저 그 전교는 진시(辰時: 오전 7~9시)에 영조가 대신들과 숭정전에서 경연을 마친 뒤 내린 것이었다. 당시 고령(76세)로 건강이 좋지 않던 영조는 경연 직후 어의들에게 진맥을 받았는데, 맥박이 정상이라는 결과를 얻자 감사와 보답의 뜻으로 백성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방책을 물었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은 세곡 탕감을 제의했고, 대신들과 긴 논의를 거쳐 그렇게 결정한 것이다.

요컨대 실록은 여러 자료에서 핵심적 내용과 결과만을 축약한 편집본이지만, 업무일지인 [일기]는 관련 사항의 전말을 모두 기록한 원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독자는 그 풍부한 서술을 읽으면서 관련된 문제의 동기와 논의된 장소, 이면의 쟁점 같은 중심적 사항은 물론, 섬세한 주의를 기울인다면, 대화에 담겨 있는 국왕과 신하들의 말투나 성품 같은 내면적 사실까지도 간취(看取: 보아서 내용을 알아차림)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하고 객관적인 서술




역사기록으로서 [일기]의 또 다른 미덕은 정확성과 객관성이다. 열람이 철저히 금지된 실록과 달리 [일기]는 어떤 문제의 전례(前例)나 사실 여부를 참고하는 데 빈번하고 필수적으로 이용되었다. 방금 지적한 대로, 그것은 실록이 주관적 개입의 개연성이 높은 편집본인데 견주어 [일기]는 상황을 거의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기록한 일지라는 기본적 차이에서 기인할 것이다.

[일기]의 이런 장점과 특징은 당쟁이 전개된 조선 후기의 민감한 정치적 사안과 관련해 특히 중요하다. 예컨대 영조 4년(1728)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인 이인좌(李麟佐)의 무신란(戊申亂)을 살펴보자. 먼저 [영조실록]은 영조와 소론이 그 진압을 주도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널리 알듯이 무신란은 경종의 급서에 반발한 남인과 소론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그 때문에 사건이 진압된 뒤 남인과 소론은 크게 위축되었고 사실상 노론의 독주가 전개되었다. [영조실록]의 내용은 그런 당파적 견해가 투영된 결과였다.

그러나 [일기]의 서술은 상당히 다르다. 거기에는 영조 초반의 주요한 소론 대신들인 이광좌(李光佐)ㆍ오명항(吳命恒)ㆍ조현명(趙顯命)ㆍ박문수(朴文秀) 등의 적극적인 대처와 활약이 충실하게 묘사되어 있다. 현대의 연구들은 [일기]의 내용이 사건의 실체에 좀더 가깝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또한 [일기]의 정확성과 객관성은 애매한 사안을 판정하는 데도 중요하게 기여했다. 창녕 조씨의 성씨 표기는 그런 흥미로운 사례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그 성씨는 중국(曹)과 달리 획수가 하나인 한자(曺)로 표기하고 있다. 그 계기는 정조 24년(1800) 4월 13일의 결정이었다.

그날 정조는 동부승지 조석중(曺錫中)에게 그 성씨의 획수가 통일되지 않은 까닭을 물었고, 조석중은 원래 한 획이었지만 자신의 6대조인 조한영(曺漢英) 때부터 두 획으로 쓰기 시작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정조는 “두 획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6대 밖에 되지 않았으니 오래 전부터 써온 대로 한 획으로 표기하라”고 지시했다. 이 기사는, 앞서 지적한 대로 당시의 국왕이 매우 특수한 문제까지 처결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 결정에 따라 그 성씨의 표기가 통일되었다는 측면에서 [일기]의 신빙성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시사 연구의 보고




[일기]는 최근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는 미시사(微視史) 연구의 보고이기도 하다. 가장 대표적인 분야는 기상 현상과 한의학 관련 내용으로 생각된다. 먼저 기상 관련 기록은 일기라는 자료의 특성상 매일의 날씨를 첫머리에 적음으로써 축적되었다. 즉 [일기]는 288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서울의 궁궐이라는 특정한 장소에서 관찰한 매일의 기상이 누적된 대단히 독특하고 희귀한 자료인 것이다.

