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조선인이 즐긴 술, 삼해주 - 정월 돼짓날에 빚은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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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49회 작성일 16-02-06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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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47416170646.png삼해주(三亥酒) 정월 돼짓날에 빚은 술">


봉제사(奉祭祀: 조상의 제사를 받들어 모심)와 접빈객(接賓客: 손님을 접대함)은 조선 시대 생활문화 중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러므로 아녀자의 음식 솜씨는 가문의 자랑이요, 가문에 평안을 주는 미덕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당시 하나부터 열까지 사람의 손이 가야 마련되는 음식은 그 노하우 전수가 문제였다. 조선 사회에서 조리법의 전수는 오로지 면대면(面對面)의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했고, 축적된 경험만이 새로운 조리 비법을 탄생시켰다.

1670년경 여성이 쓴 최초의 한글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의 필사기에는 “이 책을 이리 눈이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을 잘 알아 이대로 시행하고, 딸자식들은 각각 베껴 가되, 이 책을 가져갈 생각일랑 마음도 먹지 말며, 부디 상하지 않게 간수하여 쉽게 떨어지게 하지 말라”라고 하여 집안의 음식 솜씨가 대물림 되기를 바라는 안동(安東) 장씨(張氏)의 염원을 읽을 수 있다.

이런 식생활에 대한 기록은 여성들이 쓴 규방의 지침서뿐만 아니라 농서(農書)나 유서(類書)에도 등장한다. 특히 18세기는 실학사상이 꽃을 피우면서 식생활 관련 기록이 증폭되는 시기였다. [산림경제(山林經濟)],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해동농서(海東農書)], [고사신서(攷事新書)], [고사십이집(攷事十二集)], [소문사설(謏聞事說)], [온주법(醞酒法)], [음식보(飮食譜)] 등이 바로 그런 사실을 입증한다.

이들 자료에 기록된 내용 중 조리 관련 부분의 필수 항목은 술 빚기였다. 술마저도 가가호호(家家戶戶) 자가제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당시, 술 빚기는 전수되어야 하는 가장 긴요하고도 난이도가 높은 조리기술이었다. 그래서 몇몇 조리서는 술 빚기로 시작되기도 하고, 기록된 내용의 반 이상이 술 빚는 방법인 경우도 있다. 심지어는 [주방문(酒方文)]ㆍ[온주법]ㆍ[역주방문(歷酒方文)]ㆍ[술 빚는 법]ㆍ[술 만드는 법]처럼 아예 조리서의 이름에 술이 들어가 있기도 하니, 이들 조리서를 남긴 조상들의 의중이 짐작된다.



조선인들이 가장 사랑한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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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해주는 18세기 조리 관련 자료에서 기록 빈도가 가장 높은 술로,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술이었다. 정월 첫 번째 해일(돼짓날)에 시작하여 해일마다 세 번에 걸쳐 빚는다고 해서 삼해주(三亥酒)라는 이름이 붙었다.


18세기 조리 관련 자료에는 100여 가지가 넘는 술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기록된 빈도가 가장 높은 술은 삼해주(三亥酒)였다. 삼해주는 가장 많이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온주법]에는 세 가지의 주조법이, [증보산림경제]에는 두 가지의 주조법이 기록되어 있으니, 당시 조선인들에게 가장 사랑받은 술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삼해주라는 술 이름은 정월 첫 번째 해일(亥日)부터 술을 빚기 시작하여 돌아오는 두 번째와 세 번째 해일마다 덧술을 하여 빚은 술이라는 뜻이다. 돼짓날을 골라 빚은 삼해주는 돼지의 ‘꿀꿀’거리는 소리를 닮아 꿀처럼 단 술이 되었을까?

술은 당(糖)성분이 함유된 곡물류나 과실류, 유즙(乳汁) 등을 발효시켜 만드는데,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곡주(穀酒)가 주를 이루었다. 삼해주는 찹쌀과 멥쌀로 빚는 술이다. 밑술과 두 번의 덧술 과정 중 [온주법]에 기록된 첫 번째 주조법과 [음식보]에서는 멥쌀을 세 차례 모두 사용했지만, [온주법]에 기록된 또 다른 방법이나, [산림경제], [고사신서], [해동농서], [증보산림경제]에는 찹쌀과 멥쌀을 번갈아 쓰거나 혼용하기도 하였다.

