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보는역사 이인상의 서얼화 - 말이 끝나는 곳에서 그림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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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56회 작성일 16-02-06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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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그림에는 사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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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알브레히트 뒤러, <자화상(Self-Portrait)>1500년, 66×49cm, 독일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Alte Pinakothek)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그림 2 알브레히트 뒤러, <자화상> 부분.




그림은 모두 그려진 이유가 있고,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의도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그림의 사연이 글로 밝혀져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화가의 의도와 그림에 얽힌 사연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이 중요한 미술사적 문제에 천착한 책이 바로 마이클 박산달(Michael Baxandall)의 [의도의 패턴(Patterns of Intention)](1985)이다. 박산달은 화가에 대한 전기적 자료와 작품과 관련된 문헌자료가 없더라도 그림 속의 시각적 요소들을 통해 화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박산달의 주장을 한 예를 들어 설명해보기로 한다. 독일 르네상스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인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는 1500년에 기념비적인 자화상을 그렸다(그림 1). 이 그림 속의 뒤러는 털 코트를 입고 오른손을 위로 살짝 올린 모습으로 정면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 뒤러의 자화상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 그림이 정면상이라는 것이다. 정면상은 예수 그리스도 등 성상(聖像)에만 적용된 것으로, 이른바 ‘베라 아이콘(the vera icon)’이라 불린 정면 응시 도상이다. 뒤러는 이 도상을 사용하여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신성한 존재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또한 눈여겨볼 것이 오른손이다. 이 그림에서 오른손은 비현실적으로 매우 크게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손이 ‘신성한 손’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왜 뒤러는 이렇듯 위대한 창조자로 자신을 그린 것일까? 뒤러가 활동했던 중세 독일에서는 화가를 ‘화공(畵工)’으로 취급하여 사회적으로 천시하였다. 뒤러는 베니스를 여행했을 때 이탈리아에서 화가들이 예술가로 높은 대우를 받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창조적 에너지와 뛰어난 재능을 지닌 화가인 자신을 장인(匠人) 정도로 하대하는 현실을 개탄하였다. 독일에서 화가는 ‘기생충’에 불과하다고 뒤러는 화가의 열등한 사회적 지위에 대해 실망과 자기비하의 감정을 드러내었다. 이 자화상에서 뒤러는, 바로 신과 같은 창조자이며 신성한 손으로 위대한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다름 아닌 화가, 즉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시각적으로 천명하고 있다.

한편 이 그림에는 털옷과 머리카락, 수염 등이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다(그림 2). 자신과 같은 위대한 화가가 아니면 결코 이와 같이 정교한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하여 극사실주의 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화가의 의도는 그림으로 드러난다. 뒤러는 말(언어)로 자신을 ‘신성한 존재’라고 밝히지 않았다. 그림의 사연은 시각적 요소를 통하여 밝힐 수 있다.



<검선도> - 세상에 쓰이지 못한 서얼의 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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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이인상, <검선도(劍仙圖)>
1654년 이후, 종이에 담채, 96.7×61.8㎝,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화가의 의도가 그림 속에 시각적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흥미로운 그림으로 조선시대 이인상(李麟祥, 1710~1760)의 <검선도(劒僊圖)>(그림 3)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검선도>는 ‘서얼에 의한, 서얼을 위한, 서얼에 관한’ 그림이다. 서얼 이인상이 선배 서얼인 유후(柳逅, 1690~?)를 위하여 그린 그림이기 때문이다. <검선도>에는 “중국인이 그린 검선도를 방작(倣作:원작을 재해석하여 그림)한 이 그림을 취설 옹에게 바친다. 종강의 비오는 날에 그리다(倣華人劒僊圖 奉贈醉雪翁 鐘崗雨中作)”라는 이인상의 제발이 적혀 있다. 18세기에 ‘취설(醉雪)’이라는 호를 사용한 인물은 유후가 유일하다. 유후는 서얼로 1748년 조선통신사행에 서기(書記)로 참여하였으며 안기찰방(安奇察訪) 등 미관말직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대표적인 서얼시인 집단인 ‘초림팔재사(椒林八才士)’의 일원이었던 남옥(南玉, 1722~1770)의 손자며느리가 유후의 손녀이다. 유후는 당시 서얼들이 존경했던 인물이다.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은 유후가 “이미 80여 세의 나이가 되어 수염은 눈처럼 하얗고 붉은 볼을 지니고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신선과 같았다”라고 하였으며, 이덕무(李德懋, 1741~1793) 또한 원중거(元重擧, 1719~1790)의 말을 빌려 유후를 “걸어 다니는 신선(地行仙)”이라고 불렀다. 성해응, 이덕무, 원중거도 모두 서얼이다. 유후는 서얼이었지만 고결한 삶을 산 인물로 동시대와 후대에 평가되었다. 그러나 서얼이라는 신분적 질곡으로 말미암아 유후 또한 다른 여타의 서얼과 마찬가지로 가난에 시달렸으며 사회적 신분의 한계 속에서 한평생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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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이인상,<검선도>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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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이인상,<검선도>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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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여동빈도(呂洞賓圖)>
14세기, 미국 캔자스시티 넬슨-앳킨스 미술관(The Nelson-Atkins Museum of Art) 소장.


