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홍차에 목숨을 걸다 - 누구나 우아해질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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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70회 작성일 16-02-06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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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영국에 상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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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지 [메르쿠리우스 폴리티쿠스(Mercurius Politicus)] 1658년 9월 23일~30일자의 부분.〈출처: Eighteenth-Century Collections Online(ECCO)〉
17세기 영국 신문들은 간략한 문장 형태의 광고를 신문 말미에 싣곤 했다. 이 광고는 런던의 왕립 거래소(Royal Exchange) 근처에 있는 커피하우스에서 ‘모든 의사들이 권하는’ 중국 차를 판매한다고 알리고 있다.


영국에서 차를 처음 언급한 자료는 광고다. 런던 상인 중 최초로 차를 팔기 시작한 가웨이(Thomas Garway)는 1658년 [메르쿠리우스 폴리티쿠스(Mercurius Politicus)]란 신문에 ‘모든 의사들이 추천하는 중국의 신비한 음료’를 커피하우스에서 판매한다는 내용의 광고를 냈다. 차가 테이(Tay) 또는 티(Tea)라고 불리게 된 이유는 차를 처음 유럽에 들여오기 시작한 네덜란드 상인들이 그들이 차를 구입한 중국 푸젠 성(福建省, Fujian) 샤먼(厦門, Amoy) 지역 방언의 발음을 따랐기 때문이다. 푸젠 성과 광둥 성 등지에서 수입한 차가 네덜란드 왕가와 귀족들에게 먼저 보급되어 인기를 끌자 네덜란드 상인들은 다른 유럽 국가에도 적극적으로 차를 보급하기 시작했는데, 영국의 경우 사실상 1660년 왕정복고 이후에 본격적으로 차가 보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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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메르쿠리우스 폴리티쿠스(Mercurius Politicus)], 1658년 9월 23일~30일자 첫 페이지. 〈출처: Eighteenth-Century Collections Online(EC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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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가웨이(Thomas Garway)의 광고 포스터, 1660년. 〈출처: Eighteenth-Century Collections Online(ECCO)〉

가웨이는 담배, 커피, 차 등의 수입품을 취급하는 런던 상인이었다. 포스터에 의하면 사계절 마실 수 있는 차는 수명을 늘려주는 보약이었다.



가웨이가 차를 팔기 위해 1660년에 찍어낸 포스터에 의하면 차는 그야말로 만병통치약이요 보약이다. 두통, 소화불량, 감기 등의 가벼운 질환은 물론 간염, 수종, 학질, 심지어 괴혈병에도 효력이 있다고 적혀 있다. 차는 시력을 좋게 하며 신장을 튼튼하게 해주고 피를 깨끗하게 하며 배변을 돕는다. 따라서 차를 마시면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차의 효능을 과장해서 선전해야 했던 이유는 차가 그만큼 낯선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소비층이 확보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차의 가치를 부풀려야 했던 것이다. 가웨이는 차 1파운드(lb, 1파운드는 약 454g)를 16~50실링(shillings)에 팔았다. 20실링이 1파운드(£)이므로 차 500그램이 최고 2.5파운드의 가격에 팔렸다는 뜻이다. 당시 귀족 저택에서 일하는 남자 하인의 연봉이 겨우 2~6파운드였으니, 차가 얼마나 비싼 사치품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쌌던 차가, 게다가 머나먼 중국에서 수입해야 했던 차가 어떻게 영국의 국민 음료가 되었을까?



홍차의 발견




17세기에 유럽인들이 마신 차는 대부분 녹차였다. 가웨이가 취급했던 차 역시 녹차였을 것이다. 우리가 홍차라고 부르는 발효차는 18세기 이후 영국에서 보히(Bohea)차라는 이름으로 팔렸는데, 이는 푸젠성 우이(武夷, Bohea) 산에서 수출용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그것도 나중에 영국에서 주문이 밀려들자 수출용으로 대량 생산된 것이지 처음에는 실수로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다. 즉 우이 산에서는 소나무를 태워 녹차를 건조했는데 덜 건조된 나무를 태우다가 녹차에 연기가 밴 것을 중국인들이 멋모르는 영국인들에게 팔아넘겼다는 것이다. 그 역사적 기원이 어떻든 간에, 분명한 것은 영국인들이 이 홍차를 각별히 사랑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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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미상, 〈반란의 적; 혹은 커피와 차의 대화(Rebellions Antidote; Or a Dialogue Between Coffee and Tea)〉, 1685년.
〈출처: Eighteenth-Century Collections Online〉이 시는 알코올 음료가 국가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영국인들에게 술 대신 커피와 차를 즐겨 마실 것을 권하고 있다.