술을 빚을 때 찹쌀이나 멥쌀은 물에 담가 충분히 불린 후 고두밥을 쪄서 쓰기도 하지만, 가루를 내서 뜨거운 물에 개거나, 죽을 쑤거나, 되직하게 반죽하여 둥글게 빚은 후 가운데 구멍을 내어 마치 도넛 모양으로 만든 구멍떡을 삶아 익히거나, 백설기로 쪄서 쓴다. 삼해주의 밑술은 찹쌀이나 멥쌀을 가루 내어 묽은 죽을 쑤거나 익반죽하였는데, [온주법]에 기록된 첫 번째 주조법과 [증보산림경제]에 기록된 두 번째 주조법에서는 백설기로 찐 후 끓인 물을 섞어 다시 풀어주는 방법을 택하였다. 호화도(糊化度: 전분에 물을 넣고 가열하여 팽윤되어 소화되기 쉬운 상태로 된 정도)가 높은 죽을 이용하여 신속한 발효를 돕기 위함이다. 익힌 곡물과 누룩, 좋은 물을 섞어 항아리에 담아두면 술이 익는다. 이렇게 빚은 술은 단양주(單釀酒)다. 첫 번째 빚은 술을 밑술로 하여 곡물로 다시 밥을 지어 섞어준 후 숙성시키면 이양주(二釀酒)가 된다. 또 같은 과정을 반복하면 삼양주(三釀酒)가 되고, 또 하면 사양주(四釀酒)가 된다. 삼해주는 삼양주이다. 삼해주를 빚는 마지막 덧술에서는, [증보산림경제]의 두 번째 주조법에서 찹쌀을 사용한 것을 제외하면 통상적으로 대개 멥쌀을 이용하여 고두밥을 지었다. 고두밥을 넣으면 맑은 술을 얻을 수 있다. 덧술을 반복할수록 발효가 안정되어 저장성이 높아지고, 술의 양이나 알코올 도수가 올라간다. 무엇보다 술의 맛과 향이 중첩되어 좋은 술이 된다.

그런데 삼해주의 주조법 중 특이한 두 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온주법]에 기록된 세 가지 방법 중 제일 처음 나오는 방법이다. 멥쌀가루로 떡을 찐 후 끓인 물을 섞어 고루 퍼지게 한다. 여기에 누룩가루와 밀가루를 섞어 밑술을 빚는다. 그런데 두 번의 덧술도 똑같은 과정으로 반복했다. 맛 좋은 술은 쌀, 누룩, 물 삼총사의 화음이 잘 맞아야 한다. 이때 누룩은 발효제다. 누룩은 밀, 보리, 쌀, 녹두, 쑥, 여뀌, 도꼬마리, 솔잎, 연꽃 등으로 만드는데 술의 종류에 따라 재료, 모양과 크기별 개성이 결정된다. 일반적으로 술을 빚을 때 밑술에서는 누룩이 반드시 들어가지만, 대개 덧술을 할 때는 밑술이 스타터(starter)로 발효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온주법]의 첫번째 주조법에서는 마지막 덧술까지 계속해서 누룩을 넣는데, 오히려 그 양이 많아진다. 아마도 이는 술의 안정적인 발효를 지속시키고, 알코올 도수와 바디(body)감을 높이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청주와 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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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풍속화첩-주막>
18세기 후반, 종이에 담채, 27×22.7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잘 익은 술은 거르는 방법에 따라 탁주(濁酒)와 청주(淸酒)로 나뉜다. 탁주는 막걸리다. 막걸리는 한자로 부의주(浮蟻酒)라 했다. 발효된 밥알이 마치 개미가 뜬 것처럼 모인다는 의미이니 참말로 운치 있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반대로 청주는 술이 익은 항아리에 용수(술을 거를 때 쓰는 싸리나 대오리로 만든 둥글고 긴 통)를 박아 떠낸 맑은 술을 말한다.