<검선도>는 서얼 이인상이 존경하는 선배 서얼 유후에게 그려준 매우 특별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동아시아 회화사에서 유사한 작품을 발견할 수 없는, 독특한 초상화이다. 거대한 소나무 두 그루 아래에 마치 신선같이 휘날리는 수염과 매서운 눈매로 앉아 있는 유후의 모습이 단연 압도적이다(그림 4). <검선도>는 야외 배경의 초상화라고 할 수 있는데 유후의 오른쪽 무릎 아래에는 칼이 그려져 있다(그림 5).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칼과 관련된 신선은 팔선(八仙) 중 하나인 여동빈(呂洞賓, 798~?)이다. 여동빈은 원대(元代) 이후 발전한 전진도교(全眞道敎)에서 추앙받은 인물로 ‘비검(飛劒)’을 사용하여 잡귀와 역신(疫神)을 퇴치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현전하는 여동빈 관련 그림을 보면 모두 칼을 등에 매거나 옷 속에 숨기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을 뿐이다(그림 6). 미술사에서 ‘도상(圖像, icon)’은 문법과 같은 규칙으로 약간의 변형은 있지만 근본적인 시각구조에서는 동일한 모습의 유지를 원칙으로 한다. 도상의 원칙에서 볼 때, 이인상이 방작한 중국의 <검선도>가 여동빈 관련 그림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설혹 여동빈 관련 그림을 참고했다고 해도, 이인상은 도교화 도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그림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검선도>는 시각적 특징에 있어 동아시아 회화사에서 전무후무, 유일무이한 그림이다. 동아시아 그림에서 검이 그려진 그림은 전쟁화(戰爭畵)를 제외하면 여동빈 그림, 신년(新年)을 기념해 벽사용(辟邪用) 그림으로 자주 그려졌던 종규(鐘馗: 역귀를 쫓는 도교의 신) 그림, 무인(武人) 초상, 황제 무장상(武裝像), 전설적인 검객(劍客) 및 검무인(劍舞人) 관련 판화 및 그림(주로 소설 삽화에 등장, 그림으로 그려진 경우는 매우 드물다. 여 검객이 상당수 존재한다), 골동품으로서 칼을 그린 그림이 대부분이다. 또한 이들 그림 중 칼을 옷 속에 숨긴 여동빈의 경우를 제외하고 칼은 언제나 전체 모습으로 그려진다. <검선도>를 다시 보자. 그림 왼쪽 하단에 칼자루와 그 밑부분만이 살짝 그려져 있다. 얼핏 보면 칼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이 그림에서 칼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최근 <검선도>에 대한 한 연구에 따르면, 이인상은 어릴 적부터 칼에 대해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인상에게 칼은 강개(慷慨)한 태도, 협사적(俠士的) 멘털리티, 강렬한 존주양이적(尊周攘夷的) 이념, 청(淸)에 대한 복수설치(復讐雪恥)의 염원 및 벽사(辟邪) 혹은 호신(護身)ㆍ수신(修身)의 의미를 지녔다고 한다. 아울러 칼은 이인상의 도선적(道仙的) 취향을 보여준다고 한다. <검선도>에서 이인상은 자신과 유후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했던 은일자(隱逸者)의 고고한 기상, 무욕(無慾)의 경지, 불의에 맞서고자 했던 고결하고 올곧은 정신, 세상의 온갖 타락과 오염에 물들지 않으려고 했던 결연한 의지를 그림 속에 투영하고자 했다는 것이 이 연구의 핵심 주장이다. 이 주장은 표면적으로 보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견해이다. 조선후기 문학에서 일부 서얼들은 종종 협사(俠士) 또는 검객(劍客)과 같은 인물로 묘사되곤 했다. 가령 성대중(1732~1812)의 경우 “협사(俠士)의 풍모가 있었으며(有俠士風)”, 이명계(李命啓, 1714~?)는 “모습이 꼿꼿하고 수염이 길어 마치 신선, 검객과 같았다(如神人劍客)”고 한다. 따라서 협객의 의미로 칼이 그려졌다고 해도 유후가 서얼이라는 것을 시각적으로 알려주는 데는 문제가 없다. 실제로 <검선도>에 보이는 유후의 장중한 모습과 칼은 협사, 검객과 같은 분위기를 준다.