영국에 가서 차를 마셔본 사람이라면 영국에서 마시는 홍차가 참 맛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영국에서 마셨던 그 맛을 기억하고 국내에 사들고 와 끓여 마시면 같은 맛이 안 난다. 왜일까? 수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영국의 물은 경수인 반면, 우리나라 물은 연수다. 석회염 등의 광물질이 다량 포함된 경수에서는 차의 맛을 내는 탄닌(tannin)이 잘 우러나지 않는다. 17세기 말~18세기 초에 영국인들이 마셨던 녹차는 아마도 매우 옅은 맛이었을 것이다. 반면 녹차에 비해 탄닌이 훨씬 많이 들어 있는 발효차는 영국의 경수에도 진하게 잘 우러난다. 녹차를 제대로 맛보기 위해서는 물을 식혀서 찻잎을 여러 번 우려내는 반면, 홍차는 물을 펄펄 끓여서 찻주전자(teapot)에 한번에 우려낸 다음 뜨겁게 마시는 것이 포인트다. 일 년 내내 비가 많이 오고 을씨년스러운 날씨가 계속되는 영국에서 홍차는 추위를 덜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차를 마시기 위해 물을 끓여 마시면서 영국인들은 보다 위생적인 식생활을 하게 되었다. 영국인들이 중세부터 거의 끼니마다 맥주를 마셨던 일차적 이유는 위생 때문이었다. 오염된 식수 때문에 질병이 끊이지 않았던 시대에 맥주는 오히려 건강음료였던 셈이다. 그러나 과다한 알코올 섭취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면서 서아시아와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들여온 이국적인 맛의 커피와 홍차가 맥주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1685년에 발표된 시<반란의 적; 혹은 커피와 차의 대화(Rebellions Antidote; Or a Dialogue Between Coffee and Tea)>에서는 맥주와 와인이 강간, 살인, 절도 외에도 반란과 반역을 일으키는 주범이며 커피와 홍차를 마시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라는 주장이 등장한다. 하지만 실은 홍차를 마시면서 애국하기란 어려웠다. 왜냐면 홍차를 마시는 사람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영국은 막대한 국부를 유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상품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중국은 찻값을 은으로만 받았다. 이러한 문제가 있었는데도 영국이 차를 계속 수입한 이유는 복합적이다.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 소규모로 유통되던 차가 영국에서 큰 인기를 끌자 영국 동인도회사가 차 수입에 공격적으로 뛰어들었고, 이 회사는 꾸준히 차 공급량을 늘려갔다. 반면 서아시아 지역에서 수입해야 했던 커피는 물량 확보가 쉽지 않았다. 영국이 프랑스, 스페인과 계속 전쟁을 하면서 지중해에 진입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수입차에 높은 관세를 부과해 동인도회사를 견제하고자 했던 영국 정부는 차를 통해 매우 중요한 수입원을 확보했다. 이렇게 상업세력과 정부세력이 알게 모르게 힘을 합하면서 차는 모든 영국인들이 즐기는 일상적인 음료가 되었다.



어디서 어떻게 마셨나: 유럽의 기호에 맞게 재해석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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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 미상, 〈차 마시는 두 여인과 장교(Two Ladies and an Officer Seated at Tea)〉
1715년경, 캔버스에 유채, 63.5×76.2 cm,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Victoria and Albert Museum) 소장.

이 그림은 네덜란드 화가 페르콜례(Nicolaes Verkolje, 1673~1746)의 작품으로 알려졌으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최근 판명되었다. 앙증맞은 다구가 인상적이다. 손잡이가 달린 큰 찻잔은 나중에 유럽인의 기호에 맞춰 제작되었다.


