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김석신(金碩臣)과 이수민(李壽民) - 동일한 호를 사용하여 착각된 두 화가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18회 작성일 16-02-06 15:53

본문















14547416287813.png김석신(金碩臣)과 이수민(李壽民) ‘초원(蕉園)’이라는 동일한 호를 사용한 두 화원(畵員)">


김석신(金碩臣, 1758~?)과 이수민(李壽民, 1783~1839)은 조선 후기의 화원(畵員)으로 한 세대 정도 차이가 나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초원(蕉園)’이라는 동일한 호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오세창(吳世昌) 선생 같은 한국회화사의 개척자를 비롯하여 후대의 많은 연구자들이 착각과 오해를 계속해왔다. 나 역시 오래전부터 ‘초원’의 작품들을 보며 자주 아리송한 느낌이 들었던 차에 그동안 소개된 자료들을 검토하여 착오와 혼란을 정리하고자 한다.



김석신과 이수민은 누구인가?




김석신은 자가 군익(君翼), 호는 초원(蕉園)으로 개성 출신이다. 화원으로서 부사과라는 관직을 지냈으며, 김응리(金應履)의 3형제 중 둘째 아들로, 유명한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의 동생이자 김양신(金良臣, ?~?)의 형이기도 하다. 단원 김홍도(金弘道)의 선배였던 김응환(金應煥, 1742~1789)이 김석신의 백부였는데 나중에 양자로 들어갔다. 그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막내 김화종(金和鍾)도 화원이다. 유명한 초상화가 이명기(李命基)와 어해화(魚蟹畵)로 이름 높은 장한종(張漢宗)은 그의 매형이다.

화원으로서 그의 활약은 문헌에 많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59세 때인 1816년에 장헌세자빈 국장(國葬)에 따른 빈궁혼궁도감(殯宮魂宮都監) 혼궁(魂宮) 수리소에 근무한 것만 확인된다. 그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것은 〈도봉도(道峯圖)〉로 도봉산과 도봉서원 일대의 실경을 겸재 정선(鄭敾) 풍의 활달한 필묵법으로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의 표제를 참조하면 당대의 명류(名流: 유명인사)였던 이재학(李在學)과 서용보(徐龍輔)가 도봉산을 산책할 때 만든 〈도봉첩(道峯帖)〉에 속했던 그림임을 알 수 있다. 이재학은 판서, 서용보는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니 두 사람의 행적을 조사하면 이 작품의 제작 연대부터 행적까지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수민은 자가 군선(君先), 호는 초원(蕉園)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아쉽게도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그의 자를 ‘용선(容先)’으로 잘못 적은 까닭에 현재까지 답습한 곳이 많다. 이수민도 화원으로 벼슬은 첨지중추부사였으며, 순조 대에는 규장각 차비대령 화원을 지냈다. 조부 이성린(李聖麟, 1718~1777)과 부친 이종현, 형 이윤민도 화원이며, 역시 화원인 삼촌 이종근에게 양자로 출계(出系: 아들을 양자로 주어 그 집의 대를 잇게 함)하였다. 그리고 아들 이택록과 이의록도 화원이 되어, 3대 화원 집안을 이루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딸이 착각된 김석신의 손자 김제운과 혼인한 점이다.

그의 활약은 김석신에 비해 여러 자료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20세 때인 1802년에는 순조순원후가례도감(純祖純元后嘉禮都監)에 참여하였고, 29세 때인 1811년에는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으로 발탁되어 1835년까지 활동하였다. 또한 1811년에 통신사행으로 대마도를 다녀왔으며, 이때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들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수하독서도(樹下讀書圖)〉 외에도 여러 점 전한다. 또 신위(申緯, 1769~1847)의 기록에 의하면 30세 때인 1812년에는 주청사의 수행화원으로 연행(燕行)하였다. 48세 때인 1830년 4월 5일 자 [승정원일기]의 기록에는 순조어진 도사 참여 공로로 변장(邊將)에 제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착각 1, 오세창 선생이 이수민의 <신선도>를 김석신의 작품으로 오판하다