그러나 이인상과 유후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한 고고한 기상, 불의에 맞서는 결연하고 고결한 정신을 표현하는 소재로 반드시 칼이 사용될 필요는 없다. 이러한 면모들은 그림 속에 보이는 두 그루의 장송(長松)만으로도 충분하다. 장송은 높은 도덕성, 절개, 정의로움을 상징하는 전통 소재이다. 아울러 이인상이 칼에 대한 상징성을 그림 속에 부여하고자 했다면 칼을 전체적으로, 아울러 잘 보이도록 그렸어야 한다. 그가 단지 칼자루 주변만을 그린 사실을 이 연구의 논지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아울러 이인상과 같이 유후도 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또한 동일한 상징적 의미를 칼에 부여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검선도>는 유후를 위해 그려진 그림이다. 따라서 유후의 입장에서 칼의 의미를 생각해봐야 한다. 일반적으로 중국과 한국의 초상화에서 초상화 주인공(the sitter) 주변에 있는 물건들은 그의 삶과 연관된 것들이 많다. 따라서 <검선도>에 보이는 칼은 유후의 삶을 알려주는 중요한 시각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 초상화 전체에서 초상화 주인공과 함께 칼자루와 그 밑부분만을 그린 그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검선도>의 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칼은 서얼들에게 신분적 불평등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서얼들은 ‘칼집 속에 든 칼, 즉 갑 속의 칼(匣中劍)’로 자신들의 불우한 처지를 한탄하였다. 칼은 칼집에서 나와 사용되었을 때 비로소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칼집 속의 칼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조선시대에 서얼은 양반의 자손으로 태어났지만 사회적으로 제대로 쓰이지 못했다. 능력이 뛰어나도 서얼은 고위 관직에 나갈 수 없었기에 가난 속에 살았으며, 반쪽짜리 양반으로서 사회적 냉대와 폄하의 대상이 되었다. 글을 배울 때도 서얼들은 나이 어린 양반들 뒷자리에 앉아야 했다. 서얼들 중 이인상과 같이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거나 시인으로 저명한 인물도 일부 있었지만, 결국 이들도 서얼이었다. 서얼은 모두 세상에 뜻을 잃은 사람들, 즉 ‘실의(失意)’한 인물들이었다. 이인상 자신도 “갑(匣) 속의 칼과 서안(書案)의 책도 불평을 한다(匣劒牀書動不平)”고 하였다. 신분제에 대해 불평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갑 속의 칼과 책상 위의 책을 보면서, 이인상은 세상에 쓰이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다. 서얼이 책상에 앉아 책을 본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서얼은 아무리 책을 많이 읽어도 과거를 볼 수 없었다. 책상 위에서 불평하는 책은 이인상 자신의 서글픈 처지를 말해준다.