18세기 대표적인 풍속화가인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에서 술을 즐기는 대조적인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김홍도의 〈주막(酒幕)〉에서는 먼 길에 허기진 배를 채우는 나그네가 국밥 그릇을 기울여 남은 국물 한 숟가락까지 싹싹 먹어 치우는 고단한 모습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그리고 그 옆에 술독을 끼고 자리잡은 주모가 큰 그릇에 술을 떠 담는 중이다. 풍채 좋은 중년의 주모가 들고 있는 술잔과 복자(국자처럼 생긴 술을 뜨는 기구)의 크기가 크고, 술 항아리는 입이 넓은 것으로 보아 막걸리가 담긴 것이리라. 나그네는 마지막으로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켜고 다시 걸음을 재촉해야 할 것이다.

신윤복의 〈주사거배(酒肆擧盃)〉는 담장 높은 기와집 안에 있는 고급 술집의 모습이다. 대청마루 옆에는 술국을 끓이기 위한 부뚜막까지 설치되어 있다. 또한 주모는 얹은머리를 하고, 소매통이 좁고 짧은 저고리에 남색 치마를 입은, 그야말로 당시 패션 트렌드를 충실히 따른 젊고 고운 여성이다. 이런 호사스런 술집에서는 당연히 향기로운 청주가 항아리에 그득할 것이고, 비싸게 팔리리라. 마당에 핀 진달래가 삼해주의 계절임을 알려준다. 정월부터 담근 삼해주는 세달 정도의 숙성기간을 거쳐 봄철에 술맛이 절정을 이룬다. 주모의 손에 들린 복자가 가늘고, 작은 술잔들이 놓인 것으로 보아 술값은 마신 잔의 수대로 계산하는 듯하다. 이곳에서 철릭을 입은 관리들의 낮술은 가지가지 이유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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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 <주사거배(酒肆擧盃)>
제작연도 미상, 종이에 채색, 28.2×35.6 cm, 간송미술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조선의 술맛에 반한 것은 외국인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을 방문했던 프랑스의 지리학자이자 민속학자 샤를 루이 바라(Charles Louis Varat, 1842~1893)는 조선의 양조 기술을 소개하며 그 술맛을 극찬했다.




조선의 술은 대개 붉거나 흰색으로 쌀이나 밀 또는 그 밖의 곡물로 빚어내며, 발효하기 전 단계에 불붙은 숯을 집어넣음으로써 맑은 빛깔을 낸다. 그것은 질적인 면에서 중국이나 일본의 술을 저만치 따돌릴 만한데, 입천장에서 착착 달라붙는 그 부드러운 맛이 흡사 우리의 포도주를 연상시켰다. 너무도 맛이 좋아 친구들을 위해 프랑스에도 좀 가지고 가고 싶었지만 운반할 수 있게 포장이 된 것도 아니었고, 결정적으로 장시간 보관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쉽지만 포기해야 했다.


- (샤를 루이 바라(Charles Louis Varat)/샤이에 롱(Chaulle-Long) 지음, 성귀수 옮김, [조선기행], 눈빛, 2001

그녀는 바다 건너 친구들에게 이 좋은 술을 맛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면 조선 사람들이 즐긴 술은 대부분 증류를 하지 않은 술이었으므로 장기간의 보관이나 유통에 적합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성껏 빚은 술은 그대로 두면 발효가 진행되어 식초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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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증류하는 기술은 고려 때 원나라로부터 전해졌다. [증보산림경제]에는 소주의 독성을 줄이는 방법이 나와 있어 당시 증류주를 만드는 고도의 기술을 엿볼 수 있다.
<출처: (cc) karendotcom127 at wikimedia.org>