20세기 전반에는 회화 작품들이 제대로 발굴 또는 소개되지 않은 열악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한국 회화사의 선구자 위창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의 깊은 안목으로도 실수를 하였다. 1927년에 오세창 선생이 쓴 화제에서 이도영 구장의 이수민 필(筆) 〈신선도(神仙圖)〉를 김석신 작(作)으로 잘못 감정한 것이 그 예이다(그림 1). 현재 소재를 알 수 없는 이 작품은 1989년경 부산시립박물관에 전시되었고, 이미야가 쓴 [전 초원 김석신 필 〈신선도〉]([부산시립박물관연보] 11호, 1989)에 이 작품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이 글에 인용된 번역문을 조금 수정하여 인용한다.



14547416302942


그림 1 이수민, 〈신선도(神仙圖)〉
이도영 구장.





정가루(靜嘉樓) 주인이 이 그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말하기를, “탄월(灘月) 김군(金景源, 1901~1967)이 시장에서 얻었는데 그림이 좋아 그 사람에게 물으니 자세히 말해주는데 초원의 솜씨인 것 같다 합니다”라며, 그러나 확실하지 않아 내게 물어본다고 하였다. 내가 “감식안이 다르지 않구나”라고 하며 구장한 초원우객(蕉園羽客)의 〈취소도(吹簫圖)〉와 비교하여 보니 과연 형태와 의습, 필치가 같으므로 서로 보고 한번 웃으며 “좋구나”라고 하였다. 초원 김석신을 조사해보니 자가 군익이고 개성인이다. 그 형인 김득신도 역시 그림을 잘 그렸는데, 특히 인물에 능해 대를 이어 화원에 봉직하였다. 초원이 숙부 김응환의 양자가 되었을 때, 단원 김홍도가 김응환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운다 하였다. 초원은 단원보다 두 살이 많아 항상 같이 어울리며 그림을 익혀 각기 한 기치를 세우니, 세상이 말하기를 세 사람(김응환, 김석신, 김홍도)이 솥발처럼 섰다고 하였다. 초원은 영조 무인년(1758) 생이니 지금부터 170년 전이다. 이 그림에는 관서나 인장이 없어 누구 작품인지 몰라 귀한지 모름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전하게 보존되었으니, 신물(神物)에는 스스로 보호자가 있는 것인가. 초원의 유묵은 이 그림을 보더라도 김득신, 김홍도보다 적으니 더욱 귀중하다 할 수 있으므로 몇 자 적어 돌려보낸다. 정묘년 소제석 위창노인 오세창 적다.




오세창 선생은 위 작품을 김석신 작으로 판단하면서, 그 근거로 소장하고 있던 초원의 〈취소도(吹簫圖)〉와의 화풍을 비교하였다. 지금은 이 〈취소도〉가 어떤 작품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작품은 김석신이 아니라 이수민의 작품임이 분명하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이수민의 〈좌수도해도(坐睡渡海圖)〉(간송미술관)이다. 〈좌수도해도〉는 〈신선도〉와 같은 해상신선도의 형식이며, 일렁이는 파도의 표현과 인물의 의습선 등 김홍도의 영향이 짙은 화풍을 보여준다. 또 〈좌수도해도〉에는 ‘초원’이라는 서명 아래에 ‘壽民(수민)’이라는 백문방인(白文方印: 음각으로 새겨 글씨가 하얗게 나오는 네모난 도장)이 찍혀 있어 의심의 여지가 없다.



14547416313345


그림 2 이수민,〈좌수도해도(坐睡渡海圖)〉
개인 소장.