그런데 <검선도>를 보면 매우 일부이기는 하지만 칼이 뽑혀 있는 상태로 그려져 있다. 칼자루 밑부분을 보면 칼이 뽑혀져 칼의 몸체가 일부 드러나 있다. 이인상은 ‘갑 속의 칼’이 아닌 뽑혀져 있는 칼의 극히 일부분만을 그려 넣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갑 속의 칼’이 세상에 쓰이지 못하는 서얼의 신세를 상징한 것이라면 <검선도>에 보이는 뽑혀져 있는 칼은 반대 의미가 된다. 즉, 유후가 사회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뜻이 된다. 왜 이인상은 유후와 관련하여 뽑혀져 있는 칼을 그린 것일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검선도>가 제작된 시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발에 보이는 “종강의 비 오는 날에 그리다”라는 구절을 통해, 이인상이 <검선도>를 그린 때는 설성(雪城, 현재의 장호원 근처)에 은거처인 종강모루(鐘崗茅樓)를 지은 1754년 이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인상이 관직을 그만두고 산속에 들어가 고독한 은거자로 생활할 때다. 이 시절 이인상이 어떤 맥락에서 <검선도>를 그리게 되었는지는 문헌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제작배경을 파악하기 어렵다. 유후는 1721년에 생원시에 합격했지만 매우 늦은 나이인 53세 때(1742) 북부참봉(北部參奉)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검선도>가 그려진 시기, 즉 1754년 이후에 유후는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를 지냈으며 1757년 안기찰방(安奇察訪)으로 나가 하급 관료로 일했다. 유후가 이렇듯 6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도 하급 관료로 일해야 했던 것은 다름 아닌 가난 때문이었다. 이덕무는 유후가 90 평생을 굶주림 속에 살았다고 술회한 바 있다. 가난은 서얼들에게 운명이었다. 그들은 물려받은 재산이 없어 평생을 가난 속에서 살았다. 이인상도 서울에서 집 없이 전전하였다. 이를 불쌍히 여겨 양반들인 신소(申韶, 1715~1755)와 송문흠(宋文欽, 1710~1752)이 이인상을 위해 30냥을 주고 남산에 초가집 한 채를 사줄 정도로 그는 곤궁했다. 이인상을 포함해 하급 관료라도 하지 않으면 굶주림 속에 죽어야 했던 것이 서얼의 삶이었다.

이덕무는 유후가 온후(溫厚)하고 청직(淸直)하여 후생의 표준이 될 만한 비범한 인물이었지만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극히 적었다고 그의 인생에 대해 평가하였다. 극심한 가난 속에서 늙어서까지 하급직을 전전했지만 세상 누구도 그의 재능과 인품을 알아보지 못했다. 유후는 서얼이 아니었다면 후세의 모범이 될 인물이었다. 그러나 서얼이었기에 가난과 사회적 무관심 속에 생을 마쳤다. <검선도>에 보이는 칼은 바로 이러한 유후의 삶을 알려준다. 칼이 뽑혀져 있지만 극히 일부만 나타나 있다. 이것은 유후가 하급 관료로 일했지만 세상에 쓸모 있는 인물이 되지는 못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서얼이 벼슬을 해도 이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도화서 화원이었던 김홍도(金弘道, 1745~1806?)는 연풍현감(延豊縣監)과 안기찰방을 지냈다. 유후가 지낸 벼슬인 안기찰방은 중인 신분인 김홍도도 역임한 지방 말직이었다. 서얼들이 관직을 맡아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세상의 무관심과 냉대는 서얼들이 늘 겪었던 일이다. 세상에 쓰인들 그 누가 서얼의 재능과 인품을 존중해주었겠는가. 현실은 이와 같이 비정했다. <검선도>에 보이는 드러난 칼의 일부는 세상에 쓰였지만, 즉 관직을 맡기는 했지만 어떤 역할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미관말직만을 전전한 서얼들의 불행한 삶을 상징적으로 이야기해주고 있다. 결국 ‘칼집 속의 칼’이나 바깥으로 드러난 칼이나 의미는 마찬가지다. 드러난 칼은 ‘칼집 속의 칼’의 역설적 뒤틂이다. 본래 사회적으로 ‘무용(無用)’한 존재이지만 설혹 세상에 쓰인다 해도 제대로 쓰이지 못하는 존재가 서얼이기 때문이다. 화가 이인상 역시 유후와 마찬가지로 10년 이상을 서울과 지방의 하급직으로 연명하다가 산속에 은거하였다. 노론 명문가의 서얼이었지만 이인상도 결국은 세상에서 뜻을 펼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제대로 쓰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검선도>에 보이는 칼은 서얼의 불행한 처지에 대한 자기 연민을 보여준다. 유후에게 보낸 한 시에서 이인상은 “한루(寒樓)의 지창시(紙窓詩)를 그 누가 알아줄까(寒棲誰知紙窓詩)”라고 자조(自嘲)하였다. 여기서 한루(寒樓)는 유후의 지독한 가난을 지칭하며 지창시(紙窓詩)는 유후의 문학적 재능을 의미한다.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혹독한 가난 속에 범부로 살아야 했던 서얼 유후에 대한 이인상의 울분과 연민을 엿볼 수 있다.