차가 맥주를 대체하면서 영국 사회의 상하층 모두에서 끼니마다 맥주를 마시던 풍경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아침 식탁에 맥주 대신 홍차, 커피, 또는 초콜릿 음료가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17세기 회화를 보면 당시 유럽인들이 차를 어떻게 마셨는지 가늠할 수 있다. 〈차 마시는 두 여인과 장교(Two Ladies and an Officer Seated at Tea)〉라는 그림을 살펴보자. 찻상(tea table)에 뜨거운 물이 든 물주전자(tea kettle), 차를 우려내는 찻주전자, 손잡이 없는 찻잔(tea cup)과 받침(saucer) 등이 놓여 있다. 차를 마시기 위해 유럽인들은 중국 자기를 같이 수입해서 중국인의 차 풍습을 최대한 모방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찻상 위의 설탕그릇과 은수저가 잘 보여주듯이 유럽인들은 곧 그들의 기호에 맞춰 차 마시는 방법을 재해석했다. 네덜란드에서는 차에 설탕을 타 마시는 것을 즐겼고, 영국에서는 여기에 우유까지 더해 차를 달달하고 든든하게 만들어 마셨다. 이 때문에 영국의 다구(茶具, tea equipage)는 점점 더 분화되어 찻주전자와 찻잔 외에도 차를 담아두는 통(tea caddy), 설탕그릇(sugar basin), 설탕집게(sugar tong), 밀크 저그(milk jug) 등이 찻상에서 빠질 수 없는 필수품이 되었다. 끓는 물을 부어 만든 차는 매우 뜨거웠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차를 차받침에 조금씩 부어 식힌 뒤에 마셨다고 한다. 손잡이가 달린 찻잔이 만들어진 뒤에는 이러한 풍습이 사라졌다.

차는 물론이고 중국에서 수입한 자기가 고가의 사치품이던 시절, 귀족들은 차를 마시기 위해 찻상을 별도로 제작했고, 자기를 수집하고 진열하기 위해 별도의 장식장(tea cabinet)을 주문하기도 했으며, 화가를 고용해 찻상을 둘러싼 가족의 화목한 모습을 담은 풍속화를 그리게 하여 저택에 걸어놓곤 했다. 이 풍속화에는 ‘담화도(Conversation Piece)’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여기서 ‘Conversation’은 대화를 나눈다는 좁은 의미보다, 여러 명의 사람과 관계하며 더불어 살아간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한 예로 1733년에 제작된 웨스트(Robert West)의 〈차 마시는 토마스 스미스 씨와 그의 가족(Thomas Smith and His Family at Tea)〉을 살펴보자. 검은 피부의 하인이 찻주전자를 지키는 동안 온 가족이 차를 즐기고 있다. 물주전자에 비해 매우 작은 찻잔을 위태롭게 손에 들고 굳은 얼굴로 화가를 응시하고 있는 이 가족의 모습이 어쩐지 부자연스럽다. 차가 여전히 사회적 지위와 부를 과시하는 용도로 기능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이 회화 장르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 역동적이고 자연스러운 가족의 모습을 그리게 되는데, 그 속에서 차는 가정의 행복과 번영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으로 꾸준히 등장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차가 커피와 매우 다른 사회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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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웨스트(Robert West), 〈차 마시는 토마스 스미스 씨와 그의 가족(Thomas Smith and His Family at Tea)〉
1733년, 캔버스에 유채, 59.5×89 cm, 영국 업튼하우스(Upton House) 소장.

아주 어린 아이부터 노모까지 전 세대가 등장하고 있는 이 그림은 애완동물과 하인 역시 가정의 영역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는 Conversation Piece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설정이다.


가웨이가 광고를 내던 시대에 차는 남성들이 다니던 커피하우스에서나 마셔볼 수 있는 음료였다. 찻잎 역시 커피하우스에서 구입해야 했다.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 6.18~)는 커피하우스가 근대의 새로운 공공영역(public sphere)을 탄생시켰다고 주장한 바 있다. 여기서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읽으면서 남성들은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합리적인 토론 문화를 만들어냈으며, 이로써 보편성과 합리성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 시민사회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공공영역 이론이다. 그렇지만 여성들은 커피하우스에 드나들지 못했다. 커피하우스는 남자들이 커피 이외에 술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서 놀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여자들은 집에서 아름다운 자기에 차를 담아 마셨다. 이 때문에 차는 남성적인 공공영역과 차별되는 가정적 공간을 대변했다. 이 공간은 다분히 여성적이고 사적인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손님을 접대하고 만나는 공간이자 남녀가 같이 안전하게 사교하고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확장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렇듯, 완전히 사적이지도 않으면서 완전히 공적이지도 않은 이 중간 지대에서 남성성은 정화ㆍ교화되고 여성성은 새롭게 태어났다.