한편 간송미술관에는 이수민의 다른 해상신선도인 〈해섬자도(海蟾子圖)〉도 소장되어 있어 더욱 증거를 보강해준다. 〈해섬자도〉도 위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김홍도의 짙은 영향과 심사정의 일부 영향이 섞여 있는 공통점을 보여주며, 이수민의 〈좌수도해도〉와 거의 비슷한 도상의 다른 작품도 소개한 바 있다(그림 2). 이상의 여러 가지를 감안하면 오세창 선생은 김석신의 작품들이 소개되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에서 ‘초원’이라는 호, 그리고 김석신이 김홍도의 또래로 김응환에게 함께 그림을 배웠다는 선입견 때문에 오판을 피하지 못했던 듯 보인다. 이런 오판의 배경에는 당시 김홍도의 생년이 1760년으로 잘못 알려진 상황도 한몫하였다. 즉, 1758년생인 김석신이 김홍도보다 두 살 연상으로 그림을 함께 배운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김홍도는 1745년생으로 김석신보다 열세 살 연상이다.



14547416322712


그림 3
오세창 선생의 제자 이도영이 이수민의 작품을 김석신의 것으로 오인한 1930년 10월 21일 자 동아일보 기사.


오세창 선생의 착각은 그의 제자인 이도영에게 계승되었다. 〈동아일보〉 1930년 10월 21일 자에는 ‘조선고서화(朝鮮古書畵) 기십(其十)’이라는 제목하에 앞서 오세창 선생이 오판한 〈신선도〉의 사진을 수록하고, 그 아래 “초원 김석신 신선도―이도영 씨 구장”이라고 명기하였다. 앞서 오세창 선생이 ‘정가루(靜嘉樓) 주인’이라고 칭한 사람이 이도영이거나 그 주변 인물로 보이는데 이 점은 추후 확인이 요망된다. 어쨌든 오세창 선생에 이어 당대 고서화 감정에서 크게 활약한 이도영도 이 작품을 김석신의 것으로 오인하였음을 보여준다.

오세창 선생의 오판 근거, 즉 김석신이 김홍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잘못된 선입견 때문에 이수민의 작품이 김석신의 작품으로 소개된 예가 이어진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에도 ‘김석신’ 조를 검색하면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이수민의 작품 〈좌수도해도〉가 김석신의 작품으로 잘못 소개되어 있다.





이미지 목록



14547416332453


그림 4 이수민, 〈고승한담(高僧閑談)〉
개인 소장.





14547416342763


그림 5 이수민, 〈쌍작〉
개인 소장.



공화랑에서 2007년 개최한 [구인의 명가 비장품전]의 도판 37-40에 김석신의 작품으로 소개된 [화첩]도 이수민의 작품이다. 여기에는 〈고승한담(高僧閑談)〉, 〈소년행락(少年行樂)〉 등 산수와 인물, 그리고 〈쌍작(雙鵲)〉, 〈월죽(月竹)〉 두 폭이 소개되어 있다(그림 4, 5). 이 네 폭은 모두 김홍도 화풍의 영향이 짙게 드러난 작품들로 앞서 신선도와 같은 성격이며, 또한 ‘초원’이라는 관서의 필체와 ‘君先(군선)’이라는 이수민의 자가 분명히 찍혀 있다. 이처럼 이수민의 자가 분명한 도인이 찍혀 있는데도 김석신의 작품으로 전칭된 데에는 오세창 선생의 [근역서화징] 이수민 조에서 이수민의 자가 ‘容先(용선)’이라고 기재됐기 때문일 것이다. 앞의 화첩 중 〈고승한담〉과 〈월죽〉 두 점은 2011년 3월 마이아트옥션 1회 경매에서 역시 김석신의 작품으로 나오기도 했다.



이수민에 대한 오류가 답습되다




이수민에 대한 오류도 오세창 [근역서화징] 이수민 조에서 자 ‘君先’을 ‘容先’으로 오기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 오류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이수민’ 조에도 답습되었다. 한편 여기서는 이수민의 개인 소장 〈하일주연도〉를 간송미술관 소장으로 잘못 기록하기도 하였다. 근래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펴낸 [한국역대서화가사전](011) ‘이수민’ 조에도 [근역서화징]의 오기가 답습되어 있다. 또한 유복열의 [한국회화대관](문교원, 1969) ‘이수민’ 조에는 초전(蕉田) 오순(吳珣, ?~?)의 〈산정일장도(山靜日長圖) 병풍〉 중 한 폭을 이수민 작품으로 잘못 소개하기도 했다.