<검선도>가 어떤 목적으로 그려졌는지는 현재 알 수 없다. 그러나 여러 정황을 통해 볼 때, 특히 거대한 장송 두 그루의 상징성을 고려해볼 때 1754년 이후 언제 그려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검선도>는 유후의 생일 축하용 그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중국과 한국에서 소나무 그림은 ‘장수’를 기원하는 생일 축하용 그림으로 자주 제작되었다. 따라서 이인상은 유후의 생일을 맞이하여 <검선도>를 제작하여 바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인상은 이 그림을 그렸을 때 이미 은거자로 삶을 마감하게 될 영락한 서얼이었다. 이인상은 참혹한 자신의 처지와 선배 서얼이었지만 노년에도 미관말직을 전전하고 있던 유후의 고단한 삶을 생각하며 <검선도>에 서얼의 슬픔을 상징하는 칼을 그려 넣은 것이다. 이 칼에는 이들 모두가 느낀 서얼의 슬픔, 절망, 좌절감, 억울함과 불평의 마음, 자기 연민의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이인상은 유후를 제외하고 이러한 초상화를 누구에게도 그려주지 않았다. 자신과 친했던 양반들인 이윤영(李胤永, 1714~1759), 신소, 송문흠에게조차 <검선도>와 같은 특별한 초상화를 그려주지 않았다. <검선도>는 이인상의 서얼 의식이 미묘하게 표출된 흥미로운 ‘서얼화’라고 할 수 있다. 이인상은 서얼화가로서 주목해야 한다.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의 아들인 화가 김윤겸(金允謙, 1711~1775)은 같은 서얼이지만 자신의 그림에 서얼 의식을 드러낸 적이 없다. 김윤겸과 이인상은 모두 명문 노론 집안의 서얼이다. 이인상만이 서얼 의식을 보여준 유일한 조선시대 서얼화가이다. 동아시아 전체를 통해 봐도 조선에만 존재한 서얼 신분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내류(內流) 또는 잠류(潛流)하던 자신의 자의식인 서얼 의식을 미묘하게 드러낸 이인상의 작가적 능력은 매우 탁월한 것이었다. 이인상의 그림 속 ‘서얼 의식’은 언제나 은미(隱微: 묻히거나 작아서 알기 어려움)하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림은 절대로 함부로 그려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림은 오직 그림을 아는 자만이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설송도>- 혹한 속 늙은 소나무의 최후, 서얼이 맞이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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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이인상, <설송도(雪松圖)>
조선후기, 종이에 담채, 117.2×52.6㎝,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이인상의 모든 그림이 서얼화는 아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걸작들 중 대부분은 서얼화라고 할 수 있다. <설송도(雪松圖)>(그림 7)는 이인상이 그린 서얼화의 백미이다. 위로 굳건히 뻗어 올라간 소나무의 몸통과 옆으로 굽어 휜 늙은 소나무가 교차하는 구도는 <검선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두 그림이 비슷한 시기에 그려졌으며 유사한 주제를 담고 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설송도>는 전체적으로 단순화된 구도를 보여주고 있어 <검선도>보다 조금 늦은 시기인 1750년대 후반, 즉 이인상이 죽기 얼마 전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설송도>의 풍경은 참혹하다. 두 그루 늙은 소나무가 겨울 한파 속에 삶과 죽음을 오가고 있다. 뿌리를 앙상하게 드러낸 채 생명을 보전하고자 애쓰는 두 그루 소나무의 모습은 처연하기 그지없다. 이 그림에 보이는 매서운 겨울 풍경은 서얼들이 처한 냉혹한 삶의 조건을 암시한다. 뿌리마저 뽑혀 고사(枯死) 위기에 놓여 있는 소나무는 서얼의 고통과 절망 그 자체이다. 