여성의 찻상: 차, 사교, 매너




커피가 남성적 담론을 상징했다면 차는 여성적 담론을 상징했다. 이 여성적 담론을 잡담, 험담으로 격하하여 폄하한 예는 매우 많다. 1710년에 인쇄된 〈티 테이블(The Tea Table)〉이라는 판화를 보자. 이 판화에는 여섯 명의 여자가 원탁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면서 잡담(chit chat)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작가는 이 광경에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진다. 이 여성들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앉아 있는 테이블에서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는 암시는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테이블 밑에서 실실 웃고 있는 검은 그림자, 창밖에서 기웃거리는 두 남자, 그리고 출입문 앞에서 벌거벗은 가슴으로 뱀, 횃불 등을 들고 당황해하는 두 여인을 내쫓고 있는 신화적 인물들은 이 여성적 공간의 폐쇄성과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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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 미상, 〈티 테이블(The Tea Table)〉
1710년, 예일 대학교 루이스 월폴 도서관(Lewis Walpole Library) 소장.

여성들의 찻상은 반사회적이며 비이성적인 공간으로 풍자되기 일쑤였다.






Chief Seat of Slander! Ever there we see,                  비방이 군림하는 바로 그곳! 보라, 거기서

Thick Scandal circulate with right Bohea.                  보히차를 영락없이 돌리면서 여성들이 진한 스캔들을 나누는 장면을.

There source of blackning Falshoods Mint of Lies    시커먼 거짓말의 보고인 그곳에서

Each Dame th'Improvment of her Talent tries,             부인들은 각자의 재주를 뽐내고

And at each Sip a Lady's Honour Dies.                    차 한 모금 넘어갈 때마다 누군가는 절개를 잃고
                                                                                  불명예스러운 최후를 맞는다.









여성의 찻상을 이런 방식으로 풍자하고 통제하려 했던 것은 주로 남성이었다. 그 이유는 여성의 찻상이 남성 위주의 사회질서에 일정한 위협을 가했기 때문이다. 차가 여성끼리의 사교를 매개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부각되면서 여성들은 더 많은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들이기 시작했고 또한 그들을 방문하기 위해 자주 집을 비우게 되었다. 차는 또한 여성의 사치를 부추겼다. 18세기 영문학에는 중국제 찻잔과 찻주전자에 열광하는 부인들이 많이 등장한다. 중국에서 들여온 차와 도자기, 가구, 비단 등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상가가 생기면서 여성들은 가게를 드나들며 경쟁적으로 찻잔을 수집했다. 차 문화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의 시선은 대체로 회의적이고 냉소적이었으며, 경우에 따라 반여성주의적이었다.

찻상을 통해 당대의 여성성을 풍자한 유명한 예로 호가스(William Hogarth)의 1731년 판화 〈창녀의 인생(A Harlot’s Progress)〉을 꼽을 수 있다. 이 판화에서 호가스는 창녀의 몰락한 여성성을 넘어진 찻상과 깨진 찻잔에 비유하고 있다. 첫 번째 판화에서 갓 상경한 순진한 시골처녀로 묘사된 판화의 주인공은 두 번째 판화에서 유태인의 정부로 거듭난다. 판화는 이 여성의 무절제한 사치와 부패한 허영심을 애완 원숭이, 서인도제도에서 들여온 어린 하인, 그리고 사치스러운 찻상 등을 통해 고발하고 있다. 여기서 무너진 찻상, 그리고 찻상에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 찻주전자와 찻잔은 여성의 빗나간 사교가 언제든지 성적 타락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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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 〈한 창녀의 인생: 연인과 다투다(A Harlot’s Progress: The Quarrel with Her Lover)〉
1732년, 동판화, 31.2×37.8 cm, 영국 박물관(British Museum) 소장.

부유한 유태인 상인의 정부가 된 창녀 몰(Moll)은 또 다른 애인과 밀회를 즐기다 갑자기 유태인이 등장하자 찻상을 고의적으로 넘어뜨린다. 놀란 상인이 찻상을 붙들며 몰을 쳐다보는 동안 젊은 애인이 뒷문으로 유유히 빠져나가고 있다.


그러나 차를 통해 형성된 새로운 사교 문화는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차는 ‘매너 있고 교양 있는’, 그런 의미에서 다소 여성화된, 그러나 모두에게 열려 있는 시민성을 상징했다. 이때 매너와 교양은 타인과의 사교를 통해서, 그리고 상품의 올바른 소비를 통해서 길러지는 다분히 상업적이고 소비중심적인 덕목, 다시 말해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지나치게 피상적인 덕목으로 비칠 수 있으나, 차가 상징하는 시민성은 수행적이며 수평적이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모두에게 열려 있다는 점에서 전복적이기도 했다. 집에서 마시던 차를 영국인들은 점점 야외에서, 정원과 공원에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남녀노소 만나고 어울리는 곳에서 즐겨 마시게 되었다. 아이들도 마셨고 하인들도 마셨다. 이로써 차를 마시는 것은 특권이 아닌 보편적 권리로 다시 자리매김되었다.