위와 관련된 예로서 2011년 동산방에서 개최한 [옛 그림에의 향수] 전시 도록 도판 57에서 이수민의 노년작으로 소개된 〈춘야희우도(春夜喜雨圖)〉는 오순의 작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이 작품에는 학산(鶴山) 윤제홍(尹濟弘, 1764~1844?)이 제시(題詩) 뒤에 “초로가 그리고 학산 늙은이가 제하다(蕉老寫 鶴翁題)”라고 적어서 도록에서는 이수민의 작품으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윤제홍이 늘그막에 거의 한 세대나 나이가 어린 초원(蕉園) 이수민을 ‘초로(蕉老)’라고 지칭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 작품의 작가를 초전(蕉田) 오순으로 보는 것이 여러모로 타당해 보인다. 즉, 오순은 19세기 전반 80세 가까이 생존하였으므로 연대상 맞고, 화풍상으로도 김홍도와 다소 거리가 먼 초연한 남종화풍을 구사한 점도 그와 일치한다.

아울러 [한국역대서화가사전] ‘김석신’ 조에는 어쩐 일인지 앞의 〈춘야희우도〉를 김석신의 작품으로 소개하였다. 아마 연대를 고려하여 ‘초로’를 김석신으로 본 듯한데, 앞서 언급했듯이 초전(蕉田) 오순의 화풍과 가깝고 김석신의 화풍과는 거리가 멀다.



김석신과 이수민와 화풍을 가름하니








이미지 목록



14547416353443


그림 6 김석신, 〈도봉도(道峯圖)〉
제작연도 미상, 종이에 수묵담채, 53.7×36.6 cm, 개인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14547416363053


그림 7 김석신, 〈가고중류도(笳鼓中流圖)〉
제작연도 미상, 종이에 담채, 53.7×36.6 cm, 개인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김석신은 그의 대표작 〈도봉도〉를 통해 볼 때 겸재 정선의 과감한 필묵법과 적묵법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 또한 활달하고 구애되지 않은 구도, 원산의 표현 등에는 양부 김응환의 영향도 받았음을 알 수 있다(그림 6). 김석신의 이런 면모는 이동주 선생의 역저 [우리나라의 옛 그림]에서 ‘한강사경 4폭’으로 소개한 작품들에서도 드러난다. 이 네 폭 중 세 폭이 개인 소장 〈가고중류도(笳鼓中流圖)〉(그림 7)와 〈금호완춘(琴湖翫春)〉, 그리고 간송미술관 소장의 〈담담장락(澹澹張樂)〉으로 소개된 바 있는데, 모두 ‘초원’ 서명과 ‘君翼(군익)’ 도인이 찍혀 있다. 또 성격이 비슷한 김석신의 작품인 선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압구청상도(鴨鷗凊賞圖)〉에도 ‘초원’ 서명과 ‘군익’ 인이 있으며 화풍과 서명이 모두 동일하다. 이들 작품을 통해 볼 때 김석신은 김응환의 양자로서 그의 형 김득신과 김홍도와 함께 활동했으나 화풍상으로는 정선이나 양부 김응환처럼 뚜렷한 남성적 개성을 지녔던 화가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은 ‘초원’이라고 쓴 서명이 이수민과 김홍도의 우아한 여성적 필치에 비해 각이 진 남성적 필체인 점에서도 알 수 있다.

한편 김석신의 작품으로 소개된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수하일가도(樹下一家圖)〉는 그의 작품이 아니라 형 김득신의 작품임을 말해두어야 할 것 같다. 이 작품은 [조선후기 국보전] 〈위대한 문화유산을 찾아서 3〉(호암미술관, 1998. 7.) 도판 59로 소개된 바 있다. 의습 표현은 김득신의 〈노중상봉도〉, 〈짚신짜기〉, 〈강변회음도〉 등과 유사하고, 나무는 〈타작도〉 등과 유사하다. 그리고 화면 우측 상단에 찍힌 ‘김득신인’ 백문방인도 김득신의 〈긍재전신첩〉(간송미술관) 중 여러 폭에서 확인되는 도인이다.