이 그림 속 겨울은 신분제적 질곡(桎梏)을 의미한다. 사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부랑(浮浪)한[좋은 말로 이야기하면 처사(處士)로서 세상과 등지고 산] 서얼들의 삶은 뿌리 뽑힌 소나무, 늘 죽음과 같은 고통에 직면한 고난과 좌절의 삶이었다. 결론적으로 <설송도>는 이인상 자신의 고뇌에 찬 삶을 시각적으로 집약한 자화상이다. 나아가 이 그림의 궁극적인 주제는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화가의 성찰이다. 겨울 추위 속에서 늙은 소나무들은 죽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버티고 있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버팀도 오래가지는 못한다. 늙은 소나무들에게 이미 죽음은 임박해 있다. 화가 이인상의 놀라운 능력은 바로 죽음에 대한 성찰을 이와 같이 극적인 장면을 통해 표현한 것이다. 늙은 소나무의 죽음은 곧 화가 이인상 자신의 죽음이다. 동아시아 문인화가 중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이렇듯 처절하게 표현한 화가는 이인상 외에 없다. 혹한, 늙은 소나무의 생존 의지, 죽음의 음산한 그림자가 한데 어우러져 비장하고 침울한 세계의 진수를 <설송도>는 보여준다. 결국 이 그림에 보이는 늙은 소나무와 같이 이인상은 쓸쓸하게 산에서 죽었다. 뒤러의 <자화상>에 보이는 ‘거대한 오른손’과 같이 <설송도>에 나타난 처참하게 드러난 늙은 소나무들의 뿌리는 이인상이 지닌 비극적인 삶과 내면 의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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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석도(石濤), <운산도(雲山圖)>
1702년, 북경 고궁박물원 소장.


<설송도>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해볼 것은 이인상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근원, 즉 서얼의 삶을 성찰하고 있다는 점이다. 화가 자신의 근원에 대한 사색과 관련하여 이인상과 비견되는 인물은 중국화가 석도(石濤, 1632~1707)이다. 석도는 명(明) 황실 자손으로 명청(明淸) 교체기에 선승(禪僧)과 도사(道士)로 활동하다가 생의 마지막 단계에 양주(揚州)에 정착하여 직업화가로 삶을 마쳤다. 그는 노병(老病)에 시달리던 1701년 말~1702년 초경부터 자신의 근원인 ‘명 왕손(王孫)’ 의식을 끊임없이 그림 속에서 환기시켰다. 평생을 떠돌이 선승ㆍ도사로 살면서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석도는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 이르러 오랫동안 감추어두었던 자신의 본명인 주약극(朱若極), 보다 정확하게 광서(廣西) 계림(桂林) 지역의 명 왕부(王府)였던 정강왕부(靖江王府)의 후손 주약극을 자신의 그림에 쓰기 시작했다. 그의 말년 그림에는 ‘약극(若極)’, ‘극(極)’, ‘정강후인(靖江後人)’ 등 그의 왕손 의식을 보여주는 관지(款識, signature)와 인장(印章)이 자주 보인다(그림 8). 석도는 인생의 마지막에 명 황실 자손이었기에 만주족 지배하에서 늘 숨죽여 살아야 했던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근원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석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인상 또한 노병으로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인지하고 <설송도>와 같이 비극적인 산수화를 그리게 되었다. 결국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과 성찰이 <설송도>의 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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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이인상, <설송도> 부분.