그 내용도 매우 구체적이고 세밀하다. ‘맑음(晴)ㆍ흐림(陰)ㆍ비(雨)ㆍ눈(雪)’처럼 그날의 전체적인 날씨를 간략히 기록하기도 했지만, 변동이 심할 때는 그에 맞춰 자세히 묘사했다. 예컨대 “맑음. 묘시(오전5~7시)부터 진시(오전7~9시)까지는 안개가 끼었다(晴. 卯時辰時有霧氣. 현종 7년 10월 20일)”거나 “눈이 내리기도 하고 맑기도 했다(乍雪乍晴. 같은 해 11월 18일)”, “아침에는 맑다가 저녁에는 비가 왔다(朝晴暮雨. 인조 13년 9월 14일)”처럼 다양하고 정확하게 기재된 것이다.

이런 기상 상황은 국왕이 도성을 비웠을 때도 변함없이 기록되었다(그때는 관상감에서 기록했다가 나중에 합본했다). 앞서 살펴본 재위 10년 3월 현종이 온양으로 거둥했을 때 서울의 기상 현상은 여느 때보다 더욱 자세하게 묘사되었다.

묘시부터 진시까지 햇무리가 졌는데 양쪽에 고리가 나타났다. 사시(巳時: 오전 9~11시)에 햇무리가 졌고 왼쪽에 고리가 나타났다. 흰구름 한 줄기가 건방(乾方: 서북쪽)에서 일어나 손방(巽方: 동남쪽)으로 곧게 뻗어있었다. 길이는 10여 장, 넓이는 1척쯤이었고 해 아래에 가로로 놓여 있었다. 차츰 동쪽으로 옮겨가다가 오래 뒤에 없어졌다. 오시(午時: 오전 11~오후 1시)부터 신시(申時: 오후 3~5시)까지 햇무리가 졌다. 밤 1경(오후 7~9시)~2경(오후 9~11시)에 건방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현종 10년 3월 21일).

이런 기상 기록은 기상사라는 미시사 연구에 매우 소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자연 현상의 영향력이 지금보다 훨씬 컸던 당시의 거시적 상황을 파악하는 데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일기]의 이런 기록은 기상 현상과 밀접히 관련된 풍흉(豊凶)과 거기서 촉발된 인구ㆍ정치ㆍ경제의 변동 같은 문제에 접근하는 데도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이다.

한의학 관련 사항도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국왕이 국가와 거의 동일시되는 왕정체제에서 국왕의 건강은 국가의 안위에 직결되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따라서 국왕의 건강 상태는 날마다 꼼꼼하게 확인되었고, 국왕의 건강을 유지시키거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한 다양한 처방이 지속적으로 강구되었다.

국왕에 관련된 거의 모든 부분을 상세히 담고 있는 [일기]에서 국왕의 건강 상태는 중요한 관심사였고, 자연히 거기에 관련된 기록도 풍부하게 실려 있다. 그러니까 [일기]는 조선시대 최고 수준의 한의학 시술이 적용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상세한 임상 보고서이기도 한 것이다.

[일기]에는 당시 궁중의 의료 체계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기사가 많이 나온다. 우선 다양한 약재의 이름이 발견된다. 일일이 들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약재의 이름 중에서 명칭을 통해 그 효능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것만 몇 가지 들어보면, 탕약으로는 현재도 널리 알려진 십전대보탕을 비롯해 가감보중익기탕(加減補中益氣湯)ㆍ건비탕(健脾湯)ㆍ인삼양위탕(人蔘養胃湯) 등이 있다. 고약으로는 경옥고(瓊玉膏)ㆍ계고(鷄膏)ㆍ대황고(大黃膏)ㆍ사즙고(四汁膏) 등을, 환약으로는 청심환(淸心丸)ㆍ곤담환(滾痰丸: 가래를 뚫어주는 환약)ㆍ안신환(安神丸) 등을, 가루약으로는 생맥산(生脈散)ㆍ소서패독산(消暑敗毒散: 더위와 독기를 제거하는 가루약)ㆍ통순산(通順散)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밖에 교감단(交感丹)ㆍ금단(金丹)ㆍ우황해독단(牛黃解毒丹)ㆍ구미청심원(九味淸心元) 등도 자주 처방된 약재들이었다.