14547416372294


그림 8 이수민, 〈하일아집도(夏日雅集圖)〉
1819년, 개인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이수민은 김석신보다 스물다섯 살이나 연하이다. 이수민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던 때에 김홍도는 이미 은퇴했지만 아주 큰 영향을 받았다. 김홍도의 영향은 18~19세기에 활약한 많은 화가에게서도 볼 수 있지만, 이수민의 경우 전기보다 후기에 김홍도의 영향을 더욱 많이 받았다. 이수민의 작품 중 29세 때인 1811년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작품들, 예를 들어 두암 김용두 기증품 중 〈수하독서도〉 같은 작품에서는 김홍도의 영향이 보이기는 하나 경직되고 진하고 뚜렷한 선묘가 특징적이다. 〈하경산수도〉 등 이 시기의 산수도에서도 아직 개성이 확립되지 못한 면을 볼 수 있다. 이런 면모는 1819년 37세 때 작인 〈하일아집도(夏日雅集圖)〉에서도 여전히 드러난다(그림 8). 비록 깔끔하게 정돈되기는 했으나 조심스러운 남종화풍의 구사를 볼 수 있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서는 〈좌수도해도〉를 비롯한 여러 점의 〈해상신선도〉, 그리고 김석신으로 잘못 비정된 [화첩] 속의 〈고승한담〉, 〈쌍작〉 등을 통해 자유롭고 능숙한 필묵법으로 김홍도 화풍의 특징을 짙게 받아들였다. 이런 점은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유연수금도(柳燕水禽圖)〉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물가 수양버들 나무 아래 헤엄치는 한 쌍의 오리를 그린 이 작품은 김홍도의 〈유당유압도(柳塘遊鴨圖)〉(간송미술관)와 비교해 볼 때 그 영향 관계가 분명하다. 요컨대 이수민은 대략 30대까지의 전기에서 당시의 남종화풍을 구사하며 김홍도의 영향을 일부 보이다가, 후기에는 김홍도 화풍을 풍부하게 수렴하여 자신의 원숙한 화풍을 이루었던 셈이다.

김석신과 이수민, 두 사람의 도화서 화원이 약 한 세대를 사이에 두고 ‘초원’이라는 같은 호를 사용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별다른 이유가 없는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하지만 둘을 오인하고 착각하는 일이 계속된다면 미술사를 위해 다행한 일이 결코 아니다. 두 사람의 화원은 화풍과 개성이 매우 다른 화가들이었기 때문이다. 즉, 김석신은 주로 정선 화풍의 영향을 많이 받아 남성적이고 활달한 진경산수화를 많이 그린 반면, 이수민은 주로 김홍도 화풍의 영향을 많이 받아 여성적이고 섬세하며 시정(詩情)이 감도는 산수나 인물, 화조화 등을 자주 그렸다.

오랫동안 착각을 불러일으킨 두 사람의 관계가 이 글에서 분명히 가름될 수 있기를 다시 바란다.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태학사와 손을 잡고<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를 연재한다. 그림에 숨은 비밀과 사연을 프리즘으로 삼아 한국학의 출렁이는 바다로 여행을 떠나려는 것이다. 문학, 미술, 음악, 철학, 역사, 문화가 망라되는 항해에 깊고 진한 교감이 깃든 풍성한 바다가 펼쳐지길 해신(海神)에게 기도한다. 연재는 매주 1회 돛을 달고 항구를 떠난다.   14547416372921.png  http://www.thaehaksa.com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도서 출간
네이버캐스트에 연재되었던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시리즈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우리 시대 인문학자 32인이 옛 그림을 호명해 되살려낸 한국학 읽기의 색다른 즐거움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진준현
서울대학교에서 〈오원 장승업 연구〉(1986), 〈단원 김홍도 연구〉(1998)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관으로 일하며 한국회화사 관련 논저를 다수 펴냈다. [단원 김홍도 연구], [조선을 그린 화가 김홍도], [우리 땅 진경산수] 외 30여 편의 편저, 논문들이 있다.


발행2013.01.0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