‘한림고목도(寒林古木圖)’라는 동아시아 그림의 전통 장르가 있다. ‘한림고목도’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군자의 도덕적 고결함과 불굴의 의지를 상징하는 그림이다. 그러나 중국의 어떤 ‘한림고목도’도 <설송도>와 같이 비극적이고 참혹한 풍경을 담고 있지는 않다. <설송도>는 소나무의 고통을 극적으로 표현하여, 보고 있으면 눈이 시리다. <설송도>는 극단적인 삶의 조건 속에서 죽음의 시간을 견디는 겨울 소나무의 비극적 풍경을 그린 것으로, 동아시아 ‘한림고목도’ 중 최고 걸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얼이 아니라면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아니 그릴 필요가 있을까? <설송도>에는 뿌리 뽑힌 소나무 하단에 보이는 바위에 이인상의 도장이 하나 찍혀 있어, 이 그림이 자신을 위해 그린 그림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그림 9). <설송도>에는 이인상의 제발도 관지도 없다.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곳에 이인상은 몰래 자신의 도장을 찍어 이 그림이 자신의 그림임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 그림은 임박한 자신의 죽음, 세상에서 추방된 외로운 은일자이자 서러운 서얼의 죽음을 예시(豫示)한다. 겨울 산 후미진 계곡의 늙은 소나무가 죽은들 이 세상 누가 거들떠보랴. 설성의 깊은 산속에 혼자 병을 앓고 있는 서얼 한 명이 죽은들 누가 슬퍼하랴. 이인상은 자기 연민으로 소나무들의 최후를 바라보고 있다. 같은 문인화가였지만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은 <설송도>와 같은 비극적인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야인(野人)으로 오랜 세월을 정치적인 불운 속에 살았지만 강세황은 양반이었다. 그는 서얼인 이인상과는 신분이 달랐으며 따라서 <설송도>와 같은 비극적이고 처절한 그림을 그릴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이인상과 절친했던 양반 화가 이윤영조차 이러한 참혹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이윤영 역시 처사로 자처하면서 살았지만 그는 이인상과 같은 서얼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의 그림에 지독한 자기 비애와 연민은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하지만 이인상은 서얼이었기 때문에 이들과 달랐다. 이들과 비슷한 삶의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서얼이라는 신분은 이인상의 삶을 근본적으로 규정한 족쇄였다. 따라서 이인상의 그림은 그 누구의 그림과도 달랐던 것이다. 서얼 신분은 이인상의 삶을 비극적으로 만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예술세계는 서얼이었기 때문에 빛났다. 서얼화가라는 독특한 신분으로 말미암아 그는 한국을 넘어 동아시아 문인화 전체를 대표하는 명작들을 그려낼 수 있었다. 이인상은 서얼화가이고 그의 그림 중 명작은 ‘서얼화’이다. 중국과 일본에는 서얼화가도 서얼화도 없다. 바로 이 점에서 이인상의 ‘서얼화’는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말이 끝나는 곳에서 그림은 시작된다




그림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 언어 바깥의 세계에 자리한다. 중국의 저명한 문인화가들은 자신들의 문집을 남겼으며 방대한 양의 시와 산문을 지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 글들은 그들이 남긴 그림을 이해하는 데 별 소용이 없다. 그림과 관련한 이야기는 거의 없으며, 있어도 그들의 그림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기이하면서도 흥미로운 현상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 언어와 그림은 서로 다른 영역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 속에 그림의 세계가 있다. 이인상이 남긴 시와 산문들이 그가 그린 그림들을 설명하는 데 충분한 자료가 되지 못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이인상은 글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서얼의 슬픔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서얼이라는 자신의 처지를 인정할 수 없었고, 다른 서얼처럼 대우받기 싫었다. 그러나 이인상은 어쩔 수 없는 서얼이었다. 그것은 말로 할 수 없는 하늘의 형벌이며 고통이었다. 말로 드러낼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이인상은 말보다 그림의 ‘모호성(ambiguity)’과 ‘암시성(allusion)’을 사용하였다. 그림은 말과 달라 의미를 직접적으로 전달하지 않는다. 암시와 상징은 그림이 가진 커다란 힘이다. 의미가 드러나는 언어보다 암시로 가득 차 쉽게 해독(解讀)되지 않는 그림은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기에 좋은 매체이다. 중국의 문인화가들이 수많은 글을 남겼음에도 그림을 그려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던 이유는 바로 그림이 가지는 ‘모호성과 암시성의 힘’ 때문이다.