이렇게 다양한 약재를 동원한 국왕의 진찰과 건강 관리는 ‘약방(藥房)’이라고도 하는 내의원에서 맡았다. 내의원의 실무적인 운영과 관리를 맡은 승지들은 닷새마다 한번씩, 그러니까 한 달에 모두 6번 있는 문안진후(問安診候)에서 어의와 함께 입시해 국왕의 건강 상태를 세밀하게 점검했다.

[일기]에서 내의원이 입진했다는 의미의 ‘약방입진(藥房入診)’ 기사를 검색해보면 각 국왕의 건강 관리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현종은 재위 15년 동안 49회밖에 내의원의 입진을 받지 않았고, 숙종은 재위 46년 동안 865회, 경종은 재위 4년 동안 180회를 기록한 데 견주어 영조는 재위 52년 동안 무려 7,284회(연평균 140회)의 입진 기사가 나오는 것이다. 특히 영조 49년부터 승하하는 52년까지 4년 동안은 무려 1,817회(연평균 454회)의 입진을 받았다(하루 1.2회).

본격적으로 연구하려면 좀더 엄밀한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이런 자료는 각 국왕이 자신의 건강에 쏟은 관심의 크기를 계량적으로 보여준다. 경종의 경우는 그의 병약함을 나타내는 방증이겠지만, 영조가 조선 국왕 중에서 오랜 재위와 수명을 누릴 수 있었던 데는 이런 특별한 관심과 관리도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특히 재위 52년 3월 5일 경희궁에서 승하한 영조는 마지막 열흘 동안 모두 21회의 입진을 받았는데, 특히 건공탕(建功湯)이라는 탕약이 29회나 처방된 것이 흥미롭다. 이런 사실들을 세밀하게 종합하면 해당 국왕의 건강 상태와 사망 원인 같은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는 열쇠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21세기의 새로운 진화: 정보화와 국역




[일기]는 21세기에 들어와 새롭게 진화하고 있다. 그 두 방향은 정보화와 국역이다. 먼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2001년부터 지금까지 추진하고 있는 ‘승정원일기 정보화사업’은 [일기]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그 이용도를 높이는 데 중요하게 공헌한 업적이다. 앞서 말했듯이 [일기]는 2억 3천만 자에 이르는 문자의 바다다. 거기서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찾는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아득한 일이다.

그러나 ‘정보화사업’은 바로 그런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었다. 그 사업은 [일기]의 원문에 현대적 문장부호인 표점(標點)을 부가해 전산 입력한 것인데, 그로써 이제 그 방대하고 복잡한 자료를 자유롭고 손쉽게 검색하고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실제로 지금 이 글의 많은 부분은 이 정보화 사업이 아니었다면 쓸 수 없었을 것이다. 2012년 12월 현재 고종ㆍ순종대를 뺀 [일기]의 약 90퍼센트를 전산화한 이 사업이 조속히 마무리되어(2014년 완료 예정) [일기]의 활용을 더욱 높이기를 기대한다.

다양한 우리 고전의 국역을 진행해 온 한국고전번역원의 국역도 매우 중요한 사업이다. 인력과 예산의 부족으로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이 사업도 좀 더 빠르고 완성도 있게 진척되어 [일기]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기를 희망한다.

최근 많은 관심을 끈 영화 <광해>는 보름치의 [일기]가 사라졌다는 설정에서 출발하고 있다. [일기]의 내용을 본격적으로 활용한 사례는 아니지만, [일기]가 영화(또는 소설) 같은 대중예술에도 활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한 실마리는 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롭게 진화하고 있는 [일기]의 가치가 더욱 깊이 탐구되고 널리 전파되어 한국사의 이해와 연구가 보다 풍부해지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박홍갑ㆍ이근호ㆍ최재복, [승정원일기, 소통의 정치를 논하다], 산처럼, 2009; 서정문, [<승정원일기> 국역의 현황과 과제], [민족문화] 24, 민족문화추진회, 2001; 이홍두, [<승정원일기>의 문헌학적 특징과 정보화 방안], [한국사론] 37, 국사편찬위원회, 2003.





김범 |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조선시대 정치사와 사회사를 전공하고 있다. 저서에 [사화와 반정의 시대](2007), [연산군-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2010), 번역서에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유형원과 조선후기](제임스 B. 팔레 지음, 2008)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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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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