홍차의 정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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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매너 있고 교양 있는’, 그리고 모두에게 열려 있는 시민성을 상징했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즐겨 마시면서 차는 보편적 음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우아한 홍차 한 잔을 마시기 위해서라면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불사하기도 했다. <출처: gettyimages>


1741년 80만 파운드(lb)의 차를 소비한 영국인들은 1750년에 250만 파운드, 1784년에는 1100만 파운드에 가까운 차를 소비했다. 1693년과 1793년 사이 차 수입이 400배나 증가했다는 놀라운 통계도 있다. 차 소비가 미친 사회적 영향에 대해서는 다소 상반된 견해가 있다. 노동자들이 진이나 맥주 대신 차를 선호하게 되면서 더 건강한 몸으로 능률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되어 영국의 산업화가 촉진되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노동자들이 영양가 있는 음식을 구입해야 할 돈으로 차를 사 마시면서 오히려 신체적으로 허약해지고 노동생산성이 감소하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1756년에 [차에 대한 에세이(An Essay on Tea)]를 출간한 핸웨이(Jonas Hanway)는 차가 영국인의 건강을 해치고 일을 방해하며 개인의 자산을 축내고 국가의 부를 유출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에 대한 강력한 대책을 주문했다. 차를 마시는 영국인이 여성화되어 나약하고 무기력한 국민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믿었던 핸웨이에게 차는 도덕적 해이, 사회적 혼돈, 경제적 파탄, 아울러 국가적 낭비를 불러온 재앙이었다. 차 소비가 한창 늘어나던 시대에 핸웨이의 격한 반응은 빈축을 샀다. 예컨대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문인 중 한 명이었던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 1709.9.18~1784.12.13)은 핸웨이의 견해가 지나치다며 깎아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차는 실제로 영국 경제에 갈수록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영국인들은 점점 더 많은 차를 소비했지만 중국은 영국이 내놓을 수 있는 물건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은 갈수록 심각한 무역 적자를 떠안게 되었다. 이 불균형 때문에 영국은 자국에서 재배하기 힘든 차를 식민지 인도에서 재배하기 시작했고, 중국에 아편 수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팔아넘겨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려 했다. 19세기의 아편전쟁은 사실 차 전쟁이었던 셈이다. 미국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된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 역시 식민지 미국에서의 차 수입과 유통을 통제하려 했던 영국의 정책에 반발한 미국 시민들이 제국의 간섭 없이 차 마실 권리를 주장한 사건이었다.

우아한 홍차 한 잔을 마시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사고팔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불사한 영국을 생각하면 실로 홍차는 목숨을 걸고 마신 음료였다. ‘중국의 신비한 맛’이 영국의 맛으로 거듭난 배경에는 제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

 

'18세기의 맛'은 한국18세기학회의 기획으로서, 문학동네와 함께 합니다. 14547416610147.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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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은경 |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프린스턴 대학에서 18세기 문학, 철학, 미학을 전공하여 비교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18세기 영문학과 중국의 관계를 다룬 저서를 집필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아담 스미스와 감사의 빚(Adam Smith and the Debt of Gratitude)], [타인의 고통과 공감의 원리], [약속을 ‘준다’는 것: 인치볼드의 ‘쉬운 이야기’ 읽기(Giving Promises in Elizabeth Inchbald’s A Simple Story)], [로빈슨 크루소가 본 만리장성(Robinson Crusoe and the Great Wall of China)] 등이 있다. 차, 찻잔, 그림, 여행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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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8세기의 맛: 취향의 탄생과 혀끝의 인문학 2014.02.28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의 18세기를 다채롭고 참신한 시각으로 연구하는 한국18세기의 학회의 첫 프로젝트 결과물, <18세기의 맛>이 책으로 나왔다. 18세기의 '맛'을 중심으로 세계사의 흥미로운 단면을 맛깔나게 서술했다. 23명 인문학자의 시각으로 18세기의 동서양을 뒤흔든 맛과 그 맛에 얽힌 흥미로운 현상을 살펴보는 일에 동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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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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