이러한 그림의 특성은 문인화가 강세황에게도 적용된다. [표암유고(豹菴遺稿)]에 들어 있는 강세황의 시문들에서 그가 그린 그림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거의 찾을 수 없다. 이인상과 강세황 모두 글로써 자신의 내면 풍경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 것은 그림이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인상과 강세황은 뛰어난 화가이자 서예가였지만 명문장가이자 탁월한 시인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규상(李奎象, 1727~1799)의 [병세재언록(幷世才言錄)]에서 이인상은 <화주록(畵廚錄)>과 <서가록(書家錄)> 부분에 언급되어 있다. 강세황도 마찬가지이다. 이규상은 이인상을 고전(古篆)과 그림에서 일가를 이룬 인물로 파악하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규상은 세상 사람들이 이인상의 서체인 ‘원령체(元靈體)’를 무분별하게 추종하고 심지어는 그의 명망에 경도되어 이인상의 부족한 부분까지 모방하려는 속태(俗態)를 비판하면서 “이인상의 해서(楷書)와 시는 평범하여 다른 사람보다 약간 나을 뿐”이라고 혹평하고 있다. 즉, 이규상은 이인상의 해서와 시를 매우 평범한 수준이었다고 논평하고 있다. 최근 이인상의 문학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이규상이 이인상의 문학에 가한 논평을 고려해볼 때 매우 아이러니한 느낌이 든다. 이인상의 글만을 추적해 이인상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이인상을 이해하는 정도(正道)가 아니다. 이인상은, 이규상조차 “꼿꼿한 자태와 파리하면서도 강단 있는 정신으로 화가의 최고 경지에 이르렀다”고 극찬할 정도로 철저하게 화가였다. 이인상의 시와 그림에 대한 이규상의 평가는 이와 같이 달랐다. 물론 이인상이 남긴 글들이 그를 이해하는 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규상의 평가는 거의 동시대인의 평가이기 때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인상의 글을 통해 이인상에 대한 위인열전(偉人列傳)을 쓰는 것으로 연구가 경도될 위험이 있다.

이인상에 대한 연구가 글만을 분석 대상으로 삼을 경우, 그의 삶과 예술이 지닌 역사적 성격이 축소 또는 과장되고 왜곡될 수 있다. 이인상이 동시대 및 사후에 최고의 화가로 평가되었던 것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따라서 이인상을 이해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사항은 그가 화가였다는 사실이다.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그는 불우한 서얼화가였다. 그의 그림은 비범하고 독특하며 그 속에는 미묘한 자의식이 표현되어 있다. 그가 서얼이었기 때문에 그의 그림은 빛난다. 서얼의 아픔과 상처가 불후의 명작을 탄생시킨 힘이 되었던 것이다. 이인상의 경우를 통해 볼 때 그림은 결코 함부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된다. 그림 속에 내재된 ‘화가의 흔적’을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이 흔적은 ‘그림 속에’ 존재한다. 이인상의 흔적을 그의 그림 속에서 발견하는 일이 이인상 연구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이인상이 남긴 글만으로는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한국학이 그림과 만나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태학사와 손을 잡고<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를 연재한다. 그림에 숨은 비밀과 사연을 프리즘으로 삼아 한국학의 출렁이는 바다로 여행을 떠나려는 것이다. 문학, 미술, 음악, 철학, 역사, 문화가 망라되는 항해에 깊고 진한 교감이 깃든 풍성한 바다가 펼쳐지길 해신(海神)에게 기도한다. 연재는 매주 1회 돛을 달고 항구를 떠난다.   14547416760526.jpg  http://www.thaehaksa.com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도서 출간
네이버캐스트에 연재되었던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시리즈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우리 시대 인문학자 32인이 옛 그림을 호명해 되살려낸 한국학 읽기의 색다른 즐거움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장진성 | 서울대학교 교수
중국회화사를 전공하였다. 주로 청대 회화 관련 연구에 주력해왔으며 조선시대 그림에 대한 논문도 다수 출간하였다. 현재는 14세기 중국 화가인 예찬(倪瓚), 17세기 명ㆍ청 교체기에 활동한 항성모(項聖謨)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조선후기 진경산수화의 창시자인 정선(鄭敾)에 관한 단행본을 집필 중이다. 논문으로는 <양식과 페르소나: 이인상의 자아의식과 작품세계>, <愛情の誤謬—鄭敾に對する評價と敍述の問題(애정의 오류―정선에 대한 평가와 서술의 문제)>(일본: [미술연구(美術硏究)]), <동아시아회화사와 그림의 국적 문제>, <Beyond Boundaries: Notes on Portrait of Lingzhao(경계를 넘어: [영조초상(靈照肖像)] 재검토)>(미국: [예일대 아트갤러리 학보]) 등이 있다.


발행2013.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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