그렇다면 정말 아예 방법이 없었던 걸까? 그렇지는 않다. 빚은 술을 증류하면 오래 보관하는 것이 가능했다. 술을 증류하는 기술은 고려 때 원나라로부터 전해졌다. 비록 증류하지 않은 술을 더 많이 마셨지만, 증류주인 소주를 만들기도 했다.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우선 잘 익은 술을 솥에 넣고 소줏고리를 얹어 고면 소주가 된다. 열에 의해 기화된 알코올은 소줏고리 위의 찬 냉기와 만나서 액화되어 이슬처럼 다시 떨어진다. 그래서 소주의 다른 이름이 노주(露酒)다. [증보산림경제]에서는 소주를 고는 법이 기록되어 있는데 윗물을 열두 차례 갈면 그 술맛이 독하지도 묽지도 않지만, 여덟아홉 차례만 갈아주면 술맛이 매우 독하다고 하였다. 또 소주를 내릴 때에는 참나무나 보릿짚, 볏짚 따위를 땔감으로 써야 하고, 불의 세기를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소주의 독성을 빼는 법으로는 술을 받는 병 바닥에 꿀을 바르면 독이 빠지고 술맛이 좋아진다 하였는데, 소주의 독한 기운을 줄이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또 당시 증류주를 만드는 고도의 기술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해주 또한 소주로도 즐겼다. 대개 청주로 마시는 술이지만, [증보산림경제]에 기록된 두 번째 주조법은 삼양증류주인 것이 특이하다. 마지막 덧술까지 잘 익어 밥알이 위로 뜨면 지게미를 걸러내고, 증류하여 소주를 만드는데 술맛이 매우 독하다고 하였다.

독한 소주는 물을 타서 희석식 소주로 만들기도 하였고, 얼음을 넣어 차고 짜릿한 칵테일로 즐기기도 하였다. 청주를 빚어 소주를 혼합한 혼성주는 더운 여름철, 술맛이 쉽게 상하는 것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었다. 이 소주는 증류 과정에서 계피와 사탕가루 또는 생강이나 배를 넣어 맛을 더하거나 지초(芝草)나 치자를 술병에 달아 농염한 빛깔을 내어 애주가들을 유혹하기도 하였다.



임금도 못 말린 술맛




삼해주의 사랑은 몇몇 문집에서 확인된다. 일찍이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삼해주를 선물 받고 아래와 같은 화답시를 남겼다.




쓸쓸한 집 적막하여 참새를 잡을 만한데                   閑門寂寞雀堪羅

어찌 군후의 방문 생각이나 했으랴                            豈意君侯肯見過

다시 한 병의 술 가져오니 정이 두터운데                  更把一壺情已重

더구나 삼해주 맛 또한 뛰어났네                                況名三亥味殊嘉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또,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은 무등산을 돌아보고 식영정(息影亭)에 당도해 가진 술자리에서 삼해주를 마시는 즐거움을 노래하기도 했다.




맑은 바람 늙은 나무에 불고                                             淸風吹老樹

밝은 해는 봄 정자에 걸리었네                                         白日麗春亭

좋은 술 삼해를 기울이고                                                  美酒傾三亥

아름다운 나물 오성을 대하누나                                      嘉蔬對五星

조용히 산수를 구경하고                                                   從容見山水

오연히 문정에 있도다                                                       偃蹇在門庭

그대 나와 함께 취미 같으니                                             君與吾同趣

배회하매 구름은 창가에 가득하구나                              徘徊雲滿扄


- [고봉집(高峯集)]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연속된 자연재해로 곡물 조달이 어려워지자 금주령이 내려졌다. 그래도 번번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에는 이를 두고 대책 논의에 골몰한 대목도 보인다. 정조 17년 [일성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조의 명을 기록하고 있다.




“작년 겨울에 술을 빚지 못하도록 금하였을 때에 평시서(平市署: 조선시대 시전, 도량형, 물가 등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청)가 5일마다 계본(啓本: 조선시대에 임금에게 큰일을 아뢸 때 제출하던 문서 양식)으로 보고한 시가(市價)를 보니, 쌀값이 여전히 치솟아 있었다. 그러니 또한 시험해 보았으나 실효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흉년에 곡물을 낭비하는 것은 참으로 엄히 금할 수 있지만, 나는 “백성이 소요하지 않도록 한다(不擾民)”라는 석 자가 시행하기 어려운 명령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지금 시행할 계책으로는 한성부 판윤에게 분부하여 술을 빚는 것을 절제하라는 뜻으로 성심껏 방곡에 타이르고 깨우쳐주어 선량한 백성들로 하여금 가르침을 따를 줄 알게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또 삼해주 등 대규모로 빚는 술은 이미 저장해 놓은 것을 제외하고는 역시 판윤으로 하여금 거듭 밝혀 금지하고 절제하게 하여 기어코 실효를 거두게 하라.”


- [일성록] 정조 17년 계축



국 먹기는 여름같이, 술 마시기는 겨울같이 하라




술은 맛있는 안주가 있어야 그 맛을 더한다. 18세기를 대표하는 술안주 하나를 살펴보자. 앞서 신윤복의 그림에서는 술국을 끓이기 위한 솥이 있었다. [성협풍속화첩(成夾風俗畵帖)]에 실려 전하는 그림, 〈야연(野宴)〉에서는 사람들 가운데 화로가 놓여 있고, 위에는 전골을 지져먹는 그릇인 벙거짓골이 올려져 있다. 강한 불기운이 느껴지는 화로 위에서는 가장자리의 둥근 부분에서 뭔가가 지글지글 구워지고, 사내들은 연신 이를 주워 먹기에 바쁘다. 움푹 팬 중앙에는 국물이 끓고 있다. 즉, 고기나 채소를 번철 부분에 구워서도 먹고, 뜨거운 국물에 넣어 살짝 데치듯 익혀서도 먹는 즉석요리를 술안주로 즐기고 있다. 좋은 벗들과 향기로운 술, 즉석에서 바로 해먹는 안주까지 있으니 술이 절로 넘어갈 것 같다. 보는 것만으로도 침이 꼴깍 삼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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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연(野宴)>, [성협풍속화첩(成夾風俗畵帖)] 수록.
제작연도 미상, 종이에 담채, 20.8×28.3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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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의 [시의전서(是議全書)]에는 술상차림 그림이 실려 있다. 먼저 술상에 진안주, 마른안주, 김치, 정과, 숙실과가 차려져 있다. 옆의 곁상에는 전골, 장국, 나물, 계란, 기름종자가 있다. 이 상은 아래 있는 신선로상을 위한 상이다. 신선로상에는 신선로, 장국시(국수), 사시(숟가락)가 있다. 신선로는 궁중음식으로 사대부가에서도 즐기던 제일의 안주였는데 열구자탕(悅口子湯)이라고도 한다. 얼마나 맛이 좋았으면 입을 기쁘게 한다는 이름이 붙였을까? 선인들의 풍류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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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전서(是議全書)]에 기록된 술상차림. 아래의 신선로상을 위해 술상과 곁상이 차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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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음식으로 알려진 신선로는 사대부가에서도 안주로 즐겼다.



[규합총서]에는 우리나라의 전통음식문화를 한 문장으로 대변하고 있다. "밥 먹기는 봄같이 하고, 국(羹) 먹기는 여름같이 하고, 장(醬) 먹기는 가을같이 하고, 술 마시기는 겨울같이 하라“ 고 했다. 밥은 따뜻하게, 국은 뜨겁게, 장은 서늘하게, 술은 차게 즐겨야 제맛이라는 것이다. 삼해주의 차고 독한 술기운을 뜨거운 국으로 달랬을 조선인들을 떠올려 본다.

 

'18세기의 맛'은 한국18세기학회의 기획으로서, 문학동네와 함께 합니다. 14547416246846.jpg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14547416247470.jpg




차경희 | 전주대학교 한식조리학과 교수
고문헌을 중심으로 한국전통음식문화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한국음식문화와 콘텐츠], [향토음식], [한국음식대관] 등을 공동 집필하였고, [시의전서], [임원십육지―정조지], [부인필지], [주방문] 등 고조리서 편역에 참여하였다. <고문헌을 통해 본 조선시대 식초 제조에 관한 연구>, <[주식시의(酒食是儀)]에 기록된 조선 후기 음식>, <[쇄미록(鎖尾錄)]을 통해 본 16세기 동물성 식품의 소비 현황>, <조선중기 외래식품의 도입과 그 영향> 외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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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8세기의 맛: 취향의 탄생과 혀끝의 인문학 2014.02.28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의 18세기를 다채롭고 참신한 시각으로 연구하는 한국18세기의 학회의 첫 프로젝트 결과물, <18세기의 맛>이 책으로 나왔다. 18세기의 '맛'을 중심으로 세계사의 흥미로운 단면을 맛깔나게 서술했다. 23명 인문학자의 시각으로 18세기의 동서양을 뒤흔든 맛과 그 맛에 얽힌 흥미로운 현상을 살펴보는 일에 동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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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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